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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관의 요리사-224화 (224/314)

환관의 요리사 224화 외전 18화

“황제 폐하의 사람이다. 이 말씀이군요.”

어조는 평이했으나 동시에 날카롭기도 했다.

그 말뜻을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아둔하지는 않으나 유려한 답을 내놓을 만큼 달변가도 아니었던 악진평은 난처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나라의 녹을 먹는 관리는 모두 황제 폐하의 신하이옵니다. 그 이전에, 제국민은 모두 폐하의 아들딸이요 그분의 울타리 안에서 보호받는 어린양 아닙니까.”

“하지만 진정으로 황제 폐하의 사람이라 할 이가 몇이나 되겠습니까. 정계에, 경사에 말입니다.”

소년은 우울한 얼굴로 악진평을 올려다보았다.

그것은 제 욕심만을 차리는 불충한 무리를 꾸짖는 준엄함 분노도, 위태로운 제국의 앞날을 걱정하는 근심 어린 슬픔도 아니었다.

젖살이 채 빠지지 않은 사내아이의 얼굴에 맺힌 것은.

악진평은 한참 후에야 그것이 연민의 감정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소년은 황제의 사람이 된 악진평을 동정하고 있었다.

그 역시 황제의 사람이었기에. 먼저 책임과 의무를 짊어졌던 선배로서. 은퇴한 후에도 온전히 그 책임을 내려놓지 못한 자로서.

악진평을 바라본 소년은 쓰디쓴 숨을 내쉬었다.

”악 대주. 가시밭길에 드셨습니다그려.”

“전하.”

“가지 않으셨으면 좋았을 것을.”

소년은 말을 멈추었다. 그러고는 건조한 눈으로 악진평을 바라보았다.

처음 만났을 때와 조금도 변함이 없는 강직한 무관의 얼굴에는 담담한 긍정과 함께 강렬한 자긍심이 드러나 있었다. 그것이 그의 대답이었다.

소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에게는 그저 짐이고 굴레이고 족쇄였지만, 당신에겐 긍지였군요.’

그것이 한낱 요리사와 무사의 차이겠지요.

연민의 시선을 거둔 소년은 그 이상 왈가왈부하여 악진평을 괴롭히는 대신 그에게 차를 대접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섰다.

차는 달고 향기롭기로 유명한 복건의 명차 백호은침(白毫銀針), 차 과자는…….

“초미병(炒米餠) 이군요.”

“오랜만이지요?”

“예. 저번 칠성제 때 전하께서 내주셨지요.”

“그때보단 조금 더 나을 겁니다. 이건 갓 만든 거라.”

더 부드러울 겁니다. 부드럽다고 해도 초미병이지만요.

소년의 농담에 악진평은 슬며시 미소 짓고는 초미병을 집어 들었다.

볶은 쌀가루에 꿀과 견과류를 섞어 구워내 잘못 씹으면 생니가 부러질 만큼 단단한 초미병.

악진평은 처음 만난 날 초미병을 우적우적 씹어먹어 소년을 놀라게 했었다.

과연 지금은. 소년은 기대감을 담아 악진평이 초미병을 입에 넣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마치 맷돌처럼 튼튼한 위턱과 아래턱이 사정없이 초미병을 분쇄했다.

우드득, 와자작, 까드드득.

마치 뼈를 깨물어 부수듯 섬뜩한 파쇄음이 연달아 울려 퍼진다.

초미병 하나를 금세 씹어 삼킨 악진평은 목이 멘다는 듯 차를 들이켜고는 겸연쩍은 웃음을 지었다.

“역시, 훌륭한 맛입니다. 저번에는 개암나무 열매였는데, 이번에는…….”

혀끝에 정신을 집중한 채 골몰하던 악진평은 볶은 쌀가루의 고소함 속에서 익숙한 향기로움을 찾아내고는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잣과 연밥이군요. 초미병에 은은하게 배어든 구수한 향기는 연밥의 것이고, 잣은.”

“단단하고 뻑뻑한 초미병에 기름기를 더해줘 먹기 쉽게 해주지요. 정답입니다. 악 대주, 더 날카로워지셨군요?”

“전하께서 도와주신 덕분이지요.”

뜨는 달을 바라보며 떠들고 지는 달을 바라보며 술잔을 기울였던 시간, 그 소란스럽고 유쾌한 추억은 왕과 장군이라는 엄숙한 관계에 윤활유가 되어주었다.

