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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관의 요리사-230화 (231/314)

환관의 요리사 230화 외전 24화

간장 탄 짭조름한 냄새가 진동하는 보자반(煲籽飯)이 아무리 맛있더라도. 납육과 말린 관자의 감칠맛이 배어든 밥알이 아무리 달콤하더라도. 뚝배기 밑에 눌어붙은 누룽지가 아무리 구수하더라도. 영원히 먹을 수는 없는 법이었다.

닥닥 긁어 바닥이 드러난 뚝배기 바닥을 들여다보며 태감은 허망한 표정을 지었다. 마치 남아 있던 한 조각의 행복마저 모조리 빼앗겨 버린 것만 같은 절망과 공허함으로 얼룩진 태감의 얼굴에 소년은 실소를 금치 못하였다.

“그만 좀 긁으십쇼. 그러다 뚝배기 닳겠습니다.”

“잘된 일 아니냐. 얇아진 만큼 더 빨리 달궈질 테고. 요리도 더 빨리 익겠구나.”

“예, 더 빨리 달궈지고 더 빨리 깨지겠지요. 이 양반아.”

소년은 그 이상 닳아 빠지기 전 태감의 손에서 뚝배기를 구출해 냈다.

다행히 고온으로 단련된 뚝배기는 태감의 집요한 공격에도 흠집 하나 나지 않은 매끈한 모습 그대로였다.

아직 미련을 버리지 못한 태감은 자신의 손을 떠난 뚝배기를 아쉽다는 듯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혹시 남은 건 없느냐?”

“밥풀 하나 남기지 않고 긁어 드신 양반이, 염치도 없으십니까?”

“정말 없느냐? 너라면 분명 만약의 경우를 대비했을 텐데? 네가 나와 함께한 게 하루 이틀이 아니지 않느냐.”

내가 너를 아는 만큼, 너 역시 나를 알 것 아니냐.

태감의 예리한 추리력에 흠칫 놀란 소년은 입술을 비죽 내밀고는 순순히 실토했다.

“사실 밤에 야식을 찾으실까 봐 준비해 둔 게 있기는 합니다. 벌써 찾으실 줄은 몰랐습니다만.”

“야식거리? 무엇을 준비했느냐?”

“보자반을 만들고 재료가 조금 남길래, 밥을 지어 주먹밥을 만들어 두었습니다. 간장을 슬쩍 발라 화로에 구우면 그럴듯하지요.”

태감은 군침을 삼키며 소년을 재촉했다.

소년은 잠시 텅 빈 뚝배기를 내려다보며 이것이 사실 오 인용 뚝배기라는 것과 주방에 태감이 비운 뚝배기가 이것 말고도 다섯 개나 더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한 뚝배기에 쌀이 한 되가 좀 넘게 들어가니, 오늘 태감이 먹은 쌀이 대충…….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소년은 한숨을 푹 내쉬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태감이 오늘 몇 되의 쌀을 먹어치웠든, 식사가 부족했다면 그것은 요리사의 책임이었다.

먼지가 앉지 않도록 광주리를 씌워둔 주먹밥 접시와 화로를 내온 소년은 화로에 석쇠를 얹고는 주먹밥을 굽기 시작했다.

타다닥 불티가 튀어 오르는 소리. 창밖으로 지는 석양을 담아놓은 듯 주홍빛으로 타오르는 숯불 위에선 주먹밥이 구워진다.

간장을 찍은 솔이 주먹밥의 표면을 지나칠 때마다 진한 간장 방울이 주먹밥의 표면을 미끄러져 숯불에 방울져 떨어졌다.

이미 배가 그득하게 찼는데도 코를 벌름거리지 않을 수 없는 향기.

그 고혹적인 유혹은 식탁에 둘러앉은 이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이미 주먹밥 자체에 간이 되어 있으니, 간장은 한 면에만 바르겠습니다. 좀 짜게 먹길 원한다 하시는 분?”

모두가 구워지는 주먹밥에 집중하고 있었기에 소년의 말은 무의미한 울림이 되어 허공에 스러졌다.

성의 없는 대답 한마디 말하는 이 없는 이 각박한 세태에 분노한 소년은 속으로 보복 계획을 궁시렁거리며 집게로 주먹밥을 뒤집었다.

