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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관의 요리사-222화 (222/314)

환관의 요리사 222화 외전 16화

인간은 결코 맹수와 공존할 수 없다.

갈고리발톱을 가진 것. 날카로운 송곳니를 가진 것, 날고기를 씹는 것. 낮이 아닌 밤에 사냥을 나서는 것들과 인간은 함께 살 수 없었다.

그렇기에 인간은 맹수를 피해 벽을 세웠고 맹수는 인간을 피해 숲에 숨었다.

그것이 불문율이었다. 인간과 맹수 간의.

소년은 호랑이를 내려다보았다.

집채만 하다는 말을 비유법이 아닌, 지극히 사실적 묘사로 이용해야 할 만큼 거대한 놈이었다.

폭풍 같은 숨을 몰아쉬어 풀잎을 움츠러들게 했을 거대한 아가리.

줄지어 선 송곳니는 가장 손이 큰 이가 한껏 벌려도 재지 못할 만큼 길었고 그 어떤 가죽도 자신의 내구성을 자랑하지 못할 만큼 날카로웠다.

그 긴 은빛 수염. 이마에 선명하게 드러난 무늬는 왕의 증명이었다.

산맥과 같은 장엄한 등허리와 담대한 어깨 아래론 가장 높은 산악의 정상을 밟고 올라섰을 다리가 있었다.

황금빛 털가죽에 검은색 줄무늬 아로새겨진, 하지만 그 발만큼은 하얀색이었다.

소년은 잠시 몸을 숙여 호랑이의 발을 들여다보았다.

안쪽으로 치명적인 다섯 자루의 비수를 숨긴 발.

그러나 그 비수를 세상에 드러내지 않은 것은 맹수의 사려 깊은 성품을 증명했다.

배고프지 않으면 사냥하지 않고, 위협받지 않으면 발톱을 드러내지 않는 짐승의 성품을.

“불문율을 깨뜨린 대가로군요.”

포효 한 번으로 산천초목을 떨게 했을 산의 제왕. 수백 명의 인간을 살해한 흉포한 짐승. 가죽을 잃은 새끼의 복수를 행한 어미.

소년은 그 어느 쪽도 호랑이에게 투영할 수 없었다.

그가 느끼는 느낌은 모두 호랑이의 일부분이었으며, 이제는 무가치한 것들이었기 때문이었다.

죽은 이후에는 모든 것이 무가치할 뿐이었다.

그렇기에 소년은 가만히 손을 들어 눈을 감지 못한 채 죽은 호랑이의 눈두덩이로 손을 가져갔다.

끝까지 도시가 있는 방향을 노려보며 숨을 거둔 맹수의 눈을 감긴 후, 일어선 소년은 고개를 돌려 단혜림을 돌아보았다.

외로운 검 한 자루로 믿을 수 없는 위업을 이뤄내었건만 여인의 표정은 건조하기만 했다.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했다는 자부심도, 강대한 맹수를 검 한 자루로 사냥했다는 무사의 희열도, 새끼 잃은 어미를 사냥했다는 자책감과 슬픔도 없이 그녀는 가만히 허리춤에 검을 비껴찬 채 호랑이를 보고만 있었다.

소년이 맹수의 눈을 감겨줄 때까지.

“수고했습니다.”

치하의 말치고는 담백했다. 하지만 소년은 그녀가 그 이상의 말을 원하지 않을 것을 알았기에 말을 아꼈다.

소년의 배려에 고개 숙여 감사를 표현 단혜림은 한참 후 입을 열었다.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더군.”

“호랑이가 말입니까.”

“만약 사냥이었다면 숨어서 습격했겠지. 타고난 사냥꾼이니. 하지만 그러지 않더군.”

단혜림은 이마에 달라붙은 앞머리가 거추장스럽다는 듯 이마를 쓸어넘겼다.

땀에 흙먼지가 말라붙은 이마에는 옅은 자상이 있었다.

단혜림은 상처를 싸맬 생각도 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내더군. 호랑이가 말일세. 그리고.”

내가 검을 뽑을 때까지 기다려 주었어.

이어진 단혜림의 말에 소년은 대꾸할 말을 찾을 수 없었다.

