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관의 요리사 214화 외전 8화
아직은 밤의 시간임을 증명하듯 어슴푸레한 그림자가 비스듬히 깔린 경사의 구석진 골목길.
더운 숨을 토해내며 철방을 나선 소년은 처마 밑에 먼저 나온 손님이 있는 것을 보고는 피식 웃음 지었다.
“영감, 어쩐 일이야.”
“좀 더워서 나왔다. 너는?”
“나도 좀 더워서.”
퉁명스러운 말을 교환한 후 소년은 왼손에 들고 있던 병을 기울였다.
알싸한 인삼 향기가 은은하게 배인 달착지근한 탁주가 달빛과 함께 목구멍을 타고 뱃속 깊은 곳을 적셨다.
병이 반쯤 가벼워진 후, 소년은 병을 늙은 대장장이에게로 넘겼다.
대장장이는 말없이 그것을 받아들었지만, 병을 기울이지는 않았다.
늘 고함과 욕설과 철을 때리는 날카로운 소음으로 가득했던 거리였기에 모처럼 달빛과 함께 찾아온 침묵은 보통의 것보다 더 기묘하고 거북하게 느껴졌다.
정숙한 밤하늘을 곱씹으며 입술을 달싹이던 소년은 노인이 병을 입가로 가져가는 것을 보고는 말문을 열었다.
“영감. 고생 많았수.”
“새삼스럽게 왜 그러냐.”
“그냥. 고마워서 그러지.”
단 호위도 내색은 안 하셨지만 기뻐하시더군. 아마 호들갑스럽게 반응하기 민망하셔서 그러셨겠지.
소년의 말에 백윤은 미심쩍다는 듯 되물었다.
“그러냐? 난 솔직히 좀 찔끔했다. 원체 반응이 무덤덤해서, 마음에 안 드시나 했지.”
“후궁에서부터 뵈어온 내가 장담하는데, 그건 일부러 반응을 숨기신 거요. 뭐, 무사의 체면이란 것도 있겠지.”
얼마나 기대하셨으면 그래, 나를 두들겨 패서 흥분을 가라앉히셨다니까.
옷을 들쳐 시퍼렇게 멍든 옆구리를 보여주자 백윤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참 대단한 호위무사를 뒀구만. 주인을 두들겨 패는 호위무사라니.”
“암, 실력은 확실하지. 내가 직접 칼침 맞아가면서 확인했거든.”
“뭐? 칼침?”
“그런 게 있어, 그런 게.”
한참을 키득거리던 소년은 그 웃음소리가 창백한 밤공기에 녹아들 때쯤 입을 다물었다.
또다시 거북한 정적이 이어지는 것은 아닌지 짐짓 겁먹은 백윤은 무의미하고 무성의한 농담거리라도 내뱉어 대화를 연장하려 했지만, 소년은 부드러운 고갯짓으로 그것을 가로막았다.
그리고 잠시 후, 소년은 평소였다면 목을 내놓을지언정 그것만큼은 할 수 없다고 장담했을 진솔한 감사 인사를 내뱉었다.
술이 과했기 때문일 것이다.
“영감도 그…… 혹시 도움 필요한 일 있으면 뭐든 말해. 도울 수 있는 일이면 힘닿는 데까지 도와줄 테니까.”
그 순박하고 진지한 약속을 들은 백윤은 한참을 고민한 후 꾸밈없는 대답을 꺼내놓았다.
“왜 갑자기 안 하던 짓을 하고 그러냐. 너 진짜 죽을 날이라도 받아놨냐?”
“하여간 이놈의 영감탱이는 말을 해도 꼭. 좋게 말해줘도 지랄이야.”
“니가 안 하던 짓을 하니까 그러지 이놈아. 왜 되지도 않는 착한 척을 해서 노인네 심장 떨어지게 만드냐, 쌍놈 새끼야.”
“아이고 그래. 내 잘못이지. 염병할 영감탱이 빨리 가라고 고사를 지냈어야 했는데.”
“내 누누이 말하지만 날 때는 순서 있어도 갈 때는 순서 없다.”
늘 반복해 왔던 사교활동을 되풀이한 둘은 질렸다는 표정으로 서로를 마주 보았다.
알고 지낸 지도 제법 되었건만 어쩜 이리도 사람이 변한 게 없는지. 서로가 네놈이 더 못났다며 한참을 쏘아본 끝에 먼저 휴전을 제시한 것은 소년이었다.
