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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관의 요리사-227화 (227/314)

환관의 요리사 227화 외전 21화

늦봄의 게으른 햇살은 어느새 타오르는 불티가 되어 도시에 내려앉고 있었다.

뭉근히 피어오르는 밥 짓는 연기. 집으로 돌아가는 행인들을 배웅하는 골목길엔 주홍빛 노을이 드리운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그렇게 불안과 공포와 위협에서 벗어난 도시의 저녁은 조용히 흘러갔다.

황혼의 빛무리는 도시의 사람들에게도, 내일 여정을 떠나야 하는 여행자들에게도 공평하게 쏟아졌다.

마구간에 들여두었던 말들의 갈기를 빗겨주고 풀어두었던 짐을 도로 싣고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수행원들을 감독하던 태감은 속눈썹을 간질이는 따사로운 빛무리에 눈을 깜빡였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구나. 노을이 아름답군.”

“그러니 빨리 준비해야지요. 내일은 아침 일찍 장원을 비워줘야 하지 않습니까.”

존귀한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아깝다는 이유로 몸소 쌀 포대를 짊어지고 바쁘게 마차에 실어나르던 소년은 우수에 젖은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보는 태감에게 핀잔을 주었다.

감수성이 메마른 것이 아닌가 의심스러운 소년의 건조한 목소리에 태감은 안타깝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래도 잠시 감상에 젖을 시간은 있지 않으냐. 노을이 이토록 아름다운데. 어쩌면 홍문에서 볼 마지막 노을일지도 모른다.”

“노을이야 다 똑같은 노을이지, 홍문의 노을만 노을이겠습니까?”

경사에서 보나, 여기서 보나, 여행길에 잠깐 올려다보나. 다 똑같은 하늘 똑같은 노을이지요.

신경질적으로 포대 자루를 마차에 실은 소년은 뻐근한 어깨를 돌리며 물었다.

“노을 타령은 이제 됐고, 손 비면 일이나 좀 도와주십쇼. 아직 옮겨야 할 게 산더미 같구만.”

“하여간, 이렇게 풍류를 몰라서야. 유람은 무슨…….”

입술을 비죽 내밀고는 구시렁대는 태감을 보며 헛웃음을 흘린 소년은 짊어지려던 포대 자루를 도로 내려놓고 태감에게 다가갔다.

그러고는 은근슬쩍, 마치 혼잣말이라는 듯이 흘리듯 중얼거렸다. 물론 혼잣말치고는 지나치게 크고 장황했다.

“크흠, 이거 일의 진척이 이렇게 느려서야 야식 준비할 시간도 없겠군.”

침 삼키는 소리가 울렸다.

한쪽 입꼬리를 씰룩거린 소년은 태감에겐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말했다.

어조는 연극조로. 우렁찬 목소리엔 절절한 감정이 실려 있었다.

“내일 새벽같이 일어나야 하기에, 오늘 밤은 기름지고 든든한 이부면(伊府面)을 만들려고 했지만.”

“이부면이라고?”

결국, 참지 못하고 먼저 항복을 선언한 것은 태감이었다.

싱겁다는 듯 태감을 본 소년은 능청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이부면에 대해 설명했다.

“예. 양주지방의 관리였던 이병수라는 자의 요리사가 개발한 면으로, 물이 아닌 달걀노른자로 밀가루를 반죽한 것이 특징인 면입니다.”

“호오, 오직 노른자만으로?”

“고급스럽게 만들 때는 달걀 대신 오리 알 노른자만을 사용하기도 하지요. 그렇게 면을 만든 다음 한번 삶아 기름에 튀기고, 그것을 다시 말린 것이 바로 이부면입니다.”

어찌 보면 현대인들의 필수품으로 자리 잡은 인스턴트 라면의 원조 격이라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이부면이었다.

기름이 배어든 고소한 면발은 얼큰한 국물에 넣어도 좋고 전분을 풀어 걸쭉한 소스를 올려 먹어도 좋았지만, 이부면의 참맛을 느끼려면 역시.

“이부면의 고소함을 제대로 즐기려면 역시 물기 없이 바싹 볶는 간소이부면(乾燒伊府面)만한 것이 없지요.”

“마르게 볶는다고? 그럼 뻑뻑하지는 않느냐?”

그거야 직접 드셔보시면 알겠지요?

