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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관의 요리사-229화 (229/314)

환관의 요리사 229화 외전 23화

음습하고 그늘진 숲속 오솔길. 아직 황혼이 내려앉지도 않은 이른 저녁이었지만 그곳만은 이미 밤의 한 자락이 드리운 듯했다.

어둡고, 서늘하고, 음침한. 인적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곳.

오솔길이 끝나는 곳엔 주위 환경과 너무나 부조화하여 위화감이 들 정도로 평범한 장원이 마련되어 있었다.

높게 쌓은 담장 위로는 잘 가꿔진 정원수와 기와지붕이 엿보였다. 마차에서 내려 담장 아래를 둘러보던 소년은 대문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대문 앞에는 마중을 나온 이가 있었다. 장년의 사내였다.

그리고 소년에게는 낯익은 이였다.

“존귀하신 숙친왕 전하를 뵙나이다.”

“구면이군. 그렇지?”

사내는 입꼬리를 희미하게 올리고는 대답했다.

“예. 전하께서 후궁에 계실 때, 제가 전하의 분장을 도와드린 적 있었습니다.”

“아아, 그래. 그랬지. 노인으로 분장할 때. 그땐 신세 많이 졌네.”

절뚝거리며 걷던 시절, 칼 한 자루를 품에 안고 활개 쳤던 시간을 떠올린 소년은 쓴웃음을 짓고는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소년의 빈자리를 메우듯 태감이 앞으로 나섰다.

전 동창 제독과 현 동창 요원.

그것이 동창의 일이라 판단했기에 태감에게 일을 넘겼지만, 물러서면서도 소년은 그것이 적절한 판단이었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태감은 이미 은퇴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에게 다시금 일을 떠맡기는 것이 옳은 생각일까. 역시 내가 나서야 했나.

태감은 은퇴한 동창 제독이고 비공식 황족이었지만, 자신은 왕이었다.

그렇다면 동창의 행사를 지휘할 책임 또한 태감보다는 자신의 우선순위가 더 높지 않을까.

소년이 착잡한 후회를 곱씹는 동안, 지긋이 사내를 바라보던 태감은 작게 숨을 내쉬고는 입을 열었다.

어조는 딱딱했고 표정은 경직되어 있었다. 마치 차가운 가면을 뒤집어쓴 것처럼.

“이게 어찌 된 일이지. 기밀성을 유지해야 할 동창의 안가에 사사로이 사람을 초대하다니. 자네의 독단인가.”

“숙친왕 전하께서 예봉에 오시거든 동창의 안가로 모시라는 폐하의 명이 있었습니다. 제독.”

태감은 사내의 설명보다는 사내가 자신을 부른 호칭에 더 주목했다.

제독. 제독이라 불려본 것은 얼마 만인가.

그 호칭에서 스며 나오는 비릿함을 혀끝으로 느끼며 태감은 설명을 요구했다.

“이미 제독직을 내려놓은 지 오래되었거늘, 어째서 제독이라 불렀지?”

“황자이시니 제독에 준하는 권한이 있으시고, 아직 제독께서 사임하신 후 다른 제독이 임명된 적 없습니다. 그렇기에.”

“그렇다면, 지금 이 자리에 제독, 혹은 그에 준하는 권한을 가진 이의 지휘가 필요하단 말이군.”

그것이 폐하의 뜻인가.

태감의 물음에 의뭉스러운 웃음으로 답한 사내는 대문을 열어 그들을 안으로 들였다.

정원엔 자갈이 깔려 있었고 작은 연못이 있었다.

수행원들에게 짐을 내릴 창고를 알려준 사내는 소년과 태감을 응접실로 안내했다.

차로는 명차로 유명한 서호의 용정차(龍井茶)가 나왔다.

같은 무게의 은으로 거래되는 귀한 차가 나왔건만 찻잔에 손을 올리는 이는 없었다.

소년과 태감은 무겁게 가라앉은 표정으로, 그들을 안내한 사내는 뜻 모를 모호한 미소를 띤 채 침묵을 유지했다.

거북하게 정체된 정숙 속에서 찻잔의 김이 식어가는 가운데, 소년이 가장 먼저 말문을 열었다.