숯불의 은근한 열기에 노릇노릇한 갈색으로 구워진 주먹밥의 자태에 사람들의 탄성이 터져 나왔다.

“주먹밥을 굽는 다라……. 이 단순한 발상이 왜 경사에선 보편화하지 못한 거지? 이토록 먹음직스러운데.”

“그야 경사에서는 주먹밥 먹을 일이 별로 없어서 그렇지요.”

춥고 건조한 기후인 경사의 농부들은 대대로 쌀보다는 밀 농사에 주력해 왔고, 주식 역시 만두나 면 등의 밀가루 음식이었다.

그렇다 보니 간편식이 필요할 때도 굳이 밥을 지어 주먹밥을 만들기보다는 속이 든 만두류나 튀긴 전병류를 먼저 찾게 되는 것이다.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논리정연한 소년의 설명에 말문이 막힌 태감은 곧 그럴싸한 궤변을 궁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입을 여는 것만으로도 경사의 권력자, 문필가, 재담가들을 떨게 했던 사례 태감의 독살스러운 궤변이 읊어지는 일은 없었다.

태감이 입을 여는 순간 구운 주먹밥 또한 완성되었기 때문이었다.

고상한 삼각형에 우아한 검은 띠로 치장한 주먹밥을 본 태감의 입에선 달뜬 한숨이 흘러나왔다.

“뜨거우니 조심해서 드십시오. 김을 두른 부분을 쥐고 드시면 됩니다.”

“재치있는 배려로구나. 양념이 손에 묻지도 않고. 거기에 김까지 먹을 수 있으니.”

간장 그을린 향기가 솔솔 피어오르는 바삭한 주먹밥 한 덩이는 모두를 행복하게 했다.

심지어 혈관에 피 대신 녹인 쇳물이 흐른다는 동창의 요원들마저도.

처음 그들을 맞이했던 장년의 요원에게까지 주먹밥을 안긴 소년은 어색한 미소를 짓는 장년인을 보고는 웃음을 터뜨렸다.

“식기 전에 들게나. 든든하게 먹어둬야 일할 것 아닌가.”

“전하의 하해와 같은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장년인의 정중한 인사에 손을 휘휘 내저어 답한 소년은 자신의 몫으로 남겨두었던 주먹밥을 베어 물었다.

숯불에 구워 가슬가슬한 주먹밥의 겉 부분을 씹으면 안쪽에서 폭발적인 향기가 피어올랐다.

밥에 녹아든 채 숯불에서 응축된 가리비 관자의 달콤함으로 꽉 찬 주먹밥은 간장의 짭조름함과 숯의 은은한 불향까지 입혀져 있었다.

주먹밥을 입에 넣은 이들은 입가에 번지는 미소를 참지 못했고, 입꼬리를 씰룩이는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며 배시시 웃음 지었다.

하지만 화기애애한 시간은 고작 주먹밥을 먹는 그 잠깐뿐이었다.

이젠 일을 할 시간이었다.

손가락 끝을 핥은 태감은 문득 시선이 자신에게 집중되었음을 깨닫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를 둘러싼 모두가 그의 지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말없이 고개를 움직여 그를 바라보는 이들과 시선을 맞춘 태감은 마지막으로 소년과 눈을 마주했다.

굽었던 허리가 펴지고 앉은 자리가 변했지만, 소년은, 김승조는 여전히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한 부하로서 그의 옆에 서 있었다.

소년에게서 시선을 돌린 태감은 깊게 심호흡했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렇게 회의가 시작되었다.

“그럼, 앞으로의 계획을 수립해야겠군. 좋은 의견 없나?”

가장 먼저 의견을 제시한 것은 소년이었다.

건실한 의견이라기보다는 경직된 분위기를 풀어주기 위한 가벼운 농담에 가까운 것이었지만.

“제 생각에는 한 놈 콱 잡아다가 이실직고할 때까지 들들 볶고 싶습니다만.”

“그것도 괜찮은 의견이구나.”

실소를 기대했던 소년은 흔쾌히 긍정하는 태감을 보고는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순간 미쳤냐고 물으려던 소년은 보는 시선이 많다는 것을 떠올리고는 가까스로 점잖은 단어를 골라 입에 담았다.

