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관의 요리사-205화 (205/314)

환관의 요리사 205화

혼탁한 시야 너머에서 불빛이 아른거린다. 번갯불처럼 치달아 어둠 속에서 번뜩이고, 이내 잦아든다.

뇌리에서 점멸하는 찰나의 섬광.

명멸하는 불빛에 관해 사유하던 소년은 이내 그것이 통증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왼쪽 슬개골과 대퇴골. 굽은 척추의 마디마디. 얼굴 거죽. 간헐적인 비명과도 같이 헐떡이는 통증은 마치 깊은 곳에서 춤추는 불꽃과도 같았다.

뼈마디와 근육의 틈새. 헐떡이는 핏줄과 힘줄, 전율하는 신경계. 그 틈새에 스며든 어둠을 밝히는 그 뜨겁고도 찬란한 열기는 어딘가 익숙한 것이었다.

육신의 흐느낌. 작열감과도 같은 통증을 객관적으로 받아들이며 소년은 통증의 기원에 대해 고민해 보았다.

두껍게 쌓인 세월의 더께를 조심스럽게 들추고 그 안쪽에서 누렇게 변색된 해묵은 기억을 끄집어낸 소년은 그것이 그리 오래전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여름의 일이었다. 기이한 가면을 쓴 태감. 반룡궁 지하의 수로. 거대한 용의 석상. 황실에 충성을 맹세하며 느꼈던. 뼈마디를 태우는 통증은 그때와 흡사했다.

‘그렇다면 역시. 그때…….’

생각은 이어지지 않았다.

통증이 아닌 외부의 자극. 부드러운 두드림과 그를 부르는 목소리는 꿈의 경계에 걸쳐져 있던 소년을 강제로 부상시켰다.

부드럽고 달콤한 꿈의 저편에서 차갑고 날카로운 현실로 내동댕이쳐진 소년은 거친 욕설을 내뱉으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좋은 꿈 꾸셨습니까.”

“현실의 비참함이 여실히 느껴질 만큼.”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울린다. 불쾌하다는 듯 인상을 찌푸린 소년은 무의식적으로 왼쪽 다리를 까딱거렸다.

의도한 동작은 아니었으나 그의 무릎은 부드럽고도 곧게 펴졌고, 그에 놀란 소년은 힘을 주어 무릎을 굽혀보았다. 완만한 각도로 구부러지고, 다시 펴진다. 소년이 진정할 때쯤 그를 지켜보고 있던 문일은 동경을 가져왔다.

“한번 보시지요. 전하.”

“흠, 어디. 얼마나 반반해졌는지 한번 볼까.”

말간 동경 위로 비치는 얼굴을 확인한 소년은 거한 한숨을 몰아쉬었다. 동경에는 그야말로 ‘깨물어주고 싶을 만큼’ 귀여운 사내아이의 얼굴이 비치고 있었다.

가늘고 섬세한 턱선. 발갛고 통통한 볼에 앵두빛 선명한 입술. 오뚝하고 수려한 코. 그러나 세월의 무게에 찌든 날카로운 눈매만큼은 여전했다.

하지만 그 살벌한 눈매를 고려하더라도 동경에 비친 얼굴은 소름 끼칠 만큼 귀여웠다. 한순간에 절세 미소년으로 탈바꿈된 소년이 내뱉은 첫마디는 간결한 것이었다.

“기생오라비처럼 생겼네. 젠장.”

“커흠, 전하.”

“사내새끼 얼굴이 왜 이 모양이야. 턱 뾰쪽한 거 봐라. 한 대 툭 치면 부러지게 생겼네. 이래서 힘이나 쓰겠나.”

“전하?”

“차라리 전 얼굴이 나았어. 그 얼굴은 중후하니 관록이 있어 보였는데. 이건 영.”

거, 얼굴만 예전 걸로 바꿀 수는 없나?

소년의 확고한 취향은 천하의 전 동창 제독마저 당황하게 했다. 마치 구름과 꿀과 설탕 과자로 빚어놓은 것만 같은 천상의 미소년보다 지옥 유부에서 기어 올라온 흉악한 귀신 같은 얼굴이 마음에 든다는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지만, 문일은 존귀한 용의 혈족의 요망에 성실히 답했다.

“금제가 풀린 혈도가 안정되고 기맥이 제자리를 찾기까지 반년 정도 시간이 필요합니다만. 몸이 회복되신 이후에는 가능합니다. 얼굴을 변형시키는 금제는 비교적 몸에 부담이 적어 일상생활에서 유지해도 몸에 무리를 주지 않지요.”

