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관의 요리사 228화 외전 22화
“예봉은 작은 마을이다. 외지인들이 한꺼번에 몰려가 숙소를 찾겠다고 마을을 들쑤시는 것은 예의가 아닐 것 같구나.”
마차의 창 너머로 흐르는 늦봄의 짙푸름을 멍하니 보고 있던 소년은 태감의 말에 고개를 돌렸다.
예봉으로 이어지는 길목의 숲길. 잘 정비된 가도의 옆으로는 제법 수심이 깊은 계곡이 있었다.
말에게 물을 먹이고 쉬어가기 좋은 지점이었다.
만약 태감의 제안이 이곳에서 잠시 쉬어가자는 의미에서 나온 것이었다면.
“확실히, 앞으로 일주일은 머물러야 할 마을에 폐를 끼치는 건 그리 현명한 선택이 아닐 것 같군요. 그럼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우선 예봉으로 수행원 한 명을 보내자꾸나. 수행원으로 하여금 거간꾼에게 우리가 묵을 만한 장원, 혹은 여관을 알아보도록 하고, 그동안 우리는 이곳에서…….”
“점심을 먹자는 말씀이시죠?”
퉁명스러운 소년의 말에 태감은 멋쩍은 웃음을 짓고는 창밖으로 흐르는 개울을 가리켰다.
“잠시 쉬어가기에 좋은 곳 아니냐. 흐르는 물을 바라보며 먹는 점심은 각별할 테지.”
“그리고 수행원들이 좀 협조해 준다면 그럴듯한 별미를 맛볼 수 있을지도 모르고요.”
소년은 짓궂은 웃음을 지으며 계곡을 바라보았다.
계곡의 지형은 완만했고 물살은 잔잔했다.
힘을 쓰고 나면 이마에 송골송골 땀방울이 솟는 계절.
한창 천막을 치고 말들을 매어놓기 위해 분주한 수행원들을 불러모은 소년은 계곡을 가리키며 진중한 어조로 명령을 하달했다.
진지한 태도로 소년의 말을 경청한 수행원들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계곡과 소년을 번갈아 본 후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천렵 말씀입니까?”
“날이 덥지 않은가. 땀도 식힐 겸, 점심거리도 해결할 겸. 왜, 자신 없어서 그러나?”
그 놀라운 허락에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소년을 바라본 수행원들은 이내 짓궂은 악동들로 돌아가 계곡으로 뛰어들었다.
첨벙거리는 소리. 고함. 매끄러운 바위와 부딪히는 물보라.
소란스럽고, 부산하고, 유쾌했다.
웃통을 벗어 던지고 활개 치는 건장한 사내들을 보며 소년은 재밌는 사실을 발견했다.
“저 친구들, 다 천렵하는 방식이 다르군요.”
“천렵에도 지방색이 느껴지는구나.”
엉성하게나마 그물을 만들어 계곡을 휘젓는 이. 여뀌 같은 약한 독성이 있는 풀을 짓이겨 물에 푸는 이. 개중에는 오직 맨손으로 천렵에 나선 용자도 있었다.
믿음직한 수행원들의 분투를 기대하며 소년은 개울가 옆에 불을 피우고 큰 무쇠솥을 걸었다.
어느새 바짓단을 걷어붙이고 개울에 발을 담그고 있던 태감은 기대된다는 표정으로 소년에게 물었다.
“뭘 만들 생각이냐?”
“뭐, 이런 계곡에서 잡히는 거라고 해 봐야 피라미 아니겠습니까. 푹 삶아서 어죽이나 끓여야지요.”
“어죽이라?”
“예. 야외에서 대충 끓여 먹는 거친 음식이라 입에 맞으실지는 모르겠는데, 구수하고 뜨끈하니 점심 한 끼 때우기에 나쁘진 않습니다.”
피라미나 중태미, 모래무지, 송사리. 잡히는 대로 솥에 넣고 푹 삶아서 체에 걸러 살만 내리고, 파 마늘 된장에 고춧가루 간한다.
지방에 따라선 고추장을 넣는 곳도 있지만 소년의 고향에선 오직 된장과 고춧가루로만 간을 했다.
