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관의 요리사 223화 외전 17화
손발 끝을 오그라들게 하는 새벽의 서늘함을 녹이려는 듯 거무튀튀한 가마솥은 더운 수증기를 한껏 피워올리고 있었다.
아궁이 위에서 뭉근하게 끓어오르는 유백색 액체. 하룻밤 불려 맷돌에 갈아 짜낸 콩물은 주걱으로 휘저을 때마다 뜨거운 김과 함께 고소한 콩 냄새를 내뿜었다.
짜고 맵고 시큼하고 달착지근한, 자극적인 향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어떤 강렬한 향기보다도 위장을 자극하는 향기였다.
기나긴 밤. 길고도 길었던 공복에 시달린 뱃속에 이보다 더 간절한 한 모금이 또 있을까.
날콩 특유의 비린내가 사라지고 고소한 향만이 솥 안을 맴돌 때쯤, 콩물 한 잔을 국자로 퍼 올린 소년은 소금 한 자밤을 콩물에 탄 다음 국자를 입으로 가져갔다.
길었던 공백의 끝. 새벽닭 우는 소리와 함께 그 뜨겁고 부드러운 액체가 목구멍 너머로 넘실거리며 흘러 넘어온다.
차갑게 얼어붙은 위장을 녹이고, 뻣뻣하게 굳은 신체 말단부까지 그 온기를 퍼뜨린다.
혈관을 따라 흐르는 더운 열기. 소년은 더운 숨을 토해냈다.
“후우, 역시 아침에는 뜨끈한 두장(豆漿) 한 사발 만한 게 또 없지.”
살짝 모자란 듯하게 넣은 소금의 연한 짠맛은 콩 본연의 고소함을 부각한다.
곱게 갈아 정성껏 걸러낸 탓인지 혀에 닿는 감촉은 껄끄러운 잔여물 없이 비단처럼 부드러웠다.
단맛을 좋아한다면 갈색 설탕 한 숟갈 넣어도 훌륭하겠지만.
“역시 노인네한테 아침부터 단 건 부담스러워.”
당뇨의 무서움을 톡톡히 경험했던 소년은 그저 소금을 넣은 두장을 겸허히 즐길 뿐이었다.
아궁이에 불을 빼고 솥에 뚜껑을 비스듬히 걸쳐 김이 빠지도록 한 다음, 두장에 곁들일 식사 거리를 준비하기 위해 몸을 일으켜 세운 소년은 졸린 눈 비비며 주방을 찾은 때 이른 손님을 발견하고는 쓴웃음을 지었다.
“태감님. 어쩐 일이십니까. 더 주무시지 않고.”
“더 자려고 했는데, 영 출출해서 말이다.”
“두장(豆漿) 한 사발 내드릴까요.”
“그럼 좋지. 뭐 넣어 먹을 것도 있으면 더 좋고.”
아직 잠이 덜 깬 부숭부숭한 얼굴로 배시시 웃은 태감은 아직 이불 밖의 냉혹함이 견디기 어려운지 뜨뜻한 부뚜막에 걸터앉았다.
궁둥이 데어도 책임 못 진다고 핀잔을 준 소년은 찬장에서 사기그릇을 꺼내 콩물을 가득 담아 태감에게 내밀었다.
테두리가 푸른색으로 칠해진 하얀 사기그릇에 찰랑거리는 두장.
유백색의 고소한 행복을 한 사발 받아든 태감은 신중하게 갈색 설탕 두 숟갈을 넣고는 휘휘 저었다.
코를 찌르는 달착지근한 향기.
한 모금 들이킨 태감은 코밑에 유백색 거품이 생긴 줄도 모르고 마냥 행복해 보이는 웃음을 지었다.
“좋구나. 역시 아침엔 따뜻하고 달달한 걸 먹어야 그나마 기분이 풀리지.”
“아침에 퍽 유감이 많으신가 봅니다.”
“유감이 많지. 세상 사람 중 아침이란 놈에게 유감이 없는 사람은 없을 게다.”
출근, 등교, 숙취 등 아침이라는 놈이 선물하는 달갑지 않은 것들을 생각하면 속에서 천불이 끓지만, 이 달콤 고소한 두장은 아침이 저지른 패악질에 대한 성의 있는 변명이 되어주었다.
