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관의 요리사 203화
“몸은 좀 괜찮으냐.”
“많이 아물었습니다. 조금 있으면 실밥을 뽑을 수 있을 것 같다는군요.”
봄기운이 슬며시 찾아온 반룡궁의 내원.
오동나무 가지엔 솜털 보송보송한 새순이 돋아 있었고 살얼음이 녹은 연못에는 다시 비단잉어가 첨벙거린다.
황제의 질문에 소년은 가슴께를 쓸어 만지며 대답했다.
왼쪽 빗장뼈부터 오른쪽 옆구리까지 사선으로 갈라졌던 상처는 대부분 아물어 희미한 실금처럼만 남아있었다.
“혈도를 봉한 금제를 푸는 것은.”
“상처가 다 아물어야 한다는군요. 무리하게 금제를 풀면 그간 봉해두었던 기가 한꺼번에 터져 상처를 악화시킨다나.”
상처가 아물고. 굽은 등이 펴지고. 더는 절뚝거리며 걷지 않게 되면.
“더 이상, 후궁의 상호 오운은 없겠지요.”
“그래. 황족 진연운(秦聯雲)만이 남겠지.”
“진연운이라는 이름은…….”
“그래. 누이가 너에게 남긴 것이다.”
누이. 주화공주(朱花公主) 진비령(秦榧玲). 소년은 그 이름이 황제에게 남기고 간 아릿한 상실감을 보았다.
안쪽 깊숙한 곳에서 치밀어 오른 그 통증은 지배자의 가면을 강제로 벗겨냈고, 그 속으로 숨겨두었던 것을 끄집어냈다.
권위와 지배의 거죽을 잃은 황제의 속살을. 그 민얼굴을 소년은 보았다.
대제국의 지배자.
만백성의 아버지.
용의 아들이 아닌 누이를 잃은. 그리고 아직도 누이를 잊지 못한 진비운이라는 사내의 얼굴을 소년은 보았고, 손을 뻗으려 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위대한 지배자의 민얼굴을 그대로 올려다볼 수가 없어서.
한참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황제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 목소리는 잠겨 있었다.
“금제가 풀리고, 네가 본래의 몸을 되찾으면. 책봉식은 그때 해야겠구나.”
“꼭 할 필요 있겠습니까. 황실의 치부를 드러내는 일인데.”
“그렇기에 더욱더 해야지. 부끄럽다 하여 숨기면 호사가들에게 빌미를 제공하는 꼴이 될 뿐이다. 드러낸 약점은 약점이 아니듯이.”
“만천하에 공개된 비밀은 비밀이 아니지요. 예, 알겠습니다.”
그렇게 황제와 그가 대면하여 처리해야 할 모든 공적 상담은 끝이 났다.
시간은 늦은 오후. 점심 식사로 부른 배가 살짝 꺼져 출출한 감이 없지 않은, 하릴없이 사담이나 나누기에 딱 좋을 때였다. 짙은 그늘이 드리운 황제의 얼굴을 본 소년은 난처함을 느꼈다.
그럴싸한 위로도, 기분 전환이 될만한 유쾌한 농담도 떠올리지 못한 소년은 결국 아무렇게나 말해 버렸다.
“슬슬 허기가 지는군요. 폐하께서는 어떠십니까?”
“나도 뭔가 군입거리가 생각나는구나.”
“뭐라도 만들어올까요?”
“그래. 이젠 네 요리를 먹을 수 있는 날도 얼마 남지 않았으니.”
그간 네가 차려주는 야식을 먹는 재미가 쏠쏠했는데, 이젠 그 재미도 못 누리겠어.
쓸쓸하다는 듯 황제가 한숨을 내쉬자 소년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호언장담했다.
“황제 폐하께서 부르시면 언제든 달려오겠습니다. 제 요리가 생각나시면 언제든 불러주십시오.”
“그래도 번거로울 것 아니냐. 네 왕부(王府)를 세워 독립하면.”
“어차피 왕부야 경사 인근에 세워질 것 아닙니까.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린데.”
호들갑스럽게 다짐하는 소년을 보며 황제는 그제서야 웃음을 보였다.
아예 후궁에 상주하게 될 거라는 짓궂은 농담을 내뱉은 황제는 문득 그의 품에서 떠나갈 다른 한 명을 떠올렸다.
“그 아이는 역시 너와 함께 간다더냐?”
