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관의 요리사-206화 (206/314)

환관의 요리사 206화

살랑이는 봄바람이 콧잔등을 간지럽히고 따사로운 햇살이 귓바퀴에 속살거리는 봄기운 완연한 아침.

숙친왕부의 주방에선 아침부터 숙친왕(肅親王) 진연운(秦聯雲)과 왕부의 요리사의 실랑이가 한창이었다.

“전하!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어찌 존귀하신 손으로 칼을 쥐신단 말입니까!”

“어허, 칼을 쥐는 것에 신분이 어디 있단 말인가.”

솔직한 심정으로는 ‘너 나보다 요리 못하잖아’라고 쏘아 붙여주고 싶었지만, 차마 젊은 싹을 꺾을 수 없었기에 소년은 평소 함양할 기회가 부족했던 인내력을 한계까지 쥐어짜 요리사를 설득했다.

“크흑, 전하! 소인에게 부족한 점이 있었다면 말씀해주십시오!”

“아니, 자네가 부족한 것이 아니라.”

“전하!”

마지막에는 거의 윽박지름에 가까웠던 소년의 간곡한 설득 끝에 요리사는 우울한 얼굴로 주방을 떠났다. 진땀으로 흥건한 이마를 훔친 소년은 푸념하듯 한숨을 쉬었다.

“하여간, 왕 자리가 뭐라고 제 밥도 못 차려 먹게 해. 왕은 손이 없어 발이 없어.”

“으음, 그래도 황족으로서의 위신이라는 게…….”

“우리 삼이, 아침 먹기 싫구나?”

실랑이가 끝날 때까지 멋쩍은 얼굴로 주방 한편에 서 있었던 장소와 이삼은 소년의 말에 된서리라도 맞은 양 화들짝 놀랐다.

있었으면 좀 거들 것이지, 소년은 괘씸한 마음에 짐짓 화가 났다는 듯 표정을 굳혔다.

“오늘은 해남계반(海南鷄飯)을 하려고 했는데. 아침이 먹기 싫은가 보구나? 그럼 어쩔 수 없지. 하긴, 아침 한 끼 정도는 걸러도 괜찮지.”

“그게 아니라…….”

“그러니까요. 삼이 너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정말 실망이야. 할아버지, 전 아침 곱빼기로 먹을래요.”

“야!”

아옹다옹하는 아이들의 재롱은 그 어떤 완고한 노인도 버티지 못할 만큼 귀여웠다.

금세 애간장이 흐물흐물 녹아버린 소년은 입꼬리를 한껏 끌어올린 채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그래. 이왕 온 것, 해남계반 만드는 법 한번 배워볼 테냐?”

“네!”

“요거 하나만 잘 만들어도 평생 밥 굶을 일은 없단다. 맛도 좋고, 많이 준비해둘 수 있고, 무엇보다 손님들이 금세 먹어치워서 회전율도 빠르지.”

거나하게 식당을 차릴 필요도 없이, 그냥 노점상 하나 내서 팔아도 좋단다.

다정한 어조로 말하던 소년은 도마 위에 큼직한 닭을 올렸다.

“닭은 살집이 두툼하고 너무 질기지 않은 거면 어떤 닭도 좋지만, 역시 제맛을 내려면 해남 문창에서 나는 문창계(文昌鷄)를 쓰는 게 좋단다.”

피를 빼고 뜨거운 물에 데쳐 깃털을 제거한 닭의 배를 갈라 내장을 제거한 소년은 아궁이에 불을 지핀 다음 철과를 데웠다.

“해남계반은 반드시 통으로 조리해야 한단다. 토막을 치면 물에 육즙이 다 빠져 살이 푸석푸석해지고 감칠맛이 덜해지거든.”

껍질을 까지 않은 생강과 마늘을 노릇하게 튀겨낸 소년은 파의 푸른 잎으로 그것들을 감싸 닭의 배에 채워 넣었다.

그다음 나무 꼬치로 닭의 배를 빈틈없이 여미고, 소금 한 술을 닭에 골고루 바른 후에야 소년은 솥을 불에 올렸다.

“해남계반의 핵심은 쫄깃하고 차진 살에 있단다. 그 식감을 얻기 위해선 수고를 들여야 해요. 원래 사람 입에 들어가는 건 맛있으면 맛있을수록 귀찮은 법이란다.”

끓기 전에 한 숟갈, 끓은 후에 한 숟갈씩 소금을 넣어 물에 간을 맞춘 소년은 끓는 물에 닭을 담근 다음 정확히 5분이 지나자 닭을 건져냈다.

