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관의 요리사 215화 외전 9화
이튿날. 거의 새벽까지 먹고 마시며 만취했던 소년은 해가 오전의 끝자락을 막 넘어설 때쯤에야 간신히 눈을 뜰 수 있었다.
고된 주방 생활로 새벽 기상이 몸에 배어 있었던 소년에게는 몹시 드문 일이었다.
점심쯤에 눈을 떠본 게 도대체 얼마만의 일인지.
부숭부숭한 눈을 끔벅이며 주위를 둘러본 소년은 아수라장이라는 표현이 너무 점잖게 느껴질 만큼 난장판이 된 철방의 풍경에 한숨을 내쉬었다.
“아주 개판 났네. 적당히 마시고 좀 치우고 잘걸.”
술에 절다 못해 술독을 껴안고 잠든 못난 어른들과 비교적 얌전히 잠든 아이들.
왠지 한 명이 비는 것 같은 허전함에 한동안 고민하던 소년은 그 빈자리가 단혜림의 자리라는 걸 깨닫고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그의 예상대로 강철과도 같은 그의 호위무사는 고작 숙취를 이기지 못하고 어기적거리는 이들을 비웃듯 철방 뒤편의 마당에서 수련에 열중하고 있었다.
정오에 가까워진 태양에서 수직으로 떨어지는 햇빛을 온몸으로 받으며 그녀는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 광경에 취해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소년은 곧 정신을 차리고는 몸을 일으켜 세웠다.
기름칠을 덜 한 듯 뻣뻣한 마디마디를 조심스럽게 펼 때마다 소년의 입에선 비명이 새어 나왔다.
아이고 내 삭신이야. 아이고 내 사지육신!
아직 이차성징도 일어나지 않은 솜털 보송보송한 어린아이가 내뱉기에는 너무 걸쭉한 비명을 연달아 토해내며 간신히 일어선 소년은 아침 식사 거리를 준비하기 위해 주방으로 향했다.
“얼씨구. 하필이면 왜 다들 주방 가는 길목에 드러누워 있는 거야?”
마치 소년의 진로를 방해하기 위해 일부러 그렇게 누웠다는 듯 걸리적거리는 인간들을 내려다보며 쓴웃음을 지은 소년은 행여나 단잠에 빠진 이들이 발길에 차일라 조심스럽게 발을 뗐다.
“허이구, 곤히도 잔다. 귀엽기도 하지.”
아이들은 밟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영감탱이는 이쁠 것 하나 없기는 하다만, 그래도 노인네 밟고 지나가기도 뭐하니…….”
백윤도 혹시 밟았다 뼈라도 부러질까 겁나니 조심히 건너가고, 마지막으로 표자승을 앞에 둔 소년은 수염 덥수룩한 산적 면상을 굽어보며 중얼거렸다.
“이놈 자식은 허구한 날 스승님 스승님 하는 놈이 스승님 공경은커녕 스승님이 밥상 차려다 바칠 때까지 퍼질러 자고 앉았어.”
잠시 후, 코 고는 소리와 이빨 가는 소리, 잠꼬대 사이로 외마디 단말마가 울려 퍼졌다.
다급히 일어난 표자승은 화들짝 놀라 주위를 두리번거렸지만 발견할 수 있는 거라고는 거무죽죽한 늙은 대장장이의 얼굴과 세상 진지한 표정으로 아침 식사 거리를 준비하는 스승의 뒷모습뿐이었다.
아직 색이 변하지 않은 양고기와 어젯밤 쓰지 못한 표고버섯을 두고 고민하고 있던 소년은 뒤늦게 표자승을 발견하고는 정겨운 아침 인사를 건네었다.
“좋은 아침이다, 표자승. 사실 거의 점심이 다 되었지만.”
“예, 예? 예. 그럼, 좋은 점심입니다. 스승님.”
“오냐. 밥 금방 되니까 상 좀 치우고 있어라.”
산더미 같은 뼈 무더기와 탑처럼 쌓인 그릇, 어젯밤 술자리의 난잡함을 고발하듯 온갖 얼룩으로 더러워진 탁자를 표자승에게 떠맡긴 소년은 메뚜기떼가 지나간 듯 황량한 주방에서 간신히 남은 재료를 긁어모아 요리를 시작했다.
