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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관의 요리사-208화 (208/314)

환관의 요리사 208화 외전 2화

지평선까지 차오른 태양도 자욱한 안개에 질려 갈피를 잡지 못하고, 횃대에 앉은 닭도 첫울음을 망설일, 가장 부지런한 시녀도 아직 단잠에 빠져 있을 시간.

아직 새벽달이 지기도 전에 일어난 소년은 조금 이른 아침 식사를 준비했다.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단둘만을 위한 아침상이었기에 차림은 검소했다.

소년은 조금 걱정스러운 눈으로 자신이 준비한 아침 식사를 바라보았다.

물론 그와 마주 앉을 이가 상차림의 검소함에 불평할 것을 우려한 것은 아니었다.

소년을 걱정케 한 것은 서늘한 기온이었다.

밤사이 퍼붓던 봄비가 잦아들며 온기를 빼앗아갔기 때문에 피부에 와 닿는 바람은 소름 끼칠 만큼 차가웠다.

역시 이런 추운 아침에는 조금 더 든든하고 기름진 식사가 필요하지 않을까 고민하던 소년의 뒤로 묵직한 발소리가 들렸다.

소년은 한 박자 늦게 고개를 돌렸다.

“아침 운동은 잘하셨습니까?”

짙은 수증기의 장막을 헤치고 춤추는 더운 열기가 훅 밀려왔다.

굵은 땀방울을 떨어뜨리며 오른손에 검을 쥔 검수인 그의 호위무사는 섭섭하다는 투로 말했다.

“역시 상대가 없으니 재미가 없군. 다음번에 한 번 어울려주지 않겠나?”

“호된 경험은 한 번이면 족합니다. 정 심심하시면 도처에 널린 호위무사들에게 부탁해 보시지요.”

“아쉽군. 전하의 검을 다시 받아볼 날을 손꼽아 기다렸는데.”

“아직도 밤마다 흉터가 쑤신다는 사실을 굳이 고백하고 싶지는 않습니다만.”

소년이 앓는 소리를 내자 단혜림은 면목 없다는 표정을 연기했다. 그리고 그녀가 연기에 소질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한 소년은 입술을 비죽 내밀고는 아침상을 가리켰다.

“운동을 거하게 하셨으니 배가 고프시겠습니다. 먼저 드시고 계십시오. 뭔가 한 가지 더 차려 올릴 테니.”

“난 이거면 족한데, 뭘 더 차리려고. 태감은 아직 자고 있지 않나.”

“제가 먹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날이 쌀쌀해서 그런지 뭔가 기름진 게 먹고 싶군요.”

돼지 간과 완자가 들어간 죽에 고소하게 끓인 두유, 계란과 파를 넣고 구운 전병으로 차려진 식탁은 따스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어 참을 수 없을 만큼 식욕을 자극했다.

하지만 그의 충직한 호위무사는 고집스럽게 수저를 들지 않았다.

“어찌 모시는 주인보다 먼저 수저를 뜰까.”

“이럴 때는 주인 대접을 해주시는군요.”

“원한다면 조금 더 정중하게 대접해 줄 용의도 있네만.”

“흠, 매력적인 제안입니다만, 도저히 죽이 넘어가지 않을 것 같으니 사양하지요.”

소년은 너스레를 떨며 아궁이에 철과를 올렸다.

죽에 곁들여 먹을 반찬으로 소년이 고른 것은 안휘에서 막 들어온 기름진 납육이었다.

돼지 허릿살을 소금에 절여 훈연한 것으로 껍질은 불그스름한 갈색이었고 기름은 대리석처럼 하얀색이었으며 살은 연한 분홍빛이 돌았다.

소년은 납육을 납작하게 썬 다음 납육과 같은 두께로 썬 봄 죽순과 함께 센 불에 빠르게 볶아냈다.

고소한 기름 냄새가 주방 안에 진동하고 죽순이 돼지기름으로 반들반들 윤이 날 때쯤, 고춧가루 대신 바싹 마른 고추 두어 개를 손으로 부숴 넣는 것으로 요리를 완성한 소년은 철과째로 요리를 상에 올렸다.

“어서 드시지요. 그러다 죽 식겠습니다.”

소년이 죽사발을 들고 나서야 단혜림 또한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그녀의 젓가락이 가장 먼저 향한 곳은 죽순과 함께 볶은 납육이었다.

배어 나온 기름에 튀겨져 껍질은 반투명하게 빛났고 발그스름한 살점은 윤기가 자르르 흘렀다.