“그럼, 반년만 지나면 가능하단 말이지?”

반년 정도라면야.

거울을 들여다보며 자신의 얼굴을 관찰하던 소년은 안 되겠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역시, 그 양반이랑 똑같이 생겼군.”

“오운 황자님을 말씀하시는 거로군요.”

“그 양반이 조금 더 곱상하게 생기긴 했지만. 그래도 기분 나쁠 만큼 똑같이 생겼어.”

“두 분께선 혈연이시니 말입니다.”

닮으실 수밖에요. 오운 황자님과도, 황제 폐하와도. 그리고.

“주화 공주님과도. 정말로, 꼭 빼닮으셨군요…….”

노쇠한 환관의 흐릿한 눈동자 속에 짙은 회한이 떠올랐다.

이제는 남겨진 이의 얼굴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빛나던 시절의 기억. 모두에게 특별한 사람이었던 그녀의. 그 다정했던 추억을 떠올리며 입술을 달싹인 환관은 결국 입을 열지 못했다.

저 섬세한 콧대와 발그레한 입술이 그려내는 것은 틀림없이 주화 공주의 모습이었다.

소년의 이목구비에서 문일은 주화 공주의 흔적을 찾아냈다. 그것은 너무나 쉬운 일이었다. 그의 모든 곳에는 그녀의 흔적이 남아 있었으니까.

하지만 유일하게 그녀를 닮지 않은 단 한 곳. 그 눈 때문에 문일은 그녀의 이야기를 꺼내놓을 수 없었다.

고통과 고독의 세월에 짓눌리며 일그러진 눈동자.

즐거움과 행복이 마모되며 더욱 예리해진 증오가 담겨 있는 그 시선.

그곳에서 이글거리는 적의 때문에 문일은. 늙은 환관은 그의 어머니에 관한 이야기를 입에 담을 수 없었다.

그분이 얼마나 좋은 사람이었는지. 그분이 주변 사람들을 얼마나 즐겁게 해주었는지. 그분이 얼마나 아름다운 사람이었는지. 백성들이 얼마나 그분을 칭송했는지.

선황 폐하께서 그분을 얼마나 아끼셨는지. 밤을 지새우며 이야기를 늘어놓고 싶었지만.

그 눈동자 때문에 문일은 그 감정을 가슴 속에 삭여야 했다. 그리고 소년은 문일이 느끼고 있는 애틋한 감정 따윈 조금도 고려하지 않은 채 가뿐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침상을 박차고 일어서는 그 동작은 경쾌하기까지 했다.

두 팔을 뻗고, 허리를 뒤로 젖히고. 다리를 위로 당겨본다.

몸 구석구석을 비틀고 당기고 젖혀본 후에야 소년은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소년의 움직임을 가만히 지켜보던 문일은 조금 갈라진 목소리를 가다듬은 후 입을 열었다.

“이제 가시겠군요. 전하.”

“그래야지. 오래 봐서 좋을 사이는 아니니까.”

“정녕 뵙지 않고 가시겠습니까.”

그 말에 소년은 뒤를 돌아보았다. 사나운 표정으로 문일을 쏘아본 소년은 씹어 뱉듯이 대답했다.

“지금 그자를 본다면, 도저히 칼을 뽑아 들지 않을 자신이 없어. 그러니 보지 않겠다.”

“선황 폐하께서는 늘 이곳에서 전하를 기다리고 계실 겁니다.”

소년은 대답하지 않았다. 냉혹한 걸음을 옮기는 그의 등을 바라보던 문일은 그를 향해 정중히 고개 숙여 인사를 전했다.

“전하께서 오실 그 날을, 기쁜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 * *

혹독했던 겨울이 끝났음이 만천하에 선포되는 입춘(立春).

주화공주(朱花公主) 진비령(秦榧玲)의 장자 진연운(秦聯雲)의 책봉식은 그 입춘에 거행되었다.

온 나라가 떠들썩하도록 성대하게 치러진 책봉식 이후. 경사의 인근에는 숙친왕(肅親王)에 봉해진 진연운을 위한 거대한 왕부(王府)가 건설되었다.

“정말로 닮았구나. 내 어린 시절과 똑같아.”

“조금만 기다리십쇼. 이 반반한 얼굴 싹 갈아엎어 버릴 거니까.”

숙친왕부(肅親王府)의 내원. 왕부의 주인인 친왕의 취향에 따라 소담하게 꾸며진 내원에는 보기만 해도 탄식이 흘러나올 만큼 아름다운 사내와 가슴이 저릴 만큼 사랑스러운 사내아이가 마주 앉아 있었다.