“일단, 하나 확실히 하고 넘어가야겠군. 공식적인 일인가, 비공식적인 일인가.”

”폐하께선, 보고를 올려야 할 경우 비룡응을 이용하라 명하셨습니다.“

”비공식적인 일이란 말이군.“

메마른 입술을 핥은 소년은 찻잔으로 손을 가져갔다. 하지만 그것을 입가로 가져가지는 않았다.

그저 잔을 손에 쥔 채, 소년은 사내에게 되물었다.

“질문을 조금 바꾸지. 이번 일은 비공식적으로 해도 될 일인가. 아니면, 비공식적이어야만 하는 일인가.”

사내의 눈이 가늘어졌다.

아주 미약한 표정 변화일 뿐이었지만 태감과 소년에게는 충분한 대답이 되었다.

잔을 도로 내려놓은 소년은 무거운 신음을 흘리며 태감과 사내를 번갈아 보았다.

황제 폐하께서 동창 요원을 파견할 만한, 이미 은퇴한 태감이 다시금 지휘권을 잡아야 할 만한, 비공식적이어야만 할 일.

소년이 한숨을 내쉬며 입을 다물었고, 태감이 입을 열었다.

“인신공양인가.”

제국의 금룡 신앙은 종교적 체계가 제대로 잡히지 않은 민간신앙에 가까웠다.

그 이유는 숭배의 대상인 금룡의 화신, 용의 아들이 실존했기 때문이었다.

신앙의 주체인 황제가 직접 가뭄에 비를 내리는 기적을 행사하니 굳이 교리를 확립하여 민중을 통제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금룡 신앙은 지역의 특색에 맞게 자유분방하게 발전해 왔고 황실 역시 이를 억압하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제국의 근간이 되는 신앙을 오염시키고 민중을 불안케 하는, 인신공양만큼은 황제 폐하께서도 관심을 가지실 수밖에 없지.”

그렇기에 동창이 나선 것이다.

소리소문없이. 없었던 일로 만들기 위해서. 인신공양이라는 불온한 행위의 흔적도 남기지 않기 위해서.

태감의 말이 끝나자 소년은 손으로 눈을 덮은 채 숨을 토해냈다.

끔찍한 불안으로 눈동자는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다.

“아직 확증이 있는 건 아닙니다만, 매년 금룡께 제를 올리는 행사가 있을 때마다 예봉에서 처녀가 사라진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이는.”

”납치, 인신매매의 경우일 수도 있겠지만, 인신공양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군.“

그리고 의심이라 할지라도, 신앙에 관련된 문제라면 동창은 과민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신앙은 민심을 유지하는 제국의 뿌리이자 근본이며 역린이기도 했다.

전해야 할 정보를 모두 이야기한 사내는 작게 고개를 숙이고는 응접실을 나섰다.

사내가 나서자 태감과 나란히 앉아 있던 소년은 자리에서 일어나 태감과 마주 앉았다.

그러고는 가만히 태감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창백한 가면과도 같은 얼굴, 태감은 동창 제독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제 어찌하실 겁니까.”

“우선은, 심증을 확증으로 만들어야겠지.”

확증을 얻는다면. 그때는.

소년은 굳이 그 뒷말을 묻지는 않았다. 돌아올 대답이 너무나 자명했기에.

몸서리치는 확답을 얻는 대신 소년은 쾌활함을 가장한 웃음을 지으며 자신을 가리켰다.

“사람을 심어야겠군요. 연기력이 뛰어난 친구로.”

자신을 가리키는 소년의 검지를 본 태감은 옅은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태감은 타이르듯 부드럽게 말했다.

“네가 아직도 후궁의 상호인 줄 아는구나. 이제 슬슬 현장을 졸업할 때도 되지 않았느냐?”

“저보다 연기력이 출중한 친구가 없으니, 어쩌겠습니까.”

태감은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한참 동안 키득거린 후, 눈초리에 눈물을 매단 채 태감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맡아준다면, 든든하겠구나.”

“제가 실망시켜 드린 적 있습니까?”

“한 번도 없었지. 단 한 번도.”

말끝을 흐린 태감은 배를 쓰다듬으며 배시시 웃음 지었다.