“태감께서 이리 전해달라 하셨습니다. ‘할 만큼 했습니다’라고.”
“아쉽게 되었군. 이젠 누구에게 동창 제독을 맡기고 사례 태감을 맡긴다.”
마음 같아서는 조금 더 잡아두고 싶지만, 별수 없군. 이제는 풀어주어야지.
입맛을 다시던 황제는 넌지시 그들의 은퇴 계획을 물어보았다.
“그래, 궁을 나간 다음에는 무엇을 한다더냐?”
“우선은 실컷 놀아야지요. 일 년 정도는 한량 짓을 해볼 생각입니다.”
“한량 짓이라. 말만 들어도 황홀하구나.”
“우선은 놀고먹으며 빈둥거려야지요. 실컷 자고 느지막하게 일어나, 고기 구워 밥 한술 먹고, 점심에는 다관에나 들려 차 한잔하고. 밤에는.”
“달을 올려다보며 술잔을 기울여야지.”
놀고먹는 게 질리면 여행이나 다녀보지요. 산 좋고 물 좋은 곳 놀러 다니며 풍류를 즐기다 보면 한세월 금방 가지 않겠습니까.
소년의 말에 황제는 불편한 심기를 숨기지 못했다.
“참, 황제도 즐기지 못할 호사로구나.”
“제국 땅덩이가 넓다 보니 좋은 곳도 많다지요? 장강을 가로지르는 도강선(渡江船)도 한번 타보고, 이름난 오악(五岳)의 수려하다는 산세도 한번 즐겨보고. 경사에선 먹기 힘든 싱싱한 해산물을 즐기려 복건성에 들리는 것도 좋겠지요.”
“여행길이 고될 터인데, 계획한 것을 다 돌아볼 수 있겠느냐?”
“지치고 피로하면 돌아오지요. 즐기러 가는 여행, 아득바득 이 악물어야 할 필요 있습니까.”
먹고 싶으면 먹고, 놀고 싶으면 놀고. 싫으면 관두는. 그 느슨한 계획은 듣는 이의 복장을 뒤집어 놓을 만큼 유유자적했다.
제국의 지배자에게 질투심을 불러일으킨 줄도 모른 채 소년은 뻔뻔한 얼굴로 입을 나불거렸다.
“날 더우면 뱃놀이도 좋지요. 한가롭게 배를 띄워놓고 흐르는 물 구경하다가, 또 호수 위에 뜬 달이 아름다우면 달을 안주 삼아 한잔하고.”
“하늘이 흐리면 흐리니 또 한잔하겠지? 술 핑계야 한도 끝도 없지 않으냐.”
“세상 시름을 잊는데 술만 한 것이 없으니 그러겠지요.”
소년의 핑계는 퍽 그럴듯한 것이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목구멍을 뜨끈하게 데워줄 술 한 잔이 간절해진 황제는 애꿎은 찻잔을 쏘아보고는 신경질적으로 차를 들이켰다. 차는 뜨거웠다.
“차를 꼭 홧술 드시듯이 드시는군요.”
“어찌하겠느냐. 화는 치밀어 오르는데 술이 없으니. 차로 식힐 수밖에.”
“저런, 역시 나라의 명운을 떠받치고 계시다 보니. 심려도 크시겠군요.”
소년의 염려에 황제는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그러쥐었다.
지금껏 그를 이토록 분노하게. 조금 점잖지 못한 표현으로 말하자면 열 받게 만든 것은 단 두 명뿐이었다. 한 명은 그의 동생이었고, 또 한 명은.
“아닌 것 같으면서도, 이런 면은 정말 누이를 꼭 빼닮았구나.”
“폐하.”
“정말로, 꼭 빼닮았어. 살살 간지럽히면서 사람 분통 터지게 만드는 그 화법은. 정말 누이와 똑같구나.”
황제는 그 이상 누이의 이야기를 입에 담지 않았다. 그 대신 황제는 자신의 분기를 누그러뜨릴 만한 심술궂은 장난을 떠올렸다.
“이건 불공평한 것 같구나.”
“예?”
“역시, 너에게도 뭔가 책임질 만한 것이 있어야 공평하겠지?”
“폐하?”
터무니없이 불길한 황제의 미소에 소년은 오한이 엄습하는 것을 느꼈다.
* * *
‘책임이란 게 뭔가 했더니.’