노르스름하면서도 뽀얀 빛이 도는 죽순과 함께 한 점.

소년은 마른침을 삼키며 그녀의 감상을 기다렸다.

꼬들꼬들하니 쫄깃한 껍질과 짭조름한 소금기가 배어든 살점, 풋풋한 향이 살아 있는 아삭한 죽순, 달큼한 돼지기름의 감칠맛에 스며든 혀끝을 알알하게 만드는 고추의 매운맛. 그리고 기름으로 번질거리는 혀 위로 스치는 너무 묽지도 되지도 않은 흰 죽의 맛.

“후우…….”

밍밍한 듯 싱겁고 무미한 듯 부드러운, 기름기에 사로잡힌 혀를 달래는 은근한 단맛.

긴 숨을 토해낸 단혜림은 꾸밈없는 솔직한 감상을 말했다.

“안타까운 일이군. 이 훌륭한 아침을 오직 둘이서만 누려야 한다니. 태감께선 속이 좀 쓰리시겠어.”

“태감님의 아침은 왕부의 요리사가 해줄 겁니다. 그 친구도 가끔은 일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비싼 월급 주고 있는데.”

“그래. 비싼 월급을 받는데 정작 일거리는 없어 전전긍긍하는 그 친구 말이지? 아랫사람의 사정을 굽어살피시는 전하의 온정에 감탄이 나오는구려.”

사려 깊게 포장된 지적에 소년은 씁쓰름한 웃음을 지었다.

변명을 열거하자면 한도 끝도 없겠지만, 소년의 입에서 내뱉어진 것은 담백한 것이었다.

“경황이 없었다는 말은 변명거리가 못되겠지요. 진작 신경을 써줬어야 했는데. 왕 노릇도 쉽지가 않군요. 역시 전 후궁의 노비 노릇을 할 때가 편했던 것 같습니다.”

끝자락에서 넋두리에 가까워진 소년의 말을 단혜림이 받았다.

“위를 보고 살다 보면 발밑에 소홀해지는 법이지. 하지만 아래를 보는 것도 금방 익숙해질 거요. 왕관의 무게가 원체 무거워서 말이지. 이런, 무거운 것을 머리에 쓰고 있으면 키가 안 클 텐데. 큰일이군. 한창 자랄 나이에.”

마지막은 짓궂은 농담에 가까웠다.

그에 맞장구를 치기 위해 입을 열었지만, 정작 소년의 입에서 튀어나온 것은 쓰고 케케묵은, 회한과 같은 한숨이었다.

“글쎄요. 이제 와 익숙해지기에는 제가 너무…….”

늙은 것 같습니다.

그 말은 소년의 입 안쪽에서만 메아리치고는 공허하게 흩어졌다.

대책 없이 비밀을 토로할 뻔한 자신의 경솔함에 대한 염증과 극적인 순간에 입을 다문 자신의 순발력에 대한 자부심이 동시에 공존하는 소년의 표정은 기묘한 것이었다.

“전하?”

의아함에 물든 그녀의 입을 바라보며 소년은 입가를 일그러뜨린 째 억지로 말을 쥐어 짜내었다.

“제가 너무……. 후궁 물이 깊게 든 것 같아서 말입니다. 십 년간 노비 노릇을 하며 살았는데…….”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옛말처럼, 적응할 거요. 책임의 무게를 실감할 때쯤 되면, 어색했던 용포도 자연스레 어울리게 되겠지.”

책임의 무게라.

소년은 평생 이보다 낯설게 들렸던 단어가 있었는지를 고민하며 고개를 까딱이는 척했다.

그리고 하릴없이 나이만 먹은 노인네를 한없이 부끄럽게 만드는 단혜림을 향하여, 가장 점잖은 대답을 내놓았다.

“그때까지 많은 지도 편달 부탁드리겠습니다.”

“전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만큼 신명을 다하여 보필할 것을 약속하지.”

“그렇다면. 흠…… 생색을 내려는 건 아닙니다만, 지금 당장 도움받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말씀하시구려.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얼마든지. 지금은 일개 호위대장일 뿐이니 변변치 않은 도움이 되겠지만, 이 두 팔로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최선을 다하겠네.”

그녀의 호언장담에 소년은 은근한 어조로 부탁했다.

“그럼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왕부의 열정 넘치는 호위무사들을 좀 때려눕혀 주시겠습니까? 조용히 나서고 싶은데, 좀 거추장스러워서 말입니다.”