소년이 아직 후궁의 상호였고, 악진평이 아직 금마단주였던 시절. 허례허식에 구애받지 않고 마음껏 웃을 수 있었던 시절을 떠올린 소년은 조금 젖어 든 목소리로 말했다.

“사람은 변하지 않았는데, 자리만 변했군요.”

“전하.”

“난 아직도 내가 상호 오운인 것 같습니다. 추레하고 궁색한 절름발이 환관이요.”

그리고 여전히, 상호 오운으로서 당신을 대하고 싶습니다.

솔직한 심정 고백에 대한 대답은 한참 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그에게도 어려운 결정이리라.

소년은 황실에 충성을 맹세한 무관에게 그런 대우를 요구할 수 있는 신분이 아니었다.

그는 왕이었다.

체념한 소년은 방금 한 말을 잊어달라 말하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악진평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전하께서 그리 불편하시다면, 사적인 자리에서는 말을 편히 하겠소.”

“악 대주.”

“물론, 사적인 자리에서만 말이오.”

빙그레 웃은 악진평은 다시금 초미병이 맛있다느니 차가 향기롭다느니 하는 말로 화제를 돌렸다.

얼떨결에 그에 맞장구치던 소년은 곧 그가 쑥스러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소년은 입꼬리를 한껏 끌어올리고는 너스레를 떨었다.

“이제야 좀 살겠군요. 사실 지금까지 악 대주님께 공대를 듣느라 불편해 죽는 줄 알았습니다.”

“진작에 이럴 걸 그랬구려.”

“악 대주님도 불편하셨군요?”

“커흠, 그야 편하지는 않았소.”

악진평의 절제된 불평에 숨죽여 키득댄 소년은 한결 편안한 자세로 몸을 고쳐 앉았다.

삐딱하게 팔걸이에 턱을 괸 그 자세는 왕의 위엄이라고는 솜털만큼도 느낄 수 없는 불량한 자세였다.

그리고 악진평은 충성을 맹세한 무관으로서 절대로 왕에게 보일 수 없는 불경한 자세, 다리를 꼬고 앉는 자세를 취하여 서로의 입장을 공고히 했다.

이 자리엔 왕도 무관도 없었다. 그저 오랜만에 만나 회포를 풀고 싶어 하는 친구 둘이 만났을 뿐이었다.

자연스레 둘의 대화 또한 국가 정세나 황실의 일 등 딱딱하고 무겁고 고리타분한 것 대신 사소하고 일상적이고 시시콜콜한 것들로 이루어졌다.

“허어, 배 단주께서 득녀하셨다고요? 이런 경사가 있나.”

“그렇소. 늦봄이었소. 내 생각에는 아마 지난여름 전하께서 술을 대접해 주셨던 날 거사가 이루어지지 않았나 싶소.”

“이유야 어쨌든 좋은 소식이군요. 이거 경황이 없어 그런 경사가 있는 줄도 모르고……. 딸이라니. 허허…….”

참 귀엽겠지요?

능청스러운 소년의 질문에 악진평은 표정을 굳히고는 침중한 어조로 대답했다.

“뭐라 말하기 참 어렵지만…… 배금성 그 친구를 꼭 빼닮았더군.”

“배 단주님을 말입니까?”

소년은 잠시 배금성의 모습을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악진평보다 머리하나가 더 큰 거구에 온몸이 근육으로 들어찬 곰 같은 사내.

소도 단번에 때려잡을 것 같은 거대한 철퇴를 휘두르던 장사의 모습을 떠올린 소년은 한기가 치민다는 듯 몸을 떨었다.

“그, 장군감……이겠군요.”

“그렇더이다.”

소년은 그 어떠한 말도 꺼내놓을 수 없었다.

그저 머릿속으로 수염 부숭부숭한 배금성의 모습을 떠올리며 입술을 씹을 뿐.

입술을 떼질 못하는 것은 악진평 또한 마찬가지였다.

침통한 침묵 속에서 서로를 마주 보던 둘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떨구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소년이었다.

“식사가 아직이시지요? 먼 길 달려오셨으니…….”

“마침 허기지던 참이었소.”

둘은 마치 배금성의 딸이라는 화제에서 멀어지려는 것처럼 도망치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재료가 변변치 않아 대단한 상은 못 차릴 것 같습니다.”

