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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관의 요리사-217화 (217/314)

환관의 요리사 217화 외전 11화

창백한 달빛이 드리운 한밤중의 묘지. 음습한 정적만이 감도는 망자의 쉼터로 한 여인이 들어섰다. 그녀는 낫을 움켜쥐고 있었다.

여인은 당장에라도 흐느낄 듯 겁에 질려 있었지만, 발걸음을 돌리거나 그대로 주저앉지는 않았다.

불안감에 입술을 깨문 채 묘지 안으로 향한 여인은 묘지의 가장 바깥쪽에 새로 만들어진 무덤을 찾은 후, 가져온 낫을 들어 무덤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여인에게는 절박한 사정이 있었다. 설령 무덤을 파헤쳐 고인을 모독한다는 천벌을 받아 마땅할 죄를 짓게 되더라도 멈출 수 없는 사정이.

그녀에게는 병석에 누운 지 여러 해인 남편이 있었다. 좋다는 약도 먹여보고 용하다는 의원도 모셔 봤지만, 여인의 남편은 하루가 다르게 여위어 갈 뿐이었다.

남편의 뺨이 여위어갈수록 눈에 띄게 짙어지는 죽음의 그림자는 여인에게 극단적인 선택을 강요했다.

그것이 설령 장사를 지낸 지 삼 일이 지나지 않은 시체의 다리를 잘라 고아 먹이라는 미치광이 도사의 헛소리일지라도.

여인에게는 더 이상 방도가 없었다.

흙더미를 걷어내고 땅을 파헤치자 그 안에서 거적때기에 쌓인 시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여인이 조심스럽게 거적을 치우자 그 안에서 차갑게 굳은 시체가 보였다.

아직 썩지도, 구더기가 꼬이지도 않은 시체의 모습에 안도의 한숨을 내쉰 여인은 이내 모진 결심을 하고는 낫을 들어 올렸다.

끔찍한 감촉과 양심의 가책을 견뎌낸 끝에 간신히 잘라낸 다리를 품에 안아 든 여인이 몸을 일으켜 세운 순간. 시체 또한 여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내 다리 내놔!”

“히이이이이익!”

화들짝 놀란 장소가 앉은 채로 펄쩍 뛰어오르는 것을 본 소년은 그만 웃음을 터뜨리고야 말았다.

요 녀석, 오늘 밤은 볼일 볼 때 혼자서는 못 가겠는 걸.

오들오들 떠는 장소를 보며 껄껄 웃던 소년은 자신에게 모인 청중의 시선을 느끼고는 멋쩍게 헛기침하며 말했다.

“커흠, 아직 이야기가 끝나지 않았지요?”

“하필 가장 중요한 대목에서 끊겼구나.”

“몰입이 깨지면 흥미도 사그라드는 법이지요. 그럼 지금 이야기는 결말만 짧게 말하고 다음 이야기로 넘어갈까요?”

김이 샜다는 듯 샐쭉한 표정으로 투덜거리는 태감을 본 소년은 마차 안의 일행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아직 공포의 여운이 가시지 않은 듯 한껏 움츠러든 장소를 제외한 나머지 일행은 다음 이야기로 넘어가자는 소년의 제안에 동의했다.

소년은 쓴웃음을 지으며 간추린 줄거리를 사무적인 어조로 이야기했다.

“짧게 줄거리만 말하자면, 내 다리 내놔 하고 벌떡 일어선 시체에서 도망친 여인이 집으로 돌아와 서둘러 솥에 다리를 삶자 다리가 글쎄…… 산삼 뿌리인 것 아니겠습니까? 놀란 여인이 다시 묘지에 가보니 시체는 온데간데없고 뿌리가 잘린 산삼만 덩그러니 놓여 있더라. 이 이야기는 이렇게 끝입니다.”

“아쉽구나. 중간까지는 참 흥미진진했는데.”

“히잉, 진짜 무서웠어요.”

울먹이는 장소의 어깨에 손을 얹고 다독인 소년은 앞으로 무서운 이야기는 하지 않겠다고 새끼손가락을 걸고 약속한 후에야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설마 동창 출신의 호위무사가 이렇게나 귀신에 약할 줄이야.

