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관의 요리사 213화 외전 7화
점심을 먹기에는 너무 이르고 멀건 차만 홀짝이기에는 너무 허기진 오전.
심심풀이 군입거리를 고민하고 있던 소년은 그 심대한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 조언을 구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하지만 태감은 숙취로 앓아누워 있었고 단혜림은 수련실에 틀어박혀 있었으며 이삼은 검의 제작이 얼마나 진척되었는지 알아보기 위해 백윤의 철방으로 출장을 나간 상태였다.
소거법으로 대상을 찾아낼 필요도 없이 소년은 고개를 돌렸다.
“장소야, 뭐 먹고 싶은 것 없니?”
단짝 친구이자 동료였던 이삼의 부재로 왕의 안전이라는 책임을 홀로 떠안은 호위무사는 어디선가 들어온 고양이와 장난을 치고 있었다.
등허리는 회색에 검은 줄무늬였고 배는 새하얀 고양이였다.
잠시 고양이의 솜털 보송보송한 배와 분홍색 코를 바라보던 소년은 엄숙한 목소리로 다시금 장소의 이름을 불렀다.
“장소야.”
“네? 아, 죄송해요.”
“삼이가 들어오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 같구나.”
점심을 조금 늦게 준비해야겠는데, 그전에 뭘 좀 먹어두는 게 좋을 것 같다.
소년의 말에 장소는 고민하듯 고개를 까딱였다.
백윤의 철방에 소식을 들으러 간 이삼이 돌아오려면 족히 반나절은 걸릴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혼자서만 간식을 먹는 것은 양심에 찔리는 일이었다.
식욕인가, 아니면 우정인가.
양립될 수 없는 두 가지를 두고 갈등에 빠진 장소를 보며 선택을 강요하는 악마처럼 킬킬대던 소년은 장소의 고뇌가 극에 달했을 때쯤 은근한 목소리로 식욕과 우정 양쪽을 다 지킬 수 있는 비방을 일러주었다.
“많이 만들어서 삼이 것도 남겨주면 되지.”
“아하!”
지나치게 간결한 답이었으나 장소는 만족스러워했다.
그리고 소년은 어리숙하게도 해맑게 웃고 있는 장소에게 새로운 고민거리를 선물함으로써 그에게 두뇌 운동의 기회를 제공했다.
그래도 전자에 비하면 행복한 고민이었다.
“뭐가 먹고 싶니?”
“전 전하, 아, 지금 사람 없죠? 할아버지가 해주시는 거면 다 좋아요.”
천진난만한 얼굴로 세상 모든 요리사와 주부들의 원수와 같은 말을 내뱉는 장소를 보며 소년은 쓴웃음을 지었다.
분명 옛날 성격 같았으면 한 대 쥐어박았으리라.
새삼 유해진 지금의 모습을 돌아보며 소년은 꿀밤 대신 힘없는 손길로 장소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우리 장소, 혹시 오늘 간식으로 양 눈알 튀김 같은 게 먹고 싶니?”
“어……. 아니요.”
“그럼 신선한 도마뱀붙이 꼬치구이가 좋을까?”
‘아무거나’라는 말은 곧 상대가 내주는 음식이 어떤 거라도 군말 없이 먹겠다는 의사 표현이라는 사실을 단단히 주입 시킨 소년은 재촉처럼 느껴지지 않도록 부드러운 목소리로 되물었다.
“뭐든 말해보렴. 아직 점심 먹기 전이니 너무 배부른 건 말고.”
“으음…….”
인류가 요리라는 불의 선물과 함께 얻은 역사 깊은 고민거리 앞에서 허우적대는 장소를 손주 재롱 보는 기분으로 관람하던 소년은 문득 자신이 아직 장소만 한 나이일 때 즐겨 먹었던 간식을 떠올렸다.
그가 김승조라는 이름으로 국민학교를 다니던 시절,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었던 구멍가게의 분식들.
떡볶이, 순대, 튀김. 그리고 오뎅.
어묵이라고 말하면 섭섭한 그 간식을 떠올린 순간 소년의 뇌리에선 번갯불과도 같은 영감이 번뜩였다.
“그래, 오뎅은 어떨까?”
“네?”
물론 직사각형으로 잘라 꼬치에 꿰어 가게 창업과 역사를 함께했을지도 모르는 꽃게와 무가 끓고 있는 국물에 담긴 한국식 오뎅을 만들겠다는 것은 아니었다.
소년이 떠올린 것은 세계적으로 매일 375만 개, 약 55톤이 소비된다는 홍콩 분식의 자존심. 카레 어묵이었다.
“그게 뭐예요?”
“먹어보면 안단다, 먹어보면.”
생전 처음 들어보는 생소한 이름에 당황한 장소를 내버려 둔 채 소년은 전격적으로 조리에 들어갔다.
