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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관의 요리사-211화 (211/314)

환관의 요리사 211화 외전 5화

지난줄 알았던 늦은 봄비가 또 한 번 하늘에 고개를 내밀었기에 그날 경사의 하루는 우울하기 그지없었다.

땅은 진창이었고, 장사치들은 울상이었으며, 강제로 집안에 연금당해야 했던 짓궃은 골목대장들은 종일 어머니의 치맛자락을 쥐고 칭얼거렸다.

우산장수를 제외한 모두가 한숨을 내쉰 날이었지만 경사의 한 구석진 철방 처마 밑에서만큼은 한숨 대신 경쾌한 콧노래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마침 잘됐다. 좀 살겠구만.”

“그러게나 말입니다. 비가 이렇게 반가웠던 건 처음인 것 같습니다.”

처마 밑에 쪼그려 앉아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소년과 표자승은 왕과 대상단을 이끄는 상단주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초라한 꼴을 하고 있었다.

피로와 땀에 푹 절어 있는 채로 비와 함께 몰려온 서늘한 바람을 쐬던 소년은 장대비를 헤치고 뛰어오는 두 명의 사람을 발견하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볏짚을 엮은 도롱이를 둘러쓴 두 명은 어린아이인 듯 체구가 작았다.

이유 모를 익숙함에 골몰하던 소년은 잠시 후 반가운 탄성을 지르며 일어섰다.

“전하!”

“할아버지!”

“전하든 할아버지든 호칭은 하나로 통일해야지. 아이고, 비도 오는데 어쩐 일이야? 이것 봐, 뺨이 차네.”

도롱이를 벗자 드러난 발그레한 뺨을 손으로 감싸며 아이들을 반긴 소년은 그들을 철방 안으로 들여보냈다.

“일단 들어와서 몸 좀 녹이렴. 옷도 금세 마를 거다.”

“응? 애들은 어쩐 일이냐?”

이글거리는 가열로 앞에서 쇠를 뒤집고 있던 백윤이 아이들에게 도롱이를 받아 가열로 근처에 거는 동안 소년은 미리 끓여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차를 내왔다.

설령 땀이 샘솟다 못해 증발할 만큼 뜨거운 가열로 앞에서도 차만큼은 뜨거운 걸 먹어야 한다는 제국인들의 집념을 소년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 덕분에 아이들의 몸을 데워줄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선 감사함을 느꼈다.

아이들에게 찻잔을 하나씩 들려주고 일하는 짬짬이 먹을 새참으로 가열로에서 검과 함께 구워낸 참깨빵 지마소병(芝麻燒餠)과 볶은 고기소를 내온 후에야 소년은 자리에 앉았다.

아이들은 빵을 반으로 갈라 고기소를 넣던 손을 멈추고는 소년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아, 먹던 건 마저 먹고. 아무튼, 어쩐 일로 왔니?”

“아웅, 태감께서 상황을 알아보고 오라고 하셔서.”

“그리고 혹시 돌아오실 때가 됐으면 저희가 모셔가려고 왔어요.”

고기소를 양껏 끼운 참깨빵을 오물거리며 대답하는 아이들이 귀여워 한 번 머리를 쓰다듬어준 후, 소년은 아이들이 입에든 것을 삼켰을 때쯤 근심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질문했다.

“태감께선 식사는 잘하고 계시냐?”

“으음, 드시기는 드시는데요.”

“잘은 안 드신다?”

“네……. 좀…….”

보나 마나 뻔하지. 밥상머리 앞에서 뚱한 표정하고 끼적끼적하고 있겠지.

안 봐도 훤하다는 듯 혀를 찬 소년은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래서 좀 어떠시니?”

“우웅…….”

볼에 한가득 물고 대답을 고민하던 장소는 양손을 머리에 붙이는 동작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양쪽 검지를 곧게 세운 그 동작이 뜻하는 바는 너무나 자명했기에 소년은 그만 웃음을 터뜨리고야 말았다.

“아주 단단히 뿔이 나신 모양이구나. 이거 거하게 한 상 차려드려야겠는걸.”

특히 오늘은 비가 거세니, 더욱 배가 고프시겠어. 소년이 중얼거린 말에 아이들은 의아함을 느꼈지만 소년은 대답하지 않았다.

잠시 기지개를 켜며 뻐근한 날갯죽지를 풀어준 소년은 백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영감, 일은 좀 어때.”

“넌 슬슬 손 떼도 되겠다. 뜨임질하고 날 가는 거야 표자승 저 친구만 있어도 충분하지.”

