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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관의 요리사-216화 (216/314)

환관의 요리사 216화 외전 10화

부지깽이를 꽂아도 싹이 난다는 청명(淸明)의 아침 하늘은 발걸음을 떼지 못하고 미적거리기만 하는 여행자의 등을 떠밀 듯 쾌청하기만 했다.

귓바퀴 간질이는 산들바람을 길동무 삼아, 봇짐 하나 짊어지고 어디론가 떠나고 싶을 만큼.

낮에는 흐르는 구름 따라 걸음 닫는 대로 정처 없이 걷고, 밤이면 풀잎을 침대 삼아 별의 융단을 덮고 잠드는. 소년이 생각하는 여행이란 그런 것이었다.

“이건 여행이 아니지. 이렇게 거창한 건.”

힘 좋은 여섯 마리의 준마가 끄는 육두마차에 호위무사와 시중을 들 하인들까지 기백에 달하는 수행원.

아직 싣지도 못한 짐들을 둘러본 소년은 어이가 없다는 듯 태감을 돌아보았다.

“세상에 세간살이 다 끌고 다니는 여행이 어디 있습니까?”

“이것도 최대한 간추린 거다.”

“아니, 이 염병할 병풍은 또 뭡니까. 여행길에 병풍 칠 일 있습니까?”

“천막 안을 꾸밀 때 필요하지. 바람도 막을 수 있고.”

실용적이지 않으냐.

태감은 당연하다는 듯 대답하여 소년의 말문을 틀어막았다.

잠시 혀끝까지 육두문자가 치밀었던 소년은 존경받아 마땅한 자제력으로 입을 닫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태감은 설명을 계속했다.

“존귀한 황족의 옥체를 누일 곳에는 그만한 격식을 갖추어야 하는 법이다. 설령 길 위라 할지라도.”

“어차피 공식적인 행사도 아니지 않습니까. 굳이 이렇게 번잡하게…….”

“그러니 이렇게 간소하게 준비한 것 아니냐. 만약 공식적인 행사였다면 이 정도로 안 끝나지.”

태감의 설명에 허탈함을 느낀 소년은 쓴웃음을 지으며 작게 뇌까렸다.

“낭만은 없겠군요.”

“여행길의 낭만이라. 두 다리에 의지해 황야를 쏘다니고 낯선 하늘 아래에서 잠드는 자유의 낭만을 누리기는 어렵겠지. 그렇게 훌쩍 떠나기에는 네가 짊어진 책임이 너무 무겁구나. 하지만 낭만은 찾기 마련 아니냐. 예를 들자면…….”

잠시 말을 멈춘 태감은 이내 짓궂은 미소를 띠며 웃었다.

“흔들리는 마차에 앉아 무릎 위에 올려놓고 먹는 도시락의 낭만이라던가.”

창문 너머로 탁 트인 하늘을 올려다보며, 옆자리의 친구와 수다를 떨며 먹는 도시락. 이보다 낭만적인 일이 또 있겠느냐?

상상만 해도 침이 고였는지 입맛을 다신 태감은 흥분된 어조로 말했다.

“따뜻하게 데워서. 만약 식었다면 식은 대로 또 맛이 있지. 특히 도시락 반찬으로 들어가는 튀김의 각별함은 먹어본 사람만이 알 것이다, 약간 눅눅한 듯 기름진 튀김옷의 고소함은. 식어서 간이 더 진해진 조림도 좋지. 또 물기 없이 꽉 짜서 조물조물 무친 짠지는 또 어떻고. 식은 밥 한 덩이에 짭조름한 짠지 하나 올려 입에 넣고 시원한 냉수 한잔 마시면 세상 이보다 개운할 수 없지.”

열성적으로 도시락의 위대함을 설파하는 태감을 보며 소년은 실소를 흘렸다.

“도시락에 이렇게 해박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평소 드실 일도 없었을 텐데.”

“먹을 일이 없으니 더 선망하게 되는 것이지. 외근이나 출장이 없으니.”

“그렇게 드시고 싶으셨으면 말씀하시지 그러셨습니까. 도시락 싸는 게 뭐 어렵다고.”