그 말에 황당하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뜬 단혜림은 이내 사나운 미소로 화답했다.

* * *

왕부를 수호하는 호위무사들에게 협조를 구하는 것은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다만 소년의 예상과 조금 다른 부분이 있었다면, 그것은 단혜림이 소년의 부탁을 대단히 확대해석했다는 부분이었다.

소년은 정문을 지키는 호위 몇 명에게만 협조를 요청할 것을 부탁했지만, 단혜림은 왕부를 지키는 호위무사 전원에게 숙친왕의 암행에 협조할 것을 요청했다.

“굳이 그럴 필요까지는 없었을 것 같습니다만.”

소년의 떨떠름한 목소리에 단혜림은 단호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만약 몇 명의 인원에게만 협조를 구하고 빠져나갔다면 왕부에 큰 소동이 벌어졌을 걸세. 호위무사들이 전하를 찾겠다고 경사를 들쑤시고 다니면 모처럼의 나들이가 엉망이 될 텐데?”

“손대중은 하셨으리라 믿습니다.”

“걱정하지 말게나. 뼈가 부러진 사람은 없으니.”

비록 그 광경을 눈으로 본 것은 아니었지만 소년은 수십에 달하는 호위무사들이 어떻게 늘씬하게 두들겨 맞았는지를 선명하게 그릴 수 있었다.

마치 호랑이가 양 떼를 헤집어놓는 것처럼 가차 없이 유린당했으리라.

짧은 자유의 대가로는 과했다고 자책하며 소년은 거추장스러운 용포를 벗고 늘 입던 허름한 작업복으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당당한 걸음으로 왕부를 나섰을 때, 소년은 조금 전의 반성을 송두리째 잊어버린 채 탄성을 질렀다.

속세의 공기는 달콤했다. 소년은 자신도 모르게 감옥에서 출소한 것 같다는 심정을 고백하고야 말았다.

그 대답은 유쾌한 홍소였다. 양갓집 규수 출신치고는 지나치게 호방한 단혜림의 웃음에 장단을 맞춰 소년은 낮은 휘파람을 불었다.

모처럼 아이에게 어울리는 생기발랄한 웃음이 소년의 입에 걸려 있었다.

조롱과 한탄, 피로와 우울함으로 늘 우중충했던 소년의 평소 얼굴을 생각하면 참으로 진귀한 웃음이었다.

단혜림은 무례가 되지는 않을지 잠시 고민한 후 솔직히 말했다.

“평소에도 그리 웃으시면 참 귀여울 것 같은데.”

“많이 봐두십시오. 얼마 지나면 못 봅니다. 슬슬 옛날 얼굴이 그리워서 말이지요.”

소년의 말에 단혜림은 잠시 후궁에서 보았던 소년의 얼굴을 떠올리고는 뭐라 정의할 수 없는 해괴한 기분에 잠겨 들었다.

자신의 호위무사가 심각한 고뇌에 잠긴지도 모른 채 소년은 경쾌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발걸음이 처음으로 당도한 것은 다름 아닌 빙당호로(氷糖葫芦)를 파는 노점이었다.

가느다란 나무 꼬치에 빨간 산사나무 열매 열 개. 그리고 반짝반짝 빛나는 설탕 옷.

빙당호로를 양손에 들고 돌아온 소년은 천진하게도 그중 하나를 단혜림에게 내밀었다.

“이건?”

“저런, 모르십니까? 빙당호로라 하는 간식거리입니다. 혹은 당호로(糖葫蘆)라고도 하지요. 산사나무 열매가 보통이지만 계절에 따라 딸기나 포도, 명자나무 열매를 쓰기도 하는 경사의 전통 간식이지요.”

말을 마친 소년은 꼬치에 꿰인 산사나무 열매를 입에 넣었다.

아삭하고 깨지는 설탕 옷과 시큼한 산사나무 열매의 맛.

늘 그를 실망시키는, 하지만 어째선지 눈에 보이면 무심코 주머니를 열게 되는 그 맛.

소년은 실소를 흘리며 빙당호로를 먹어치웠다.

소년이 서푼짜리 추억을 먹어치우는 동안 그의 동행인은 침묵한 채 그것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열매를 다 빼먹고 꼬치에 남은 설탕을 갉아먹은 후, 꼬치를 이쑤시개 대용으로 사용할 것을 고려하던 소년은 길게 이어지는 정적을 견디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빙당호로가 마음에 들지 않으시면 바꿔오지요. 제법 먹을 만한 간식이 많습니다.”