“모처럼 잘생겨진 얼굴을 뭐하러?”

“사내새끼 상판은 자고로 듬직한 맛이 있어야지요. 이런 비리비리하고 얄상한 상판으로는 못 삽니다.”

“은근슬쩍 내 얼굴까지 함께 욕하는구나. 용의주도한 녀석 같으니.”

공식적으로 사례 태감과 동창 제독직에서 은퇴한 태감은 마음고생이 줄어서인지 그야말로 만개한 꽃처럼 싱그러워 보였다.

발그레한 장밋빛 뺨과 화사한 웃음을 혐오스럽다는 듯이 노려보던 소년은 자신의 얼굴도 그와 별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는 뺨을 쥐어뜯었다.

“염병할, 이거 쇠질을 하든가 해야지. 근육이 없어서 그런지 더 꼴 보기가 싫어.”

“하여간, 생긴 대로 살면 즐거울 것을.”

“혹시 배고파서 그럽니까? 주둥이 나불대는 거 보면 배고프다고 시위하는 것 같은데.”

태양이 하늘 끝자락에서 살짝 미끄러지는 늦은 오후였다. 태감에게는 슬슬 허기가 찾아올 시간이리라.

가볍게 허기를 면할 만한 군입거리를 궁리하던 소년은 문득 생각난 것이 있다는 듯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

“배가 고프시면, 죽이라도 한 그릇 끓여 올리리까.”

“죽? 죽이라. 그래. 그거 좋겠다. 저녁을 먹기 전, 가볍게 허기를 면하기에 죽만 한 것이 또 없지.”

군침이 돈다는 듯 입맛을 다신 태감이 고개를 끄덕이자 소년은 선뜻 자리에서 일어섰다.

곧게 펴진 그의 등허리를 보고 있던 태감은 총총걸음으로 그의 뒤를 따랐다.

숙친왕부의 주방. 오직 한 사람만을 위해서 꾸며진 주방은 먼지 한 톨 앉은 구석 없이 청결했고 걸려 있는 주방 도구들은 기름을 먹이고 정성껏 손질해 반지르르하게 윤기가 흘렀다.

아직 익숙해지지 못한 낯선 주방에서 소년은 칼을 뽑아 들었다.

“어떤 죽을 끓여줄 생각이냐? 물론 네가 끓여주는 죽이야 다 맛있다만, 개인적으로는 돼지고기에 피단이 올라간 피단수육죽(皮蛋瘦肉粥)이…….”

“제가 태감님 식성 모르겠습니까. 어련히 차려 올릴 테니 좀 기다리십시오. 나 원 말도 많아.”

소년의 도마 위에 가장 먼저 오른 것은 살이 토실토실하게 찐 토끼였다.

껍질을 벗긴 토끼에 초석 한 줌과 소금을 문지른 소년은 토끼의 배에 무와 생강, 팔각과 진피를 채워 나무 꼬치로 여민 다음 찜기에 올렸다.

라복증암토(蘿蔔蒸罯兎).

보들보들하고 하얀 연두부에 아릿한 파와 생강 채를 듬뿍 얹고는 짭짤한 간장 양념을 듬뿍 끼얹어 내는 소총반두부(小蔥拌豆腐).

깨끗하게 손질한 콩나물을 실처럼 가늘게 썬 화퇴와 함께 볶아낸 초두아(炒豆芽).

그리고 향어살을 갈아 만든 완자와 죽순을 넣은 옥정어구죽(玉淨魚球粥).

마지막으로 상에 오른 것은 팔뚝만 한 크고 좋은 향어였다. 밀가루 옷을 입혀 산초로 향을 낸 향어구이. 바삭바삭하게 튀겨진 향어구이가 상에 오르자 태감은 말없이 젓가락을 들어 올렸다.

가장 먼저 집는 것은, 담백한 토끼찜이었다. 결대로 찢어지는 하얀 살점. 기름기 없는 살점은 진피 향이 진하게 배어들어 향긋하면서도 달았다. 이어서 태감은 생선 살 완자가 뜬 흰 죽에 간장을 살짝 뿌렸다.

순백의 흰 죽 위로 간장이 스며들어 기묘한 무늬를 그릴 때쯤, 너무 섞이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휘저어 뜬다.

뭉근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죽은 탱글탱글한 생선 살 완자와 아삭한 식감의 죽순이 절묘하게 얽혀 있었다.

