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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관의 요리사-231화 (232/314)

환관의 요리사 231화 외전 25화

“이보게, 왕칠.”

호수 변을 따라 다급한 걸음으로 다가오는 사내를 본 노인의 눈이 가늘어졌다.

마을에서 행세깨나 하는 인물인 듯, 왕칠을 부르는 모양새가 제집 하인을 부르는 듯했다.

키는 작았는데 얼굴이며 허리며 옆으로 비대하게 살집이 올라 꼭 공이 굴러오는 것처럼 뒤뚱거렸다.

그 퉁퉁한 몸엔 값비싼 비단옷을 걸쳤고 사슴 가죽으로 만든 요대를 걸쳤지만, 그 터질듯한 배 때문에 맵시가 산다기보다는 되레 우스꽝스러워 보였다.

노인이 사내를 위아래로 훑어보는 동안 숨 가쁘게 뛰어온 사내는 노인과 왕칠을 번갈아 보고는 차마 노인에게 말을 걸지는 못하고 왕칠에게 먼저 물었다.

“이보게 왕칠 이 늙은, 아니, 이분은 뉘신가?”

튀어나오는 말본새를 보아하니 평소 행실이 보이는구만.

우람한 준마 여섯 마리가 끄는 웅장한 마차를 배경으로 선 노인에게 기가 죽었는지 사내는 식은땀을 흘리며 말을 바꾸었다.

고소를 머금은 노인는 왕칠의 소개를 기다리는 대신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섰다.

“만나서 반갑네, 이 늙은이는 서역에서 작게 무역상을 꾸렸던 승조라 하네.”

“예? 아, 예. 예봉에 사는 장봉입니다.”

봉(鳳)이라. 좋은 이름이군.

얄팍한 입술을 가늘게 찢어 올린 노인이 손을 내밀었다.

마치 겨울바람에 메마른 삭정이처럼 뒤틀린 노인의 손가락 마디마디에는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하나같이 홍옥이며 금강석이며 청금석 같은 귀한 보석들로 빛나는 반지의 광채에 자신의 손을 슬쩍 내려다본 장봉은 조심스레 노인의 손을 마주 잡았다.

왜소한 체격의 노인에게 맞추기 위해 한껏 허리를 숙인 장봉은 복부를 파고든 요대의 압박에 억눌린 숨을 토해냈다.

땀을 삐질삐질 흘리는 그 꼴이 퍽 우스워 피식 웃음을 흘릴뻔한 노인은 헛기침으로 목을 가다듬고는 사려 깊은 미소를 지으며 그의 손을 놓아주었다.

간신히 숨을 참은 채 허리를 숙였던 장봉은 노인이 손을 놓아주자마자 거세게 숨을 몰아쉬었다.

시뻘겋게 달아오른 볼이 다시 본래의 희멀건 색으로 돌아올 때쯤, 숨을 고른 장봉은 노인을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커흠, 그…… 어르신께서는 예봉엔 어쩐 일로.”

“허허, 다 늙어빠진 노인네가 산세 수려하고 물 좋은 곳 찾을 이유가 달리 있겠나?”

몸뚱이 누일 곳 찾으러 온 게지.

노인의 말에 장봉은 혹시나 한다는 투로 되물었다.

“그 말씀은, 혹시 예봉에 정착하러 오신……?”

“내 나이가 들어 다리 힘이 빠지고 치아도 부실해지니 예전처럼 사업을 건사할 수가 없겠더구려. 젊은 시절 서역의 모래바람을 헤치며 바쁘게 살았으니, 말년엔 흐르는 물과 깊은 산을 가까이하며 조용히 살고 싶더군.”

“예봉의 산세가 좋기는 하지요. 물도 맑고, 유유자적하게 살기엔 예봉만 한 곳이 없지요.”

“산과 물이 좋아서인지 사람들도 덕이 있어 보이더군.”

그래서 말인데.

잠시 뜸을 들이던 노인은 장봉을 향해 손짓했다.

비밀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귓가에 속삭이고 싶다는, 상대의 기대감을 한없이 부풀어 오르게 하는 그 가벼운 동작.

노인의 손가락 마디에서 반지가 잘그락 소리를 냈다.