북림궁의 연무장. 간소한 차림의 안양비와 마주 본 소년은 시선을 바닥 쪽으로 내리고는 혀를 내둘렀다.
부스러진 돌조각과 두 동강 난 창칼, 바닥의 흔적들. 마치 전장의 일부분을 옮겨놓은 것처럼 참혹한 광경은 그간 그녀가 유폐되어 있는 동안 무엇을 했는지를 증명하고 있었다.
“그간 격조하였나이다. 전하.”
“오랜만에 뵙습니다. 안양비 님.”
“상처는 어떠신지요?”
“그럭저럭 아물었습니다. 역시 솜씨가 좋으셔서 그런지, 단면이 뭉개지지 않아 빨리 아물더군요.”
안양비는 우아한 동작으로 검집에 검을 집어넣었다. 검게 옻칠을 하고 자개로 장식한 칼집에 자루에는 자주색 수실을 단, 아름다운 검이었다.
멍하니 그것을 보던 소년은 전날의 기억을 떠올리고는 쓴웃음을 지었다.
“아름다운 검이군요. 새로 장만하셨나요?”
“전부터 예비용으로 가지고 있던 검입니다. 제일 아끼던 검은 전하께서 부러뜨리셨으니.”
소년이 헛기침하자 방긋 웃은 안양비는 연무장을 둘러보고는 면목이 없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어찌 되었든, 연무장은 귀한 손님을 맞이하기에 적합한 공간은 아니었다.
“귀하신 분께서 오셨는데 대접이 미흡했습니다.”
“아닙니다. 오히려 바쁘실 때 찾아온 저의 잘못이지요.”
손사래를 친 소년은 진땀으로 축축해진 목덜미를 쓸어 만지고는 숨을 내쉬었다. 그를 불편하게 만드는 것은 연무장의 살풍경함도, 자신의 가슴에 큼직한 상처를 안겨준 검사의 손에 여전히 검이 쥐어져 있다는 위기감도 아니었다.
소년은 다른 어떤 것보다도 그녀의 정중한 말투가 불편했다.
그리고 소년은 앞으로 나누어야 할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누기 전, 이 문제를 꼭 짚고 넘어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우스운 말입니다만, 저는 때론 공경과 배려가 멸시와 천대보다 더 불편하게 느껴진다는 사실에 놀라곤 합니다. 어울리지 않는 자리에 억지로 올라서인지, 아니면 제가 천상 ‘상놈’이라 그런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안양비는 약간 당혹한 표정으로 소년을 바라보았다. 그 의미를 짐작하려 애쓴 그녀는 이내 소년이 뜻하는 바를 이해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익숙하지 않으시니 부담스럽게 느껴지실 수도 있지요. 만약 원하신다면 말투를 조금 바꾸겠습니다.”
“부디, 간곡히 부탁드리겠습니다.”
“알겠네. 이리 말하니 나도 훨씬 편하군.”
소년은 안양비의 담대함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감격에 젖은 소년의 시선에 코웃음 친 그녀는 손수 연무장의 문을 열어젖히며 물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어쩐 일로 이 가련한 여인을 찾아오셨나? 연무장에 틀어박혀 소일하는 것이 불쌍하여 얼굴이라도 비추려고 오셨나?”
“‘가련한’이라는 단어에 심히 의문이 들지만, 일단은 그렇습니다. 지루한 연금 생활을 보내고 계실까 달콤한 사식이라도 넣어드릴 겸 왔습니다.”
“달콤한 사식이라. 전하께서 솜씨를 부리신 것인가? 이거 영광이로군.”
황족 살해 미수범에게는 과분한 대접이야.
소년을 응접실로 안내한 안양비는 손수 차를 우려왔다. 복건성 안계현의 명물인 안계철관음(安溪鐵觀音)이었다. 근사한 향기가 물씬 피어오르자 소년은 서둘러 가져온 과자를 상에 올렸다.
“벌꿀과 설탕에 절인 감귤 껍질로 만든 파운드 케이크입니다.”
“호오, 아주 묵직해 보이는 과자로군.”
“잘라드릴까요?”
“번거롭게 굳이 칼을 더럽힐 필요 있을까.”
안양비는 소년의 기대를 배신하지 않았다. 족히 두 뼘은 되는 길이의 거대한 파운드 케이크를 손으로 집어 든 안양비는 거리낌 없이 그것을 베어 물었다.