청자의 호기심이 극대화된 순간에 설명을 중단한 소년의 매정함에 태감은 형용할 수 없는 오묘한 표정을 지었다.

잠시 노을 진 하늘과 시큰둥한 표정의 소년을 번갈아 보던 태감은 패배감에 찌든 숨을 내쉬었다.

찰나의 낭만과 배를 따끈하게 데워줄 야식. 둘 중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할지는 너무나 자명했다.

결국, 한때 헛기침 한 번으로 정계를 긴장케 했던 후궁 제일의 권력자이자 황제의 심복이었던 그도 팔을 걷어붙일 수밖에 없었다.

드디어 태감에게 건전한 노동의 기쁨을 알려줄 수 있게 된 소년은 순박한 기쁨이라 하기엔 조금 음흉한 표정으로 웃음 지었다.

“시장이 반찬이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열심히 땀 흘리고 먹는 밥 만큼 맛있는 것도 없지요.”

“나도 몇 번인가 그런 말을 듣기는 했지. 지금까진 땀 흘린 후 식사할 기회가 없어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 검증할 기회가 없었다만.”

“그러니 그렇게 빼빼 마르신 게지요. 아무리 많이 먹으면 뭐합니까. 종일 책상 앞에 앉아 붓대나 굴리고 있으니 영양분이 흡수가 안 되고 줄줄 새버리는데. 자고로 건전한 노동, 아니. 건전한 운동과 건전한 식사가 건강한 육체를 만드는 법입니다.”

“아니, 내가 살이 안 찌는 이유는 여의주 때문…….”

황실의 비밀을 들먹이며 설득하려는 태감을 쏘아본 소년은 주변의 호위무사들을 돌아보고는 태감에게 입을 다물어 달라는 뜻의 점잖은 육두문자를 속삭였다.

어찌 되었든 존귀한 황실의 사내들이 둘이나 달라붙어서인지 짐 정리는 금방 끝이 났다.

남은 자질구레한 일들은 수행원들에게 맡기고, 소년은 피죽도 못 먹은 사람인 양 축 늘어진 태감을 끌고 주방으로 들어섰다.

따뜻한 주방에 들어서자마자 병든 닭처럼 늘어진 태감을 보며 소년은 한심함과 측은함의 중간쯤 되는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 따사로운 시선에 태감은 초라한 변명을 내뱉었다.

“아까도 말했지만, 여의주를 품은 황족은 강대한 여의주의 기운에 눌려 쇠약해진다. 내가 먹어도 살이 찌지 않는 이유는 그 때문이야.”

“그럼 운동으로 해결될 일은 아니군요.”

소년은 퉁명스럽게 대꾸했지만, 그 이상 빈정거리거나 야멸차게 쏘아붙이지는 않았다.

태감의 말대로, 그가 여의주를 품지만 않았더라면 그는 얼마든지 강건한 신체를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용의 피를 타고난 이라면 응당 받아야 했을 축복을 그는 허락받지 못한 것이다.

그것은 그의 책임이 아니었다.

그 창백하고 메마른 팔뚝을 흘깃거리던 소년은 신음을 흘리고는 아궁이 앞에 섰다.

자신이 그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하나뿐이었다.

소년이 아궁이에 솥을 걸자 따사로운 온기에 꾸벅꾸벅 졸던 태감이 반색하며 일어섰다.

“이부면!”

“예. 일했으니 또 먹어야지요.”

아쉽게도 운동으로 개선될 몸이 아닌 것 같으니, 잘 먹이기라도 해야지. 어쩌겠는가.

소년은 찬장을 열어 미리 만들어두었던 이부면을 꺼냈다.

새 둥지 모양으로 말아둔 면은 노르스름했고 칼로 자른 듯 단면이 각져 있었다. 그 외의 재료는 간소했다.

숙주와 부추, 그리고 가늘게 찢은 익힌 닭고기뿐이었다.

“이부면의 핵심은 면이지요. 다른 잡다한 재료는 최소한으로 넣어야 면의 풍미를 온전히 느낄 수 있지요.”

“늦은 저녁에 먹기엔 너무…….”

“죄책감이 드십니까?”

“환상적이라는 뜻이었다.”

태감의 너스레에 피식 웃은 소년은 기름을 두른 철과에 면을 넣고는 물을 살짝 넣어 면이 풀어지도록 했다.

메마른 면이 수분을 빨아들여 부드러워지고 처음 넣은 물이 증발할 때쯤, 소년은 미리 준비해둔 닭 육수를 자작하게 부었다.