괜스레 전 동창 제독이었던 태감을 노려본 소년은 분위기를 전환하기 위해서라도 빨리 점심부터 먹어야겠다는 생각에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소년이 고개를 내밀자 말을 타고 마차와 나란히 달리고 있었던 호위무사가 말을 마차 쪽으로 몰아 다가왔다.

“전하, 부르셨습니까.”

“오늘은 좀 일찍 점심을 먹을 생각이니 잠깐 쉬어가세나.”

“예 전하. 후열에도 전달하겠습니다.”

잠시 후 마차가 멈춰 섰고 뒤이어 뒤따르던 수행원들이 재빨리 천막을 치기 시작했다.

소년은 수행원들이 모닥불을 피우고 걸대에 솥을 걸 때쯤 마차에서 내려 땅을 밟았다.

장장 몇 시간 만에 디뎌보는 단단한 대지의 안정감에 감격한 소년은 한참 후에야 아직 눈가가 빨간 장소에게 무엇이 먹고 싶은지를 물을 수 있었다.

“우리 장소 뭐 먹고 싶니? 어이구 녀석 눈 빨개진 거 봐.”

귀신 이야기가 그리 무서웠어? 응?

마치 놀란 손주 달래듯 달래는 소년에게 뾰로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팩 돌린 장소는 옆구리를 콕콕 찌르는 소년의 질문에 결국 입을 열고야 말았다.

“매운 거요…….”

“그래. 매운 거로 하자꾸나. 장소가 먹고 싶다는데.”

장소가 마차로 돌아가자 이번엔 태감이 나와 도마 위를 기웃거렸다.

훈제한 돼지 귀와 풋고추 등 간소한 식재료를 본 태감은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어떤 음식으로 장소를 달래줄 생각이냐?”

“매운 게 먹고 싶다길래, 청초납육(青椒臘肉)을 만들 생각입니다.”

“호오, 청초납육이라면 호남의 훈제육 볶음이 아니냐. 돼지 귀로 만든다는 소리는 처음 듣는데.”

“보통 돼지 귀는 볶음요리보다는 데쳐서 간장과 지마장(芝麻醬)에 무쳐 먹는 경우가 많지요. 하지만 볶아서 드셔보시면 무침과는 또 다른 독특한 별미가 됩니다.”

청초납육은 들어가는 재료만큼이나 만드는 법 또한 간단했다.

기름을 넉넉하게 두른 철과에 편으로 썬 마늘과 파를 넣고 향을 우려낸 다음, 채 썬 훈제 돼지 귀와 돼지 귀와 같은 굵기로 썬 고추를 넣고 볶아주다가 조리용 술과 간장으로 간하면 끝.

하지만 간단하기에 그만큼 요리사의 솜씨가 중요한 요리이기도 했다.

“청초납육의 핵심은 무엇보다도 식감에 있지요. 꼬들꼬들하면서도 껍데기 부분이 튀겨지듯 익어 바삭한 돼지 귀와 아삭아삭한 풋고추의 식감.”

돼지 귀는 저온에서 넣고 익히기 시작해서 서서히 기름 온도를 높여가며 튀겨야 바삭한 느낌이 살고, 반대로 고추는 센 불에서 단시간에 익혀야 아삭한 식감이 산다.

그 두 가지를 모두 잡을 수 있어야 제대로 된 청초납육이 완성되는 것이다.

넉넉하게 만든 청초납육은 수행원들도 맛을 볼 수 있을 만큼 푸짐했다.

각자 끼리끼리 모여 식사를 준비하던 수행원들에게도 한 접시씩 나눠준 후, 소년은 청초납육과 고슬고슬한 쌀밥으로 소박한 점심상을 차려냈다.

식사 맛있게 하라는 상투적인 인사말을 신호로 식탁에 둘러앉은 모두가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실처럼 가늘게 썰려 있었기에 청초납육은 볶음요리라기보다는 면을 집어 든다는 느낌으로 욕심껏 집을 수 있었다.

한 움큼 집어 든 볶음을 밥과 함께 욱여넣기에 바빠 식탁 위에선 그 흔한 맛있다는 한마디가 오가질 앉았다.