그는 도저히 호랑이의 의도가 무엇이었는지를 파악할 수 없었다.

새끼를 잃은 어미는 어째서 인간을 공격하고, 그러면서도 그녀가 검을 뽑을 때까지 기다렸을까.

복수에 지쳐서였을까.

거듭된 복수에 지쳐 결국 죽음을 기다리게 된 걸까.

자신의 최후를 장식할 적수로 그녀를 선택한 걸까.

새끼의 가죽을 찾지도, 가죽을 벗겨간 흉수를 찾지도 못한 채 무의미하게 반복되는 살육에 지쳐서였을까.

그래서 상념에 젖어 있던 소년은 가만히 숨을 몰아쉬고는 여인을 바라보았다.

“사람을 상대하는 것에 익숙하더군. 사람에 대해 잘 알고 있었어.”

“어째서였을까요.”

“글세, 어째서였을까.”

살아 있기에 나눌 수 있는, 시체의 생전 모습을 주제로 한 대화는 머지않아 끊어졌다.

간헐적으로 이어졌던 대화가 중단되자 잠시 고민하던 소년은 상황을 진전시켜야겠다고 판단했다.

고개를 단혜림에게 돌리지 않은 채 소년은 그녀에게 물었다.

“이제 어찌하시겠습니까.”

정적이 이어졌다. 침묵하는 그녀를 위해 소년은 몇 가지 선택지를 제시했다.

“가죽을 벗기시겠습니까? 승자의 권리지요. 가죽을 벗기고 취할 수 있는 것을 취하시겠습니까? 호랑이는 버릴 것이 없는 짐승입니다. 뼈, 송곳니와 발톱. 쓸개를 비롯한 장기. 피. 심지어 고기까지도 고가에 팔리지요.”

“전하께서는.”

원하시나.

담담한 어조로 내뱉어진 질문에 소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호랑이는 그녀의 사냥감이었다.

그는 남의 사냥감을 탐낼 만큼 염치없는 이가 아니었다.

“아니요. 당신의 사냥감이니, 당신이 좋을 대로 하십시오.”

“그럼, 그냥 묻어주고 싶네.”

“그렇습니까.”

소년은 군말 없이 그녀의 요청을 수락했다.

소년의 손짓에 뒤쪽에서 대기하고 있던 수행원들이 걸어 나왔다.

그들은 포대기와 톱, 칼 등 짐승의 해체와 운반에 필요한 도구는 모두 갖추고 있었지만, 삽은 가지고 있는 이가 없었다.

그렇기에 호랑이의 매장은 퍽 시간이 걸렸다.

산짐승이 파헤치지 않도록 구덩이를 깊게 파고, 호랑이를 묻은 후 땅을 메웠다.

사람의 것처럼 무덤을 봉긋하게 돋우거나 비석을 세우지는 않았다. 그저 평탄하게 땅을 다졌을 뿐.

“이제 남은 것은 시간이 해결해 주겠지요.”

“비가 내리면 풀이 자라겠지.”

“다시 찾아와도 기억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다시 찾을 일도 없겠지만…….”

“찾을 일이 있네.”

단혜림의 말에 소년은 의아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단혜림은 마치 주변 지형을 기억하려는 듯 근처의 큰 나무나 바위 등 특징적인 것들을 보고 있었다.

“언젠가, 다시 찾을 일이 있을 걸세. 복수는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

“사냥꾼들을 찾을 생각입니까.”

“기회가 닿아, 우연히 마주치게 된다면.”

“살인은 불법입니다. 단 호위.”

그래서, 말릴 텐가?

단혜림의 물음에 한숨을 내쉰 소년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전 못 도와드립니다. 절대로 길삼 그 양반에게 사냥꾼들의 용모파기를 부탁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절대로요. 그리고 설령 천운이 닿아 사냥꾼들과 마주친다 한들 단 호위가 그들을 공격하는 것을 용인하지도 않을 겁니다.”

“그래? 하지만 내가 개인적으로 시간을 내서 하는 일까지 상관하지는 않으시겠지?”

“물론 개인의 사생활까지 참견할 수는 없지요.”

