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관의 요리사 218화 외전 12화
성큼 찾아온 밤하늘이 황혼을 지평선 아래로 내리누르는 늦은 저녁, 장원을 대여하여 여장을 푼 일행은 여독을 풀기도 전에 장원의 응접실 탁자에 둘러앉았다.
장원을 선택하는 조건으로 금액을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인지 장원의 시설은 퍽 훌륭했다.
우아한 자단목 탁자에 둘러앉아 차를 홀짝이던 소년은 화두가 던져지기만을 기다리는 일행의 시선에 한숨을 내쉬며 말을 골라 입을 열었다.
“여러분께서도 도시의 분위기를 보고 미루어 짐작하셨겠지만, 현재 홍문의 사정이 그리 좋지만은 않습니다. 하남으로 통하는 길목인 홍문산에 자리 잡은 호랑이 때문이지요.”
얼마 전부터 홍문산에 자리 잡은 호랑이가 사람을 닥치는 대로 습격하여 피해가 극심하다 합니다.
그 때문에 상인들의 발걸음이 끊기고 시민들이 다른 도시로 떠나니 결과적으로 도시 전체가 고사할 위기에 처하게 된 것이지요.
말끝을 흐린 소년의 시선이 잠시 태감에게 머물렀다. 그를 바라보던 소년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을 이었다.
“물론 저희는 단순히 이 도시를 거쳐 지나가는 길손일 뿐입니다. 같은 제국인 이라는 포괄적인 공통점을 제외하면 이 도시와는 그 어떠한 연관도 없는 이들이지요. 하남 방면의 길목에서 호랑이가 출몰한다면 다른 길을 택하여 떠나면 될 일입니다만.”
어느새 소년의 시선은 단혜림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팔짱을 낀 채 생각에 잠겨 있던 단혜림은 뒤늦게 시선을 눈치채고는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그리 애타게 볼 필요 없네. 어려움에 빠진 백성들을 두고 귀찮은 일에 연루되기 싫으니 피해가자 할 만큼 후안무치한 사람은 아니니.”
“감사드립니다, 단 호위.”
“모시는 주인의 뜻에 따르는 일이 감사받을 만한 일은 아니지 않은가.”
소년은 그제야 안심이 된다는 듯 숨을 몰아쉬었다.
어찌 되었든, 머리를 쓸 사람은 하나보단 둘이 더 나은 것이다. 그리고 소년은 자신이 머리를 굴릴 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기뻐하던 소년은 문득 생각났다는 듯 한마디를 덧붙였다.
“호환(虎患)이라니, 솔직히 믿을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궁벽한 산골의 촌락도 아니고, 홍문처럼 융성한 도시가 호환으로 망한다니.”
소년의 말을 거들듯 태감과 단혜림은 각자 자신이 고민하고 있던 바를 꺼내기 시작했다.
“확실히, 민간에서 대처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응당 도시를 다스리는 태수가 나섰을 텐데도…….”
“그렇다면 가정은 두 가지가 되겠구려. 첫 번째, 태수가 나설 수 없는 상황에 빠졌든가. 두 번째, 태수가 나서지 않는 상황이든가.”
태감과 단혜림, 한때 후궁을 양분했었던 두 권력자가 머리를 맞대니 이보다 더 든든할 수 없었다.
정수리에서 김을 피워올릴 만큼 골몰하는 둘을 본 소년은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나 뒤로 빠져나왔다.
소년이 빠져나오자 천덕꾸러기마냥 오도카니 앉아 있던 이삼과 장소도 뒤따라 나왔다.
“저, 이렇게 두 분에게만 맡겨도 되는 걸까요?”
“허허, 장소야. 내 누누이 말하지 않았느냐?. 머리 쓰는 건 머리 쓸 줄 아는 인간들한테 맡겨야 하는 법이다. 우리 같은 놈들이 괜히 굴러가지도 않는 머리 억지로 굴려봐야 실속 없이 머리만 아파요.”
연륜에서 우러나온 깊이 있는 지혜에 탄복한 장소와 이삼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저는 머리 쓰는 일보다 몸 쓰는 일이 더 적성에 맞는 것 같아요!”