오돌오돌한 연골과 겉은 바삭하면서 안쪽으로는 쫀득한 식감이 살아 있는 껍데기, 물기 많은 고추의 신선한 식감.

반고리관 깊숙이서 올리는 오도독 아삭 소리가 흐릿해질 때쯤 풋고추의 산뜻한 매운맛이 코끝을 톡 치고 올라왔다.

밥공기가 반쯤 비고 그만큼 위장이 차오르자 비로소 주위를 돌아볼 여유가 생겼다.

풋고추의 매콤함으로 벌겋게 달아오른 면면들을 훑어본 소년은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장소에게 물었다.

“장소야, 밥 좀 더 먹겠니?”

“네! 더 주세요!”

해맑은 장소의 대답과 함께 뒤따른 열화와 같은 추가요청에 등 떠밀린 소년은 툴툴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여간 더 먹을 거면 진작에 솥에 가서 한술 떠오면 될 것을.

솥뚜껑을 연 소년은 주걱으로 박박 긁어 세 공기의 흰밥과 두 공기의 누룽지 밥을 퍼냈다. 이 경우, 더 인기 있는 것은 누룽지 밥이었다.

‘왠지는 모르겠지만 누룽지 밥은 그냥 쌀밥보다 조금 더 특별하게 느껴진단 말이지.’

은근슬쩍 누룽지 밥을 장소 쪽으로 밀어준 소년은 모른 척 남은 한 공기도 자신이 챙기고는 재빨리 입으로 가져갔다.

꾸덕꾸덕하게 눌어붙어 씹을수록 고소한 누룽지와 얼얼한 청초납육은 서로 다른 식감이기에 안 어울릴 것 같으면서도 어금니 사이에서 묘한 화합을 이루었다.

밥상 위에서 일어난 작은 편애를 아는지 모르는지 태감은 부른 배를 두드리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지금껏 돼지 귀는 냉채로나 즐길 줄 알았지, 이렇게 볶아먹어도 되는 줄 처음 알았구나. 진작 알았으면 더 친하게 지냈을 것을. 그동안 돼지 귀의 진가를 알아보지 못한 내 눈이 옹이구멍이었구나.”

“좋은 친구는 그저 만났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사한 일이지요. 마음에 드신다니 가끔 상에 올리겠습니다.”

“가능하다면 내일 또 보고 싶구나.”

태감의 너스레에 코웃음 친 소년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도시에 들러 식재료를 보충해야 했으니 원하신다면야 얼마든지 해드리지요.”

* * *

이튿날. 소년의 일행이 도착한 곳은 경사와 하남성(河南省)의 경계에 위치한 홍문(虹門)이라는 도시였다.

홍문은 예부터 경사와 하남을 오가는 상인들이 끊이질 않기로 유명한 곳으로 오가는 상인들을 상대하다 보니 숙박업과 요식업이 발달한 것이 특징이었다는 것이 태감의 설명이었으나, 실제로 소년의 눈에 들어온 홍문의 모습은 사람의 왕래가 끊어져 도시 전체가 활력을 잃어버린 한촌의 모습이었다.

“태감님. 혹시 다른 곳과 착각하신 것은 아니겠지요?”

“착각했을 리가 있겠느냐?. 세상에 홍문이라는 이름은 경사와 하남의 사이에 있는 도시는 이곳 하나인데.”

“분명 경사와 하남을 오가는 상인들로 발 디딜 틈 없이 북적거리는 동네라 하셨던 것 같은데요.”

발 디딜 틈 없기는커녕 너무 한적에서 굴러다녀도 되겠습니다.

태감에게 핀잔을 준 소년은 시장통을 오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살펴보고는 해괴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참 별 이상한 일 다 보겠군요.”

“무엇이 말이냐.”

“보십시오. 단순히 사람 발길이 끊어져 침체된 분위기가 아닙니다. 이건 마치…….”

줄초상이라도 난 것 같지 않습니까.

무심코 그 말을 입에 담은 소년은 자기 자신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 태감을 올려다보았다.

