환관의 요리사 233화 외전 27화
석 잔이면 장사도 고꾸라진다는 금병매, 장정 열이 달라붙어 한 병을 비우지 못한다는 홍루몽.
한 모금 마시면 모레, 한 잔을 마시면 글피에 아침 해를 보게 된다는 금옥연.
우물에 풀면 마을 하나가 대취한다는 풍월보감.
달고 향기롭기로는 반도 잎사귀에 어린 이슬과 같으며 독하기로는 독이 바싹 오른 육칠월 독사도 혀를 내두른다는 천하의 이름난 명주가 줄줄이 상에 올랐다.
다소 경직되어 있었던 분위기는 한 잔술에 부드러워졌고 두 잔술에 달아올랐으며 석 잔째가 되었을 땐 끓어 넘칠 지경이었다.
비단옷과 모피로 치장하고 마을 유지랍시고 점잔을 빼던 이들은 어느새 물러 터진 홍시 같은 얼굴을 하고는 낄낄대며 떠들어댔다.
불콰하게 취해 벌게진 면면들을 바라본 소년은 부드러운 어조로 운을 띄웠다.
“크흠, 달도 뜨고 술자리도 무르익었으니, 이제 슬슬 한 발자국 더 떼어도 될 것 같은데, 어찌들 생각하시나?”
떨리는 손을 추스르지 못하고 자꾸만 자신의 앞섶에 술을 나눠주던 장봉이 갑작스럽게 탄성을 내뱉었다.
이마를 친 그는 흐느적거리며 소년에게 다가와서는 넙죽 고개를 숙였다.
“아이고, 이 불학무식(不學無識)한 놈들이 예와 덕을 몰라 큰 실례를 저질렀습니다. 이리 성대한 연회를 베풀어 주셨는데 그 은혜에 보답은 못 할망정 아직 제 이름 석 자 밝히지 않고 있으니……. 아니, 뭣들 하는가!”
어서 어르신께 인사드리지 않고!
장봉이 꽥 소리를 지르자 모여앉은 이들의 얼굴 위로 면목 없다는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기우뚱거리며 일어난 이들은 배배 꼬인 혀를 열심히 놀려 가며 자신을 소개했다.
“소개가 늦었습니다. 저는 예봉에서…….”
“작게 의원을 하고 있는…….”
“저는 곡물상을…….”
뒤늦은 자기소개와 감사 인사에 담담한 덕담으로 응대하면서도 소년은 연회석의 말석에 앉은 젊은 사내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옥빛의 비단옷을 차려입은 선풍도골의 사내는 주는 술을 거부하지 않았음에도 만취하기는커녕 볼이 조금 상기되었을 뿐 처음과 같은 꼿꼿한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상에 오른 술 중 독주 아닌 것이 없었고 그에게 권해진 술병이 한둘이 아니었음을 생각하면 기이한 일이었다.
고함인지 노래인지 인사말인지 구분할 수 없는 돼지들의 합창을 경청하는 척하며 소년은 사내의 차례가 오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잠시 후, 사내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빈도(貧道)는 향산에서 수행한 반양(返洋)이라 합니다.”
“허어…… 풍모가 범상치 않아 짐작은 했소만, 진정 도사셨을 줄이야.”
소년의 감탄에 옆자리의 돼지들이 거들고 나섰다.
마치 칭찬을 못 해 안달이라도 난 것처럼 열성적으로 지껄여대는 돼지들의 낯뜨거운 몰골에도 젊은 도사는 겸허한 미소를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반양 도사야말로 우리 마을의 자랑 아니겠나.”
“아무렴, 반양 도사가 온 이래 마을 처녀 중 제때 밤잠 든 이가 없다 하지 않나.”
“도를 닦으신 도사만 아니었어도 당장 사위로 들이고 싶은데, 내 천추의 한일세.”
“덕분에 마을도 무사 평안이지. 도력 깊으신 반양 도사께서 제를 주관하시니 마을에 화가 없지 않소.”
