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관의 요리사 212화 외전 6화
무의미하고 무책임하다는 점에서 술과 위로는 같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최소한 남을 위로할 수단으로 술 이외의 방법을 모르는 비사교적이고 무뚝뚝한 이들에게 둘은 같은 의미나 진배없었다.
태감의 잔에 말간 탁주를 가득 따르며 소년은 그래도 말뿐인 위로보다는 술 한잔이 더 나으리라 생각했다.
“태감님.”
“왜 그러느냐?”
끝자락까지 파삭하게 튀겨진 날개를 떼어내던 태감은 그것을 입에 쏙 집어넣고는 고개를 들었다.
발그레하게 상기된 얼굴에는 근심과 걱정의 그늘이 없었다. 취기가 머리끝까지 치민 것이리라.
헤벌쭉 올라간 입꼬리를 보던 소년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그냥, 더 드실 건지 여쭈려고 그랬습니다.”
“나는 좋다만, 너는 괜찮겠느냐?”
“태감님보다는 멀쩡합니다.”
귀하게 자라신 나으리답게 태감은 탁주 마시는 법을 전혀 몰랐다.
쌉싸름하고 맑은 청주완 달리 탁주는 달착지근한 데다 발포성이 있어 마시기 쉬운 술이었지만, 마시기 쉬운 만큼 절제하기도 어려운 술이었다.
거기에 뒤끝도 청주나 증류주보다 센 편이니, 분명 내일 아침은 된통 고생할 것이 뻔했다.
태감의 폭음을 어느 정도 부추기기는 했지만 설마 그가 이 정도로 무절제하게 마실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소년은 술독을 옆에 끼고 있는 태감의 모습에 탄식했다.
“뭐, 한 번쯤 당해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지.”
“응? 무슨 말 했느냐?”
“별말 안 했습니다. 마저 드십쇼, 더 튀겨올 테니.”
수북하게 쌓여 있었던 튀김도 어느새 동이나 그릇 밑바닥을 들어내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남은 두 마리를 태감과 나눈 소년은 그것을 몸통과 날개, 다리로 나눈 다음 입으로 가져갔다.
바삭바삭하고 기름진 날개와 오동통하게 살이 오른 다리도 훌륭했지만, 비둘기 튀김의 가장 맛있는 부분은 역시 섬세하고 촉촉한 가슴살이라 할 수 있었다.
오리보다는 담백하고 닭보다는 기름진, 두 가금류의 좋은 부분만을 취하여 빚어낸 듯한 그 달콤하고 보드라운 살점.
스스로 만든 튀김에 스스로 감탄하는, 남이 보면 퍽 우스운 짓을 하고 있던 소년은 이내 김이 식었다는 듯 탁주를 들이켰다.
그 역시 자신이 담근 것이었지만 알싸한 인삼 향이 감도는 탁주는 자찬이 부끄럽지 않을 만큼 훌륭했다.
맥주의 아성을 넘어서지는 못했지만, 소년은 막걸리 역시 튀김의 훌륭한 동반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목구멍을 찢을 듯 짜릿한 탄산과 청량함은 없지만, 그 대신 더 부드럽고 더 순하지 않은가.
소년은 어째선지 튀김의 절대적 반려로써 지배적인 평가를 얻었던 맥주에 대한 무한한 증오와 반발심이 샘솟는 것을 느꼈다.
취했다는 증거였다.
남은 비둘기를 마저 튀겨오겠다는 핑계를 대며 일어선 소년은 물독에 고개를 처박았다. 첨벙거리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사방으로 물이 튀었다.
취기를 몰아내기 위한 세수치고는 지나치게 과격한 행동이었으나 그 점을 지적할 이는 아무도 없었다.
“취했군. 너무 마셨나.”
태감은 한껏 취해도 좋았지만, 그는 취해선 안 되었다. 둘 중 하나는 맨정신이어야 남은 한 명을 챙길 것 아닌가.
지금껏 남을 챙겨야 하는 위치에 있었던 일이 별로 없었던 소년은 쓴웃음을 지으며 아궁이 앞에 섰다.
한번 데웠기 때문인지 기름은 금세 끓어올랐다.
창백한 유백색이었던 비둘기가 점차 우아한 황금빛으로 물들어가는 것을 보고 있던 소년은 문득 생각났다는 듯 태감을 향해 말했다.
“태감님.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말입니다. 여의주 말입니다. 남에게 옮길 수는 없습니까.”
