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관의 요리사 225화 외전 19화
식사가 소박하였으니 후식은 화려하고 달콤해야 하지 않겠는가.
간볶음에 밥 한 공기라는 간소한 상을 차린 후, 소년은 아궁이에 남은 잉걸불의 은은한 열기로 후식을 만들었다.
도마 위에 오른 재료를 본 악진평이 반색하며 물었다.
“호오, 그건 흰목이버섯이 아니오.”
“예, 후식에 쓸 생각입니다.”
“흰목이버섯이 들어가는 후식이라. 구기돈은이(枸杞燉銀耳)일 것 같은데, 내 예상이 맞소?”
소년은 조금 놀란 표정으로 되물었다.
“혹시 섬서 출신이셨습니까?”
“섬서 출신은 아니지만, 젊은 시절 섬서땅에서 근무한 적이 있소. 그때 몇 번 대접받았지.”
소년이 만들던 구기돈은이는 섬서에서 유명한 최고급 보양식으로 맛이 달고 개운하며 보기에도 좋아 섬서 잔치의 대표적인 후식으로 유명했다.
하지만 그 화려한 명성과 요리에 받쳐진 찬사, 그 우아한 맛에 비해 들어가는 재료와 요리법은 무척 간단했다.
“들어가는 재료로는 흰목이버섯에 구기자, 설탕. 굳이 꼽아야 한다면 물. 이렇게 네 개뿐이지요. 사실 그 명성에 비해 재료가 너무 빈약해서 조금 민망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맛은 천상의 감로수와 견주어도 손색이 없지. 진정 가치 있는 것은 으레 그렇지 않소. 소박하거나 볼품없는 모습으로 그 보석과 같은 가치를 숨기고, 가치를 알아주는 이에게만 그 달콤함을 허락하지.”
그 재료가 빈약해 보이나 약효까지 미미한 것은 아니었다.
만약 그랬다면 구기돈은이가 섬서 최고의 보양식으로 손꼽히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흰목이버섯을 손질하며 소년은 구기돈은이의 약효에 관해 이야기했다.
“구기자는 예부터 술을 담가 은잔에 담아 장복하면 신선이 된단 말이 있을 정도로 약효가 좋기로 유명한 약재지요. 신장에 좋고 침침한 눈을 밝게 하고 푸석한 피부에 윤이 돌게 하는데도 효험이 있다 합니다. 그러니 구기자를 장복하면 늙지 않는다는 말이 있나 봅니다.”
“허어, 구기자가 좋다는 말은 많이 들었지만…….”
“구기자를 달일 때 대추 몇 알을 넣으면 여성분들이 드실 때 금상첨화지요. 나중에 차 달이는 법을 알려드릴까요? 부인께 사랑받으실 겁니다.”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며 소년이 돌아보자 악진평은 시선을 피하며 헛기침했다.
하지만 부인 생각을 이기지는 못했는지 결국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간신배처럼 킬킬거리며 소년은 설명을 이었다.
“그리고 흰목이버섯 역시 여성에게 좋은 음식입니다. 특히 산모에게 좋지요.”
“산모에게?”
“예. 흔히들 출산하면 뼛골이 빈다고 하지 않습니까? 흰목이버섯이 뼈를 튼튼하게 하는 데 좋습니다.”
“허어, 그럼 배금성 그 친구에게 좀 보내줘야겠구려.”
“그 외에 간의 독소를 풀어주는 데도 으뜸이지요. 술 마신 다음 날 흰목이버섯만 한 숙취 해소제가 없다는군요.”
그래서 잔치가 끝나면 그렇게들 흰목이버섯을 찾았나 봅니다.
우스갯소리로 이야기를 끝마친 소년은 잉걸불에 유약을 바르지 않은 뚝배기를 건 다음 흰목이버섯과 얼음 설탕을 넣고는 목이버섯이 잠길 만큼 끓는 물을 부었다.
“목이버섯은 끓는 물을 부어 뭉근한 불에서 익혀줘야 부드러워 지지요.”
구기자는 종지 그릇에 담아 설탕을 뿌린 다음 물로 적셔 센 불에 쪄낸다.
시루에 구기자를 올린 소년은 문득 구기돈은이의 의미를 떠올리고는 악진평을 바라보았다.
“악 대주님.”
“왜 그러시오?”
구기돈은이의 구기자는 붉은 피를, 흰목이버섯은 결백을 뜻했다.