“무관이라도 관리라오. 호환으로 도시의 시장도 침체 되었음을 빤히 아는데 어찌 먹을 것을 탐하겠소. 그저 죽이라도 한 그릇 내어주시면 족하오.”

“그래도 정말 흰죽 한 그릇만 달랑 나오면 섭섭하겠지요?”

킬킬거리며 소년이 도마 위에 올린 것은 시뻘건 돼지의 간이었다.

딱 보기에도 잡티 없이 붉은 팥색이 나는 것이 당일 도축된 신선한 것임이 틀림없었다.

어디서 이런 좋은 간을 구했냐는 악진평의 질문에 소년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사정이 어려워도 인륜지대사까지 막을 수는 없나 봅니다. 오늘 아침 어느 집에서 혼인한다고 돼지를 잡길래, 웃돈을 주고 얻어왔습니다. 염치가 있어 고기까지 내달라고는 못 하고, 간 같은 내장만 얻어왔지요.”

“사정이 어려울 때이니 더 그럴 수도 있겠구려. 사람 마음이란 것이 다 그렇지 않소.”

“예. 어렵고 고단할수록 더 각별하지요.”

말씀하시는 걸 보니 악 대주께서도 소싯적엔 꽤나 어려운 사랑을 하셨나 봅니다. 아직도 깨가 쏟아지시는 걸 보면.

짓궂은 농을 던지면서도 소년의 손은 쉼 없이 움직였다.

힘줄을 제거하고 얇은 막을 벗겨낸 다음, 간을 버들잎 모양으로 얇게 썬 소년은 부뚜막에 걸터앉은 악진평에게 시선을 돌렸다.

“악 대주님은 혹시 동북 지방을 방문하신 적 있으십니까?”

“몇 번인가 방문한 적은 있소. 대부분 임무 중 거쳐 가는 정도였지만.”

“그럼 혹시 류간첨(熘肝尖)이라고 들어보신 적 있으신지요?”

“류간첨?”

생소하다는 그의 반응에 소년은 애석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들어보신 적 없으신가 보군요. 제가 지금 만드는 돼지 간볶음이 류간첨입니다. 동북지역에서 가장 유명한 사대 요리 중 하나지요.”

“허어, 견문이 짧아 그런 요리가 있는 줄도 모르고 살았구려.”

드셔보시면 분명 마음에 드실 겁니다. 무관 나으리들의 입맛에 잘 맞는 요리거든요.

소년의 말에 악진평은 입맛을 다시며 대답했다.

“무관의 입맛에 잘 맞는 요리라? 어떤 요리일지 짐작이 가는군.”

분명 매콤달콤하고 짭조름해서 쌀밥을 무한대로 흡입할 수 있는 요리겠지?

악진평의 놀라운 추리력에 감탄한 소년은 청고추와 홍고추를 돼지 간과 비슷한 크기로 썰며, 이 소박한 요리가 어찌 동북 사대 요리가 되었는지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 요리를 처음 만든 것은 하북 출신의 국희옥(國熙玉)이라는 요리사가 요녕땅에서 처음 만들었다 합니다. 보발원(寶發園)이라는 이름의 가게를 차려 생계를 유지했다는군요.”

그러던 어느 날, 약관쯤 되어 보이는 청년이 가게에 들어와서는 돼지 간볶음과 돼지 콩팥 볶음, 달걀 볶음, 완자 구이 등 네 가지 요리를 주문했다 합니다.

소년은 씨익 웃으며 악진평에게 물었다.

“반응이 어땠을지는 설명하지 않아도 아시겠지요?”

“천하일품이었겠군. 그리고 그 손님은 아마 고위 공직자거나 그에 버금가는 유명인일 테고.”

“예, 맞습니다. 사실 그러지 않으면 이야기가 되지 않았겠지요. 아무튼, 그 청년이 칭찬하길 요리가 색깔과 모양, 맛, 칼 솜씨, 불의 강약조절. 모든 것이 나무랄 데 없이 훌륭하니 사대 요리라 불려도 손색이 없다 했다는군요.”

그리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절찬을 늘어놓은 젊은이는 사실 요녕땅에서 모르는 이가 없는 장군 장학량(張學良)이었다 합니다.