텅 비어 가벼워진 병을 한번 흔들어본 소년은 술이 부족하다며 철방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잠깐의 시차를 두고 백윤 또한 철방 안으로 들어섰다.
새벽까지 이어진 술자리로 식탁 위는 그야말로 초토화된 상태였다.
뜨끈뜨끈한 내장탕과 푸짐한 양고기 수육이었던 것들의 앙상한 잔해를 바라보며 안줏거리를 고민하던 백윤은 넌지시 소년에게 물었다.
“안주 떨어졌는데 뭐 씹을 거리 좀 없냐?”
“씹을 거리? 좀 기다리쇼. 꼬불쳐둔 게 있으니까.”
백윤은 내심 소년이 볶은 땅콩이나 육포 쪼가리 따위를 가져오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소년은 기다렸다는 듯이 식탁 위의 잔해를 치우고는 그 위로 큼지막한 광주리를 올렸다.
광주리 안을 확인해 본 백윤은 탄성을 질렀다.
“이거 양 배받이살 아니냐. 잘 안 들어오는 건데…….”
“이걸 알아보네. 역시 먹을 줄 아는 양반이라니까.”
광주리에 담긴 껍질 붙은 살코기는 흔히 배받이살 이라 부르는 양의 치마양지 부위였다.
껍질은 쫀득하고 살코기는 기름기가 잘 박혀 야들야들해 수육으로는 으뜸으로 친다는 그 부위.
군침을 삼킨 백윤은 기대감을 담아 소년을 바라보았다.
“그럼 이걸로 뭘 만들 생각이냐? 물론 그냥 삶아서 소금만 찍어 먹어도 맛있겠다만.”
“그건 너무 시시하지. 영감 혹시 대마참보(大馬站煲)라고 아나?“
생소한 이름에 백윤이 고개를 가로젓자 소년은 한껏 거드름을 피우며 설명을 시작했다.
“대마참보는 이름 그대로 광동의 어느 역참마을에서 시작된 광동의 전통 요리로, 데친 배받이살에 채소와 두부를 넣고 새우젓으로 간해 뚝배기에 끓여내는 요리요. 날 추울 때 먹으면 뜨끈하니 속을 데워주고 날 더울 때 먹으면 땀을 쭉 빼줘서 몸을 개운하게 해주지.”
“새우젓으로 간을 한다라. 거 신기하구만.”
“하긴, 경사 토박이인 영감한테는 조금 생소할 수도 있겠어. 복건성 출신이었으면 환장하고 달려들었을 텐데. 세상에 이 맛을 모르다니.”
안타깝다는 눈으로 백윤을 바라본 소년은 재빠르게 조리를 시작했다.
소년이 가장 먼저 준비한 것은 질박한 뚝배기였다.
족히 오 인분은 만들 수 있을 만큼 큼직한 뚝배기를 쇠를 녹이는 가열로에 올린 소년은 백윤에게 손짓을 보냈다.
그 손짓의 의미를 깨달은 백윤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진심이냐? 그러다 뚝배기가 깨지면 어쩌려고.”
“뚝배기를 너무 우습게 보는구만. 걱정하지 말고 화력이나 올리쇼.”
“그러다 박살이라도 나면 알아서 해라.”
말은 거칠었지만 늙은 대장장이의 손은 소년의 지시에 순응하고 있었다.
앙상하게 메마른 팔뚝에 잔 근육이 솟아오르고 풍로가 힘껏 움직이자 잔잔하게 흔들리던 가열로의 불꽃이 거세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금세 폭발적으로 부풀어 오른 불꽃이 이글거리는 아가리 안쪽으로 시퍼런 혀를 날름거리자 덩달아 소년의 손 또한 바빠지기 시작했다.
배받이살은 도톰하게 썬 다음 끓는 물에 살짝 데쳐주고 두부는 두툼하게 썰어 기름에 노랗게 튀겨준다.
마지막으로 마늘종을 검지 길이로 짧게 잘라 준비를 끝낸 소년은 맹포하게 타오르는 불꽃의 한가운데로 고기를 던져넣었다.
“그래, 뚝배기 요리는 이렇게 화끈해야 제맛이지. 영감, 화력을 더 높여!”
“미친놈. 뭔 요리를 하는데 쇳물 끓이듯이…….”
배어 나온 기름으로 고기 테두리가 바삭해질 때쯤 새우젓을 넣고 마늘종을 수북이 넣은 소년은 마지막으로 뚜껑을 덮고는 허리춤에서 작은 호리병을 꺼내 들었다.