“그럼 오늘은 먼저 들어가 봐야겠수.”

“그려. 고생해라.”

도롱이는 장소와 이삼이 쓰고 온 두 개뿐이었기에 소년은 백윤에게서 우산을 빌려 써야 했다.

대나무로 살을 만들고 거기에 기름 먹인 비단을 붙여 만든 우산은 선명한 붉은색 바탕에 잉어와 연꽃이 그려진 고급스러운 물건이었다.

도저히 꾀죄죄한 노인네가 쓰고 다닐 만한 물건은 아니었기에 소년은 놀랍다는 듯 물었다.

“영감, 이건 어디서 난 거야? 꽤 좋아 보이는데.”

“왜. 어디서 훔쳐 왔을까 봐 그러냐.”

“영감 손기술 좋은 거야 알고 있었지만, 그런 쪽으로도 재주가 있을 줄은 몰랐네.”

하여간 저놈은 똥통에 빠뜨려도 입만 동동 뜰 거야.

잠시 소년의 밉살스러운 입술에 대해 저주를 퍼부은 백윤은 퉁명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내가 만든 거다.”

“영감이? 이거 보통이 아닌데. 아예 철방 때려치우고 우산장수 해도 되겠어.”

“미리 말해두겠는데 그거 비싼 거다. 비단은 안휘산이고 칠한 기름은 고래 기름이야. 대나무는-”

“그래그래. 고맙게 잘 쓸게.”

소년은 가엾게도 취미의 지옥에 빠져 버린 늙은 대장장이에게 건성으로 대답했다.

금전적 문제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본업과는 달리 취미는 투자비용의 상한선이란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분명 소일거리 삼아 시작한 일에 재미를 붙이고, 만족스러운 작품을 완성하기 전까지 퍽 돈을 썼으리라.

심지어 손잡이 부분에도 정교한 용무늬가 음각된 우산을 살펴보며 혀를 내두른 소년은 도롱이를 쓰고 나갈 채비를 갖춘 아이들을 향해 질문했다.

“혹시 태감께서 뭐 드시고 싶다 하신 건 없니?”

소년의 질문에 아이들은 이구동성으로 대답했다.

“고기요.”

“그야 고기겠지. 다만 고기도 종류가 좀 많잖니?”

두 발 달린 놈, 네발 달린 놈, 또는 다리가 아예 없는 놈.

소년은 자신이 던진 실없는 농담에 실소를 흘리고는 어깨 위로 우산을 걸쳤다.

자신의 작품이 세상에 처음으로 쓸모를 다하는 것을 보고 있던 백윤은 못내 걱정스럽다는 듯 소년의 등을 향해 소리쳤다.

“왕이라는 놈이 너무 헐렁하게 다니는 거 아니냐?”

“뭐 어때. 믿음직한 호위무사가 둘이나 있는데.”

아이들을 가리킨 소년은 한번 씨익 웃고는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철방을 나섰다.

그리고 그 뒤를 바삐 쫓아 나서는 장소와 이삼을 어이없다는 눈으로 보던 백윤은 헛웃음을 흘리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배짱 하나는 알아줘야 한다니까.”

“정말 대단하시지요.”

“그건 그렇고 다 쉬었나? 슬슬 일해야지.”

“예. 준비됐습니다, 어르신.”

어서 작업 마무리하고 저 녀석한테 술이나 얻어먹자고. 알싸한 인삼 향이 도는 탁주라 했지?

군침을 삼킨 늙은 대장장이는 다시 시뻘건 불꽃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젠 일을 할 시간이었다.

* * *

“다녀왔습니다.”

“왔느냐.”

고개를 팩 돌리고는 무뚝뚝한 어조로 답하는 태감의 꼴이 아주 가관이었기에 소년은 잠시 말문이 막혀 입을 열지를 못했다.

한껏 토라졌다는 것을 온몸으로 표현하고 있는 그 뾰로통한 표정과 공기가 잔뜩 들어간 볼, 발그레한 뺨에 새초롬한 눈초리까지. 그것은 소년에게는 너무나 버거운 것이었다.

자리를 박차고 달려들까. 아니면 의자를 사용할까. 아니면 얇고 넓적해 공기저항을 덜 받을 것 같은 찻잔 받침을 이용해 볼까.

세 치 혀보다 더 즉각적이고 단순한 방식에 익숙해진 소년은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그러쥐었다.