버섯에 토란대. 대파. 그리고 기름기 없는 빨간 양고기.
말라붙은 국물 자국을 지우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표자승은 소년이 큰 솥에 고기를 통째로 삶기 시작하는 걸 보고는 호기심을 참지 못하였다.
“스승님. 어떤 요리를 하시길래 고기를 통으로…….”
“표자승. 넌 해장할 때 멀건 죽 한 사발 먹는 게 좋겠냐, 아니면 뻘겋고 얼큰한 고깃국에 밥 한 공기 말아먹는 게 좋겠냐.”
“예? 그야 얼큰한 고깃국이지요.”
“그렇지? 나도 그래.”
질문에 대한 답변이라 하기에는 조금 모호한 답을 얻은 표자승은 잠자코 요리가 끝나기를 기다리며 청소에 열중했다.
위태롭게 쌓여 있던 그릇이 설거지통으로 들어가고 본래의 색을 되찾은 식탁에 하나둘 사람들이 모여 앉았을 때쯤, 소년의 말대로 좁은 철방 안에는 얼얼하고 구수한 고깃국 냄새가 가득 들어차기 시작했다.
“이게 무슨 냄새여?”
“영감 일어났나?”
“아침부터 뭘 하길래 이렇게 매운 냄새가 진동을 하냐.”
“양고기 육개장.”
들어본 적 없는 생소한 이름이었지만 상에 나온 요리를 보자마자 백윤은 그것이 어떤 요리인지를 알 수 있었다.
기름이 둥둥 뜬 뻘건 국물에 결대로 찢어 넣은 고기, 아낌없이 넣은 파와 토란대. 그리고 버섯이 어우러진 국은 빈속에 뜨기엔 상당한 용기가 필요했다.
“빈속에 좀 뻘겋지 않냐. 술도 마셨는데.”
“원래 해장은 좀 뻘겋고 칼칼한 거로 해야 제맛이지.”
미심쩍다는 눈으로 국을 바라보던 백윤은 숟가락으로 국을 휘저은 후 조심스럽게 첫술을 떴다.
뜨겁다기보다는 따스한 액체가 갈라진 입술 사이를 파고 들어와 메마른 혀뿌리에 스며든다.
얼큰한 냄새를 솔솔 풍기며 보기만 해도 혀가 아릴 듯 벌건 국물의 첫맛은 의외로 부드럽고 순했으며 은은한 단맛이 돌아 백윤을 놀라게 했다.
기름의 단맛일까. 아니면 파에서 우러나온 단맛일까.
미식가 흉내를 내기엔 너무나 무던한 자신의 혀에 실망한 백윤은 고민 없이 하얀 쌀밥을 새빨간 국물에 풍덩 빠뜨렸다.
“그래. 네 말이 맞다. 뻘겋고 칼칼한 거로 해장을 하니까 숙취가 싹 내려가네.”
“그거 봐 영감. 역시 해장에는 뜨끈하고 얼큰한 국물이지?”
소년의 말에 연신 고개를 끄덕이는 대장장이의 주름진 이마에는 어느새 굵은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그 땀방울과 함께 몸속의 노폐물이 녹아 나온 것이리라.
땀을 훔치며 마지막 한 모금까지 깨끗하게 비운 후, 거한 숨을 몰아쉰 소년은 반쯤 그을린 쥐 수염을 땀으로 흠뻑 적신 채 국그릇을 들어 올리던 백윤에게 말했다.
“영감 그, 나 없는 동안 술 너무 푸진 마쇼. 해장국 끓여줄 사람도 없잖수.”
“너 아니면 술 사줄 사람도 없다, 이놈아.”
“술 사줄 친구도 없수? 인생 헛살았구먼.”
“쌍놈 새끼 끝까지 말 꼬라지 하고는.”
만복감에 젖어서인지, 아니면 긴 여정을 준비하는 친구에게 각별한 감정이 샘솟은 것인지, 백윤의 말투에는 평소와 같은 사나움과 날카로움이 결여되어 있었다.
매가리 없는 말들로 투덜대며 서로의 고질적 단점을 헐뜯던 둘은 결국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손을 내밀었다.