“그래그래. 사람이 적성에 맞는 일을 하는 게 제일 중요하단다.”
“그럼 할아버지, 저흰 그동안 뭘 하고 있을까요?”
“우리도 우리 나름대로 고민할 거리가 있단다.”
고민거리가 있다는 소년의 말에 아이들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벌써부터 어려워하는 기색이 역력한 아이들의 시선에 소년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우린 그동안 저녁에 뭐 먹을지 고민해 보자꾸나.”
“휴우, 다행이다.”
“어허, 요 녀석들. 벌써부터 안도하면 안 되지. 자 그럼, 여기서 문제 하나 내볼까?”
헛기침으로 목소리를 다잡은 소년은 엄숙한 표정으로 아이들에게 문제를 내었다.
“너희들도 알겠지만, 현재 홍문은 호환을 당하여 도시 전체가 침체 되어 있는 상황이란다. 상인들이 오지 않으니 물류가 멈추어 신선한 식재료를 구하기 무척 어려운 상황이지. 이런 상황에 오늘 저녁상에 올려야 할 식재료로 가장 적합한 것은 무엇일까?”
소년은 문제에 이미 답을 다 적어주었다며 속으로 자책했다. 그리고 소년의 예상대로 아이들은 답을 추론해 내고는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닭이요!”
“그렇게 생각한 이유는?”
소년이 심술궂은 미소를 지으며 이유를 묻자 거기까지는 준비하지 못했던 아이들은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어, 그러니까…… 물류가 멈춰서 신선한 식재료를 구하기 어려우니까, 물가가 없는 홍문에서 나지 않는 생선류는 애초에 쓰지 못할 것 같았어요.”
“그래서 주변에서 구할 수 있는 가축 중에, 소나 돼지는 호랑이가 노릴 만한 큰 먹이니까 호환을 당한 도시 사람들이 일찍 처분했을 것 같아서, 그래서 닭을 골랐어요.”
요것들 제법인데?
사뭇 놀랍다는 표정으로 아이들을 돌아본 소년은 이내 푸근한 미소를 띠고는 새로운 질문을 던졌다.
“하지만 여기서 만족하면 안 되지. 진짜 일류라면 식재료뿐만 아니라 그 식재료로 어떤 요리를 할지도 제시해야 하지 않겠니?”
소년이 넌지시 제안한 저녁 메뉴 결정권은 아이들을 더 큰 혼란에 빠뜨렸다.
삶고 굽고 튀기고 찌고 졸이고 볶고 심지어 절이기까지. 세계 온갖 곳에서 온갖 방법으로 요리해 먹는 수많은 닭고기 요리 중 하나를 고르란 것은 대단히 매력적이었지만, 그렇기에 더욱더 하나를 선택할 수 없는 난처한 문제였다.
약한 불에서 온갖 약재를 넣고 뭉근하게 끓일 것인가. 아니면 껍질이 먹음직스러운 갈색이 돌도록 튀길 것인가. 달착지근한 간장양념에 진득하게 졸이는 건 어떨까.
아니면 알싸한 고추와 함께 물기 없이 바짝 볶는 것 또한 훌륭한 것이다.
결정 장애에 빠진 아이들을 보며 웃음 짓던 소년은 더는 저녁준비를 미룰 수 없을 때쯤 넌지시 답을 골라주었다.
“정 고르기 어려우면. 그래, 구이는 어떠니?”
“구이요?”
“껍질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하게 익은, 후추의 매콤함이 살짝 돋보이는 닭고기구이 말이다.”
마치 악마의 속삭임처럼 감미로운 소년의 설명에 깊은 감명을 받은 장소와 이삼은 가장 신속한 동작으로 소년의 제안에 동의했다.
* * *
소년이 만들기로 한 요리는 고법염국계(古法鹽焗鷄)라는 요리로 이를 직역하자면 옛 방식의 소금에 찜구이한 닭요리라는 뜻이었다.
그 이름답게 염국계는 소금 더미에 닭을 묻어 익히는 요리였는데 조리법이 까다롭고 만드는 시간이 오래 걸리지만, 그 특유의 조리법 때문에 은은하게 배어든 소금기가 고급스러운 감칠맛을 내기로 유명한 요리였다.