“자, 닭을 건진 다음 재빨리 찬물에 헹구고, 다시 삶는 걸 반복하면 살이 쫀쫀하면서도 부드러워진단다. 고기는 연한 복숭앗빛을 띠고, 뼈에는 살짝 핏기가 고인 듯해야 잘 삶아진 닭이라는 걸 명심하렴.”

마지막으로 다 삶아진 닭은 바람이 잘 통하는 곳에 걸어 겉을 살짝 말린다.

열 마리 가까운 닭을 갈고리에 꿰어 장대에 건 소년은 뻐근한 어깨를 돌리며 실소를 흘렸다.

“하여간, 잘 먹는 사람이 둘이나 있으니 아침 차리는 것도 중노동이라니까.”

“단 호위님도 정말 잘 드셨죠.”

“어쩌겠냐. 칼 쓰는 사람은 잘 먹어야지. 그에 비해 그 양반은 하루 종일 빈둥대면서 뭔 놈의 밥은 그냥…….”

하여간 일 안 한다고 아주 폐인이 다됐어. 어휴, 이래서 사람이 일을 손에 놓으면 안 되는 건데.

구시렁거리던 소년은 솥에 쌀과 파를 넣고는 닭 삶은 국물을 조금씩 부어가며 볶기 시작했다.

“해남계반의 두 번째 핵심은 바로 이 닭고기 국물로 지은 밥이란다. 닭 육수로 밥을 지으면 밥알에 닭기름이 반지르르하게 도는 것이 간장만 살짝 쳐서 먹어도 별미지.”

쌀알이 투명해지면 닭 육수를 넣어 밥을 짓고, 남은 국물은 후추와 소금으로 간을 해 곁들이 국물로 낸다.

밥에 뜸이 들 때쯤 굽혔던 허리를 편 소년은 문득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그러고 보니, 그 양반은 일어났니? 슬슬 아침 먹을 시간인데.”

“그게, 단 호위님이 깨우러 가기는 하셨는데…….”

“하여간 남들 잘 때 처 잤으면 남들 일어날 때 일어나야지. 염병할 양반 같으니.”

가장 존귀한 자리에 올랐음에도 소년은 솔선수범의 모범을 보이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칼을 쥔 채로 한달음에 태감의 방까지 뛰어간 소년은 비호와 같이 방문을 걷어차며 노호했다.

“이 양반아! 해가 중천이다.!”

후궁 제일의 권력자. 사례 태감이자 동창의 제독. 한때 황제의 심복으로서 정계를 주름잡았던 사내는 항거할 수 없는 봄의 나른함에 취해 침대 위를 뒹굴거리고 있었다.

솜이불을 도롱이처럼 감은 채 늘어진 그 모습은 꼭 배부른 고양이처럼 게을러 보였다. 태감을 노려보던 소년은 사나운 시선을 딴청을 피우고 있던 단혜림에게 돌렸다.

“단 호위?”

“커흠, 그래도 용의 피를 물려받으신 황족이신데. 거친 방법으로 깨울 수 없더군.”

“그러시겠지요. 먼저 가 기다리십쇼.”

“전하께선?”

“좀 거친 방법으로 깨우려 그럽니다.”

번뜩이는 칼날에서 떨어지는 핏물을 본 단혜림은 마치 다가올 폭풍을 예견한 듯한 비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후 방을 나갔다.

그녀의 발소리가 멀어진 것을 확인한 후 소년은 고개 숙여 태감의 귓가에 속삭였다.

“마지막 기회를 드리지.”

소년은 태감에게 충분한 기회를 주었고, 태감은 끝까지 그의 기대를 저버렸다.

엄숙히 그가 일어나기를 기다렸던 소년은 끝까지 일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는 그의 의지를 존중하여, 조용히 발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이 화상아! 여행 당일까지 늦잠이냐!”

거센 포효와 함께 그를 걷어찼다.

* * *

“아야야, 기상 방법이 너무 호쾌하지 않으냐.”

“여행 당일까지 늦잠을 잔 사람이 잘못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흠흠, 여행에 대한 기대감에 잠을 제대로 못 자서 그런 거다.”

“얼씨구, 동심 한번 풍부하십니다.”

소년의 등쌀에 못 이기겠다는 듯 엄살을 부리던 태감은 화사하게 차려진 아침상에 탄성을 내질렀다.

고소한 향기가 솔솔 피어오르는 따끈한 밥에 하얀 닭고기. 그리고 닭고기를 콕 찍어 먹을 간장과 고추기름. 태감은 감격스럽다는 듯 소년을 바라보았다.