평생 일만 하며 살아온 이들의 손.
불에 익고 짓무르며 굳은살 두텁게 박인 서로의 손을 마주 잡은 둘은 그제야 서툴게나마 덕담과 함께 인사를 전했다.
“몸조심해라. 다치지 말고.”
“영감도 건강하쇼.”
둘의 인사는 그걸로 끝이었다.
그리고, 그거면 충분했다.
* * *
왕부로 복귀한 소년은 간식으로 오징어 완자 튀김을 챙겨 들고는 태감의 방을 찾았다.
여행 일정을 짜고 있던 태감은 기쁜 표정으로 소년의 선물을 받아들었지만, 간식과 함께 찾아온 질문에는 난색을 보였다.
“동정호의 수상 암시장이라. 그래, 그러고 보니 그런 곳도 있었지.”
“알고 계셨습니까?”
“그럼 몰랐겠느냐?.”
동창 제독을 지낸 사람이 암시장이 있는 줄도 모르고 있었다면 그게 더 문제겠지.
그 당연한 대답에 소년은 납득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직 바삭함이 남아 있을 때 오징어 완자 튀김을 먹으려 했던 태감은 소년의 부루퉁한 얼굴을 보고는 입가로 가져가려던 완자 튀김을 내려놓았다.
“혹시, 그 사특하고 불온한 무리를 당장에 추포(追捕)하여 제국법의 지엄함을 천하에 널리 알려야 하지 않겠느냐. 뭐 그런 말이 하고 싶은 게냐?”
“그 정도로 멍청한 놈은 아닙니다. 다만.”
소년은 질문하는 대신 말끝을 흐리는 것으로 태감에게 발언권을 넘겼다.
그 질문이 자칫 공박하는 태도로 비칠 수 있기에 보인 배려였다.
태감은 잠시 미소 지은 후, 소년이 하고자 했을 질문을 대신 입에 담았다.
“황제 폐하께서 암시장의 존재를 용인한 것은 아니냐. 그렇게 묻고 싶은 것이냐.”
“물론 공명정대하신 제국법의 수호자이시며 만백성의 어버이이신 황제 폐하께서 불법을 옹호하리라 생각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관례로 굳어져 버린 악습에 대한 개혁 의지를 포기한 것은 아니냐. 참, 노회한 정치인처럼 말하는구나. 얄밉게도.”
“늙은이니 말입니다.”
유들유들하게 말하는 소년을 째려보던 태감은 목이 탄다는 듯 찻잔을 집어 들었다.
뜨거운 차를 들이켜는 태감을 보며 소년이 장난스럽게 농을 건네었다.
“차보다는 술이 필요하실 것 같군요.”
“그 정도는 아니다. 물론 오징어 완자 튀김은 안주로도 손색없을 것 같긴 하군.”
오징어를 곱게 갈아 차지게 반죽하여 튀긴 오징어 완자 튀김은 간식과 술안주 양쪽에서 활약할 수 있는 매력적인 음식이었다.
겉은 바삭하지만 속은 폭신하면서도 탄력 있고 신선한 오징어 특유의 달착지근함이 살아 있다.
산초가루 섞은 소금을 살짝 찍어도 좋고 겨자를 찍어도 좋으며 조금 유치하지만 스위트 칠리소스와의 조합도 환상적이다.
하지만 완자를 찍어 든 태감의 얼굴은 수심에 차 있었다.
“황제 폐하께서도 암시장을 비롯한 지하경제의 폐해에 대해 고민하지 않으시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긴 시간 지역 사회에 뿌리내려 유착관계를 형성한 지하경제를 뿌리 뽑는 것은 막대한 진통을 감내해야만 하지. 이미 우환이 많은 제국에는 그럴만한 여유가 없어.”
“그렇게 즉각적으로 처리해야 할 문제는 아니지요.”
“예산 문제, 감시할 인력 문제. 핑곗거리가 많으니 소홀할 수밖에. 그 누적된 방임에 결국 필요악인 양 당연시되고는 있지만, 언젠가는 짚고 넘어가야만 하겠지.”
그래서. 갑자기 암시장은 왜 물어보느냐?
의문에 찬 태감의 질문에 소년은 대수로운 일 아니라는 양 대답했다.