“그리고 여기에 기름지고 바삭한 것까지 더해진다면, 아침이란 놈과 화해의 악수를 나눌 수 있을지도 모르지. 어쩌면 말이다.”
태감의 말에 피식 웃은 소년은 기름 솥에 불을 올리고는 어젯밤 미리 해둔 반죽을 면 판에 올렸다.
“역시 두장에는 바삭하고 기름진 걸 찍어 먹어야 제맛이지요.”
한국인에겐 유타오(油條)라는 이름으로 유명한 유작귀(油炸鬼)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두장은 마치 밥과 김치처럼 너무나 당연한 조합이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자연스럽게 찾게 되는, 내일을 오늘이라는 어제의 연장선으로 이어주는 일상의 한 조각.
소년은 달아오른 기름 솥으로 직사각형의 길쭉한 반죽을 집어넣었다.
기름이 자글자글 끓어오르는 소리와 함께 튀겨지며 팽창한 반죽이 기름 위로 둥실 떠오른다.
두 뼘쯤 되는 길이의 통통하고 바삭바삭한 황금빛 유작귀 하나가 완성되는 것은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다 튀겨진 반죽은 그대로 기름 망 위에 올려 기름을 빼고, 그다음에-
“어떻게, 썰어서 넣어드릴까요? 아니면?”
가위를 찰캉거리는 소년을 보며 고민하던 태감은 말간 콩물을 한번 바라보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냥 그대로 다오. 첫입은 그대로 먹고 싶구나. 물론 유작귀를 두장에 촉촉하게 적셔 먹는 것도 나름의 풍미가 있지만.”
“갓 튀긴 유작귀의 바삭함을 굳이 축축하게 죽일 필요는 없지요.”
길쭉한 유작귀를 받아든 태감은 두장 한 모금을 입에 머금고는 유작귀 끄트머리를 베어 물었다.
바삭한 겉 부분이 바스러지며 씹히는 쫄깃한 속 부분, 기름지고 짭조름한 맛이 달큼한 두장과 섞여든다.
달착지근함과 짭짤한 맛, 콩의 고소함과 기름의 감칠맛. 두장의 따끈한 온기와 방금 튀겨낸 유작귀의 바삭함.
그 부드럽고 윤기 흐르는 한입으로 위장을 채우고 나서야 태감은 새로운 하루의 시작을 기쁜 마음으로 맞이할 수 있었다.
“허기는 좀 면하셨습니까?”
“그래, 좀 낫구나.”
빙그레 웃은 태감은 두 번째 유작귀와 두장을 받아들고는 가위로 유작귀를 송송 썰어 두장에 넣었다.
퐁당퐁당 소리를 내며 황금빛 유작귀가 두장에 빠진다.
설탕은 역시 두 숟갈. 바삭하고 기름진 반죽에 두장이 촉촉하게 배어들었을 때쯤 태감은 숟가락을 들었다.
후루룩 들이마시는 소리와 아궁이에서 불티가 튀어 오르는 소리. 그리고 기름 솥에서 반죽이 튀겨지는 소리.
홍문의 새벽은 작은 소음 속에서 담담히 흘러갔다.
호환이 해결된 지, 그리고 황제에게 서신을 보낸 지 닷새째 되던 날이었다.
“좋은 소식은 아직입니까.”
“좋은 소식? 경사에서 올 소식 말이냐.”
기름이 뜬 두장을 마시던 태감은 소년의 말에 잠시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성미 급한 아이를 타이르는 다정한 어조로 상황을 설명했다.
“너무 보채지 말아라. 이제 고작 닷새가 지나지 않았느냐.”
“경사가 멀기는 하지요.”
“그래. 준마로 밤낮없이 달려도 사흘은 걸릴 거리지. 그리고 황실의 일은 원래 느린 법이다.”
거쳐야 할 절차도 많고 과정도 복잡하지. 서신을 전달한 이의 신원 확인부터 서신의 필적 확인 등등을 다 거치고 나면 아마 일주일은 지나야 황제 폐하께 서신이 도착할걸?
태감의 말에 소년은 질린다는 표정으로 혀를 찼다.
“그럼 감찰관이 홍문에 오려면 한세월 걸리겠군요.”
“오히려 잘된 일이지. 우린 이제 곧 떠날 테니까.”