소년은 잠시 고민하고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유방(劉邦)을 도와 한(漢)나라를 세운 공신의 한 명인 장량(張良)은 공신들을 팽하는 유방에 회의를 느껴 깊은 산속에 은둔해 자신의 결백을 표하고자 하얀 목이버섯을 키워 요리해 먹었다고 한다.
당(唐)조 개국황제인 이세민(李世民)을 도와 당나라를 세운 공신들인 방(房)씨와 두(杜)씨는 자신의 결백만 보여주기에 급급해서는 사나이가 아니라 하며 의미만 있다면 붉은 피를 흘리며 목숨을 버려도 좋다 말했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흰목이버섯과 구기자를 함께 끓여 결백을 증명할 때는 피 흘림을 두려워 말라는 의미를 후세에 전하였다.
그런 요리의 의미를 되새긴 소년은 다시 한번 고개를 가로젓고는 악진평을 바라보았다.
‘악 대주. 당신은 부디 당신의 붉은 피로 결백을 증명할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갑작스레 고개를 젓는 소년의 행동에 의아함을 느낀 악진평은 젓가락을 내려놓고는 소년에게 다가왔다.
그의 얼굴에 떠오른 걱정의 기색에 소년은 다급히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무슨 일 있으시오?”
“슬슬 요리를 마무리할 때가 된 것 같아서 그럽니다.”
소년은 다급히 시루에서 구기자를 꺼내고는 푹 익은 흰목이버섯에 구기자 우러난 국물과 구기자를 함께 넣어 한소끔 더 끓여냈다.
구기돈은이가 완성되자 소년은 무늬 없는 흰 사기그릇에 요리를 담아냈다.
구기자의 색이 녹아든 국물은 은은한 황금빛으로 빛났다. 그 위로 붉은 구기자가 뜨고 흰목이버섯이 담긴다.
그 모습은 마치 황금의 바다에 투명한 산호초가 잠긴 듯했다. 넘실거리는 황금빛 수면 위로는 붉은 쪽배가 떠 있었다.
악진평은 조심스럽게 그릇을 받아들었다.
그것은 우아하고, 빛났으며. 따스했다.
“아름답군…….”
“식기 전에 드십시오.”
악진평은 가만히 숟가락을 들어 올렸다.
고요히 잠든 황금의 바다에 파문이 번지고, 악진평은 그곳에서 빛나는 산호 몇 조각과 빨간 쪽배를 건져 입으로 가져갔다.
작게 벌린 입술 틈새를 간질이며 미끄러지는 흰목이버섯의 감촉은 매끄러웠다.
오돌오돌 씹히는 듯하다가, 사르르 녹는다. 남은 것은 입안을 흥건하게 적시는 다디단 국물뿐이었다.
후우.
악진평은 더운 숨을 토해냈다. 그리고는 어떠한 감탄사도 내지르지 않고 조용히 그릇을 기울였다.
단물을 들이켜는 사내의 침묵에서 그의 만족감과 환희를 느낀 소년은 빙그레 미소 짓고는 주방 밖에 난 작은 창으로 시선을 돌렸다.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단내를 맞으셨나 보군.’
단내에 굶주린 승냥이를 맞이하기 위해 일어선 소년은 문 바깥의 사람과 충돌하는 불상사가 없도록 주의 깊게 문을 열었다.
그의 예상대로, 바깥에는 태감이 있었다.
“간식거리를 찾으러 오셨습니까? 마침 구기돈은이를 조금 끓였는데.”
“그것도 있지만, 다른 용건도 있다.”
다른 용건?
소년의 의문에 대답하는 대신 태감은 뒤따라 온 사람을 위해 비켜섰다.
의아한 표정으로 태감을 올려다보던 소년은 곧 경악스런 표정을 지어야만 했다. 그곳에는.
“비룡대주가 왔다지. 그와는 풀어야 할 매듭이 있어서.”
그곳에는 허리춤에 검을 비껴찬 단혜림이 있었다.
* * *
악진평은 서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고는 한 걸음 앞으로 나서 단혜림과 마주 섰다.
둘의 시선이 마주치는 것을 본 소년은 본능적으로 벽에 바짝 붙어섰다.
“안양비 님을 뵙습니다.”
“폐비된 지 오래이니 예를 차릴 것 없네. 정히 부를 호칭이 필요하다면. 그래. 지금은 숙친왕 전하의 호위무사이니 단 호위라 부르시구려,”
“예, 단 호위님.”