그 후 보발원은 네 가지 요리로 유명세를 얻어 가게가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그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야기를 끝낸 소년은 끓어오르기 시작한 기름 솥으로 시선을 돌렸다. 간을 튀기기에 딱 좋은 온도였다.

녹말가루로 곱게 치장한 간 조각들이 기름에 들어가자 자지러지는 소리를 내었다.

기름 끓어오르는 요란한 소리가 귓바퀴를 감돌며 짙은 육향이 피어올랐다.

기름진 살코기의 냄새가 아니었다. 조금 더 비릿하고 짙은, 신선한 내장의 향기였다.

“간을 맛있게 먹으려면 절대로 센 불에 간을 오래 두면 안 되지요. 오랫동안 익은 간은 퍽퍽하다 못해 푸석하기까지 하지요. 그런 간은 먹는 것도 고역입니다. 아마 열흘 굶은 비렁뱅이도 난색을 표할 겁니다.”

“난 지금까지 열흘 굶은 비렁뱅이도 난감해할 간을 먹고 있었군. 우리 집 요리사는 다 그럭저럭 먹을 만한데, 간 요리 만큼은 끔찍하다오.”

그런데 또 몸에 좋다고 올리기는 어찌나 많이 올리는지.

소년은 어쩐지 그의 푸념이 단순한 우스갯소리로 하는 말은 아닌 것 같다고 생각했다.

언제 한번 요리 지도라도 나가야겠다고 생각하며 기름에서 간을 건져낸 소년은 아궁이에 철과를 걸어 데우고는 상추씨 기름 약간 둘렀다.

“이제 마늘과 생강, 파를 튀겨 기름에 향을 내주고, 여기에 고추를 넣어 아삭한 식감이 살아 있게 익힌 다음.”

튀긴 간을 넣어 살짝 더 볶다가 간장을 철과 테두리부터 흘려 넣어 간을 맞추고, 마무리로 녹말 물을 넣어 걸쭉하게 해주면.

“자, 류간첨 완성입니다.”

차려진 상은 단출했다.

수북하게 쌓은 돼지 간볶음 한 접시에 고봉밥으로 그득하게 푼 쌀밥. 젓가락에 물잔까지 세지 않으면 민망할 정도로 초라한 밥상이었지만, 악진평의 얼굴에는 부실한 대접에 대한 노여움 따윈 조금도 엿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입가에 맺힌 것은 당장에라도 흰 쌀밥과 함께 간을 입에 한가득 욱여넣고 싶다는 강렬한 충동이었다.

그의 잔에 미지근한 차를 따른 다음, 소년은 한 발자국 물러났다.

편히 식사하시라는 소년의 배려에 깊이 고개를 숙인 다음, 악진평은 점잖은 자세로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잘 먹겠소.”

그의 공손함이 유지된 것은 거기까지였다. 다음 순간, 악진평은 전장에 나서려는 야차와 같은 모습으로 간볶음을 입에 쑤셔 넣었다.

센 불에서 재빨리 익혀낸 간의 야들야들한 식감. 그을린 간장의 짭조름함을 입은 간을 베어 물면 툭 터지듯 끊어지며 입안에 특유의 단맛을 한껏 쏟아내었다.

그 어떤 육고기와도 비할 수 없는, 혀 위에 살며시 녹는 그 달착지근함. 그 신선한 향취.

불쾌한 피비린내 따윈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달고 신선한, 내장 특유의 기분 좋은 육향이 은근하게 깔릴 뿐.

문자 그대로 ‘살살 녹는’ 감칠맛에 빠져 황홀경을 느끼던 악진평은 홀린 듯 쌀밥을 입에 넣었다.

차진 밥 알갱이 하나하나가 간의 농후한 감칠맛에 섞여든다.

볼이 미어지도록 씹을 때마다 악진평은 그의 부족했던 무언가가 충족됨을 느꼈다.

단순히 빈 위장을 채워 느끼는 포만감이 아니었다. 마음 한구석이 뿌듯하게 차오르는, 오늘 밤 기분 좋은 꿈을 꿀 수 있을 것만 같은. 내일 분명 좋은 일이 있을 거라 약속할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영혼의 충족감이었다.

“전하.”

“예. 말씀하시지요.”

고개를 든 악진평은 잠시 소년을 바라보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본래 간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지만…….”

“않았지만?”

“오늘부턴 간이 좋아질 것 같소.”

악진평의 수줍은 고백에 소년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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