소년은 우선 깃털을 뽑고 내장을 제거한 닭을 도마 위에 올렸다.
품종은 기름이 노랗고 살이 차지기로 유명한 삼황닭. 너무 크지 않은 중간 크기였다.
“염국계는 소금 더미에 묻어 익히는 만큼 간을 거의 하지 않는단다. 간장을 쓰기는 하지만 간을 한다는 의미보다는 색을 낸다는 의미가 더 강하지.”
우선은 팔각과 생강, 통후추, 장미꽃으로 담근 장미술과 간장을 섞은 조미액에 닭을 재워준 다음 찜통에 넣고 닭의 뱃속까지 더운 김을 쐬어준다.
이는 양념이 잘 배어들게 해 감칠맛을 더하기 위함이었다.
찜솥에서 꺼낸 닭은 차게 식힌 다음 겉에 진한 간장을 발라 색을 내준다.
“다음에는 간장이 마르도록 서너 시간을 자연건조 해줘야 하지만, 오늘은 바쁘니 속성법을 써야겠구나.”
“속성법이요?”
소년은 말없이 장소와 이삼에게 큰 부채를 내밀었다.
멍하니 부채를 받아든 아이들은 허망한 눈동자로 부채와 소년을 번갈아 보았다.
“빨리 먹고 싶지?”
“네…….”
“그럼 열심히 부쳐야겠구나.”
그렇게 이삼과 장소의 노력으로 한 시간여 만에 닭이 준비되었다.
얼룩 없이 매끈한 껍질을 살펴본 소년이 합격점을 주자 아이들은 맹렬한 운동으로 놀란 근육을 주무르며 얼싸안았다.
“자, 이제 소금에 파묻을 준비를 해야겠구나.”
본래 레시피에선 기름칠한 종이로 단단히 감싸 익히는데 소년은 기름종이 대신 돼지의 대망을 이용하기를 즐겼다.
희끄무레한 그물망 같은 것이 도마 위에 오르자 놀란 아이들이 호기심으로 눈을 빛내며 소년에게 물었다.
“이건……?”
“돼지의 대망이란다. 대망이란 내장을 감싸고 있는 지방막을 말하는 것이지. 얇지만 무척 질겨서 다진 재료를 감싸 모양을 잡아 주거나 기름기가 적은 담백한 고기에 기름진 맛을 더해줄 때도 자주 이용한단다.”
프랑스에선 크레핀(CRÉPINE)이라 부르는 대망은 주로 중식보다는 양식에 사용되었다.
그중에서도 프렌치 쉐프들이 즐겨 쓰는 재료로, 대망을 이용한 염국계는 소년의 오리지널 레시피였다.
‘이것도 알려주고 왔어야 했는데. 이깟 게 뭐가 대단한 비밀이라고 바리바리 싸 들고 죽었나 몰라.’
선배 노릇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죽은 전생을 떠올리며 후회를 곱씹던 소년은 미끌미끌한 대망을 만져보며 깔깔거리는 아이들을 보고는 아쉬움을 달랠 수 있었다.
그래도 이번 생에는 레시피를 이어 받아줄 제자들이 있으니 그의 레시피 또한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리라.
피식 웃음 지은 소년은 닭을 대망으로 잘 감싼 다음 뜨겁게 달군 굵은 소금을 채운 단지에 묻어 그대로 화덕으로 가져갔다.
그렇게 화덕 앞에서 한 시간가량이 지나자 소년은 가마에서 누렇게 그을린 소금 덩어리를 끄집어냈다.
그을린 소금의 독특한 냄새가 주방 안에 피어올랐다.
“염국계는 완성되었다 해서 곧바로 닭을 꺼내면 안 된단다. 그러면 육즙이 빠져 푸석푸석해지기에 십상이거든.”
한 김 식을 때까지 기다린 후 소금 덩어리가 적당히 식어 손으로 만질 수 있을 정도가 되면 통째로 접시에 올려 상에 낸다.
요리사가 직접 소금 덩이를 깨고 안에서 닭을 꺼내 손질하는 퍼포먼스까지가 요리 일부였다.