무미건조한 어조로 내뱉어진 질문에 대한 답은 한참 후에야 돌아왔다.
술기운에 짓무른 숨을 몰아쉰 태감은 떨리는 손을 탁자 아래로 내린 후 입을 열었다.
“말하지 않았느냐?. 여의주를 품을 자질은 타고나는 것이다. 그렇기에 굴레인 것이지.”
“예. 그러셨지요.”
그냥 헛소리 한번 해봤습니다.
대단찮은 궁금증이었다는 듯 태감을 향해 손을 내저은 소년은 먹음직스러운 갈색으로 노릇하게 튀겨진 비둘기를 건지기 위해 뜰채를 집어 들었다.
땀에 젖은 머리칼이 착 달라붙은 그의 목덜미를 바라보던 태감은 갑작스레 입을 열었다.
“만약 그럴 수 있었다면, 네가 대신 떠안을 생각이었느냐?”
“아시다시피, 사람이 나이가 들면 무뎌지는 법입니다. 한창 예민하실 태감님보다는 제가 적임자일 것 같더군요.”
장난스럽게 내민 대답이었으나 그 속으로 품은 뜻까지 가벼운 것은 아니었다.
그 말을 꺼내기 전까지 그가 했을 고민과 각오를 곱씹으며 입술을 달싹이던 태감은 마음속에 담아둔 채 넘기려 했던 말을 결국 꺼내놓았다.
“하지만 설령 그럴 수 있다고 해도, 네가 책임을 떠안을 필요는 없지 않으냐.”
“이런 말이 우스우리란 건 알고 있습니다마는, 저 역시 황실의 일원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저에게도 의무란 것이 존재하겠지요.”
“의무란 그에 합당한 권리가 보장되었을 때나 주장하는 것이다.”
“권리를 누리고 있지 않습니까.”
이만하면 충분하지요. 무엇을 더 바랍니까.
죽어도 진작에 죽었어야 할 놈입니다. 두 눈 뜨고 멀쩡히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할 팔자에, 이제는 왕이라는 감투를 쓰고 앉아 갖은 호사를 다 누리고 있지 않습니까.
넉살 좋게 웃는 소년은 우둔해 보일 만큼 순박하여 태감은 그를 논파할 만한 날카로운 말들을 쏟아내지는 못했다.
그렇기에 태감은 소년에게 호소하듯 가냘픈 목소리로 뇌까렸다.
“그것은 네가 응당 누려야 할 당연한 권리다. 몸서리칠 만큼 가혹한 유년 시절만으로도 이미 황족의 의무는 넘치도록 치르고도 남았을 것이야.”
“이 이상 원한다면 과욕입니다. 태감님, 왕의 자리로도 만족을 못 한다면 그 위에는 하나뿐이지 않습니까.”
낄낄거리며 웃은 소년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술독을 향해 손을 가져가려는 태감을 만류했다.
한참을 아웅다웅한 끝에 태감에게서 술 바가지를 빼앗은 소년은 땀에 젖은 이마를 훔치고는 창문을 열었다.
어느새 먹구름이 갠 하늘은 좁은 창 안으로 찬란한 햇빛을 드리우고 있었다.
주방 안에 드리운 그늘을 쫓아 창틀을 넘은 햇빛은 태감에게까지 길게 드리웠다.
“태감님, 비가 그쳤습니다. 그만 가서 주무시지요.”
“그래, 그래야겠구나.”
휘청거리며 일어선 태감을 배웅하던 소년은 그가 뒤돌아 걸음을 떼기 전 작은 목소리로 당부했다.
“태감님. 혹여나 또 잠 못 드는 밤이 오면 말입니다. 기탄없이 말씀해 주십시오.”
술 한 동이 내오고 안줏거리 마련하는 거야 대단한 수고도 아니니.
멈춰선 태감은 한 박자 늦게 고개를 돌려 대답했다.
“그래. 그때가 되면 부탁하마.”
단조롭게 답한 후 휘적휘적 걸어가는 태감을 보며 실소를 흘린 소년은 탁자를 향해 시선을 돌리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탁자 위에는 아직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비둘기 튀김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이런, 확실히 취하긴 취하셨군. 튀김을 깜빡하시다니.”
이제 와 자러 간 양반을 다시 불러다 앉힐 수도 없는 노릇이니, 이건 애들 간식으로나 줘야겠군.
금세 남은 튀김을 처분한 방법을 생각해낸 소년은 뜻밖의 행운의 수혜자가 된 아이들을 찾기 위해 주방을 나섰다.