태감은 사람을 재고 가늠하는 정치가의 눈으로 사람들을 세심하게 관찰한 다음, 이내 소년의 의문에 확답을 내려주었다.

“네 말이 옳다. 사람들의 얼굴에 드리운 근심이 보통 짙은 것이 아니로구나.”

소년과 태감은 대로변 한가운데에 우두커니 선 채로 뜨문뜨문 돌아다니는 사람들의 안색을 낱낱이 살폈다.

대낮에 대로변 한가운데를 가로막고 서 있는데도 비키라는 욕설, 고함 등의 신경질적인 반응이 날아오는 일은 없었다.

“시장으로 통하는 대로인데도 물건을 실은 수레는커녕 오가는 사람조차 찾기 힘드니,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설령 어떤 사연이 있어 상인들의 왕래가 끊겼다 해도 이렇게까지 무너질 곳이 아닌데. 도대체 어찌 된 영문인지 모르겠구나.”

“그래서, 하실 겁니까?”

다짜고짜 툭 던져진 소년의 질문에 태감은 빙그레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글쎄다. 비록 은퇴했다고는 하나 한때 공직에 몸담았던 몸으로서 사태가 이리 심각한데 그냥 모른 척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만.”

어찌 숙친왕 전하께 양해도 구하지 않고 내 멋대로 독단전행(獨斷專行) 할 수 있겠느냐?

태감의 능청스러운 대답에 소년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혀를 찼다.

“그러니까, 책임은 제가 져라. 이 말씀이시군요?”

“크흠. 뭐, 꼭 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니었지만.”

일그러진 소년의 시선에 괜한 딴청을 피우며 시선을 돌린 태감은 안타깝다는 듯 탄식을 내뱉었다.

“세상에, 한때는 하남과 경사의 모든 부가 이 길을 타고 흐른다며 금원로(金洹路)라고도 불릴 만큼 융성했던 도시가 어찌 이리되었는지. 참으로 안타깝구나.”

“정치가 놈이랑 대화하는 건 눈감고 코 베어 가라고 칼 쥐여주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하더니, 사람 하나 쌍놈 새끼 만드는 건 아주 순식간이군요.”

씹어 뱉듯이 내뱉은 소년은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소년에게서 허락을 얻어낸 태감은 배시시 미소 짓고는 본격적으로 행동에 들어갔다.

“잠시 말씀 좀 여쭙겠습니다. 어르신.”

“뉘……시오? 이 마을에서 본 얼굴은 아닌 것 같은데…….”

태감에게 붙잡힌 중년인은 태감의 미모에 잠시 말문이 막힌 듯 말끝을 흐렸다.

위아래로 훑어보는 중년인의 시선에도 태감은 생긋 웃으며 살갑게 말을 붙였다.

“하남과 경사 사이에 홍문이라는 도시가 크게 번성하였다 하여 소문을 듣고 찾아온 여행객인데, 도시의 분위기가 좋지 않아 어찌 된 영문인지 궁금하여…….”

“여행객? 여행객이라고?”

중년인의 반응은 괴이한 것이었다. 마치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소스라치게 놀란 중년인은 태감과 소년을 번갈아 보며 물었다.

“설마 하남 방면에서 온 것은 아닐 테고, 경사 방면의 길로 온 거요?”

“예? 예, 경사 쪽에서 통하는 길을 따라 내려왔습니다.”

“어쩐지, 그래서 화를 피하셨던 게로군. 아직도 홍문 소식을 못 들은 걸 보면 퍽 멀리서 오셨나 보오.”

안타깝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은 중년인은 이내 우울함과 피로에 찌든 표정으로 손을 내저었다.

“봤으니 알겠지만, 홍문은 완전히 망했소. 유람을 온 여행객인지 아니면 장사 자리 알아보러 온 장사치인지는 모르겠지만, 왔던 길 그대로 돌아가시오. 절대 하남 쪽으로는 가지 말고.”

“예? 어째서 하남은…….”

태감의 거듭된 질문에 입술을 깨문 중년인은 이내 쓰디쓴 숨을 내쉬고는 선선히 답을 알려주었다.

“호랑이 때문이오. 호랑이. 홍문은 호환(虎患)으로 망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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