거기에 깻잎이나 방아잎을 넣고, 쌀이 푹 퍼지면 소면도 뚝뚝 끊어 풀어서 걸쭉하게 끓여내면 여름 휴가철 이만한 별미가 또 없었다.
“붕어로 끓여도 좋고, 메기가 들어가면 국물이 정말 달지요.”
“메기라. 이 계곡에도 메기가 있을까?”
“찾아보면 있기야 있겠지마는…….”
사람 손으로 잡기는 어렵지요. 통발이나 치면 또 모를까.
입맛을 다신 소년은 평평한 돌 위에 도마와 칼을 올린 다음 수행원들의 성과를 기다렸다.
잠시 후, 구릿빛 어깨와 늠름한 가슴팍을 드러낸 젊은이들이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전리품을 가져왔다.
“전하, 명을 완수하였나이다.”
“고생들 했네. 와서 몸 좀 말리게.”
수행원들이 모닥불 주위에 둘러앉아 몸을 말리는 동안 소년은 도마 위에 물고기들을 늘어놓고는 손질을 시작했다.
꺽지에 미꾸라지, 빠가사리라는 이름으로 유명한 동자개. 잡어라 뭉뚱그려 부르기엔 아쉬운 맛좋은 민물고기가 가득했다.
소년은 고기의 배를 갈라 내장만 빼낸 다음 물에 한 번 씻어 그대로 솥에 집어넣었다.
“내장만 빼내도 되는 것이냐? 머리나 지느러미는?”
“어차피 삶아서 체에 거를 거라 굳이 제거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대로 삶는 편이 국물도 우러나 더 맛있지요.”
파나 마늘 등을 넣고 살이 푹 퍼질 때까지 충분히 삶아준 후, 살이 뼈에서 떨어질 만큼 물러졌으면 그대로 건져 체에 거른다.
“이렇게 뼈는 걸러내고 살만 추려 국물에 풀어준 다음에, 여기에 불려둔 쌀을 넣고 끓이면 되지요.”
솥에 들기름을 두르고 쌀을 볶아주다가 쌀알이 반투명해지면 만들어 준 생선 육수를 부어 끓여준다.
한번 부르르 끓어오르면 된장과 고춧가루, 다진 파 마늘을 넣어 양념해 준 다음 쌀이 퍼지도록 끓여 준다.
“원래는 쌀이 퍼질 때쯤에 깻잎이나 쑥갓 같은 향 채소를 듬뿍 넣어줘야 하는데, 오늘은 없으니 산초잎으로 대체해야겠습니다.”
깻잎 대신 어린 산초잎을 넣고, 국수를 분질러 넣어준 다음 국물이 걸쭉해지고 면이 풀어지면 완성이었다.
국수 가닥이 떠오른, 뭉근히 끓인 어죽 한 사발. 산초가루를 뿌려 마무리한 소년은 사발에 어죽을 담뿍 퍼 올렸다.
화려하지도 사치스럽지도 않지만, 꾸밈없이 솔직하고 논두렁에 핀 메꽃 한 송이처럼 순박한, 길 떠나면 차마 잊지 못하고 돌아보게 될 것 같은, 그 따끈한 죽 한 사발은 계곡을 뛰놀며 허기진 사내들에겐 최고의 성찬이었다.
세상에 직접 잡은 고기로 끓인 어죽만큼 달콤하고 특별한 것이 또 있을까.
나무 그늘에서, 볕 잘 드는 바위 위에서, 자갈밭 위에서. 혹은 계곡물에 발을 담근 채 무질서하게 웃고 떠드는 수행원들에게선 의무와 책임의 그늘도 잠시 물러난 듯했다.
그 사이에서 솥을 닥닥 긁어 마지막 한 사발을 뜬 소년은 이마의 땀을 훔치며 허리를 폈다.
“잘들 먹었나 모르겠군요.”
“난 잘 먹었다.”
“태감님 말고, 수행원들 말입니다.”
배부르게 먹고 윤이 반지르르하게 도는 태감을 흘겨본 소년은 남은 죽이 식지 않도록 뚜껑을 얹어 모닥불 근처에 놓았다.