* * *
이튿날. 옛 선조들이 글귀와 구전으로 누누이 경고해 온 술의 폐해를 온몸으로 느끼고 있는 태감을 보며 소년은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침상 위에 늘어져 두통을 호소하는 태감은 마치 소금에 절인 배춧잎처럼 시들시들했다.
“태감님께 이런 말씀을 전하게 될 날이 올 줄은 몰랐습니다만. 참, 꼴 좋습니다그려.”
“분명히, 너도 나와 함께 마시지 않았느냐?.”
태감은 말쑥한 차림새의 소년을 보며 몹시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고통은 나눈다고 반이 되지 않지만, 최소한 같은 원인으로 통증을 호소하는 이가 옆에 있다면 동질감과 함께 위안거리는 되었을 것이다.
태감의 비참한 몰골과 남의 행복보다 불행에 더 관심을 두는 옹졸함을 비웃어주는 시간을 잠시 가진 후, 소년은 상쾌함 마저 느껴지는 미소와 함께 대답했다.
“그야 연륜의 차이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풍부한 연륜을 쌓았다면, 최소한 익숙지 않은 초보자에게 한두 마디 정도 귀띔해 줄 수도 있었을 텐데.”
“백문이 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인 법입니다. 태감님.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릴 백 마디 경고보다는 한 번 호되게 데여 보는 편이 더 확실하지요.”
뼈아픈 실패만큼 좋은 스승은 없다지 않습니까.
어린아이의 청아한 미성으로 낄낄거리는 소년을 보며 이불을 씹던 태감은 조금만 더 놀리면 베갯잇을 적시겠다는 각오를 담아 소년을 노려보았다.
다 큰 어른, 그것도 사례 태감에 동창 제독을 겸임했던 철혈의 사내가 베개에 고개를 파묻고 엉엉 우는 장관을 구경하기 위해 소년은 조금 더 공을 들이기로 했다.
“그러고 보니 말입니다. 어제 깜빡 두고 가신 분실물이 있더군요.”
“그래. 원래는 내 위장에 고이 담아 가지고 갔어야 할 것들 말이지?”
바삭바삭하고, 향기롭고, 달콤짭짤하면서도 기름진, 그리고 부드러운. 사람을 행복하게 해야 할 모든 요소가 충족되어 있었던 그 비둘기 튀김.
힘겹게 입술을 뗀 태감의 얼굴에는 비통한 심정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마치 망국의 미래를 예견한 충신과도 같은 애절한 슬픔이 맺힌 태감을 마주하며 소년 역시 침통함을 얼굴에 비쳤다.
“예. 보관이 어려운 물건이었는지라, 유감스럽게도…….”
“현장에서 적절한 이들에게 인계하였다?”
“마침 장소와 이삼이 배가 고파 보였기에.”
맛있게 먹더군요.
점잖은 마무리에 어울리는 통렬한 단말마가 푹신한 침상 위에 메아리쳤다.
떨어지는 잎새마냥 힘없이 고개를 떨군 태감에게서 시선을 돌린 소년은 창밖의 태양이 늦은 아침을 알리고 있음을 깨닫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조금 더 늦장을 부리면 아침이 아니라 점심을 준비해야 할 판국이었기에 소년은 다급히 돌아서려 했지만, 태감은 간절한 목소리로 그의 발걸음을 잡아챘다.
“내 아침은 뭐지?”
부디, 부디 어제 놓친 비둘기 튀김을 만회할 만한 음식이기를.
일말의 기대감이 담긴 애절한 목소리에 소년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흰죽에 조갯국입니다. 어쩐 일인지 싱싱한 모시조개가 들어왔더군요. 맑게 끓여서 송송 썬 파를 넣으면 시원하니 해장에는 으뜸이지요.”
“흰죽에 조갯국?”
“그럼 술병 나신 양반 아침상으로 잔칫상이라도 차려 올릴까요.”
태감은 멍한 눈을 들어 소년을 바라보았다.
병상에 누워 가냘픈 숨을 내쉬는 그 모습은 사람의 애간장을 끓게 할 만큼 애달팠으나 소년은 단호하기 그지없었다.
“자고로 숙취의 특효약은 물과 당분입니다. 주당들이 숙취를 호소할 때마다 꿀물을 찾는 것은 그런 이유지요. 꿀물 외에 배도 좋습니다만, 계절상 배를 구하기는 어려울 것 같군요.”