“실례지만, 제정신입니까?”

“음, 네 나름대로 부드러운 단어를 고른 거였겠지? 아무튼, 제정신이다.”

“그럼 제정신으로 동의하신 겁니까?”

제정신이라 자부하는 놈치고 제정신인 놈 없던데, 혹시?

의혹을 담은 소년의 눈길에 태감은 담담한 어조로 반박해 주었다.

“확실히 좀 과격한 제안이긴 하지만, 이번엔 사안이 사안이니만큼 과격하더라도 효율적인 방법을 채택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웬일로 화통하십니다?”

“어차피 임시직 아니냐. 책임은 폐하께서 지시겠지.”

도를 넘어선 뻔뻔함은 오히려 당당해 보이기까지 했다.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태연자약한 태감을 보며 혀를 내두른 소년은 이마 위로 흘러내린 땀을 훔치고는 물었다.

“그렇다고 아무나 잡아 올 수는 없지 않습니까?”

“물론, 가능한 핵심적 정보를 쥐고 있는 이를 선별해서 심문하는 것이 효율적이겠지. 이 선별 작업은 네게 맡기마.”

“흐음, 잠입해서 적당한 놈을 물색해 오란 말씀이시죠?”

“어렵겠느냐?”

어려울 거야 없습니다만…….

말끝을 흐린 소년은 조용히 대화를 경청하고 있는 동창의 요원들을 흘깃 바라보고는 말을 이었다.

“잠입하는 거야 어려울 것 없습니다만, 단기간에 성과를 내려면 자금이 좀 필요할 것 같은데…….”

“자금이라. 암시장에 들를 계획으로 여정을 짜 노잣돈을 넉넉하게 준비했으니 예산이 모자랄 일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만약 부족하다면.”

“폐하께서 추가예산을 편성해 주시겠지요.”

유람 나온 사람 붙들어다 일을 시키셨으니, 그 정도는 해주시겠지요?

소년의 질문에 태감은 반드시 넉넉한 예산을 타내겠다며 거듭 당부했다.

그렇게 황제 폐하의 호주머니를 쥐어짤 방법에 매몰되어 있었던 둘은 한참 후에야 예산을 타낸 후 어떻게 사용할 지로 화제를 넘길 수 있었다.

* * *

마을 주민 대부분이 호수를 삶의 터전으로 삼는 예봉 사람에게 소원이 있냐 묻는다면 열에 아홉은 부디 이번 해는 호수가 범람하지 않는 것이라 대답할 것이다.

그렇기에 예봉에서 가장 중요한 행사를 꼽으라면 단연 봄비가 내리는 곡우 날 금룡께 제를 올려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곡우제일 것이다.

부디 올해도 호수가 범람하지 않고 무사히 넘어가기를.

다른 그 어떤 것보다도 예봉 사람들에겐 절실한 기원이었기에 다들 넉넉지 않은 형편임에도 곡우제 만큼은 성대히 치를 수 있도록 십시일반 힘을 모으는 것이 예봉의 전통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번 년은 유독 심하구먼.”

“그러게나 말일세.”

하지만 축제를 주제로 대화를 나누는 주민들의 얼굴은 그리 밝지만은 않았다.

그것은 단순히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처지에 무리한 지출을 해야만 하는 부담감 때문만은 아니었다.

다가올 곡우제를 준비하기 위해 그물을 치러 호숫가로 나온 사내. 예봉에서 어부 일을 하는 왕칠은 분통이 터진다는 듯 씨근거리며 그물을 손질했다.

“아니, 호수에서 잡은 물고기를 내다 팔아 하루를 연명하는 처지인 걸 뻔히 알면서도 그리 큰돈을 내놓으라 하나? 벼룩의 간을 내먹어도 유분수지.”

“그래도 어쩌겠나. 마을 어르신들이 하시는 일인데 안낼 수도 없고.”

“어르신은 무슨 놈의 어르신.”

숨을 씩씩 몰아쉬는 왕칠에게 다시 그물을 쥐여준 동료 어부는 한숨을 내쉬며 자신의 그물로 시선을 떨구었다.

분통이 터진다는 듯 가슴을 친 왕칠도 결국에는 별수 없이 그물을 손에 쥐었다.