“질펀하게 기름을 잔뜩 두르거나 걸쭉한 전분 국물을 곁들인 다른 볶음국수와는 다르게, 이부면은 닭 육수를 졸여 면에 흡수시켜 메마르게 볶아내는 요리입니다. 물기가 거의 없기 때문에 자칫 건조해 보이지만, 면엔 닭 육수의 수분이 충분히 배어 있어서 씹으면 촉촉한 수분기를 느낄 수 있지요.”

그렇기에 무엇보다도 불 조절이 관건인 요리입니다.

닭 육수가 부르르 끓어오르기 시작하자 소년은 부지깽이로 숯을 긁어내 불을 은은하게 줄였다.

“불이 너무 세면 육수가 면에 배어들기 전에 졸아붙고, 너무 약하면 면이 팅팅 불어버리지요.”

“요리사의 내공을 증명하는 요리구나.”

“내공이 부족한 친구들은 걸핏하면 기름을 흠뻑 먹은 기름떡 같은 이부면을 만들어 욕을 먹곤 하지요.”

육수가 충분히 졸아들고 면에 윤기가 돌면 나머지 재료를 전부 넣고는 간장을 슬쩍 두르고 센 불에 빠르게 볶아낸다.

완성된 면을 접시에 담은 소년은 정체 모를 가루를 면 위에 솔솔 뿌렸다.

가루라고 하기엔 묘하게 입자가 굵은, 주황색 살짝 도는 갈색의. 마지막에 첨가된 그 묘한 조미료를 본 태감은 감탄사를 내질렀다.

“오호라, 그것은 새우 알이 아니냐.”

“예, 안휘성 우호(芜湖)의 명물이지요.”

가장 무더운 여름날, 징거미새우의 알을 쪄서 말려 볶아낸 그 조미료는 광주리 한가득 징거미새우를 잡아야 고작 한 줌 얻을 수 있는 사치스러운 별미였다.

현지에선 보통 돼지 사골로 육수를 낸 국수에 고명으로 올려 먹지만, 소년은 이부면의 감칠맛을 내기 위해 즐겨 사용했다.

고작 한 자밤만 넣어도 뽀오얀 사골육수를 짙은 색으로 물들이는 새우 알이 호사스럽게도 담뿍 올라간 이부면이 상 위에 오르자 태감은 감격스러운 표정으로 소년을 올려다보았다.

“최고의 야식이군.”

“최악의 야식이기도 하지요.”

탄수화물 과다, 지방 과다, 염분 과다. 당뇨와 고혈압 환자일 경우 주의 요망. 단, 불면증과 근심 걱정에는 효과적일 수 있음.

소년은 자신의 처방에 의사들이 동의해 줄지 고민했다.

하지만 이미 상에 차려진 요리를 두고 고민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었다.

설령 내일이 두려울지라도, 요리가 차려졌으면 먹어야 한다.

태감의 젓가락이 면발을 한가득 집어 올렸다. 매끄러운 면발에는 작은 새우 알이 알알이 엉겨 있었다.

면발이 뿜어내는 뜨거운 열기를 식히기 위해 잠시 기다린 다음, 태감은 거침없이 면발을 빨아들였다.

후루룩.

탄력 있는 면발이 콧잔등을 톡 치고는 입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양 볼이 미어지도록 욱여넣은 면발. 면발은 바삭하게 지져져 있었지만, 속에는 아직 메마르지 않은 촉촉함과 쫄깃함을 품고 있었다.

닭 육수가 흠뻑 배어든 면발의 고소함. 그리고 면발을 씹을 때마다 타액과 뒤섞이며 서서히 그 진가를 선보이기 시작한 새우 알의 감칠맛.

혀 위를 구르는 단단한 알갱이들 하나하나에는 농후한 새우의 풍미가 응축되어 있었다.

그 달고 향기로운 알갱이가 달라붙은 매끄러운 면발.

태감은 그에 만족했다.

더할 수도, 뺄 수도 없다. 이곳이 바로 낙원이며, 이것이 바로 행복이다. 이보다 더 나은 것은 없으리라.

소년은 차가운 조소를 지으며 태감의 확신을 부정했다.

“맛이 좀 지루하지요?”

“지루하다고?”

“기름지고, 고소하고, 짭짤한 맛뿐이지 않습니까.”