마치 호랑이가 사슴의 목덜미를 물어뜯는 듯한 호쾌함에 소년은 넋을 잃은 채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훌륭하군. 추운 겨울에 따스한 차와 함께 먹기에 이보다 더 좋은 과자는 없겠지. 짙은 갈색의 겉 테두리 부분은 바삭바삭하고, 그 안쪽은 촉촉하고 부드럽군. 묵직하고 밀도 높은 질감. 하지만 그 중후한 맛을 상큼한 감귤 향기가 중화해 주는군.”
한 입, 두 입. 그리고 차 한 모금. 마지막으로 세 입.
꿀꺽.
단 세입 만에 파운드 케이크 하나가 사라졌다. 멍하니 보고 있던 소년은 아쉬운 듯 접시를 바라보는 안양비를 보고는 황급히 두 번째 과자를 상에 올렸다.
“두 번째 과자는 사르르 녹는 달콤한 커스터드 크림과 설탕에 절인 자두를 올린 파이입니다.”
“이건 또 신기한 과자로군.”
“이건 통째로 들고 드시기 불편하실 것 같으니 사 등분해 드리지요.”
안양비는 사양하지 않았다.
농후한 커스터드 크림과 혀가 녹아내릴 만큼 달콤한 자두가 넘치도록 올라간 바삭한 파이.
그리고 꿀에 졸인 밤과 호두가 들어간 버터크림 롤케이크.
단팥으로 속을 채운 페이스트리와 폭신한 머랭 케이크.
입가심으로는 산뜻한 아이스크림.
그제야 안양비는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나라 제일의 요리사. 훌륭한 솜씨였네.”
“만족하셨다니, 다행이군요.”
“가는 길 배도 채웠으니, 이제 미련은 없네.”
소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안양비는 소년이 입을 열기를 기다리지 않았다. 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고, 각오는 그녀 한 사람 몫이면 충분했다.
“나는 이미 준비가 되어 있네.”
“억울하지는 않으십니까.”
“억울할 것 뭐 있겠나. 최선을 다했고, 그래도 안 되었으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
천하를 꿈꾸었던 자에게 어울리는 최후 아닌가. 패자에게 침상에 누워 맞이하는 안온한 죽음은 어울리지 않지. 그렇지 않은가.
소년을 향해 안양비는 사나운 웃음을 지어 보였다.
“걱정하지 말게나. 죽어도 원망은 안 할 터이니.”
“그런 말씀은 하시는데 어찌 걱정을 안 하겠습니까.”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려 너스레를 떨던 소년은 이 이상 용건을 지체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소년의 얼굴에 각오가 떠오르자 안양비는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두 가지 선택지를 드리지요. 첫 번째는 죄인으로서 목이 베여 효수되는 것. 두 번째는.”
“능지처참인가?”
“그보다 끔찍한 겁니다.”
두 번째는, 저의 호위 무사로서 구차하게 목숨을 연명하는 겁니다. 어쩌시겠습니까.
소년의 제안에 안양비는 얼이 빠진 듯 멍한 표정으로 소년을 보았다. 그 표정은 소년에게 작은 쾌감을 안겨주었다.
“참고로 박봉에, 위험하며. 야간근무수당도 없습니다.”
“굉장히 가혹한 조건이군.”
“대신 평생직장입니다. 흠, 그리고 숙식 제공이라는 장점도 있지요.”
“숙식 제공이라. 밥은 누가 주는가?”
식사는 고용주가 직접 조리합니다.
소년의 대답에 안양비는 실소를 흘렸다.
“요즘 세상에 밥도 안 주는 직장이 어디 있나. 하물며 노비를 부려도 숙식은 제공해 주는 법이네. 호위 무사를 고용하는 것 치고는 조건이 너무 박해. 그것도 나라에서 손꼽는 실력자를 고용하는 건데.”
“확실히 실력은 검증되었지요. 제 몸으로.”
고민하는 척하던 소년은 하는 수 없이 조건을 조금 올렸다.
“그럼 연봉은 연차가 쌓이면 올려드리지요. 그리고 간식에 야식 포함.”
“그리고?”
“실력 좋은 장인에게 칼 한 자루 뽑아드리지요.”
이 이상은 못 드립니다.
능글맞은 웃음을 지으며 소년이 손을 내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