가장 먼저 만들기 시작한 것은 카레 어묵의 핵심이자 모든 것인 카레였다.
카레 어묵의 카레는 걸쭉하고 맵고 진하고 향기로워야 하며 살짝 달콤한 맛도 있어야 한다.
큰 돌절구를 가져온 소년은 고춧가루, 생강, 정향, 계피, 육두구, 마늘, 회향, 흑후추, 강황, 겨자씨, 붓순나무 등의 각종 향신료를 가져와 곱게 간 다음 솥으로 옮겨, 간 사과와 육수 등을 넣고는 걸쭉한 카레 소스를 만들기 시작했다.
삽시간에 이국적이고 강렬한 향기가 주방 안을 점령하기 시작했다.
낯설지만 거북하지는 않은, 초면이라는 이유로 배척하기에는 너무나 매력적인 향기에 장소가 발을 구르는 동안 큰 솥에 물을 담고 작은 솥에 카레를 중탕으로 뭉근히 끓도록 한 소년은 재빨리 어묵을 만들 생선을 고르기 위해 수조로 향했다.
“허허, 이런 염병할 일이 있나.”
뜰채를 들고 수조 앞으로 달려간 소년은 당혹스러운 나머지 육두문자를 내뱉었다.
왜 오늘따라 유독 고급 생선만 들여놓은 것인지.
민물 생선으로는 가물치에 쏘가리, 메기, 잉어가 헤엄치고 바다 생선으로는 도미에 준치, 붉바리가 즐비한 수조 앞에서 소년은 허망한 웃음을 터뜨렸다.
“거참, 살다 살다 별짓을 다 하게 되는군.”
고심 끝에 도미를 고른 소년은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어처구니가 없었는지 연거푸 부정형 문장을 되뇌었다.
하지만 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빛나는 운철제 식칼은 완벽한 동작으로 세 장 뜨기를 수행해냈고 껍질을 벗겨낸 다음 곱게 다져 버렸다.
약간의 소금으로 간을 하고 밀가루를 더해 끈기를 낸 후, 소년은 손에 기름을 바른 후 차지게 완성된 어묵 반죽을 구체로 만들기 시작했다.
엄지와 검지로 반죽을 쥐어 손쉽게 동그란 어묵 경단을 만들어내는 그 광경은 마치 묘기처럼 보였다.
자신의 손으로도 그 묘기를 재현할 수 있을지 시도해 봤지만 신통치 않은 결과만을 양산한 장소는 울상을 지었다.
동정심과 동시에 폭소를 유발하는 그 애처로움에 소년은 인자함을 유지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말했다.
“허허, 너무 쉽게 따라 해버리면 세상 모든 경단 장사들이 뭐가 되겠니. 그 친구들 밥벌이도 생각해 줘야지.”
“헤헤, 그렇겠죠?”
“그럼. 자, 얼추 다 되었구나. 이제 튀기거나 그대로 카레에 담가 익히면 되는데…….”
튀겨서 카레 소스를 입힌 어묵과 카레에 푹 삶아 맛이 배어든 어묵.
이는 국물 떡볶이와 그냥 떡볶이만큼 불타는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민감한 주제였으나 소년은 독단적인 판단으로 어묵을 튀기기로 했다.
황금의 바다 위로 새하얀 구체가 추락한다. 깊이 침몰하였던 구체들은 점차 빛나는 황금빛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노릇하게 튀겨진 어묵을 건져낸 소년은 지체 없이 어묵을 카레 소스에 빠트렸다.
“원래는 꼬치에 꿰어야 하지만, 오늘은 그냥 먹어도 될 것 같구나. 이게 구슬도 아니고.”
“구슬은 꿰어야 보배지만 이건 꿰지 않아도 충분히 맛있을 것 같아요.”
제법 능숙하게 장단을 맞추는 장소에게 어묵이 가득 담긴 접시를 들려준 후 소년은 젓가락을 대신한 나무 꼬치로 가장 잘 익은 어묵을 겨냥해 찔렀다.
“몇십 년 만이군. 마흔 중반쯤에 끊었으니.”
길거리 포장마차의 열악한 위생상태와 흰옷에 꼭 흔적을 남기고 간다는 이유로 긴 시간 멀리해 온 젊은 날의 친구를 다시 마주하게 된 소년은 감개가 무량하다는 표정으로 어묵을 입에 넣었다.
코끝을 찌르는 복합적인 향신료의 향기와 자극적인 맛 너머로 아직 바삭함이 남아 있는 어묵의 무게감이 전해져 온다.
잠시 혀 위에서 어묵을 굴리던 소년은 그것을 오른쪽 어금니 사이에 끼워 넣고는 조심스럽게 씹어보았다.
어금니가 튕길 만큼의 탄력과 함께 감미료에 의지하지 않은 품위 있는 단맛이 알싸한 카레 소스에 얽혀들었다.