뒷정리는 감찰관에게 맡기고 마음 편히 여행이나 떠나자는 태감의 제안에 소년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옛말에 일 저지르는 놈 따로 있고 치우는 놈 따로 있다더니, 딱 그 꼴입니다그려.
한참 동안 키득댄 후, 소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밥상을 잘 차려 놓았으니 이제 떠먹기만 하면 될 일이지요. 밥상을 차리는 건 저희 일이었으니.”
“떠먹은 다음 설거지를 하는 것은 폐하께서 하셔야 할 일이지.”
정확히는 폐하께서 보내신 감찰관이 할 일이지요.
악동 같은 미소를 그리며 짓궂은 농을 태감과 나눈 소년은 잠시 그들의 뒷정리를 하게 될 감찰관에게 애도를 보내었다.
‘뉘실지는 모르겠지만, 잘 부탁합니다.’
훗날 만나게 되면 술이라도 한잔 사지요.
* * *
“태감님.”
“왜 그러느냐?.”
“감찰관이 오려면 한세월 걸린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소년의 말에 태감은 물끄러미 창밖을 바라보았다.
수양버들이 운치 있게 늘어진 소담한 정원.
그 시원한 그늘에서 숨돌리는 것은 풍류를 찾는 문인이 아니라 사납게 투레질하는 군마와 창칼을 꼬나쥐고 깃발을 휘날리는 무관들이었다.
어깨가 떡 벌어진 위풍당당한 사내들을 보며 소년은 한숨을 내쉬었다.
“비룡대군요.”
“그래. 비룡대구나. 비룡대가 왔어.”
황제의 친위대. 비룡대의 출전은 가벼이 다뤄지지 않는다. 오직 황제의 친정(親征), 혹은 그에 버금가는 일이 있을 때만 출전이 허가되는 것이 바로 비룡대였다.
그리고 비룡대의 대주는.
“악 대주. 오랜만에 보겠군요.”
금군 제일창(第一槍). 악진평이었다.
무리의 선두에서 창을 비스듬히 든 악진평의 얼굴을 확인한 소년은 우울한 표정으로 곱게 개어 처박아두었던 용포를 찾아다 걸쳤다.
이제 한동안은 어울리지도 않는 왕 노릇을 해야만 했다.
용포를 대충 걸친 소년이 찌뿌둥한 얼굴로 장원을 나서자 험악한 인상의 사내들이 황급히 말에서 내렸다.
그리고 소년이 지척에 다가왔을 때쯤, 선두에 선 악진평의 호령과 함께 일제히 절을 올렸다.
“비룡대 일동이 존귀하신 숙친왕 전하께 문후를 여쭙나이다.”
“커흠, 오랜만입니다. 비룡대주.”
건장한 사내들의 오체투지는 물리적인 압박감이 느껴질 만큼 부담스러운 것이었다.
살짝 기가 죽어 헛기침한 소년은 꿇어 엎드린 사내 중 유독 가냘픈 이를 발견하고는 입을 열었다.
“흠, 그대는?”
“도찰원의 감찰관 양문성(良文成)이 문후를 여쭙나이다.”
“난 무탈하네만, 자네는…….”
힘겹게 무릎걸음으로 다가온 사내를 본 소년은 안쓰럽다는 표정으로 그를 굽어보았다.
그의 벌어진 채 모이지 않는 허벅지는 그간의 가혹했던 여정을 증명하고 있었다.
분명, 밤잠 자지 않고 달려온 것이리라. 일생을 말 위에서 살아온 무관들이라면 모를까. 평소 책상 앞에서 붓이나 굴리던 문관에게는…….
“고생 많았소.”
“크흑…….”
허벅지가 짓물렀을 가엾은 감찰관의 어깨를 짚어준 후, 소년은 악진평을 돌아보았다.
소년은 그와 얼굴을 마주 보는 것이 무척 오랜만이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왕좌에 앉은 이래 서신으로 소식만 전했을 뿐, 바뀐 얼굴로 대면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잠시 그의 얼굴을 바라보던 소년은 떨리는 입술을 깨물고는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설마 이리 빨리 오실 거라고는 생각 못 했습니다. 늦어도 달은 넘겨야 도착할 줄 알았는데…….”