마른침을 삼킨 장봉이 노인에게 다가섰다.

“외지인이 마을에 자리를 잡으려면, 마을에 자리 잡고 계신 어르신들께 인사를 드려야 하지 않겠나?”

마침, 마을에 큰 행사가 있다 들었는데.

말끝을 흐린 노인은 지긋이 장봉을 바라보며 흰 터럭 몇 가닥이 난 턱을 쓰다듬었다.

내어줄 듯 말 듯이, 사람 애간장을 끓게 하는 늙은 장사치의 말솜씨에 애가 탄 장봉은 말을 꺼내지는 못하고 마른침을 삼키며 노인의 입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핏기없이 거무죽죽하고 갈라진 노인의 입술을 간절한 눈으로 보고 있던 장봉은 결국 참지 못하고 먼저 말을 꺼내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장봉이 숨을 들이켠 순간 노인이 말문을 열었다.

마치 안부를 묻듯이 평온한 어조였다.

“보아하니 이 마을에서 발이 좀 넓은 것 같은데, 부탁 좀 해도 되겠나?”

“크흠, 예. 자랑은 아니지만, 저희 집안이 대대로 예봉에 뿌리내리고 살아온 토박이지요.”

가늘게 휜 노인의 입꼬리가 순간 길게 찢어졌다.

이거 잘 골랐군.

뜻 모를 말을 중얼거린 노인은 은근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본래 마을 어르신들을 한 분 한 분 찾아뵙고 인사를 드리는 것이 예의겠지만, 이 늙은이가 다리 힘이 없어 그렇게는 힘들 것 같네. 그래서 대신 약소하나마 잔치를 열어 어르신들을 초청하고 싶은데, 좀 도와주지 않겠나?”

정중히 도움을 청하는 노인의 겸허한 태도에 장봉은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무조건적인 협조를 약속하면서도 장봉은 마치 간 쓸개라도 빼줄 것처럼 구는 스스로에게 의아함을 느꼈다.

하지만 장봉의 의문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노인의 입에서 감미로운 말들이 흘러나왔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마을 발전을 위한 건설적인 대화도 좀 나눠보면 좋겠지.”

“건설적인 대화라 하시면.”

“예를 들자면, 마을의 특별한 행사를 위한 기부금이라던가.”

장봉은 아찔한 현기증을 느꼈다. 노인이 내뱉는 한 마디 한 마디에선 진저리칠 만큼 비릿한 돈 냄새가 풍겨왔다.

거무튀튀한 철전도, 멀건 은전도 아닌, 번쩍번쩍 빛나는 황금의 냄새가.

비록 두루뭉술하게 이야기했지만, 노인의 말에는 곡우제를 위해 ‘거액의’ 기부금을 낼 용의가 있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었다.

까마귀 목 비트는 소리와 견줄 만한 노인의 목소리를 선녀의 노랫가락처럼 경청하던 장봉은 노인의 말이 끝나자 열렬한 반응을 보여주었다.

비록 사람은 하나였으나 핏발선 눈과 풍부한 성량, 감동에 젖은 목소리가 전하는 호소력과 박력은 족히 열 사람분의 찬사와도 맞먹을 지경이었다.

“그런 일이라면 응당 두 팔 걷어붙이고 도와야지요! 말씀만 하십시오. 어르신!”

“흠, 그럼 우선 잔치를 열 장소가 필요할 것 같은데…….”

“초라하지만 제집이라도 괜찮으시다면 얼마든지 빌려드리지요. 마침 마을 한가운데라 손님분들 모시기도 편할 겁니다.”

“이거 신세를 지는군. 내 섭섭지 않게 사례하겠네.”

섭섭지 않게. 예의상 으레 하는 그 한마디에 장봉의 얼굴이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저 당당한 여섯 마리의 준마가 끄는 육두마차를 타고 온 노인이 말하는 섭섭지 않음이란, 어느 정도일까.

장봉의 대답은 무척 서툴고 조악한 것이었지만 지켜보고 있었던 왕칠과 그의 동료는 장봉의 반응을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셈도 제대로 못 하는 무식한 놈들도 절로 가슴이 뛸 만한 이야기였으니, 마을 유지로서의 품격이나 체면 따위를 고려할 여력이 없었으리라.