절묘하게 짭조름하고. 과하지 않게 매콤하며, 충분히 향긋한, 카레보다 더 그리웠던 카레맛.
단순히 카레의 모조품으로 치부하기에는 너무나도 그리운, 친숙했던 일상의 일부분이 소년에게 흘러들어왔다.
“신기하단 말이지. 카레는 한 번도 그리운 적 없었는데, 카레맛 나는 음식은 신기할 정도로 그립게 느껴져.”
진짜의 모방품이기에 더 친근하고 애달픈, 조금은 서글프게 퇴색된 추억을 곱씹던 망향의 표류자는 또 한 명 사무치는 그리움에 젖어 있을 표류자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꼬치에 어묵 몇 개를 꽂아놓은 장소는 그것을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가장 먼저 생각나는 사람. 장소가 그리는 사람은 누구일까.
소년은 굳이 질문하여 가슴 깊이 묻어두었을 것들을 끄집어내지는 않았다.
“장소야.”
“네? 아, 이거 정말 맛있네요. 매콤하면서 탱글탱글한 게…….”
“입에 맞는다니 다행이구나. 그건 그렇다 치고, 너와 상담하고 싶은 게 있어서 말이다.”
잠시 머뭇거렸던 소년은 이내 숨을 가다듬고는 담백한 어조로 이야기를 꺼내놓았다.
주제는 동정호로 향하는 여정의 경로에 관한 것이었다.
소년의 이야기가 끝나기를 기다렸던 장소는 소년이 말을 멈추기를 주의 깊게 기다린 후 조심스럽게 늘어진 이야기를 정리했다.
“그러니까, 동정호까지 가는 여정에…… 귀주를 들러도 된다는 말씀이신가요? 하지만 그러면 여정이 너무…….”
“세상 좋다는 명승지가 동정호에만 있다더냐? 어차피 산 좋고 물 좋은 곳 찾아 구름 따라 흘러가는 유람인데, 좀 길어진다고 탓할 사람 없다.”
욕심부리는 법보다 사양을 먼저 배운 아이를 소년은 씁쓸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예상치 못한 권유에 안절부절못하는 장소를 위하여, 소년은 한마디를 더해 그의 말문을 터주었다.
“그래서, 싫으냐?”
“아니에요! 싫은 건 아닌데.”
“그러면 혹시 떠나오기 전에 가족에게 앙금이라도 남아 있느냐?”
“아니요.”
그럼 가지 않을 이유가 없구나.
소년은 가만히 손을 들어 장소의 머리 위에 올려놓았다.
거칠고 투박한 손길이 전해주는 온기가 그 순박한 눈망울에 스며들 때쯤, 바깥에서 들려오는 달음박질 소리에 소년은 손을 내려 장소의 눈가를 훔쳐주었다.
“어이쿠, 발소리를 들어보니 삼이가 돌아온 것 같구나.”
좋은 소식 가져왔으려나?
과장된 웃음을 터뜨리며 이삼을 맞이한 소년은 아직 뜨겁고 바삭한 카레 어묵을 내주었다.
영문도 모른 채 접시를 받아든 이삼은 곧 전령으로서의 본분도 잊은 채 이국적인 카레의 맛을 탐닉했다.
“할아버지. 제가 나중에 은퇴해서 가판대를 차리게 되면, 꼭 이 음식 만드는 법을 알려주셔야 해요.”
“은퇴 계획은 좀 평온하고 무료한 방향으로 짜도록 하자꾸나. 그보다, 검은 완성 되었다더냐?”
입에 가득 어묵을 물고 있었던 이삼은 고개를 격렬하게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백 마디 말보다도 확실한 확답을 받은 후, 소년은 긴장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렇다면 알려드려야겠구나. 단 호위께.”
검이 검수를 기다리니, 한시도 지체해서는 안 되겠지.
* * *
육신의 단련이란 곧 육신을 가장 효과적으로 괴롭히는 행위이며, 그런 의미에서 물구나무서기는 팔과 허리, 균형감각. 그리고 인내력을 모두 연마할 수 있는 대단히 효과적인 단련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보통 한쪽 팔로만 이루어지는 물구나무서기는 거의 없으며, 바닥을 짚는 것이 아닌 바닥을 ‘움켜쥐고’하는 물구나무는 유례를 찾아보기도 힘들 것이다.
그 기상천외한 단련을 처음으로 목도한 소년이 가장 먼저 떠올린 감상은 바닥 수리비에 관련된 것이었다.
값비싼 옥석을 깔아 만든 연무장 바닥에 선명하게 새겨진 균열을 응시하던 소년은 시선을 조금 위로 올렸다.
대나무처럼 꼿꼿한 자세는 흔들림 없이 견고하기 그지없었다.
“커흠, 단 호위.”