어느덧 하늘에는 별이 빛나는 완연한 밤이 찾아와 있었다.
저녁 식사라기보다는 야식이라 부르는 것이 더 적절할지도 모르겠다며 걸음을 재촉하던 소년은 응접실 바깥까지 울리는 둘의 목소리에 걸음을 멈췄다.
거의 고함에 가까운 언쟁. 첨예하게 대립하는 둘에게선 단 한 치도 양보할 수 없다는 강렬한 신념이 느껴졌다.
한때 권력을 두고 대립하던 시절의 기억이 되살아나기라도 한 걸까.
그렇다면? 불길한 예감이 든 소년은 거의 문을 걷어차듯이 열어 저치고는 언쟁의 틈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거 참, 식사 시간에 왜들 목소리를 높이고 그러십니까.”
“커흠, 좀처럼 이견이 좁혀지질 않다 보니…….”
“오랜만에 예전 후궁 생각이 나서 그런지 나도 모르게 언성을 높이고 말았구려.”
멋쩍어하는 둘을 보며 목덜미를 쓰다듬은 소년은 어설프게 꾸며낸 미소를 띠고는 일부러 소리가 나게 염국계를 상에 올렸다.
상다리가 떨릴 만큼 육중한 울림에 서로를 마주 보던 태감과 단혜림의 눈길이 아래로 쏠렸다.
“이건 염국계가 아니냐. 손이 많이 가는 요리일 텐데.”
“공이 드는 만큼 맛도 좋지요.”
칼자루 뭉툭한 부분으로 소금을 깬 소년은 그 안에서 대망에 싸여 있는 닭을 발굴해 냈다.
대망의 기름기가 녹아 나오며 튀겨지듯 익은 노릇한 색의 껍질.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근사한 닭 한 마리가 모습을 드러내자 태감과 단혜림은 조금 전 다투었던 것도 잊었는지 군침을 삼키며 소년의 칼끝에만 정신을 집중했다.
척추를 따라 반으로 가르고, 날개와 다리를 분리한다.
크지 않은 닭이기 때문에 뼈째 그대로 썰어 접시에 담고, 특별한 양념장 없이 그대로 상에 올린다.
소년이 소금 더미에서 한창 두 번째 닭을 발굴 중이었기에 젓가락을 든 이는 태감과 단혜림 둘 뿐이었다.
“먼저 드시오, 태감.”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단혜림의 배려에 먼저 좋아하는 부위를 집어 들 수 있게 된 태감은 고민 끝에 살점이 실팍하게 붙은 가슴살을 집어 들었다.
껍질이 가장 도톰하게 붙은 부위. 결대로 찢어지는 희고 보드라운 살점.
너무 급하지 않게. 만드는 데 공이 드는 요리인 만큼 한 점 한점 신중하게.
그 처음의 다짐은 고작 첫입 만에 흔적도 없이 무너지고야 말았다.
“절묘하구나, 참으로 절묘한 간이야.”
“대망에 싸서 굽는 과정에서 소금이 기름에 녹아 닭에 고루 배어들지요. 골고루 간이 잘 배어 있지요?”
너무 과함도, 모자람도 없이 중도를 지키는 절묘한 소금의 짠맛은 지금껏 모르고 있었던 기름의 달콤함을 부각시켰다.
닭의 기름이란 이토록 달콤한 것이었던가. 이토록 달고, 향기롭고, 그윽하고, 진했던가.
살코기의 육즙과 껍질의 지방이 스며든 감칠맛이 혀 밑에 고여 태감은 입을 열 수조차 없었다.
말없이 입술을 달싹이기만 하는 태감과 단혜림을 번갈아 본 소년은 쓴웃음을 지으며 자신의 입에도 닭고기 한 점을 집어넣었다. 부위는 다리 살이었다.
탄력 있게 씹히는 오동통한 살점, 은근한 소금 간. 훌륭한 밥반찬이자 최고의 술안주로 손꼽히는 염국계는, 결코 양보할 수 없는 신념을 건 언쟁도 잠시 멈추고 맛볼 만한 가치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