칭찬의 당사자가 아닌 소년도 절로 얼굴이 달아오를 만한 칭찬이 무더기로 쏟아졌지만 젊은 도사는 ‘과찬이십니다’라는 담백한 한마디로 대답할 뿐이었다.
입꼬리를 씰룩이지도, 창피함에 볼을 붉히며 고개를 팩 돌리지도 않는 도사를 보며 소년은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과연 도사다운 평정심이라 할만했다.
만약 장소가 이런 곳이 아니었다면 도사의 깊은 수양에 찬사를 바쳤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기엔 장소가 좋지 않았다.
‘자고로 백로는 까마귀 가는 곳에 가지 않고 용은 맑은 물에만 머무르는 법이지.’
고고한 학처럼 보이는 이가 굳이 더러운 돼지들과 어울리길 마다치 않는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지 않겠는가.
과연 부리 길고 날개를 쭉 뻗은 학일까, 아니면 학인 척 분장한 돼지일까.
젊은 도사를 바라보는 소년의 눈동자가 가늘게 휘어졌다.
과연 학일까, 돼지일까. 배를 갈라보면 알겠지.
검버섯과 주름으로 분장한 입가를 매만진 소년은 젊은 도사에게 술을 권했다.
상에 오른 명주 중에서도 독하기론 천하제일이라는 황산의 금릉십이차를 집어 든 소년이 병을 기울이자 도사는 공손히 양손으로 잔을 받쳐 들어 술을 받았다.
맑은 금빛의 물결이 푸른 옥 잔에 넘실거린다.
샛노란 꽃 한 움큼을 집어 입에 담은 듯 달착지근한 꽃향기가 두드러지고, 그다음으론 입에 군침이 돌게 해는 새큼한 과실향이 뒤따른다.
속살이 노란 과실. 꿀이 뚝뚝 떨어지는 즙 많은 것. 껍질은 두꺼우나 그 속살은 연하고 부드러운 것. 강렬한 신맛 이후 뒤끝에 살짝 달콤함을 남기는 것. 우물물에 차게 식혀 베어 물면 아삭하게 씹히는 것.
스치는 향기에 연상되는 과일만 족히 수십 가지였다.
하지만 그 화려한 달콤함은 가시를 품은 장미의 유혹과 같은 것이었다. 그 아름다움에 이끌려 무심코 손을 뻗으면 독오른 가시덩굴에 휘말려 옴짝달싹 못 하게 되는.
그 향기로움에 이끌려 섣불리 입에 대면 내일을 장담할 수 없는 위험을 내포한 유혹.
그 명성을 아는 이라면 입술에 대기까지 적어도 세 번을 고민할 독주를 눈앞에 둔 도사는 천천히 잔을 들어 올렸다.
얇은 입술 끝자락에 잔을 대기 직전, 도사는 잠시 시선을 소년에게로 향했다.
그러고는 뜻 모를 묘한 미소를 입에 띄웠다.
“감사히 마시겠습니다, 대인.”
도사는 주저 없이 잔을 비웠다.
황금빛 독주가 막힘없이 목구멍으로 흘러 들어가는 모습은 장쾌하기까지 했다.
범속한 이라면 한 모금 넘기자마자 목을 부여잡고 나뒹굴었을 텐데도, 잔을 비운 도사는 되레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기까지 했다.
“좋은 술을 대접받았습니다.”
“허허, 달게 드시는구려.”
“대인께서 따라주시니 더욱 달더군요.”
이 친구 넉살도 좋군.
술 대신 상에 차려진 안주를 권하며 소년은 젊은 도사에 대한 평가를 상향 조정할 수밖에 없었다.
최소한, 그가 호호탕탕한 걸물이라는 사실은 인정할 수밖에 없을 듯했다. 그리고 그 평가는 소년에게 확신을 심어주었다.
도사의 주량에 대한 칭찬을 늘어놓던 소년은 가래 끊는 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이쿠, 잠시 자리를 좀 비워야겠구려.”
커흠, 늙으면 이거 물줄기 조절이 안 돼서 말이지.
능글맞은 웃음과 함께 던져진 실없는 농담에 열화와 같은 폭소가 돌아왔다.