남은 한 사발은 예봉으로 장원을 알아보러 간 수행원의 것이었다.
“그 친구 좀 늦는군요. 갓 끓였을 때 먹었으면 좋았을 것을.”
“확실히 인원이 인원이니만큼, 맞는 숙소를 구하기 어려웠을지도 모르겠구나.”
어쩌면 마을 안에 천막을 쳐야 할지도.
탐탁지 않은 기색으로 한숨을 내쉬던 태감은 갑작스레 고개를 틀었다.
그리고 조금 늦게 소년 또한 태감과 같은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 친구, 그래도 먹을 복은 있구나.”
“양반은 못 되는군요.”
숲길로 통하는 가도를 따라 말발굽 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잠시 후, 말을 탄 수행원의 모습이 시선에 잡혔다.
피식 웃으며 수행원을 맞이하기 위해 일어선 소년은 지척에 다다랐는데도 속도를 줄이기는커녕 더욱더 채찍질하며 말을 보채는 수행원의 태도에 당혹스러움을 느꼈다.
“저 친구, 왜 저러지요? 마치 뭐에 쫓기는 사람처럼…….”
“글쎄, 사정은 모르겠지만.”
확실한 것은, 낭보는 아니겠구나.
태감의 건조한 대답에 소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말을 모는 수행원의 얼굴은 긴장과 흥분으로 한껏 달아올라 있었다.
* * *
수행원은 안장 위에서 떨어지듯 내려섰다.
바닥을 구르며 간신히 일어선 그는 목에 핏대를 세우며 무언가를 말하려 했지만, 터질 것처럼 부풀어 오른 폐부는 그의 간절함에 부응하지 못했다.
늑간 안쪽을 쑤시는 것 같은 통증에 숨을 몰아쉬는 수행원에게 소년은 물주머니를 건네었다.
소가죽으로 만든 물주머니에는 계곡 상류의 수원지에서 떠온 물이 가득 담겨 있었다.
“말하려 애쓰지 말고, 숨부터 고르게. 그다음에 입술도 적시고. 한꺼번에 왈칵 들이키지 않게 조심하게.”
소년은 조심스럽게 그의 등을 두드려주었다.
잘 단련된 등판은 식은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이유로 이렇게 숨돌릴 틈도 없이 말을 몰아야 했던 걸까.
그의 떨림이 멎자 소년은 다가온 단혜림에게 자리를 비켜주었다.
이제부터는 호위의 총책임자인 그녀가 나서야 할 일이었다.
소년에게 작게 고개 숙인 다음, 단혜림은 낮고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단중. 정신이 좀 드나.”
“예. 예, 대장님.”
“마을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가.”
고개를 든 사내는 숙소를 잡으러 간 호위무사라기보다는 전쟁터에서 급보를 전하려 뛰어온 전령에 가까웠다.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인 채 입술을 달싹이는 그에게 단혜림은 심호흡할 것을 주문했다.
그러고는 그의 흥분을 과열시키지 않도록 천천히, 차분하게. 작은 목소리로 질문했다.
“단중. 천천히 대답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처음부터 설명해 봐. 말하기 전에 생각하려 들지 말고, 있었던 일을 그대로.”
입술을 달싹이는 단중을 지긋이 보던 단혜림은 그의 어깨에 손을 짚었다.
그 단단하고 묵직한 감촉에 정신이 들었는지 단중은 떠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우선은, 명령하신 대로, 마을에 도착하자마자 거간꾼을 찾으려 했습니다. 시기가 시기이다 보니 상인들이 몰려왔을 것 같아 마음이 급했지요.”
곡우가 가까워지면 으레 한해 농사에 쓸 종자부터 농기구 따위를 팔기 위해 보부상이 드나들기 마련이었다.
고개를 끄덕인 단혜림은 재촉하는 것처럼 들리지 않도록 부드러운 어조로 되물었다.
“그래. 이맘때쯤이면 여관도 자리가 없지. 그래서?”
“그래서 급하게 말을 몰아 마을에 도착했는데. 마을 어귀에 저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자네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다고?”