이런 요리엔 딱 맞은 조미료가 있지요. 아마 좋은 자극제가 될 겁니다.

소년은 웃으며 태감에게 작은 단지를 내밀었다.

태감이 보내오는 의심의 눈초리를 웃음으로 받아넘기며 소년은 단지의 뚜껑을 열었다. 알싸한 냄새가 코끝을 스친다.

“고추기름입니다. 산초도 조금 들어갔지요.”

기름진 것에 이보다 좋은 친구는 또 없지요.

마치 아편을 권하는 아편상과도 같은 음침한 웃음을 흘리며 소년이 거듭 권하자 태감은 떨리는 손으로 그것을 받아들었다.

새빨간 기름이 면발 위로 떨어진다. 이미 기름이 밴 면이었기에 고추기름은 면발에 흡수되는 대신 방울져 미끄러졌다.

붉은색이 번들거리는 면발을 집어 올린 태감은 신중히 그것을 입으로 가져갔다.

그리고.

그가 완전하다 믿었던 그의 낙원이 산산이 부서졌다.

몸서리치는 경악과 터질듯한 흥분, 녹아내릴 것만 같은 희열을 얼굴에 띄운 채 그대로 얼어붙은 태감 앞에서 소년은 빙긋 미소 지었다.

“어떻습니까. 잘 어울리지요?”

소년은 굳이 태감의 입에서 항복이 선언되기를 기다리지는 않았다.

소년이 두 번째 이부면을 만들기 위해 아궁이로 돌아갔기에 태감은 소년의 눈치를 보지 않고 마음껏 고추기름을 끼얹을 수 있었다.

그렇게 첫 번째 접시가 고추기름이 뿌려졌던 흔적만 남은 채 깨끗이 비워지고 두 번째 접시가 상에 오를 때쯤, 한결 허기가 가신 태감은 면 위에 고추기름을 듬뿍 뿌리며 앞으로의 여정을 이야기했다.

“다음에 들릴 곳은 예봉(濊峰)이라는 마을로, 하남으로 가기 전 반드시 들려야 할 곳이다.”

“반드시? 뭐 대단한 볼거리라도 있습니까?”

“마을 자체는 특별한 게 없다. 그냥 하남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작은 마을일 뿐이야. 다만 근처에 작은 호수가 있어 어업에 종사하는 사람이 많다는구나.”

“그럼 굳이 들려야 할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식료품을 보충해야 한다면 모를까. 볼거리도 놀 거리도 없는 마을에 굳이?

소년은 미심쩍다는 투로 되물었다.

“혹시 생선 요리가 드시고 싶어서는 아니겠지요?”

“설마. 그런 이유로 경유지를 고르겠느냐?.”

“하긴, 생선을 그리 즐기시는 분도 아닌데. 그럼 어떤 이윱니까?”

“이제 곧 곡우(穀雨)이지 않느냐.”

태감의 말에 날짜를 세어본 소년은 혀를 차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십사절기의 여섯 번째 절기. 봄의 마지막 날인 곡우는 봄비가 내려 마른 땅을 적시고 한해 농사를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날이었다.

농사꾼들에게 봄비야 반가운 손님이었지만, 여행객들에게는 하늘을 원망케 하는 불청객일 뿐이었다.

“여행 중 내리는 비라니. 상상만 해도 끔찍하군요.”

“그러니 가급 적 봄비가 그칠 때까진 예봉에서 머물다 갈 생각이다.”

“오랜만에 생선은 실컷 먹겠군요.”

“예봉은 생선도 유명하지만, 또 호수에 풀어 키우는 오리도 유명하다는구나.”

그리고 곡우에는 풍년을 기원하고 범람으로 수해가 없길 기원하는 제사가 있기 마련이니, 어쩌면 구경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구나.

태감의 말에 소년은 염려에 찌든 표정으로 품 안에 넣어둔 호각을 매만졌다.

“부디 이걸 쓸 일이 없으면 좋겠습니다만.”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 홍문에서 같은 큰일이 그리 쉬이 벌어질 리가 없으니. 예봉은 작은 마을이다. 그런 곳에서 소란이 벌어져 봐야 얼마나 큰일이겠느냐.”

과연, 괜한 걱정일까요.

불안한 표정으로 뒷덜미를 쓸어 만진 소년은 가만히 자신의 손을 들여다보았다.

손아귀는 식은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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