“닭고기와 밥. 아침 식사로 이보다 더 훌륭한 조합은 세상에 없을 것 같구나.”

“여행길을 준비해야 하니 조금 든든하게 차렸습니다.”

“그래도 마차를 타고 있으면 금방 꺼지겠지?”

“그럼 멈춰서 먹고 가지요.”

급히 가는 여행길도 아닌데, 배고프고 피곤하면 멈춰서 쉬고 가지요. 문제 될 게 뭐 있겠습니까. 소년의 퉁명스러운 말에 태감은 한껏 고양된 어조로 대답했다.

“그렇지. 우리가 가는 건 일이 아니라 유람이었지.”

“그러다 밥 식겠습니다. 태감님.”

“사설이 길었나. 자, 어서 먹자꾸나.”

태감은 식사를 시작하기 전 식탁에 둘러앉은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소년과 단혜림. 그리고 장소와 이삼. 함께 여행을 떠날 길동무들을 낱낱이 살핀 태감은 자신이 첫술을 뜨기를 기다리는 이들의 시선에 서둘러 숟가락을 들어 올렸다.

닭고기와 밥. 국물. 갈등하던 태감의 숟가락이 가장 먼저 향한 곳은 검은 후추알갱이와 파가 떠올라 있는 따끈한 국물이었다.

길고도 길었던 한밤의 공복에 메마른 혀뿌리를 축이는 감로수와 같은 육수. 알싸한 후추 향 물씬 피어오르는 그 진한 국물을 머금은 태감의 입술에는 반들반들 윤기가 돌았다.

“그래. 역시 아침의 시작은 국물이어야지.”

잠들어 있던 위장이 너무 놀라지 않도록. 상냥한 온기로 첫술을 뜬 태감이 다음으로 선택한 것은 닭기름이 스며들어 매끄럽게 빛나는 쌀밥이었다. 고추기름과 간장.

두가지 양념 사이에서 고민하던 태감은 조언을 구하기 위해 소년을 바라보았다.

“전통을 원하신다면 간장. 파격을 원하신다면 고추기름입니다만. 개인적으로 첫술은 간장을 권해드립니다.”

“전통은 간장이라.”

대추와 마른 고추 등을 넣어 숙성시킨 간장은 달착지근한 감칠맛이 돌았다.

너무 짜지 않게. 신중하게 간장을 친 다음, 태감은 아무 밑반찬 없이 밥만 가득 떠 입에 욱여넣었다.

“밥만으로도 맛있구나.”

“그야 육수로 지은 밥이니, 어느 정도 간이 되어 있지요.”

간장을 슬쩍 친 것뿐이었는데도 밥은 씹으면 씹을수록 달큰한 맛이 샘솟았다.

닭기름의 진득한 고소함이 배어든 밥 알갱이를 볼이 미어지도록 밀어 넣고 씹던 태감은 밥이 절반쯤 넘어갔을 때 국물을 한껏 들이켰다.

국물이 밥과 함께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그 묵직하고 뜨거운 감촉. 그 만족감. 그릇 가장자리에서 입술을 뗀 태감의 볼은 발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그래. 역시 아침에는 따뜻한 밥을 먹어야지.”

“밥만 드시지 말고 고기도 좀 드시지요.”

“그럼, 어찌 밥상의 주역을 홀대할까.”

살점이 도톰하게 붙어 있고 껍질이 착 달라붙은 가슴살을 집어 든 태감은 고민 없이 그대로 입으로 가져갔다.

쫄깃쫄깃한 껍질과 촉촉한 가슴살, 탄력 있는 다리와 허벅지, 기름진 날개. 때로는 간장에, 때로는 고추기름에 찍어 먹고. 마지막으로 밥에 올려서. 네 마리 분량의 닭을 먹어치우고 나서야 태감은 배를 두드리며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었다.

“배부르게 잘 먹었구나. 역시 아침을 든든하게 먹어 줘야 하루가 활기 차다니까.”

“후식은 해남식 찹쌀떡인 야사나미파(椰丝糯米粑)입니다.”

“해남의 떡이라. 소로는 뭐가 들어 있느냐?”

“말린 야자 과육과 땅콩, 깨 등을 설탕으로 버무려서 소로 넣었습니다.”

야자나무잎을 접어 만든 그릇에 예쁘게 하나씩 담겨 있는 찰떡은 아무리 배가 불러도 하나쯤 먹지 않고는 넘어가지 못할 만큼 달콤해 보였다.

설탕물에 담뿍 적셔진 야자 과육은 아삭아삭하니 경쾌했고 얇은 찹쌀떡은 야들야들했다.