소년의 방관적인 태도에 단혜림은 작게 미소 지었다. 그러고는 미련 없이 등을 돌려 산에서 내려가기 시작했다.

“배가 고프군. 혹시 장원에 먹을 것 좀 있는가?”

“예, 안 그래도 연회 상을 차려두었습니다. 어서 내려가시지요.”

* * *

주빈인 단혜림을 포함해 식탁에 둘러앉은 이들은 총 다섯.

소년은 주방을 바삐 드나들어야 했기에 실질적으로 식탁 앞에 모인 이들은 넷이었다.

단출한 인원이었지만 그들 앞에 차려진 음식은 연회라는 말이 아깝지 않을 만큼 풍성했다.

온갖 산해진미가 차려진 식탁.

그 한가운데에 놓인 탕관은 그 향이 새기라도 할까 젖은 종이로 엄중히 봉해져 있었다.

평소 입던 용포 대신 단정한 요리사 복장을 차려입은 소년이 주빈인 단혜림에게 시선을 보내었다.

소년과 눈이 마주친 그녀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식전주가 담긴 잔을 들어 올렸다.

“오늘 이 영광을 허락해 주신 숙친왕 전하께 감사드리며, 건배-”

짤막한 건배사가 끝나자 소년은 지체 없이 탕관을 봉한 종이에 칼을 가져갔다.

젖은 종이에 실금이 그어지고 뚜껑이 열리며, 안에 봉해져 있던 향기가 수증기를 타고 피어올랐다.

깊은 새벽 산자락에 깔린 안개처럼 농밀하고 한여름 밤의 백일몽처럼 아련한 향기.

단혜림은 코끝에 신경을 집중했다.

가장 처음 느껴지는 것은 공들여 달여낸 닭 육수의 진득함이었다.

뼈 안쪽에 들어찬 골수가 녹아 나오도록 긴 시간 은근한 불에서 달여낸 농후함, 하지만 기름진 육수 특유의 끈적임 없이 개운함이 느껴진다.

소년이 국자로 국물을 휘저을 때마다 향기가 상승기류를 타고 방안을 잠식했다.

진한 닭 육수 다음으로 찾아온 것은 그윽한 버섯 향기였다.

낙엽 쌓인 나무 밑동 아래. 이슬 젖은 이끼와 흙내음.

깊디깊은 대지의 향기에 침잠하던 그녀는 그 속에 스며있던 낯선 향기를 포착하고는 눈을 떴다.

닭과 버섯. 대지의 은혜로움 속에 녹아 있는 예상 밖의 잔향.

그것은 틀림없이.

“바다 내음이 나는군.”

“예리하시군요.”

“맞는가?”

“예. 오징어 알로 끓여낸 탕. 회오어단(烩烏魚蛋)이라 합니다. 달리 오어단탕(烏魚蛋湯)이라고도 하지요.”

첫입은 그대로. 두 번째는 적식초 조금을 곁들여서. 세 번째는 참기름을 살짝 둘러 드셔보십시오.

말을 마친 소년은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요리사의 일은 이걸로 끝이었다. 남은 것은 온전히 요리와 손님의 시간일 뿐.

과한 참견은 식사의 감동을 무디게 만들 뿐이었다.

“그럼, 맛있게 드십시오.”

그 말을 신호로 단혜림은 숟가락을 들었다.

흰 사기 숟가락이 비쳐 보이는 투명한 육수. 맑은 황금빛 육수에 담긴 오동통한 오징어 알.

그녀는 조심스럽게 그것을 입으로 가져갔다.

사기 숟가락 끝자락과 입술이 맞닿는 순간, 메마른 입술을 적시며 흘러들어온 뜨거운 액체는 그녀의 모든 감각을 일제히 일깨웠다.

사기 숟가락의 둔탁한 감촉마저도 소름 끼칠 만큼 예리하게 느껴졌다.

마치 온몸의 모공이 열린 것처럼, 혀끝의 모든 미뢰가 경련하는 것처럼. 예민해진 감각은 그녀를 감싼 모든 것을 더욱 날카롭게 받아들였다.

입안을 채우는 온기. 혀 위를 타고 흐르는 따스함이 혀 곳곳을 어루만진다.