막연한 상상 속으로 노인의 부를 가늠하고 있었던 왕칠은 어느새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노인의 시선에 질겁하여 주위를 돌아보았다.

어느새 자리를 비웠는지 장봉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멍청한 얼굴로 서 있는 동료에게서 눈을 뗀 왕칠은 굽실거리며 노인에게 물었다. 장봉과는 달리 그의 허리는 무척이나 유연했다.

“어르신, 혹시 쇤네에게 궁금하신 거라도?”

“자네들도 이 마을에서 오래 살았나?”

“예 뭐, 이 마을에서 나고 자랐으니…….”

“그럼 마을 사정에도 훤하겠군그래?”

혹시 시간 좀 남으면 노인네 말동무라도 해주지 않겠나? 내 섭섭지 않게 사례하겠네.

빙그레 웃는 노인은 장봉을 대할 때와는 다른 웃음을 지으며 그들을 바라보았다.

* * *

어부들과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고 그들의 품에 묵직한 주머니를 안겨준 다음, 노인이 마차에 다가서자 마부가 마차의 문을 열었다.

창가에 장막을 쳐두었기에 마차 안은 어두컴컴했다. 마차에 오르려던 노인은 거추장스러운 지팡이를 어찌할지 고민하다가 마차 안쪽에 들어찬 어둠 너머를 쏘아보았다.

“좀 받아주시지 그러십니까.”

엉거주춤하게 마차에 발을 올린 노인을 비웃는 낭랑한 웃음소리가 마차 안을 울렸다.

그와 함께 차오른 어둠을 들추듯 새하얀 손이 나타났다. 가늘고 섬세한 손가락은 백옥같았고 그 손톱은 가지런했다.

어쩐지 이승의 것이 아닌 것만 같은 창백한 손에 지팡이를 넘긴 노인은 신경질적인 표정으로 마차에 올랐다.

“염병할 진짜, 이거 진짜 어떻게 안 됩니까? 안에 땀은 차지, 바람은 안 통하지.”

노인은, 노인으로 분장한 소년은 마차에 오르자마자 짜증스럽게 뺨에 달라붙은 인피면구를 떼어냈다.

검버섯 핀 거죽 아래로 장밋빛 발그레한 뺨이 드러났다.

받아든 지팡이를 구석으로 치운 태감은 엄격한 어조로 물건을 함부로 대하는 소년의 품성을 나무랐다.

“어허, 내일 또 써야 할 물건인데 이렇게 내팽개치면 안 되지.”

혐오스러운 눈으로 자신의 얼굴에 들러붙어 있었던 가죽을 바라보던 소년은 목 아래와 팔등, 손까지 덮은 가죽을 거칠게 떼어냈다.

거의 사람 한 명분의 가죽을 털어낸 소년은 기진맥진하여 의자에 늘어졌다.

‘할리우드 특수분장팀은 명함도 못 내밀겠군.’

하지만 뛰어난 기술력에 대한 감탄과 불편한 착용감에 대한 분노는 별개의 문제였다.

옛날에는 그래도 이 정도로 떡칠하지는 않았는데.

날카롭게 쭉 째진 눈과 음흉한 매부리코. 얄팍한 입술로 보기만 해도 등허리가 오싹해질 만큼 음산했던 옛 얼굴을 떠올린 소년은 사무치는 그리움을 느꼈다.

원체 볼썽사나운 흉물이었던 덕분인지, 그때는 지금보다 훨씬 더 가벼운 분장만으로도 완벽한 노인이 될 수 있었다.

그에 비해 지금은 어떤가. 샛별처럼 빛나는 눈, 오뚝한 코. 애교 있는 입술. 입안에 쏙 넣으면 사르르 녹을 것만 같은 사랑스러운 사내아이의 얼굴을 동경에 비춰본 소년은 지긋지긋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옛날 얼굴이 좋았는데.”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소년을 바라본 태감은 세상 모든 보편타당한 안목을 가진 이들을 대신하여 소년을 비난해야 함을 느꼈다.