“이것 참, 배가 부른데 멈출 수가 없구나.”

“천천히 드십쇼. 차도 좀 드셔가면서.”

결국 태감의 아침 식사는 여덟 개의 찹쌀떡과 세잔의 차로 끝이 났다.

이젠 더 들어갈 구석이 없다는 양 가쁜 숨을 몰아쉬던 태감은 다 먹은 접시를 치우는 소년을 바라보며 멋쩍게 웃었다.

“무척 염치없는 소리인 것은 안다만, 배가 부르니 여행가기가 귀찮아지는구나.”

“내 그럴 줄 알았습니다.”

하여간, 배가 부르면 엉덩이가 무거워진다니까. 키득거리던 소년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여 태감을 놀라게 했다.

“가기 싫으시면 내일 가지요.”

“괜찮겠느냐?”

“뭐 어떻습니까. 하루 늦게 간다고 명승지가 도망을 가겠습니까. 특산물이 씨가 마르겠습니까.”

그동안 쫓기듯 살지 않았습니까. 여유 좀 부린다고 욕할 사람 없습니다.

치우던 그릇을 내려놓고 태감 앞에 마주 앉은 소년은 반쯤 내려온 태감의 눈꺼풀을 보며 자신 또한 입을 쩍 벌려 하품했다.

그걸 본 태감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중얼거렸다.

“믿기지 않는구나. 네게 이렇게 유한 부분이 있었다니.”

“저도 원래는 부드러운 사람입니다. 후궁이 원체 지랄 맞은 곳인지라 성질을 버려서 그렇지.”

“그래. 후궁은 그런 곳이지. 짐승과 똑같아. 무시무시한 모습으로 자신을 치장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가 없지.”

말없이 서로를 마주 보던 둘은 갑작스럽게 웃음을 터뜨렸다. 이제야 자신들이 살아남았음을, 혹독했던 겨울을 이겨냈음을 실감한 안도의 웃음이었다.

“정말 잘도 살아남았습니다.”

“그러게나 말이다. 어떻게 죽지 않고. 참 잘도 살아남았어.”

“위험한 일도 많았지요. 반쯤 목숨 내놓고 살았는데도 이렇게 멀쩡히 살아있는 걸 보면, 인명재천(人命在天)이라는 말이 사실인가 봅니다.”

“위험한 순간도 많았지. 칼을 맞고, 독에 중독된 적도 있지 않느냐.”

그땐 정말 죽는 줄 알았지요.

가슴께를 쓸어 만지던 소년은 단혜림이 있는 방향을 슬쩍 보고는 쓴웃음을 지었다.

여러 목숨의 위협을 넘겨왔지만, 그중 가장 간담 서늘했던 것은 역시 그녀와의 대결이었으리라.

“그때는 도대체 무슨 객기였는지.”

“정말 살아남은 게 용한 일이었지. 그때 그녀는 참 무서웠어.”

“전 그래서 지금도 높임말 쓰지 않습니까.”

아마 평생 말 못 놓을 것 같습니다.

소년의 말에 태감 또한 동의했다. 상전 모시듯 모시고 살아야 하는 부하를 보며 둘은 무거운 숨을 토해냈다.

“어쩌겠습니까. 풀어주자니 칼 들고 쫓아올 것 같아 무섭고. 그냥 옆에 두고 잘 모셔야지요.”

“그래. 아군인 동안에는 안전하지 않으냐.”

“참, 왕 신세 처량합니다그려.”

“법 위에 칼이 있는 법이다.”

낄낄거리며 농담을 나누던 둘은 술잔 대신 찻잔을 부딪혀 건배했다. 씁쓰름한 찻물을 들이켠 소년은 드물게도 우수에 젖은 눈으로 태감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아주 짧은 시간 동안 벌어진 일이었다. 태감이 눈치채기 전에 눈을 감은 소년은 곧 기운찬 어조로 말했다.

“여행길 먹는 밥이 아무리 맛있어도 역시 집에서 편히 먹는 밥만은 못한 법이지요. 여행길 동안 그리울 일 없도록 오늘은 실컷 먹고 푹 자는 걸로 하지요.”

“참으로 명안이로다. 역시 나이에서 우러나온 연륜인 것인지, 너는 늘 그 깊은 지혜로 나를 놀라게 하는구나.”

“객쩍은 소리 말고 들어가 주무십쇼.”

태감을 등 떠밀어 보낸 소년은 마지막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의 입가에는 진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배불리 먹었으면 자야지요. 안 그렇습니까?”

모두 좋은 꿈 꾸시길 바랍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