하지만 그의 입에선 이내 서글픈 넋두리가 흘러나왔다.

“옛날이 좋았지. 그때는.”

“지난 일 말해 뭣하나.”

“그래도 그때는 유지라고 거들먹거리던 놈들이 지금처럼 나서지는 않았지 않은가.”

왕칠은 입술을 질근질근 씹으며 중얼거렸다.

왕칠을 말리려던 그의 동료도 그 말 만큼은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동료의 동의를 얻은 덕분인지 왕칠의 목소리는 한층 거칠고 사나워졌다.

“나름 유지라고 하던 놈들이 하는 꼴 좀 보게. 마을 발전 기금이니 곡우제 부흥 기금이니 뭐니 하는 명목으로 없는 사람들 돈을 뜯어 가서는 제 배만 불리고 있지 않나. 난 그놈들이 뜯어 간 돈이 정말 곡우제에 사용되었는지도 의심스럽네.”

“예전엔 이러지는 않았지. 그땐 최소한 강제로 돈을 뜯어 가지는 않았으니.”

“그리고 신부 보내기니 하는 것도 없었고…….”

아무 생각 없이 입을 나불대던 왕칠은 소스라치게 놀라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는 자신만큼이나 창백하게 질린 동료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혹시, 누가 들은 건 아니겠지?”

“누가 들었겠나, 들었다고 해도 기껏해야 동네 사람이겠지.”

“그, 그렇겠지?”

“그래도 혹시 모르니 말 좀 조심하게. 나는 새가 주워들으면 어쩌려고 그러나.”

하여간 이놈의 주둥이가 문제지.

왕칠은 그 께름칙한 단어를 머릿속에서 지우고 싶다는 듯 머리를 부르르 흔들고는 찢어진 그물에 정신을 집중했다.

하지만 그의 집중력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마을 어귀에서 흙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오는 마차 때문이었다.

요란스럽게 달려오는 마차에 욕설이라도 퍼부어줄 심정으로 고개를 쳐든 왕칠은 그만 넋을 잃고야 말았다.

그것은 마차에 탄 이가 보는 사람의 시선을 사로잡을 만큼 아름다운 미인이어서도, 무지렁이인 그조차 단번에 알아볼 만큼 유명인이어서도 아니었다.

단순히, 그 마차가 평생 빈곤하게 살아온 그로서는 상상도 하지 못할 만큼 호화로웠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힘 좋은 여섯 마리 준마가 이끄는 화려한 마차가 자신들의 앞에 멈춰 섰을 때 왕칠은 심장이 터질 것만 같은 긴장감 속에서 뻣뻣한 자세로 직립했다.

도대체 왜 멈춰선 걸까. 마차에 타고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

설마 이야기를 들은 건 아니겠지?

속닥거리며 나눈 대화를 듣기엔 마차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고, 설령 가까운 거리였다 해도 말발굽 소리에 대화가 묻혀 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왕칠의 뇌리를 잠식한 혼란은 그의 어처구니없는 망상을 끝없이 비약시켰다.

혼란과 공포와 고뇌가 뒤섞여 그의 얼굴을 물들이고 있었다.

창백한 색에서 시뻘건 색으로, 그리고 다시 퍼렇게 질렸다가 끝내 거무칙칙하게 죽은 그의 얼굴은 당장에라도 쓰러질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침이 바싹 메말라 건조해진 입술을 달싹이며 왕칠이 휘청일 때쯤, 마침내 마차의 창문이 열렸다.

“만나서 반갑네.”

정겹게 인사를 건네 온 것은 옹졸하고 볼품없게 생긴 늙은이였다.

검버섯 핀 노인의 얼굴을 멍하니 올려다보던 왕칠은 마른기침을 토해낸 후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예, 반갑습니다. 어르신.”

“혹시 이 마을에 사시나?”

“예, 어르신. 여기서 어부 일을 하는 왕칠이라 합니다. 근데 그건 어찌 물으시는지…….”

“허허, 다름이 아니라, 이 마을에 정착할까 해 마을 분들께 인사를 드리고 있었다네.”

잘부탁허이.

살가운 웃음을 지으며 악수를 청하는 노인의 손을 왕칠은 자신도 모르게 마주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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