“사안이 사안인 만큼, 황실에서도 지급으로 일을 처리했습니다. 전하께서 서신을 보내신 당일 폐하께서 도찰원에 감찰관을 파견하라 명을 내리셨지요.”
도찰원이라면 부여비의 입김이 닿는 곳이니 그만큼 준비가 빨랐던 것이리라.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된 소년은 측은하다는 표정으로 감찰관 양문성을 보았다.
감찰관은 태수의 비리를 조사하고 도시를 정상화하는 큰 임무를 짊어지기엔 조금 연륜이 부족해 보였다.
이제 막 서른이나 되었을까. 어쩌면 스물 후반일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이런 큰 중책을 맡게 되었다면 이유는 보통 공적을 쌓기 위해 상부에서 밀어주는 인물이거나, 혹은.
‘기피 임무 짬 처리당했거나.’
앉지도 일어서지도 다리를 쭉 펴지도 못한 채 엉거주춤한 자세를 취하고 있는 감찰관을 보며 속으로 혀를 찬 소년은 수행원들을 불러 그에게 방을 내어주도록 명했다.
소도 지치면 여물을 쒀 먹이고 쉬게 하는 법이었다.
사흘 밤낮 말을 타고 달려온 이에게 벌써 일을 시키는 것은 사람의 도리가 아니었다.
“여정이 퍽 고되었나 봅니다.”
“감찰관께선 조금 힘들어하시더군요.”
“모두가 비룡대원 같을 수는 없지요.”
만약 그랬다면 진즉에 제국이 세계를 정복했을 겁니다.
싱거운 우스갯소리를 던진 소년은 감찰관이 어기적거리며 장원으로 들어설 때쯤 말을 이었다.
“비룡대가 출정했다는 것은, 저 감찰관에게 황제 폐하의 전권이 내려졌다고 봐야겠지요?”
악진평의 대답은 조금 늦게 돌아왔다.
황실에 충성을 맹세한 무관은 들고 있던 창을 수양버들에 기대 세운 후 공손히 손을 모으고 대답했다.
“예. 폐하께선 이번 호환을 해결하는 데 감찰관의 권한이 부족하여 수습이 부진하거나 미흡한 일이 없도록 하라 명하셨습니다.”
“그렇다면 향후 계획은 어찌 되는지 물어도 괜찮겠습니까?”
소년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악진평은 다부진 태도로 대답했다.
“우선은 홍문의 호환이 해결되었음을 경사와 하남에 알려 상인들의 발걸음이 다시 홍문으로 모일 수 있도록 유도할 생각입니다. 이는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해결될 일이지만, 빠르면 빠를수록 홍문의 백성들이 겪는 고통이 줄어들겠지요.”
“태수의 목을 효수해야겠군요.”
“앞으로 열흘 후면 태수를 참수할 참주가 홍문에 도착합니다. 그리고 그때까지 감찰관이 태수의 죄목을 낱낱이 밝힐 수 있도록 보호하는 것이 저희의 임무지요.”
궁지에 몰린 태수가 어떤 흉계를 꾸밀지 모르니 말입니다.
악진평의 설명을 들은 소년은 혹시 자신들이 이 도시에 남아 도와야 할 일이 있을지 질문하려 했다.
하지만 그들은 아직 수양버들 아래에 있었고 소년은 나무 그늘보다는 안락한 응접실이 대화를 나누기에 더 적합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소년은 겸연쩍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런, 먼 길 오신 대주께 아직 차 한잔 내드리지 못했군요. 괜찮으시다면 차 한잔 어떠십니까? 물론 달콤한 차 과자도 곁들여서.”
“하해와 같은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악진평의 거창한 감사 인사에 키득거리며 그를 장원 안으로 안내하려던 소년은 문득 태감의 존재를 떠올리고는 걸음을 멈추었다.
태감에게는 더 이상 가면이 없었다. 그렇기에 그의 맨얼굴을, 황제와 너무나 닮은 그의 맨얼굴을 숨길 수가 없었다.
식은땀으로 축축하게 젖은 뒷덜미를 한번 쓸어 만진 소년은 뻣뻣한 동작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그, 악 대주. 미안하지만 차는 별관에서…….”
“혹 진오운 황자님의 정체를 숨기기 위해 그러시는 거라면, 굳이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악진평의 담백한 대답에 멍청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던 소년은 김빠진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렇다면 악 대주께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