어차피 점심 준비하나 도시락 준비하나 매한가지 일인데.

소년의 말에 태감은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집무실에서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주방이 있는데, 도시락 먹기도 우스운 일 아니냐.”

“하긴, 그것도 그렇군요. 뜨신 밥 옆에 두고 굳이 도시락 먹을 필요는 없지요.”

그럼 이번에라도 실컷 드십시오.

소년의 말에 태감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정말 준비했느냐?”

“도시락 전문 요리사가 아니라 대단치는 않습니다만. 만들면서 몇 개 여분이 남았는데, 지금 하나 드셔보시겠습니까?”

물론 태감은 마다치 않았다.

둘은 한창 짐을 싣고 있는 수행원들의 눈을 피해 조용히 주방 안으로 숨어들었다.

주방에 환기용으로 뚫린 작은 창으로 슬쩍 밖을 내다본 후 태감은 한껏 들뜬 듯 뺨을 발갛게 물들이고는 미소 지었다.

“몰래 먹는 도시락이라 더욱 각별할 것 같구나.”

“대놓고 드셔도 뭐라 할 사람 없습니다만.”

“커흠. 그래도 미안하지 않으냐. 땀 흘려 일하는 수행원들 앞에서 도시락을 쩝쩝대는 건.”

“숨어서 먹는 게 더 맛있어서 그런 건 아니겠지요?.”

속셈 뻔히 보인다는 듯 코웃음 친 소년은 만들어준 도시락을 가져와 태감에게 건네었다.

쑥색 보자기에 쌓인 도시락은 방금 만들었는지 뜨끈뜨끈했다.

“젓가락은 안에 넣어두었습니다. 아, 혹시 차 한잔 드시겠습니까? 냉침한 옥로차가 있는데.”

“그래. 도시락이 차갑다면 뜨거운 차가 어울리겠지만, 따뜻한 도시락에는 시원한 옥로가 어울릴 것 같구나. 한잔 다오.”

소년이 차를 뜨러 가자 태감은 비로소 도시락과 단둘이 남게 되었다.

조심스럽게 보자기를 끌러 펼치자 안쪽으로 타원형의 목제 도시락통이 나왔다. 옻칠한 도시락통은 부드러운 광택이 있었고 감촉은 매끄러웠다.

가만히 도시락통에 손을 얹으면 담긴 음식물의 온기가 고스란히 손으로 전해졌다.

과연 어떤 요리가 담겨 있을까. 달착지근하게 조린 돼지고기일 수도 있고, 아니면 대담하게 한 토막 통째로 구워 넣은 생선구이일 수도 있다.

어쩌면 탱글탱글한 소고기 완자일 수도 있고, 바싹하게 튀긴 닭고기일지도 모른다.

뚜껑을 열어보기 전. 확정되지 않았기에 무엇이든 될 수 있는 미지수의 기대감은 태감의 손을 자꾸만 머뭇거리게 했다.

시원한 차를 가져온 소년은 뚜껑에 손을 올리고 안절부절못하는 태감을 보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하십니까? 고사 지내는 것도 아니고. 그러다 식겠습니다.”

“그래. 식기 전에 먹어야지 그렇고말고.”

마침내 눈을 질끈 감고 뚜껑을 연 태감은 눈을 뜨기 전 코로 도시락의 내용물을 확인했다.

수증기와 함께 피어오르는 기름진 향기. 졸아든 간장의 짭조름한 향기. 톡 쏘는 진한 후추 향.

참지 못하고 눈을 뜬 태감은 도시락의 내용물을 확인하고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건 대체…….”

도시락의 구성은 간결하기 그지없었다. 타원형의 도시락통에 빈틈없이 담긴 쌀밥과 고기.

마치 채소 따위에 내어줄 공간은 없다고 주장하듯 귀퉁이에 찔끔 담긴 갓 장아찌를 제외하면 도시락에 담겨 있는 반찬은 온통 고기뿐이었다.

간장에 조린 닭 다리와 달걀. 꿀을 발라 구운 차슈. 달걀 물을 입혀 바삭하게 지져낸 소고기 완자. 그리고 튀김.