단중의 말을 곱씹어본 단혜림은 자신도 모르게 칼자루에 손을 얹었다.
그것은 예기치 못한 상황, 그것도 함정임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 불길한 상황에 놓인 무사의 본능과도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무사인 동시에 그녀는 정치가이기도 했다. 부족한 정보로 섣불리 판단하는 것이 섶을 지고 불구덩이에 뛰어드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을 이해할 만큼 냉정한.
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조곤조곤 물었다.
“그건 누구였지?”
“거간꾼이었습니다. 자신을 거간꾼이라고 소개하더군요.”
“거간꾼이라. 그가 거간꾼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면, 네게 제안한 것이 있었겠군.”
마을에 현재 빈 숙소가 없으니, 대신할 숙소를 준비해 두었다든가.
단혜림의 예상에 단중은 소스라치게 놀라 그녀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단혜림은 ‘어떻게 아셨습니까’로 시작할 부하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미간을 슬쩍 찌푸리는 것으로 그의 입을 틀어막은 단혜림은 만약 되묻게 한다면 기대해도 좋다는 뜻을 담은 시선으로 단중을 채근했다.
그 무언의 엄포에 바싹 얼어붙은 단중은 마치 군기가 바싹 든 신병 같은 태도로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예! 그자는 이미 제가 올 것도, 제 목적도 알고 있었습니다. 마을에는 숙소가 없다며 제게 약도를 내밀더군요. 어떻게 여관을 찾는 중인 걸 알았느냐고 추궁하려 했습니다만…….”
“대답하지 않았겠지. 고생 많았네. 좀 쉬게나.”
단중을 앉힌 단혜림은 그의 손에서 약도를 받아들었다.
약도는 구겨져 있었고 축축했다.
고생한 호위무사에게 따뜻한 죽사발을 내어준 소년은 쓴웃음을 지으며 그녀의 옆으로 다가왔다.
“참 별일도 다 있습니다그려.”
“그러게나 말일세. 세상에 그토록 발 빠른 거간꾼이 있을 줄 누가 알았겠나.”
단혜림의 농담에 작게 미소 지은 다음, 소년은 뒷짐을 진 채 그녀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는 헛기침했다.
그녀는 구겨진 약도를 펴볼 생각이 없는지 팔짱을 낀 채 소년의 말문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함정일 거라 생각하지는 않으시나 봅니다.”
“함정일 거라 생각하나?”
“커흠, 질문에 질문으로 대답하는 것은…….”
“질문에 대한 답이 질문으로 돌아온 것은 질문한 이가 질문할 입장이 아니었던 거요.”
지금 질문해야 할 사람은 전하가 아니지 않소.
소년은 엷게 웃고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나무 그늘에 앉아 있는 태감에게로 시선을 보냈다.
이런 일은 원래 댁이 해야 할 일 아닙니까.
하지만 열렬한 신호에도 불구하고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눈짓으로 의미를 전달하기에는 너무 먼 거리였다.
소년은 숨을 몰아쉬고는 단혜림을 올려다보았다.
“말씀하십시오.”
“그럼 거두절미하고 묻겠소. 황실의 사람이오?”
“거두절미한다고 하기에는 여지를 많이 남기는 질문이군요. 대답부터 드리자면, 그렇습니다.”
“황실의 사람이라도 어디에 속해 있는지에 따라 다르겠지.”
소년은 눈을 지그시 감고는 입술을 깨물었다. 마치 대답하기도 꺼림칙하다는 듯이. 예상이 사실이 아니기를 원한다는 듯이.
하지만 침묵은 오래가지 않았다. 소년이 손을 내밀자 단혜림은 구겨진 약도를 펴 그의 손에 쥐여주었다.
약도는 목적지를 표시했다 하기엔 너무나 난잡하고, 서툴고, 지저분한 선으로 가득했다.
아무리 좋게 표현해도 그것에 어울리는 명칭은 약도가 아니라 낙서였다.
그것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햇빛에 비춰보고, 종이를 뒤집어 비치는 글씨를 확인한 끝에 소년은 침중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동창의 암호문입니다.”
아무래도, 동창에서 보낸 초대장인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