그 모습을 의아하게 본 백윤은 소년과 뚝배기를 번갈아 보고는 소리쳤다.
“이미 뚜껑 덮고서 무슨 양념을 더 하려고?”
“양념이라면 양념이겠지만, 이건 음식에 간을 하기 위한 양념이 아니야.”
“뭐?”
늙은 대장장이의 의문이 당혹스러움으로 바뀐 것은 잠시 후의 일이었다.
이빨로 마개를 물어 뽑는 소년의 호쾌함에 너털웃음을 터뜨린 백윤은 이내 멀리 떨어진 그에게까지 진동하는 독한 술 냄새를 맡고는 안색을 굳혔다.
그리고 소년은 노인의 기대를 배신하고 싶지 않다는 듯 명랑한 어조로 말했다.
“그러니까 말했잖아? 뚝배기 요리는 화끈해야 제맛이라니까.”
“이 미친놈아!”
* * *
나른함에 젖어 있었던 철방의 분위기를 긴장시키는 데는 단 몇 방울의 증류주면 충분했다.
만복감과 술과 검.
각자의 이유에 취해 있었던 이들이 갑작스럽게 치솟은 불에 헐레벌떡 놀라 달려왔을 때 소년은 이미 뚝배기를 식탁에 차린 후였다.
희멀건 낯짝들을 한번 둘러본 소년은 젓가락을 나눠주며 쾌활하게 웃었다.
“자, 다들 식기 전에 먹읍시다. 이건 식으면 맛없으니.”
곰삭은 젓갈 특유의 쿰쿰하면서도 그윽한 향기가 물씬 피어오르는 뚝배기는 물론 매력적이었으나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그을린 벽과 서까래를 올려다보는 백윤을 무시할 수 없었던 표자승은 어색하게 입꼬리를 씰룩이며 입을 열었다.
“저, 스승님. 이 요리는…….”
“대마참보(大馬站煲)라고 하는 요리다.”
“아아, 들어본 적 있습니다. 그러니까, 광동의 명물 요리였죠?”
음, 그러니까. 그러니까 말입니다.
아직 뇌에 들어찬 주독이 빠지지 않았는지 표자승은 떠듬거리며 자꾸만 횡설수설했다.
싱겁다는 듯이 그를 보고 있던 소년은 손수 그를 끌어다 앉히고는 그의 손에 젓가락을 쥐여주었다.
그러고는 멍하니 손에 쥔 젓가락을 보고만 있는 표자승의 귀에 속삭였다.
“왜, 이젠 이 스승이 밥까지 떠먹여 주리?”
“아닙니다. 스승님. 잘 먹겠습니다.”
집은 고기가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도 모를 만큼 혼란스러운 상황이었지만 그럼에도 그의 혀는 탐욕스럽게 음식을 갈구했다.
아삭아삭하고 향긋한 마늘종에 야들야들하고 기름진 고기. 그리고 노릇하게 익은 표면으로 새우젓의 감칠맛을 흠뻑 빨아들인 두부.
표자승은 이 쿰쿰하고 찝찌름한 새우젓의 맛이 이토록 향기롭고 달착지근하게 느껴질 수 있다는 사실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어떠냐. 먹을 만하지?”
새로운 미식의 지평선을 연 표자승은 존경하는 스승의 질문에 대답할 여유조차 없이 젓가락을 바삐 놀리고 있었다.
딱히 대답을 바란 질문은 아니었기에 소년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영감, 그만 보고 와서 앉아. 수리 견적 뽑는 건 먹고 해도 안 늦을 테니까.”
“그래. 그래야지. 먹어야지. 먹어야 네놈을 두들겨 패주지.”
아무리 충성스러운 호위무사라도 이 순간만큼은 침묵할 거라고 판단한 백윤은 으름장을 놓으며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그의 예상대로 단혜림과 아이들은 소년을 보며 어깨를 한번 으쓱할 뿐 언동을 주의하라는 경고를 입에 담지는 않았다.
안주가 좋으니 다시 술 한잔이 돌 수밖에 없었다.
톡 쏘는 탁주로 입맛을 돋우었으니 이번엔 깔끔한 청주가 나서야 할 차례라는 소년의 주장은 술을 마실 수 없는 아이들을 제외한 모두의 찬사를 받았다.
댓잎으로 거른 죽엽청, 생강과 배로 담근 이강주, 무르익은 가을 국화의 향기를 녹여낸 국화주가 차례로 상에 오르자 술꾼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자신의 입맛에 맞는 술을 찾아 병을 기울였다.