북적거리는 시장통의 입구였기 때문에 근처엔 바쁜 상인들을 대상으로 한 노점도 제법 있었다.

돼지 내장을 숭덩숭덩 썰어 넣은 국수, 민물 생선 완자를 띄운 죽, 구운 닭에 신선한 돼지 피로 만든 순대. 개중에는 잔술을 파는 노점도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단혜림에게서 돌아온 대답은 싱거운 것이었다.

“아니, 이거 하나면 족하네.”

소년은 못내 아쉬운지 입맛을 다시며 잔술을 파는 노점을 힐끗거렸다.

아마 탁주인 듯 탁한 유백색 액체가 넘실거리는 항아리를 곁눈질하던 소년은 신중하게 빙당호로를 관찰하는 단혜림을 보며 중얼거렸다.

“슬슬 드시지요. 혹시 가보로 물려주실 생각이 아니면.”

“그것도 고려해 볼 문제로군. 처음으로 맛보는 빙당호로의 감동을 후손들에게도 전해줘야지.”

“처음이십니까?”

“엄격한 집안에서 자란 터라.”

그녀가 이부 상서의 금지옥엽이라는 사실을 떠올린 소년은 그럴 만하다고 생각했다.

이 시대는 규중의 아가씨들에게 요구하는 것이 너무 많았다.

“확실히 꼬치를 무는 것이 그리 품위 있는 행동은 아니지요.”

“나름 유년 시절의 선망의 대상이었단 말일세.”

“예, 알겠습니다. 편히 즐기시지요.”

소년의 동의를 얻은 단혜림은 경건함마저 느껴지는 태도로 빙당호로를 입에 넣었다.

어린 시절의 못다 한 숙원을 풀겠다는 듯이 조심스럽게 씹고 진득하게 맛본 후, 그녀는 입을 열었다.

“이런 맛이었군.”

무덤덤했지만, 그녀의 목소리에는 숨길 수 없는 실망감이 묻어나왔다.

그녀가 자신의 감정을 숨김없이 내비쳤다는 사실에 놀란 소년이 그녀가 더는 안양비가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자신들의 위치와 관계를 재확인하며 소년은 헛웃음을 흘렸다.

“기대하셨던 것만큼은 아니지요?”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렇군. 난 조금 더 환상적인 맛일 줄 알았네.”

“현실은 때때로 실망스럽지요. 꿈은 꿈인 채 놔두는 것이 좋았을지도 모릅니다.”

소년의 착잡한 말에 단혜림은 동의하지 않았다.

“하지만 꿈꾸던 기대감을 배신했다 하여 현실을 원망할 필요는 없지.”

유년기의 추억에 작별을 고한 후, 단혜림은 실망과 체념 따위의 우울한 그림자 따윈 조금도 남아 있지 않은 당당한 표정으로 소년에게 손짓했다.

모시는 주인에게 길 안내를 명령하는 호위무사라니. 오묘한 눈으로 그녀의 손끝을 바라보던 소년은 이내 쓴웃음을 짓고는 앞장서서 뒷골목으로 들어섰다.

소년은 그녀를 음침한 뒷골목 길의 한 귀퉁이로 인도했다.

도대체 무엇을 말려놓은 건지 짐작도 가지 않는 수상쩍은 약재들을 진열해 둔 약재상을 지나 장물아비들의 호객행위를 거쳐, 정체를 알 수 없는 고기를 걸어둔 푸줏간을 끼고 돌면 나오는 허름한 철방.

소년은 성큼 걸음으로 철방 앞까지 당도한 다음 예의 바르게 문을 걷어찼다.

“이 염병할 놈아! 집 무너지겠다!”

예의 바른 인사에 어울리는 공손한 화답이 돌아왔다.

곰방대를 문 채 씩씩거리며 나온 대장장이 노인을 보자마자 소년은 정겨운 덕담을 참지 못했다.

“영감쟁이도 오랜만에 보니까 반갑네. 아직 가기 전에 와서 다행이야.”

“하여간 오사랄 놈 같으니. 쌍판대기만 펴졌지 반 토막 난 혓바닥은 그대로야 아주.

“영감만 할까.”

마치 철천지원수처럼 으르렁거리며 서로를 헐뜯기 시작한 둘을 보며 단혜림은 멀거니 서서 둘의 친목 활동이 끝나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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