그리고 정치인 특유의 감각으로 소년의 손등에 솟아오른 핏줄을 포착한 태감은 재빨리 입을 열어 상황을 모면했다.

“커흠, 아무튼 일찍 왔구나. 검은 완성된 것이냐?”

“이제 막 담금질을 끝냈습니다. 아직 자루도 끼우지 못했는데, 완성은 멀었지요.”

“그럼 어쩐 일로?”

“그야, 비가 오지 않습니까. 태감님께서 또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전전긍긍하고 계실 게 뻔해서 좀 일찍 왔습니다.”

차마 걱정돼서 왔다고는 못하고, 타박하듯 툴툴거리는 소년을 보며 태감은 가만히 웃음 지었다.

그 가느다란 웃음을 올려다보던 소년은 피로감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늘 그랬습니까? 후궁에서부터?”

“늘 그랬지.”

“여의주를 받은, 그날부터?”

태감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소년은 고개를 떨구어 그의 가슴께를 보았다.

옷깃을 단단히 여몄지만, 소년은 그 속에 무엇이 있는지를 알고 있었다.

한 뼘쯤 되는, 그 투명하고 소름 끼치는. 황실의 신물이 그곳에 있을 것이다.

가뭄에 비를 내려 만백성을 살찌우는 용께서 이 제국을 가호하신다는 증거가.

“후궁에선 한 번도 내색하지 않으셨잖습니까.”

소년이 가까스로 쥐어 짜낸 그 한마디는 마치 책망처럼 들렸다.

그럴 의도가 전혀 없었는데도. 목소리가 잠겨 있었기 때문이다.

말할 때 입술을 깨물었기 때문일까? 아니, 어쩌면 책망이었을 지도 모른다.

진작 말해줬더라면. 조금이라도 더 빨리 말했더라면. 그저 말뿐만인 위로라도 전할 수 있었을 텐데.

무의미한 일일지라도 함께했을 텐데. 최소한, 잠 못 드는 밤을 위해 야식이라도 준비할 수 있었을 텐데.

소년은 혹여나 눈에라도 책망의 빛이 비칠까 고개를 숙였다.

태감의 대답은 한참 후에야 돌아왔다. 목소리를 가다듬을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때는 가면이 있었지. 늘 가면을 쓰고 다녔으니까. 견딜 수 있었다.”

“가면. 예, 그러셨지요. 후궁에선 가면을 쓰고 계셨지요.”

사례 태감의 가면.

동창 제독의 가면.

소년은 태감이 벗어두고 온 새카만 흑단 가면을 떠올렸다.

그의 얼굴 절반을 가려주었던 가면.

그 차갑고 단단했던 방패는 더는 존재하지 않았다. 후궁에 모두 두고와 버렸다.

야만성과 증오로 가득한 세계에 노출된 그의 나약한 민낯을 올려다보며 소년은 쓴웃음을 짓고는 입술을 비집어 열었다.

“한마디로, 일을 그만두니 할 일이 없어서 잡생각이 생긴다. 그 말이시군요.”

“정말 그럴지도 모르겠구나. 이제는 책임질 것이 없으니 마음이 붕 떠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어.”

태감은 빈정거리듯 뇌까린 말을 도리어 순순히 인정해 소년을 당황케 했다.

메마른 입속에서 공허한 말들을 웅얼대던 소년은 결국 고개를 떨구었다.

서툰 위로도, 무책임한 동정도 없는 건조한 침묵이 잠시 이어졌다.

혀뿌리의 수분기를 앗아가는 정적의 끝자락에서 태감이 난처한 표정으로 그를 굽어보고 있을 때, 소년은 갑작스럽게 일어서서는 태감의 손목을 쥐고 그를 일으켜 세웠다.

의아함을 느끼면서도 태감은 일으켜 세우는 힘에 저항하지 않았다.

“왜 그러느냐?”

“배가 고파서 그런가 봅니다. 배가 비어 있으니 근심스러운 게지요. 그득하게 차려 먹고, 거나하게 취하면 무슨 근심이 있겠습니까.”

그 어떤 해결책도 되지 못하고, 그저 순간을 모면하려는 제안이었으나 동시에 태감이 가장 바라마지않던 제안이기도 했다.

태감은 흉중에 꿈틀대는 이유 없는 불안과 근심의 틈 사이로 호기심이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

“뭘 만들 생각이지?”

“비 올 때는 역시 튀김이지요.”