“늦게 오시면 술이 동날지도 모르니 서둘러 다녀오십시오!”
“걱정들 마시게, 장강 물이 말라도 오늘 연회에 술이 마를 일은 없으니.”
너스레를 떨며 소년이 자리를 비우자 돼지들은 또다시 술을 탐내며 꽥꽥거리기 시작했다.
달이 차오르고, 술은 달고. 드리운 밤은 짙었다.
하지만 소란스러운 연회의 한가운데에서도, 도사는 마지막까지 복도의 그늘 너머로 사라지는 소년의 등을 주시하고 있었다.
* * *
천장 아래에선 돼지들이 흥청망청 먹고 마시는 동안, 천장 위에선 쥐들이 찍찍거리고 있었다.
연회장이 내려다보이는 천장 위 대들보. 그 위에 올라앉은 이삼과 장소는 연회장을 감시하며 속닥거리고 있었다.
“으으, 배고파. 삼아, 넌?”
“나도 배고프지.”
“옛날엔 하룻밤 굶는 건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옛날엔 참는 훈련도 했으니까.”
이삼은 허기진 배를 쓰다듬으며 고달팠던 시절을 떠올렸다.
굶주림을 참는 훈련. 소리 내지 않고 걷는 훈련. 비수를 던지는 훈련. 물속에서 숨을 참는 훈련. 벽을 기어오르는 훈련.
발이 퉁퉁 부어오르고 물집이 터진 자리에 또 물집이 잡혔던 지난날.
지금도 가끔 꿈에 나오곤 하는 그 악몽 같은 시간을 떠올린 이삼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러다 몸이 무뎌졌다고 다시 동창에 끌려가면 어떡하지?”
“다른 건 다 괜찮은데, 이제 배고픈 건 못 참겠어.”
할아버지가 너무 잘 챙겨주셨나 봐.
이삼은 자신의 볼을 한번 쓰다듬어 보고는 옆에 있는 장소의 볼을 꼬집었다.
장소의 볼도 살이 통통하게 올라 말랑말랑하고 쫀득했다.
“에? 애 그래?”
“음, 아냐. 그냥…….”
반대쪽 손으로 자신의 볼을 꼬집어본 이삼은 한숨을 내쉬고는 고개를 떨구었다.
말랑한 감촉이 손에 남으니 어쩐지 더 배가 고파졌다.
꼬르륵 소리를 내며 자기주장을 하는 배에 손을 얹은 이삼은 장소를 돌아보며 말했다.
“나중에 이번 일 끝나면, 할아버지가 맛있는 거 해주시겠지?”
“맛있는 거? 어떤 거?”
허기진 와중에 음식 이야길 하는 것은 불구덩이에 기름을 붓는 것과 같은 일이었지만 한번 물꼬가 트인 입을 막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들보의 먼지가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움직여 붙어 앉은 둘은 속닥거리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하지만 서로의 공감대 형성을 목적으로 시작된 이야기는 결국 논쟁으로 확대되었다.
둘의 주장은 결코 양립될 수 없는 것이었으며 어느 것이 더 낫다고 단언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당연히 짬뽕이지!”
“무슨 소리야, 당연히 짜장면이지!”
달콤하고 기름진, 혀끝에 착 감겨드는 검은빛과 정열적이고 강렬한, 속 깊이 스며드는 붉은빛.
두 가지 치명적인 유혹을 두고 둘은 첨예하게 대립했다.
먼저 주장을 펼친 것은 이삼이었다.
“당연히 짜장면이지. 달콤 짭짤하고, 그리고 짜장면이 탕수육하고 더 잘 어울려.”
“탕수육하면 당연히 짬뽕이지. 얼큰하고 시원한 짬뽕 국물이 탕수육이랑 더 잘 어울려.”
“아니야, 달달한 짜장면이 탕수육의 새콤한 맛을 부드럽게 중화해 준단 말이야. 그러니까 짜장면이 더 잘 어울려.”
장소에게 바삭바삭하게 튀겨 새콤한 당초를 입은 탕수육엔 달콤 짭짤한 짜장면이야말로 천생배필이라는 것을 거듭 강조하려던 이삼은 갑작스럽게 입을 멈추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장소는 아래를 바라보았다.