평이하고 정중한 대화였으나 소년은 도저히 안도할 수가 없었다.
마치 한 우리에 두 마리의 호랑이를 가둬둔 듯한, 스치는 바람마저 숨죽이는 긴장과 전율이 주방 안을 가득 채웠다.
“직접 대면한 것은 처음인가. 이리 만나게 될 줄은 몰랐네.”
“만약 그날, 혁문수 그 친구가 아닌 단 호위님께서 직접 오셨다면. 그날 떨어진 목은 제 것이었겠군요.”
“혁문수. 그래, 그랬었지.”
단혜림의 왼손이 허리춤의 검 자루를 쥐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하듯이, 자루를 쓰다듬던 그녀는 입꼬리를 가늘게 찢고는 입을 열었다.
“사과하기를 바라나.”
“그 일을 후회하십니까.”
“후회하지 않네.”
“저 역시, 사과는 바라지 않습니다.”
악진평의 대답에 담담히 고개를 끄덕인 단혜림은 주방 안을 둘러보며 말했다.
방금 요리를 했기 때문인지 그리 크지 않은 주방은 어지러웠으며 더운 공기가 들어차 있었다.
“주방은 조금 좁군.”
“예, 움직이기 좋은 장소는 아니지요.”
“그럼, 밖으로 나가겠나? 아직 무더운 날씨는 아니니, 움직이기 나쁘지는 않을걸세.”
“그게 좋겠습니다.”
단혜림의 뒤를 따라나서는 악진평을 소년은 말릴 수 없었다. 그의 눈동자가 타오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복수나 증오 따위의 질척한 것이 아니었다. 순수하고, 격렬한, 자기 자신을 태워 버릴 만큼 뜨거운 것.
호승심이었다.
단혜림과 악진평이 내원으로 나가고 나서야 소년은 한숨과 함께 태감을 돌아보았다.
“태감님.”
“왜 그러느냐?.”
“말리실 수는 없었습니까.”
“단 호위를 말이냐?”
코웃음 친 태감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럼 불편하다 하여 평생 마주치지 못하게 막고 있을 것이냐. 언젠가는 풀어야 할 매듭이었다.”
“그야……. 예, 그렇지요.”
한숨을 내쉰 소년은 솥에서 구기돈은이 한 그릇을 퍼 태감에게 건네었다.
그릇을 받아든 태감은 식탁까지 가기도 귀찮은지 부뚜막에 걸터앉아 그것을 들이켰다.
달콤하고 맑은 국물을 반쯤 들이마신 후, 태감은 그릇을 내리고는 소년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말을 걸라는 신호였다.
소년은 내키지 않는다는 투로 넌지시 물었다.
“감찰관은 좀 어떻습니까.”
“아마 나흘쯤 앓아누워 있을 것 같더구나. 아직도 다리를 오므리지 못하고 있는걸 보면.”
“저런. 그럼 그 양반이 전해줬어야 할 황제 폐하의 전언도 듣기 어렵겠군요.”
단조로운 어조로 내뱉어진 소년의 말은 태감을 침묵하게 했다.
입술을 달싹이며 무언가를 말하려던 태감은 잠시 후 건조한 목소리로 소년에게 물었다.
“어찌 알았느냐?.”
“어떤 것 말입니까. 전언이 있을 거라는 것을 알아차린 것? 아니면 서신이 아닌 전언일 거란 걸 예측한 것?”
“둘 다.”
“굳이 추리력을 발휘할 필요도 없는 문제였지요.”
저도 후궁 밥 먹은 지 제법 오래되지 않았습니까.
낮게 키득거린 소년은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설명했다.
“이유야 간단하지요. 폐하께선 팔자 좋게 유람이나 떠나는 저희를 보며 배알이 꼬였을 거라는 것. 그리고 황제 폐하의 눈길이 미치지 않는 지방의 문제를 해결하고 싶으셨을 거라는 점. 이것으로 전자의 이유는 설명이 되었군요.”
“후자의 이유는?”
“황제 폐하께선 이번 일은 비공식적으로 처리하길 원하신다는 것이 그 이유가 되겠지요. 인장을 찍은 서신은 공식적인 문서로 발송 기록이 남지만, 입으로 전한 전언은 사람 입만 막으면 없던 일이 되지요.”
틀렸습니까?
느물대는 소년의 입꼬리를 쏘아보던 태감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입을 열었다.
“정답이다. 어조가 조금 불경하기는 했지만, 그냥 넘어가도록 하지.”