“튀김. 그래, 비 올 때는 역시 튀김을 빼놓을 수 없지. 기름이 자글자글 끓어오르는 소리가 빗소리와 섞여든 그 화음은 선녀의 노랫가락과 같고, 진동하는 고소한 기름 냄새는 우울한 하늘의 시름을 잊게 하니.”

“그래서 오늘은 광동식 새끼비둘기 튀김인 취피유합(脆皮乳鴿)을 만들 생각입니다.”

살점은 보드랍고 육즙은 담백한데 뼈가 가늘어 바삭하게 튀기면 통째로 씹어먹을 수 있지요.

비 오는 날 톡 쏘는 탁주 한 잔 곁들여 먹기에 이보다 좋은 안줏거리가 또 없습니다.

소년의 말에 태감은 의아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탁주도 내올 생각이냐?”

“예. 원래 일 끝내고 영감이랑 마실 생각이었는데, 도저히 못 참겠군요.”

“어르신께서 서운해하시겠군.”

“괜찮습니다. 한 동이 더 담가 둔 게 있어서.”

건성으로 대답하며 태감을 주방으로 이끈 소년은 그가 주방 구석에 자리를 잡는 동안 창고에서 미리 준비해둔 새끼비둘기를 가져왔다.

새끼비둘기를 조리할 때는 우선 뜨거운 물에 살짝 데친 다음 찬물에 식혀 껍질을 단단하게 오그라들게 하는 것이 중요했다.

그리해야만 새끼비둘기가 튀겼을 때도 모양이 흐트러지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다음에는 간장과 설탕, 후추, 정향, 진피 등을 혼합하여 끓인 양념장에 맛이 배도록 십 여분 가량을 여열로 익혀준 다음, 꿀에 식초와 간장을 혼합한 양념을 발라가며 다섯 시간가량을 건조해 주어야 한다.

“원래 새끼비둘기를 튀길 때는 복잡한 준비과정이 필요합니다만, 오늘은 시간 관계상 미리 준비해 둔 재료를 쓰겠습니다.”

“언제 준비해 둔 것이냐?”

“너무 묻지 마십시오.”

“그래도…….”

“그럼 처음부터 준비해서 만들까요? 예? 식사가 다섯 시간쯤 뒤로 미뤄져도 괜찮으시다면야.”

날카로운 시선으로 태감의 입을 봉한 소년은 솥에 기름을 달구기 시작했다.

기름 온도는 180도 정도, 너무 뜨거우면 겉에 입힌 양념이 타 거무튀튀해지고 너무 미지근하면 뼈가 제대로 튀겨지지 않는다.

비둘기 튀김의 관건은 반지르르하게 윤기가 도는 껍질과 과자처럼 바싹한 뼈에 있었다.

튀기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섬세하고 여린 비둘기 고기는 과하게 튀기면 육즙이 모조리 빠져 퍽퍽하다 못해 뻣뻣한 육포처럼 되기 십상이었다.

겉 부분이 우아한 금빛이 되도록 충분히, 하지만 너무 여유 부리지 않고 적당히. 껍질에 말라붙은 꿀과 간장이 기름에 튀겨지며 향기로운 냄새가 피어오르고 자잘한 갈비뼈까지 바삭해졌을 때쯤, 소년은 비둘기를 솥에서 건져 도마 위에 올렸다.

“다 튀긴 비둘기는 크게 손댈 필요가 없지요.”

“애초에 이미 한입 크기지 않으냐. 먹기 좋게 썬다고 자잘하게 칼을 대면 더 볼품없어지겠지.”

앙증맞은 크기인 새끼비둘기는 반으로 가르기만 해도 충분했다.

등뼈를 기준으로 반으로 나눈 다음 산초가루 조금 섞은 소금을 곁들이면 완성.

소년은 흔한 이파리 한 장 장식하지 않고 수북하게 쌓은 튀김 그대로 상에 올렸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웠다.

자신의 시선과 수평을 이루는 높이까지 쌓인 튀김을 몽롱한 눈으로 바라보고만 있는 태감을 재촉하며 소년은 손으로 튀김을 집어 들었다.

“뜨거울 때 드십시오. 태감님. 설마 근심과 걱정에 짓눌려 식욕이 없으신 건 아니겠지요? 만약 그러시다면 어쩔 수 없군요. 저 혼자 포식할 수밖에.”

그 짓궂은 농담에 정신을 차린 태감은 소년의 얼굴을 한번 응시하고는 식사 예절이란 말을 내밀 수도 없을 만큼 저돌적인 동작으로 손을 뻗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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