화끈한 불 쇼로 잠시 달아났던 취기가 다시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를 때쯤, 술잔에 코를 박을 듯 기우뚱거리던 백윤은 문득 생각났다는 듯 고개를 꺾어 소년을 바라보았다.
막 뜨끈뜨끈한 두부를 입에 가져가려던 소년은 노인의 뜨거운 시선에 질겁을 하며 어깨를 움츠렸다.
“뭐요, 영감.”
“너, 그…… 혹시 장물에 관심 있냐?”
“영감, 취했수? 갑자기 뭔…….”
밑도 끝도 없이 던져진 황당한 질문에 소년은 순간 짜증을 느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조금 전까지의 대화에서 장물에 대한 화제로 비약될 만한 소재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곰곰이 생각하던 소년은 아직 백윤의 말이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고는 무뚝뚝한 어조로 물었다.
“장물은 갑자기 왜.”
“너 동정호로 여행 간다고 하지 않았냐.”
“동정호? 그렇지.”
“생각해 보니까, 끄윽, 동정호에 그게 있다는 걸 깜박 잊고 있었더군.”
그게 뭐냐고 물어보려 했던 소년은 뒤늦게 터져 나온 표자승의 탄성에 다급히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 보니 동정호에는 그곳이 있었지요. 발걸음을 끊은 지 하도 오래돼서 저도 잊고 있었습니다.”
“표자승, 끝까지 신비주의 전략을 고수하는 건 그리 권장하고 싶지 않아. 특히 그것이 대단한 비밀이 아닐 경우라면 더더욱.”
자신의 폭력성이 단순히 말로만 끝나지 않을 거라는 소년의 위협에 난처한 표정을 지은 표자승은 잠시 젓가락과 잔을 내려놓고는 설명에 열중했다.
“경사에 자리를 잡으며 잊고 살았지만, 어르신의 말씀에 기억이 났습니다. 동정호에는 제국 최대의 암시장이 있다는 사실을요.”
“암시장?”
“그냥 암시장이 아닙니다. 한 번에 수천 명의 인원을 수용할 수 있는 초거대 유람선에서 이루어지는 수상 암시장이지요.”
소년은 그제야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소년의 표정 변화에 힘입은 표자승은 더욱 힘 있는 어조로 말을 이었다.
“달이 뜬 동정호 위로 배가 뜬 그 모습은 실로 장관이지요. 수천 개의 등을 내건 초거대 유람선과 유람선을 향해 몰려드는 이용객들을 태운 배들은 그 자체만으로도 뱃놀이 축제를 연상시킬 만큼 화려하고 웅장하지요. 매년 규모가 커지는 만큼 한 번 들러보시면 후회는 안 하실 겁니다.”
“허어? 제국법의 법망을 피해간 암시장이 매년 규모가 커지고 있다니, 말세로다.”
모처럼 스승에게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열정적으로 입을 놀렸던 표자승은 자신이 신나게 설명한 대상이 누군지를 깨닫고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의식적으로 되새기지 않으면 금세 잊어버릴 만큼 소탈하게 행동하긴 했지만, 눈앞에서 술을 홀짝이고 있는 소년은 존귀한 황족이었으며 권위와 의무를 명받은 제국의 왕이었다.
“저, 스승님.”
“아아, 괜찮다. 네가 나쁜 마음으로 권한 것도 아니고, 오히려 모르고 있었으면 더 큰 문제 아니냐.”
이번 기회에 한 번 방문해 보는 것도 괜찮겠지.
마치 악동 같은 짓궂은 웃음을 지은 소년은 국법의 수호자여야 할 왕에게 불법 유흥을 권했다는 사실에 당혹스러움을 넘어 죄스러움을 느끼고 있는 표자승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마침 잘됐어. 하릴없이 무료한 여행에 짜릿한 긴장감이 더해지겠구나.”
“괜찮으시겠습니까?”
“괜찮고말고. 졸부 노릇 할 돈도 있겠다. 여차하면 의지할 든든한 호위도 있겠다.”
그리고, 내가 원래 어디 출신인지 잊은 건 아니겠지?
그리 얌전하지는 않았던 전 직장을 들먹여 표자승을 안심시킨 소년은 자신의 잔에 술을 가득 따라 높이 쳐들었다.
그 동작이 뜻하는 바는 명확했고, 잠시 후 그을린 철방 안엔 날카로운 쨍그랑 소리가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