“아이고, 성은이 망극하옵니다그려.”
소년은 휘적휘적 걸어와 태감의 옆자리에 걸터앉았다.
조금 전까지 불을 때서인지 부뚜막은 궁둥이 붙이고 있기 힘들 만큼 뜨끈뜨끈했다.
잘도 이런 데 앉아 있다는 표정으로 태감을 본 소년은 곧 그가 외투를 접어 깔고 앉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소년이 용의주도하다고 말할 새도 없이 태감은 이야기를 시작했다.
“황제 폐하께서 네게 명을 내리셨다.”
“예? 감찰관 그 양반 앓아누웠다면서요? 어떻게 듣고 오셨습니까?”
“끙끙 앓는 사람 흔들어 깨워서, 침대맡에 앉아 들었지.”
“거참 천벌 받을 짓을.”
혀를 끌끌 찬 소년은 입술을 굳게 닫고는 시선을 태감에게 돌렸다.
청자가 들을 준비가 되었음을 확인한 태감은 엄숙한 목소리로 황제의 명을 전했다.
“폐하께서는 네게 그간 소홀히 했던 지방 감찰의 임무를 맡기겠다 하시는구나.”
“배알이 단단히 꼬이셨나 봅니다.”
태감은 몇 초 동안 말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성대한 폭소를 터뜨려야 했기 때문이었다.
사레가 들릴 만큼 웃다가 들고 있던 그릇을 떨어뜨릴 뻔한 태감은 눈꼬리에 눈물방울을 매달고는 입을 열었다.
“물론 크흠, 그런 이유도 있겠지만, 꼭 그것 때문만은 아니다. 설마 폐하께서 심통이 나서 임무를 내리셨겠느냐?”
순간 그럴 것 같다고 대답할 뻔한 소년은 가까스로 입술을 눌러 닫았다.
소년이 하려던 말이 무엇인지 짐작한 태감은 피식 웃고는 말을 이었다.
“이번 일은 폐하껜 다시 없을 기회이기 때문이다.”
“기회요? 저와 태감님이 유람을 나온 것이 말입니까?”
“그래. 절대로 배신하지 않을, 피로 이어진 혈족을 감찰관으로 쓸 수 있으니 이보다 큰 기회가 또 있겠느냐?. 그간 여력이 안 돼 소홀히 할 수밖에 없었던 지방의 사정을 여과 없이 듣고 해결할 수 있으니 폐하께서도 절박하실 수밖에.”
소년은 부루퉁한 표정으로 턱을 삐딱하게 괴었다.
태감의 설명은 논리적이었지만, 세상 모든 일이 그렇듯 논리와 납득은 별개의 문제였다.
거부할 명분이 마땅치 않았음에도 소년은 소극적인 태도로 반항했다.
“하지만 비공식적인 감찰 아닙니까. 왕의 신분을 대놓고 드러낼 수도 없고, 따로 직위가 있어 감찰권이나 체포권이 있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임무를 수행하겠습니까. 이번처럼 필요할 때마다 경사로 파발꾼을 보내란 말씀은 아니겠지요?”
“물론, 폐하께선 그에 따른 대책 또한 마련해 두셨다.”
잠시 말을 멈춘 태감은 품에서 작은 함을 꺼내 소년에게 건네었다.
손안에 쏙 들어오는 작은 크기에 오동나무 재질이었고 검은 옻칠을 한 것이었다.
소년은 불안한 표정으로 그것을 열어보았다.
“이건 뭡니까?”
“호각(胡角)이다.”
“그건 보면 압니다. 그러니까 제 말은.”
“뭘 부르는 호각이냐. 그 말이지?”
함 안에 든 것은 작은 호각이었다.
뿔이나 뼈, 나무를 이용해 만드는 보통의 호각과는 달리 그것은 옥을 깎아 만든 것이었으며 취구는 순금 재질이었다.
불기 아까울 만큼 유려한 자태의 호각을 집어 든 소년은 미심쩍다는 듯이 그것을 바라보았다.
“이거, 소리 나는 건 맞습니까? 괜히 힘껏 불었다가 깨지기라도 하면…….”
“한번 불어보거라.”
태감의 재촉에 어쩔 수 없이 취구를 입으로 가져가며, 소년은 쓰디쓴 숨을 내쉬었다.
이제 좀 쉬나 했더니, 이번엔 비공식 감찰관이라니.
“이러다 복직하게 되는 건 아닌지 모르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