“전하께서 어인 일이시오?”
그제야 고개를 든 단혜림은 우아한 동작으로 두 다리를 땅에 내린 다음 바닥에 박아넣었던 손을 잡아뺐다.
섬뜩한 소리와 함께 뽑혀 나온 손에서는 돌가루가 우수수 떨어졌다.
“무척 독특한 단련 방법이군요.”
“음, 팔 근육을 단련하는 데 좋지.”
“악력을 단련하는 데도 좋아보이는군요.”
약간의 책망이 담긴 소년의 말에 안양비는 고개를 숙여 바닥에 아로새겨진 자신의 흔적을 바라보았다.
단혜림은 조금 겸연쩍은 투로 대답했다.
“가급적 기물파손을 최소화할 수 있는 단련법을 생각해 봐야겠군.”
“예, 부디 잘 부탁드립니다. 아, 혹시 간식 좀 드시겠습니까?”
단혜림은 기쁜 표정으로 소년의 선물을 받아들었다.
아무리 철혈의 여인이라도 땀 흘린 후에 맡는 그 매콤한 향기는 참기 어려운 유혹이었으리라.
나무 꼬치에 다섯 개의 어묵을 찍어 한입에 삼킨 후, 그녀는 간결하고 산뜻한 감상을 이야기했다.
“훌륭하군.”
“마음에 드시다니 기쁘군요.”
“그럼 이제 용건을 말해주겠나?”
“이미 짐작하신 거로 압니다만.”
“그래도 직접 귀로 듣고 싶은 것이 사람의 심리 아니겠나.”
말해주겠나?
거듭된 단혜림의 요구에 소년은 표정을 다잡고는 곧게 허리를 폈다.
그리고 가장 진지한 표정으로 얼굴을 굳힌 다음 정숙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그리고 그녀의 기대감이 최대치에 도달했을 때쯤 입을 열었다.
“검이 완성되었습니다.”
기대했던 환호성과 노고에 대한 찬사는 터져 나오지 않았다.
소년은 만약 그녀가 진짜로 그런 열광하는 반응을 보여줬다면 기겁했을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마치 가라앉은 것처럼 침묵하는 그녀에게는 의문을 가졌다.
“단 호위?”
“아아, 미안하네. 잠시 풋내기 검수들이 흔히 저지르는 실수를 되새기고 있었어.”
“풋내기 말입니까?”
“새로운, 분수에 어울리지 않는 훌륭한 명검을 쥐게 된 얼간이들이 흔히 저지르는 성급한 실수 말일세.”
그런 풋내기들은 때때로 머리끝까지 차오른 고양감과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무심코 칼날의 성능을 시험해 보고픈 충동을 느끼게 되지.
그 말에 소년은 어처구니없다는 반응을 돌려주었다.
“단 호위께서 그렇게 풋내나는 애송이는 아니리라 믿습니다.”
“물론 나 역시 내 자제력을 신뢰하는 편이네. 하지만 이번엔 경우가 다르지 않나.”
철왕의 마지막 제자와 대상단의 상단주, 그리고 존귀하신 숙친왕 진연운 전하께서 직접 벼린 검을 쥐다니.
역사상 그 어떤 검수도 누려보지 못한 영예가 아닌가.
빙그레 웃으며 자신의 심정을 고백한 단혜림은 은근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유감스럽게도, 지금은 전란의 시대가 아닌지라 검의 성능과 자신의 실력을 마음껏 시험해 볼 수도 없군.”
“예, 늘 감사하게 생각하는 부분이지요. 소가죽이나 볏짚 정도로 만족해 주실 수는…… 예, 없겠지요.”
설득하려는 의지보다 먼저 찾아온 체념이 소년의 얼굴에 번졌다.
시무룩하게 처진 소년의 얼굴을 보며 실소를 흘린 단혜림은 점잖게 자신의 요구사항을 말했다.
“그래서 말인데, 전하께서 잠시 어울려주시면 감사하겠네만. 흥분이 식을 정도로만.”
“단 호위.”
“이번에도 또 애꿎은 호위들을 괴롭힐 수는 없지 않은가.”
이미 한 번 전적이 있었던 소년은 도저히 두 번이나 같은 희생을 요구할 수는 없었다.
만약 이번에도 고삐 풀린 맹수를 풀어놓는다면 양 떼가 파업을 일으킬 것이 불 보듯 뻔했기 때문이었다.
‘이번에는 내가 각오를 다질 차례로군.’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푹 숙인 후,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소년의 눈동자는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흥분이 식을 정도로만 입니다.”
“물론. 과욕은 부리지 않겠네.”
부디 상식적인 선을 지켜주시길.
부드러운 미소를 띠며 화기애애하게 약속한 후, 둘은 웃음기를 지우기도 전에 서로에게 주먹을 치켜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