“그 전에 내 배도 좀 만족시켜 주면 좋겠구나.”

“그야 어려울 것 없지요.”

동창 안가에 비축된 식량을 한번 털어볼까요?

자리를 박차고 일어선 소년은 응접실을 나서기 전 문득 생각났다는 듯 태감에게 물었다.

“태감님, 만약에 말입니다. 이번 일이 동창의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었다면…….”

“동창은 그리 허술한 기관이 아니다.”

“예, 그렇지요. 아니 땐 굴뚝에서 연기 날 일은 없지요.”

씁쓸한 표정으로 돌아선 소년을 향해 태감은 작게 한마디를 덧붙었다.

“만약 진정 인신공양이 아니라면. 굳이 동창이 나설 필요는 없을 테지.”

“예?”

“네 말대로 동창이 오판한 경우라면, 굳이 비공식적으로 처리할 필요가 없단 말이다.”

인신공양은 금룡 신앙를 더럽힐 오점이기에 흔적 없이 지워야 하지만, 인신매매나 납치사건의 경우엔 오히려 드러내고 해결함으로써 백성들을 안심시킬 낭보가 되지.

“그러니 황제 폐하의 이름으로 ‘공식적’으로 해결해야 하지 않겠느냐?”

그렇다면 흘려야 할 피도 줄어들겠지.

태감에게 답을 얻은 소년은 한결 가벼워진 표정으로 응접실을 나섰다.

* * *

동창의 안가에 마련된 창고는 그야말로 온갖 저장식품의 천국이라 할 만했다.

단지에 가지런히 담긴 건해산물, 대들보에 매달아둔 염장육이며 훈제육들.

말리고 절이고 연기에 그을린 것들로 가득한 창고의 한가운데에서 소년은 이 와중에도 행복한 고민에 빠져들었다.

이 볶아도 맛있고 쪄도 맛있고 끓여도 맛있는 짭조름한 친구들을 도대체 어떻게 요리해야 할까?

고민에 잠겨 있는 소년을 향해 그를 창고로 안내한 동창 요원이 말을 걸었다.

“만약 고민되신다면, 제가 추천을 좀 해드릴까요?”

“추천? 뭐 좋은 재료가 있는가?”

“예. 전하께서 오실 것을 대비하여 창고의 재료는 모두 상등품으로 갖춰두었습니다만, 그중에서도 이건 특상품입니다.”

요원이 찬장에서 꺼내 든 것은 말린 가리비 관자(干貝)였다.

수분기 없이 바싹 말렸는데도 여전히 아이 주먹만 한 큼직한 관자가 가득 담긴 단지를 본 소년은 반색하며 그것을 받아들었다.

“이렇게 훌륭한 관자는 후궁에서도 보기 어려운 것인데, 이런 곳에서 볼 줄이야.”

“폐하께서 전하께 보내신 것이옵니다.”

“폐하께서?”

풍성한 수염을 길게 늘어뜨린 위엄있는 용안을 떠올린 소년은 신경질적으로 혀를 찼다.

쯧, 주실 거면 관자만 주실 것이지.

툴툴거리며 관자를 꺼낸 소년은 따뜻하게 데운 물로 관자를 불리고는 아궁이에 큰 뚝배기를 올렸다.

“혹시 보자반(煲籽飯)을 만드시려 그러십니까?”

“허어, 단번에 알아보네. 혹시 주방일 좀 해봤나?”

“예. 평소에 점소이 신분으로 일할 기회가 많다 보니.”

“그거 고달프겠군.”

그럼 오늘 좀 배워가게나. 혹시 아나? 다음엔 점소이가 아니라 주방장으로 일하게 해줄지.

피식 웃음 지은 소년은 대들보에서 소금에 통째로 절인 돼지 뒷다리를 내렸다.

“역시 보자반은 짭짤한 납육(臘肉)이 듬뿍 들어가야 제맛이 나지.”

“그렇지요. 납육을 올려 밥을 지으면 기름이 밥에 배어 윤기가 자르르 돌지요.”

“먹을 줄 아는 친구구만, 눈썰미만 좋은 줄 알았더니.”