그들의 아래, 상석에 앉아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웃으며 연회를 주도하던 소년이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시선이 오간 시간은 짧았지만, 장소와 이삼은 그들에게 내려진 명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었다.
둘은 소리 없이 들보 위를 이동했다.
천장의 판자가 덜컹거리는 소리도 나무못이 삐걱대는 소리도 없이 조용히 천장 위를 이동한 둘은 저택의 가장 외진 곳, 평소 하인들도 잘 드나들지 않는 창고의 천장에 도착했다.
잠시 아래를 살핀 둘은 가벼운 동작으로 바닥에 착지했다. 마치 고양잇과 동물을 연상시키는 그 유연함엔 휘파람을 동반한 갈채가 보내졌다.
“재주는 여전하구나. 녀석들.”
“할아버지!”
“다들 배고프지? 에구, 뺨 홀쭉해진 것 좀 봐.”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은 소년은 품에서 주머니 두 개를 꺼내 둘에게 안겨주었다.
주머니 안에는 짭짤한 육포 한 주먹과 입안에 침이 돌게 하는 시큼한 말린 과일이 들어 있었다.
제때 수분을 섭취하기 어려운 호위들을 배려한 숙친왕 전하의 위문품에 둘은 감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이들의 입에 육포를 물려준 소년은 자신 또한 입에 육포 한 조각을 넣었다. 육포는 짜고 살짝 매운맛이 돌았다.
독한 술기운에 바싹 마른 혀뿌리에 다시 촉촉한 수분기가 어릴 때쯤, 소년이 입을 열었다.
“그래. 반양이라는 도사 놈이 주는 술을 다 마시더냐? 혹시 마시는 척 버리거나 물로 바꿔치는 일도 없었고?”
“네, 전부 마셨어요.”
“허어, 도사라는 놈이 수행할 시간에 술만 푸고 다녔나. 보통이 아니군.”
하늘 아래 가장 강건하다는 용의 피를 타고난 소년도 취기가 올라 머리가 아찔하건만, 소년 못지않게 잔을 받았을 도사가 멀쩡한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혹여 그 또한 용의 피를 타고난 숨겨진 황족이라면 모를까.
의미 없는 가정을 허무맹랑한 우스갯소리로 완성한 소년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결정을 내렸다.
“그래. 일단 배를 갈라봐야겠어.”
그래야 답이 나오겠군. 흰 놈인지 검은 놈인지, 학인지 돼지인지.
소년이 투덜거리며 뇌까린 말에 육포를 오물거리던 아이들이 다가섰다.
입은 육포를 물고 있었지만, 눈동자만큼은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임무에 나서려는 호위무사의 눈이었다.
백 마디 말보다 한 번의 행동으로 자신의 충성을 증명하는 호위무사들을 보며 소년은 입꼬리를 길게 찢어 올렸다.
하지만 그의 입에 담긴 것은 당장에라도 뛰쳐나갈 것만 같은 호위무사들을 말리는 유보의 말이었다.
“하지만, 아직은 아니야. 조금만 더 기다려보렴. 아직 그에게 들어야 할 말이 있다.”
“들어야 할 말이요?”
“그래. 최소한 그 친구도 자기변호를 할 시간은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
들어봤자 뻔할 것 같다만, 그래도 절차는 지켜야지. 공직자 아니냐.
키득거린 소년의 말에 둘은 뽑아 들었던 소름 끼치는 쇠붙이들을 다시 품 안에 갈무리했다.
그리고 왕의 충직한 호위무사에서 애교 있는 아이들의 모습으로 돌아와 칭얼거렸다.
“할아버지. 할아버지는 짜장이랑 짬뽕 중에 뭐가 더 좋으세요?”
“짜장면이죠?”
중화 요리사로서 대답하기 어려운 난감한 질문 앞에서 고민하던 소년은 이내 피식 실소를 흘리며 대답했다.
“너희들, 아직 짬짜면이 뭔지 모르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