하지만 소년은 태감이 열변을 토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제법 괜찮은 친구를 고른 것 같습니다, 태감님.”

“아아, 그자. 장봉이라 한다지?”

예, 말 그대로 봉이더군요.

키득거리던 소년은 왕칠에게 전해 들은 장봉의 신상정보를 읊기 시작했다.

“이름은 장봉, 나이는 마흔이 조금 넘었고, 집안 대대로 예봉에서 유지 노릇을 해왔다는군요. 예봉에서 가장 많은 땅을 소유한 지주이고…….”

“땅 대부분은 소작을 주고 있겠군?”

“예. 소작농들에게 평판은 좋지 않은 편으로, 보통은 배에 기름 찬 돼지 새끼, 굴러다니는 놈, 벼룩의 간도 내먹을 후레자식 등으로 불리며 특히 전자의 사용빈도가 높더군요.”

돈 이야기만 나오면 눈을 희번덕거리고 콧구멍을 벌름거리는 거로 보아 돈 욕심은 많은데, 또 몸에 걸친 걸 보면 사치스럽기 그지없으니 버는 만큼 쓰기도 술술 쓰는, 호탕한 친구인 것 같더군요.

지나치게 호의적인 해석으로 평을 마무리한 소년은 미심쩍다는 투로 말을 이었다.

“아무리 소작농을 거느린 지주라고 해도 차려입은 모양새가 과하더군요. 예봉은 작은 마을 아닙니까. 돈 나올 구석이야 한정되어 있는데, 어디서 그렇게 긁어모았을까요?”

“소작농을 수탈하는 재주가 남다른가 보구나.”

“그야 수탈하는 재주도 남다르겠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단 말입니다.”

걸친 것은 안휘산 최고급 비단에 그 퉁퉁한 배를 졸라맨 것은 수사슴 가죽 요대에 대모갑으로 장식한 것, 신발은 곰 가죽을 덧댄 비단신이더군요.

몸에 빈틈없이 꼭 맞는 것을 보니 물려 입은 것도 아니고, 도대체 무슨 돈이 있어 그것들을 갖춰 입었겠습니까? 소작농 숨통 조이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요.

소년의 말에 태감은 자신 없다는 투로 농을 던졌다.

“그 친구에게 숨겨진 상재가 있어 재산을 불렸을 가능성은?”

“글쎄요. 돈 좀 쥐여주겠다는 말에 눈을 까뒤집는 걸 보면 그럴 가능성은 희박해 보입니다만.”

“그렇다면 다른 돈 나올 구석이 있다는 말이로구나.”

상재가 있는 것도 아니고, 땅이나 조금 있어 소작이나 주는 친구가 무슨 재주로 그렇게 값비싼 옷을 차려입었을까.

검지로 지팡이를 톡톡 두드리던 태감은 창가에 쳐둔 장막을 슬쩍 들춰 창밖을 내다보았다.

마차는 예봉 인근의 숲길을 달리고 있었다.

“그럼, 그 친구로 하겠느냐?”

사람은 이미 준비해 두었다.

태감의 말에 소년은 뒷덜미를 타고 기어오르는 한기를 느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심장을 저릿하게 옥죄는 긴장감. 새삼 자신이 동창의 일을 수행하고 있음을 실감한 소년은 입술을 깨물었다.

“아직, 섣불리 판단할 필요는 없겠지요. 잔치를 벌여 마을 유지들을 초청하기로 했으니, 면밀히 살펴보고 그때 고르겠습니다.”

“그래. 굳이 두 번 일할 필요는 없지.”

태감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입을 다물었다.

마치 공백과도 같은 정적 속에서 입술을 달싹이던 소년은 태감의 반응을 끌어낼 만한 화제를 생각해 냈다.

“아, 그리고 그 친구들에게 마을의 특산품을 좀 사 왔습니다. 오늘 저녁에 올리지요.”

“오리냐?”

“아쉽게도 붕업니다. 예봉의 오리는 벼꽃이 무르익을 때쯤은 되어야 제맛이 난다더군요.”

아쉬워도 어쩔 수 없지요. 능글맞게 웃으며 이죽거리는 소년을 보며 태감은 팔짱을 끼고는 고개를 팩 돌려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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