“별일은 아니고, 표자승 그 친구가 권하더군요. 제국의 암시장 중에서도 가장 규모가 크고 볼거리 많은 곳이 동정호의 수상 암시장이라며.”
“허어, 배짱 있는 친구인 것은 알고 있었지만, 설마 그 정도로 담대할 줄은 몰랐구나. 국법을 수호해야 할 의무를 진 황족에게 서슴없이 불법을 권할 줄이야.”
표자승의 담대함에 혀를 내두르던 태감은 문득 자신이 빈틈없이 준비한 여행 계획을 처음부터 다시 짜야 할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불안감을 느꼈다.
물론 소년이 아직 암시장을 들러야겠다고 선언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소년이 무엇을 선택할지는 자명한 일이었기에 태감은 섣부른 희망을 품지는 않았다.
잠깐의 고민 후, 체념과 좌절의 사이에서 조용히 미소 지은 태감은 소년이 준비하고 있었던 제안을 자신이 먼저 내놓음으로써 소년을 놀라게 했다.
“그렇다면, 일정을 다시 짜야겠구나. 동정호의 수상 암시장을 들리는 일정으로.”
“괜찮으시겠습니까? 일정이 복잡해질 텐데요. 암시장에 왕의 이름을 대고 들어갈 수도 없으니 가짜 신분도 준비해야 할 테고.”
“그거야 일도 아니지. 그건 우리가 늘 하던 일 아니냐.
태감의 너스레에 소년은 흐릿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은퇴했다고는 하나 동창 제독에게 가짜 신분을 준비하는 것은 일의 축에 끼지도 못할 것이다.
그렇게 암시장이 열리는 날짜와 여행의 일정을 조율하며 완자를 집어 먹던 태감은 어느 순간 그릇이 허전함을 깨닫고는 소년을 바라보았다.
그 무언의 갈구에 실소를 흘린 소년은 그에게서 빈 접시를 받아들었다.
“벌써 다 드셨습니까? 조금 더 넉넉하게 튀겨올 걸 그랬군요.”
“혹시 남은 게 좀 있느냐?”
“오징어는 없지만, 다른 건 좀 있을 겁니다. 꼭 오징어일 필요는 없지요?”
“꼭 튀김일 필요도 없지.”
하지만 이제 곧 저녁을 먹어야 할 시간인데…….
저녁을 먹기에는 너무 이르고, 그렇다고 간식을 더 먹기에는 너무 부담스러운 어중간한 오후.
어떤 간식을 준비해야 저녁 식사 전의 허기를 달래면서도 과한 포만감으로 저녁 식사의 즐거움을 반감시키지 않을지 고민하던 소년은 기막힌 역발상을 떠올리고는 탄성을 질렀다.
“지금까지 멍청한 생각을 하고 있었군요. 왜 저녁 식사 전에 먹을 간식 때문에 전전긍긍하고 있었지요?”
저녁을 일찍 앞당겨 먹고, 그다음에 늦게 야식을 먹으면 해결될 문제였는데 말입니다.
소년의 명쾌한 답에 가장 당혹스러워한 것은 태감이었다.
평소였다면 당뇨와 동맥 경화 등을 비롯한 각종 성인병을 들먹이며 면박을 주었을 의견을 소년 스스로가 제안했다는 사실에 까무러치게 놀란 태감은 차마 기쁨의 환호성을 지르지는 못하고 대신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혹시 뭐 잘못 먹었느냐? 어디 아픈 것은 아니고?”
“싫으십니까?”
“싫은 것은 아니다만…….”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자신을 바라보는 태감의 시선에서 의혹의 원인을 알아차린 소년은 선량한 웃음을 지으며 태감의 걱정을 불식시켰다.
“앞으로 여행을 떠나면 한동안 거친 식사를 하셔야 하지 않습니까. 그러니 지금 마음껏 드셔두시라는 의미였지, 다른 의도는 없습니다.”
“네가 내주는 식사야 늘 맛있었으니 걱정은 안 된다만, 그렇다고 기껏 찾아온 기회를 내칠 필요는 없겠지?”
그제야 화색이 도는 태감을 보며 피식 실소를 흘린 소년은 아예 먹으면서 고민하자며 그를 주방으로 이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