그리고 조개에는 숙취에 효과가 좋다고 하는 타우린과 호박산 또한, 다량 함유되어 있지요.
태감이 이해하지 못할 설명을 무심하게 이야기한 소년은 굳이 말할 필요 없었던 사족을 덧붙여 태감을 울상짓게 했다.
“참고로, 단 호위와 아이들에게는 평소와 다름없는 식단이 제공될 예정입니다.”
“평소와 다름없는 식단이라 한다면?”
“말 그대로 평소와 다름없이 평범한 아침상이지요. 오늘은 좋은 집오리가 들어왔더군요.”
아침부터 조금 무거울 것 같기는 하지만, 이왕 들어온 오리이니 속을 채워 뚝배기에 찔 생각입니다.
밤에 은행, 대추, 연밥, 구기자 등을 넣고 간장을 끼얹어 뼈가 무를 때까지 푹 조리면 밥반찬으로는 그만한 것이 없지요.
가만히 소년의 말을 경청한 후, 분명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한 아침 식사가 될 거라는 확신을 느낀 태감은 그렇기에 그 아침 식사에 자신의 자리가 없다는 사실에 몸서리칠 만큼의 분노를 느꼈다.
“그렇게 정성스럽게 내가 먹을 수 없는 아침 식사를 설명한 이유는 무엇이냐.”
“자주 찾아오지 않는 기회인지라 조금 욕심을 부렸습니다. 역시 통쾌하군요.”
“허어, 나는 그간 너와 나의 관계가 우애로 다져졌다 믿고 있었건만, 너는 늘 나를 골탕 먹일 생각만 하고 있었구나.”
“전적은 태감님이 앞서시지 않습니까. 모처럼 올린 일 승에 너무 야박하게 구시는군요.”
솔직히 후궁에서 태감님께 당했던 것을 생각하면…….
순간 떠오른 불쾌한 기억에 표정을 야차처럼 일그러뜨렸던 소년은 한껏 헛기침하여 표정근을 풀어주고는 상냥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아무튼, 효과는 확실하지 않습니까. 역시 탁주만 한 것이 없지요?”
“네가 말하는 효과가 육신을 극한의 상황에 빠뜨려 마음의 근심을 잊게 하는 거라면. 확실히 효과적이기는 하구나.”
“몸이 고단하면 잡생각이 안 드는 법입니다. 만복감은 짧지만, 숙취는 오래가지요.”
마치 효율과 합리성의 화신이 된듯한 소년의 말에 태감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소년의 확고한 사상은 태감에게 일평생을 함께해 오면서도 익숙해질 수 없었던 이질적인 차가움에 익숙해져야만 한다는 당위성을 만들어 주었다.
분명 심신의 건강을 생각해서라도 그편이 올바른 선택이리라.
이십여 년간 회의적인 입장을 고수해 왔던 태감이었지만 정수리에 정을 대고 내려치는 듯한 두통은 식어 있었던 그의 도전 욕구에 불을 붙여주었다.
어쩌면 도전욕이라기보다는 생존욕이라 부르는 게 더 적절할지도 몰랐지만.
태감의 말을 들은 소년은 웃음을 터뜨렸다.
“정중한 청주나 증류주에 비해 탁주가 좀 사납기는 하지요. 그래도 적절히 선을 지킬 줄만 알면…….”
“탁주는 마시기 쉬운 만큼 절제하기도 어려운 술이라 하지 않았느냐. 네가 보기에는 내가 절제할 수 있을 것 같으냐?”
“어……. 음……. 물론 대단히 어려운 일이겠지요.”
난제를 두고 고뇌에 잠긴 소년을 바라보며 피식 웃음 지은 태감은 가능성과 경우의 수를 계산하며 중얼거리는 소년을 내버려 둔 채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도톰한 솜이불의 방음성으로 세상과 자신을 완전히 차단한 후, 태감은 소년에게 끝까지 고백하지 못했던 진심을 조용히 흘렸다.
“이제 곧 여행을 떠나야 하는데, 언제까지 과거의 해묵은 족쇄에 발목 잡혀있을 수는 없지 않으냐.”
길고도 길었던 유년기와의 결별을 앞에 두고서, 태감은 여의주의 파편 아래로 격렬하게 맥동하는 심장의 고동을 느꼈다.
그 심장을 울리는 것이 익숙한 체념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두려움일지, 아니면 새로운 세계를 앞에 둔 이의 두근거림일지. 태감은 자신의 가슴에 귀를 기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