따뜻한 죽으로 혀를 데운 다음에는 차가운 두부. 알싸한 파와 생강 향기가 배어있는 두부의 매끈한 촉감. 달아오른 혀 위로 미끄러지는 서늘함에 혀가 녹아들 때쯤. 태감의 젓가락은 화퇴가 듬뿍 들어간 콩나물로 향했다.

“그래. 이 맛이었지.”

화퇴의 짭조름하고 강렬한 소금기. 그 진한 감칠맛이 싱겁게 조절된 요리 위에서 화려하게 피어오른다. 공들여 씹고, 느끼고. 떠올린 태감은 탄식하듯 내뱉었다.

“순서가 있었지. 이 요리를 먹을 때는.”

“늦으셨습니다. 태감.”

“내 잠시 잊고 살았구나. 어찌 잊었을까.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는데.”

태감의 젓가락이 천천히 움직였다.

그때 그 순서 그대로. 두부에서 찜으로, 찜에서 볶음으로.

차가움과 뜨거움. 부드러움과 강렬함. 맛의 대비를 경험하며 지친 혀 위로 상냥한 쌀의 단맛이 꽃을 피운다.

진흙탕 위에서 꽃피우는 연꽃과 같이. 혀 위에 내려앉은 천상의 희열에 태감은 자신도 모르게 손을 얼굴로 가져갔다.

벅차오르는 격정을 숨기기 위해서. 가면을 내리누르기 위해서.

소년은 조용히 말했다.

“태감, 가면은 두고 오지 않으셨습니까.”

손에 잡히는 것은 보드라운 피부뿐이었다. 한참이나 얼굴을 더듬거린 태감은 그제야 가쁜 숨을 내쉬었다.

십수 년을 써왔던 가면. 평생 벗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던 그 가면은 사례 태감의 자리와 함께 후궁에 두고 왔다.

더는 그의 얼굴을 가려줄 것이 없었다.

익숙함의 일부를 잃어버렸다는 것. 그리고 다시는 그것을 되찾지 못할 거라는 것.

그 사실은 태감에게 후련함에 앞서 공허함을 느끼게 했다.

그는 더 이상 후궁의 사례 태감도, 동창의 제독도 아니었다. 그는 그저.

“뭐하십니까. 태감님. 식겠습니다.”

상실의 공황에 빠져있던 태감은 소년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식탁에는 아직 요리 하나가 남아 있었다. 바삭바삭하게 구운 향어구이가. 그것을 본 태감은 자신도 모르게 실소를 흘렸다.

“그날 먹었던 향어구이는 참 맛있었지.”

“맛있으셨겠지요. 어찌나 맛있게 드시던지, 뼈에 살점 한 점이 붙어있질 않더군요.”

“원래 뺏어 먹는 게 더 맛있더구나.”

“예. 그땔 생각하면 지금도 천불이 끓습니다.”

그때만 생각하면 밥을 해줄 게 아니라 욕을 해줘야 하는데.

소년의 시선이 매서워지자 태감은 쩔쩔매며 소년을 바라보았다. 마치 허락을 구하는 듯한 그 간절한 시선에 소년은 혀를 차며 손을 내저었다. 퉁명스러운 허락의 표현이었다.

“죽 다 드셨습니까?”

“그래, 밥 있으면 좀 다오.”

공기에 수북하게 담긴 흰 쌀밥과 기름진 향어구이. 기름에 노릇하게 튀겨진 살점을 젓가락이 집어 든다.

잔가시가 적고 보드라운 향어 살을 태감은 쌀밥과 함께 가득 욱여넣었다. 쌀알에 배어드는 고소한 향어의 기름기. 거슬리는 잔가시 따윈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그 실팍한 살점.

마치 그 맛을 혀에 각인시키는 것처럼. 천천히 씹어 삼킨 태감은 소년을 보며 배시시 웃었다.

“맛있구나. 정말 맛있어.”

“뺏어 드실 때만큼 맛있으십니까?”

“그때보다 더 맛있는 것 같구나.”

잔가시를 말끔하게 발라내고 살뜰히 향어를 발라 먹은 다음, 마지막 쌀 한 톨을 입에 넣은 태감은 만복감에 젖은 미소를 띄웠다.

태감이 깨끗이 비운 접시를 설거지통에 쏟아 넣은 소년은 태감을 돌아보며 물었다.

“잘 드셨습니까?”

“그래. 잘 먹었다. 배불리 잘 먹었어.”

덕분에, 정말로 잘 먹었다. 김승조.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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