태감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다른 모든 반찬을 사이드로 밀어낸 채 정 중앙을 차지한 거대한 튀김이었다. 태감의 시선을 눈치챈 소년이 입을 열었다.

“돼지갈비를 넓게 펴서 기름에 튀긴 겁니다. 대만이라는 나라의 명물 음식인데 따로 부르는 이름 없이 그냥 파이구(排骨)라고 부르지요.”

밥 위에 떡하니 올라있는 튀김은 거의 손바닥만 했다. 그것도 손가락을 다소곳이 모은 손이 아닌, 있는 힘껏 쫙 편 손만큼.

자신도 모르고 손을 펴 튀김의 길이를 가늠해본 태감은 감격스러운 표정으로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먹기 좋게 썰지 않은 튀김은 젓가락으로 집기 어려울 만큼 묵직했다.

“썰어두면 먹기는 편하지만, 육즙이 다 빠져 버리지요. 그냥 베어 물어 드시면 됩니다.”

“베어 문다라. 참으로 호쾌하구나.”

소년의 말대로 태감은 거침없이 튀김을 베어 물었다.

도시락통에 담겨 있으며 살짝 숨이 죽은 듯 눅눅해진 튀김옷은 씹으면 고소한 기름이 배어 나와 입술을 번들거리게 했고 도톰한 갈빗살은 촉촉하면서도 부드러웠다.

튀김을 한입 가득 베어 물고 다시 흰 쌀밥을 볼이 미어지도록 욱여넣으면 튀김의 기름기가 살짝 미지근해진 밥에 배어들어 단단해진 밥알을 부드럽게 풀어주었다.

간장양념이 잘 배인 닭 다리에 노른자가 반숙으로 익은 달걀. 달착지근한 차슈와 탱글탱글한 완자. 그리고 밥.

도시락을 탐닉하던 태감은 문득 생각났다는 듯 식탁 반대쪽에 쌓아둔 도시락 꾸러미를 바라보았다.

“도시락 내용물은 전부 같은 것이냐.”

“그럼 재미가 없지 않습니까. 다 다르지요. 저기 빨간색 보자기는 닭튀김이 든 것이고 파란색 보자기는 부들부들하게 간장에 졸인 동파육이, 갈색 보자기에는 훈제한 오리 다리가 들어 있습니다.”

“그것참 듣기만 해도 군침이 도는구나. 닭튀김에 동파육, 훈제한 오리고기라.”

“태감님.”

무심코 도시락 쪽으로 손을 뻗는 태감을 제지한 소년은 엄격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나머지는 나중에, 마차에서 드시지요. 맛보기는 하나뿐입니다.”

“맛보기라면 종류별로 하나씩 먹어봐야 하지 않겠느냐?.”

“혹시 맛보기라는 단어를 잘못 알고 계신 건 아닙니까?”

때마침 들려온 달음박질 소리에 고개를 등 뒤로 돌린 소년은 익숙한 고양이상의 얼굴을 발견하고는 살가운 웃음을 지었다.

“어이쿠, 장소 왔구나.”

“할아버지!

“마침 잘 왔다. 태감님이랑 도시락 까먹고 있었거든.”

“예? 이제 출발할 시간인데요?”

“어이쿠, 벌써 그렇게 되었느냐?”

태감님, 그렇답니다.

고개를 틀어 태감에게 이죽거린 소년은 도시락 보따리를 품에 안아 들고는 일어섰다.

“자, 갑시다. 여행을 떠나야지요.”

“가기 전에 하나만 더 먹고 가면 안 되겠느냐?.”

* * *

“지금쯤이면 마차에 오르셨겠군요.”

“여행을 가기엔 좋은 날일세. 하늘은 화창하고 바람은 선선하니. 안 그런가, 문일.”

찻잔을 쥐고 창밖을 내다보던 늙은 환관은 빙그레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정말로 그렇습니다. 폐하. 이런 날은 발걸음도 가볍지요.”