간지럽히듯. 쓰다듬듯. 온기는 입안 전체를 데우고는 목 너머로 사르르 미끄러진다.

식도를 타고 흐른 황금빛 액체가 공허한 위장을 적신다.

긴 공복에 지쳐 굳은 위장을 일깨우는 한 모금의 따스함.

그 순간 그녀는 탄식과도 같은 숨을 내쉬었다.

“하아.”

“마음에 드십니까?”

“아직, 아직은 대답 못 하겠군. 아직 먹지 못한 게 남아 있어서.”

멋쩍은 웃음을 지는 단혜림은 숟가락에 남아 있었던 오징어 알을 삼켰다.

매끈한 감촉에 혀로 누르면 묘한 탄력이 있는 그것은 씹을 때마다 신선한 감칠맛으로 혀를 적셨다.

짭조름하면서도 어딘가 달착지근한, 원초적인 바다의 풍미.

그것이 산의. 땅의 감칠맛과 뒤섞인다.

잠시 후, 몸서리치는 전율에서 간신히 평정심을 회복한 단혜림은 식탁에 둘러앉은 이들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다른 이들은 여전히 전율에서 헤어나오질 못하고 있었다.

감상을 전할 사람이 오직 자신뿐이라는 것을 깨달은 단혜림은 난처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런 표현이 적절할지 모르겠지만, 살아 있음을 실감하게 되는 맛이었네.”

짧고 단조로웠지만, 그것은 무사가 전할 수 있는 최대의 극찬이었다.

의기양양한 웃음으로 화답한 소년은 식탁에 차려진 채 젓가락을 기다리고 있는 요리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직 남은 요리가 이리도 많은데, 설마 벌써 만족하신 건 아니시겠지요?”

“물론, 식사는 이제 시작 아닌가.”

어른 중지만 한 통통한 민물새우를 껍질째 튀겨 훈제한 고추와 함께 볶아낸 향랄하(香辣蝦), 속에 고기를 채워 달큼하게 졸인 두부 요리 동강양두부(東江釀豆腐), 꿀을 발라 구워 껍질이 설탕 과자처럼 바삭한 광동의 새끼돼지 통구이 고유저(烤乳猪), 시성(詩聖) 두보가 즐겼다는 잉어찜 오류어(五柳魚)에 전복을 통째로 쪄낸 배원각포어(扒原壳鮑魚)에 최마령(崔馬鈴) 등등. 먹어야 할 음식은 너무나 많았다.

갈피를 잡지 못하고 고민하는 단혜림은 그중에서도 향랄하를 골라 집어 들었다.

훈연하여 검게 그을린 고추가 들어간 향랄하는 입에 넣으면 그을린 고추의 향기가 콧속으로 훅 치고 올라왔고, 씹으면 민물새우의 얇고 아삭한 껍질 아래로 탱글탱글한 살점이 어금니를 튕겨 올렸다.

“아, 그러고 보니 식사는 밥으로 하시겠습니까? 아니면 면으로 하시겠습니까?”

“면으로 하면 뭐가 나오는가?”

“면을 고르시면 기름에 바삭하게 지진 면에 녹말가루로 걸쭉하게 한 해물 볶음을 올린 팔진초면(八珍炒面)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꼬들꼬들 바삭한 면에 온갖 해물이 푸짐하게 올라간 감칠맛 나는 볶음을 더하면…….”

“허어, 그럼 밥을 고르면 뭐가 준비되어 있지?”

“밥에는 야들야들하게 조려 젓가락으로 집어 들면 그대로 잘릴 만큼 부드럽게 조린 동파육을 곁들인 동파육 덮밥을 준비했습니다.”

단혜림의 선택은 역시나 동파육 덮밥이었고, 뒤를 이은 주문 또한 전부 동파육 덮밥이었다.

육식주의에 찌든 이들을 돌아보며 속으로 흉을 본 소년은 이내 쓴웃음을 짓고는 주방으로 향하기 위해 연회장을 나섰다.

연회장 문턱을 밟기 전, 돌아선 소년은 향랄하에서 전복으로 젓가락을 옮기고 있었던 단혜림을 보고는 속삭이듯 말했다.

“단 호위. 오늘 정말 수고 많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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