그럼 자네, 관자를 넣은 보자반은 어찌 만드는 줄 아나?

소년의 질문에 동창 요원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소년은 됫박을 집어 들며 설명을 시작했다.

“보자반을 지을 때는 보통 찹쌀과 멥쌀을 반반 섞어서 쓰지. 그래야 찰기가 있어 입에 착 달라붙거든.”

납육은 얇게 썰어서. 그리고 물에 불린 관자는 한번 삶아낸 다음 결대로 찢어서 준비하면 되지.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이 관자 삶은 육수라네.

소년은 관자를 삶은 육수에 간장과 술을 조금 섞어주고는 종지 그릇에 덜어 요원에게 내밀었다.

“관자를 삶아낸 육수는 최고의 밥물이지. 그윽한 감칠맛이 쌀알에 그대로 배어들거든. 하지만 자칫 잘못하면 비릿할 수 있어 조심해야 하네.”

그러나 술을 조금 섞어서 센 불에 익혀내면 비린내를 날릴 수 있으니, 참고하도록.

소년의 조언에 젊은 요원은 열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왕을 모시는 동창의 요원이라기보다는 스승께 배움을 청하는 기특한 제자 같은 모습이었다.

혹시 젊은 동창 요원이 이대로 요리사의 꿈을 꾸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소년은 뚝배기에 쌀을 안쳤다.

남은 것은 건더기를 올려 밥을 짓는 것뿐이었다.

한가운데에 잘게 찢은 관자를 배치하고 그 주위로 납작하게 썬 납육을 빙 둘러 배치한 다음, 관자 육수를 밥물 삼아 부어준 소년은 뚜껑을 덮어 불에 올렸다.

밥물이 끓어오르면 센 불에서 십오 분, 그리고 누룽지가 생기도록 뚝배기를 기울인 다음 다시 오 분. 뜸이 들도록 상에 내기 직전까지 뚜껑은 열지 않는다.

밥물이 끓는 소리에 귀를 집중하며 불을 조절하던 소년은 밥물이 졸아들고 누룽지가 토도독 눌어붙는 소리를 듣고는 뚝배기를 불에서 내렸다.

이젠 배고픈 손님들에게 내기만 하면 될 일이었다.

소년은 대신 들겠다는 젊은 요원의 배려도 물리고 손수 뚝배기를 들어 날랐다.

굶주림에 허덕이며 상에 늘어져 있던 태감은 매나 독수리를 연상시키는 날렵한 동작으로 고개를 쳐들었다.

“너무 늦지 않게 왔구나.”

“만약 늦었으면 무슨 일을 저지르실 생각이셨습니까?”

“글쎄? 장소의 친구 한 명이 줄어들지 않았을까?”

소년은 구석에서 서로를 부둥켜안은 채 덜덜 떨고 있는 장소와 이삼을 보고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고 보니 전채요리를 준비하지 못했군요.”

“그것참 섭섭한 소식이구나. 아쉬운 대로 이삼으로 만족해야 하나?”

아이들의 새된 비명을 배경 삼아 소년은 느긋한 동작으로 뚜껑을 열었다.

뚜껑에 갇혀 있었던 더운 김과 함께 달착지근한 관자의 향이 훅 피어올랐다.

기름이 배어 진주알처럼 빛나는 밥알. 반투명한 비계와 불그스름한 살점의 조화가 근사한 납육. 그리고 결대로 곱게 찢어 소복하게 올린 관자.

태감의 입가에서 최후까지 남아 있었던 농담 한마디가 스러졌다.

시시콜콜한 잡담 한마디도 아깝다는 듯 초조한 눈으로 뚝배기를 노려보는 태감을 조롱하듯 소년은 여유롭게 뚝배기의 가장자리로 간장을 흘려 넣었다.

달아오른 뚝배기의 열기에 간장이 졸아들고, 그 진주처럼 고운 밥알을 먹음직스러운 갈색으로 물들였다.

누룽지가 생긴 밑바닥까지 주걱을 넣어 골고루 비벼준 소년은 공기에 봉긋하게 보자반을 퍼 상에 올렸다.

“자, 드시지요.”

든든하게 드셔두십시오. 이젠 일을 할 시간이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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