“누구는 이 좋은 날에도 바깥 구경도 한 번 못 하고 궁에 감금되어 있는데 말이지.”

진력이 난다는 듯 한숨을 쉰 황제는 미지근하게 식은 차를 들이켜고는 문일을 바라보았다.

그리 크지 않은 키에 좁은 어깨. 온화한 미소가 걸린 주름진 얼굴에서는 인자함과 선량함이 묻어난다.

하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황제는 가만히 노인의 얼굴 속에서 과거의 모습을 찾아내었다.

그의 머리카락이 아직 새카맣고, 그의 뺨에 세월의 흔적이 쌓이기 전, 동창 제독 문일의 젊은 시절.

그 해묵은 과거의 나날과 함께 황제는 그가 그간 의식적으로 무시해 왔던, 떠올리지 않기 위하여 엄중히 봉해왔던 것들을 떠올렸다.

이제는 마주해야 할 때였다.

“선황께서는. 어디에 계시는가.”

갑작스럽게 던져진 질문이었으나 문일은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문일은 황제가 질문할 줄 알았다는 듯이 담담한 어조로 대답했다.

“알리지 말라 하셨습니다, 폐하.”

“내게도 말인가.”

문일은 그저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 허옇게 센 머리를 내려다보던 제국의 지배자는 끓어오르는 분기를 목 끝에서 억누르고는 천천히 되물었다.

“다시 한번 묻겠네, 문일. 선황께서는 어디 계시는가.”

“죄송합니다, 폐하.”

“진정, 대답하지 않을 셈인가.”

탁자 아래에서 섬뜩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오동나무로 만들어진 의자 팔걸이가 바스러지는 소리였다.

황제는 핏발선 눈으로 문일을 노려보며 자신이 부순 팔걸이를 떨어뜨렸다.

“묻겠네. 문일. 그대는 나의 신하인가.”

“폐하. 저는 물론 제국의 신하이며 황실의 종복이옵니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대답하지 않는가!”

사나운 노호성을 토해내며 일어선 황제는 당장에라도 달려들 것만 같았다.

하지만 격노한 용의 아들을 눈앞에 두고서도 문일은 처음과 다름없는 담담한 미소를 유지하고 있었다.

“폐하. 저의 불충함을 벌하여 주십시오.”

“정녕 목을 내놓겠는가! 그대가 선황 폐하의 심복이라 하여 베지 못할 것 같은가!”

문일은 일어섰다. 하지만 황제의 명령을 따르지는 않았다.

조용히 무릎을 꿇고 절을 올리는 그를 보며 황제는 참을 수 없는 분노와 함께 절망감을 느꼈다.

그는 결코 대답하지 않을 것이다. 그 어떤 일을 당하여도, 그 어떤 권위로 명령하여도.

황제는 허물어지듯 주저앉았다.

“그분께서 뵙고 싶지 않다고 하시던가. 이 못난 놈이 보기 싫다 하시던가.”

“폐하. 선황 폐하께선 그저…….”

“그래. 성에 차지 않으셨겠지. 늘 부족함 많은 아들이었으니. 나는 늘 이등이었지. 학문도, 무예도. 무엇하나 누이보다 나은 것이 없었어.”

“폐하, 선황께서는.”

“그렇지 않나. 본래 이 자리는 나 대신 누이가 앉았을 자리이니.”

차가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긴 시간 가슴속에 담은 채 응어리졌던, 너무 오랫동안 방치해 온 끝에 썩어 문드러진 과거의 시간을 다시 꺼내놓은 황제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선황께서 뵙기 싫다 하시니, 그럼 문일. 그대에게 묻겠네.”

분명, 누이의 마지막을 수습한 것은 자네였지.

그 뒤를 이을 질문을 짐작한 문일은 입술을 깨문 채 이마를 땅에 대었다.

대답할 수 없는 무언의 거부였으나 황제는 눈을 감은 채 말을 이었다.

“문일. 누이가 잠든 곳은 어디인가.”

시신으로도 내게 돌아오지 않은 누이가, 묻힌 곳은 어디인가. 선황께서 답을 주지 않으시니, 자네가 알려주게. 문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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