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관의 요리사 202화
도망친 공주의 자손. 황족. 왕의 작위. 용의 피.
가중되는 혼란 속에서 소년이 떠올린 것은 가장 혹독했던 겨울이었다.
그가 아직 후궁 밑바닥을 기었던 시절.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존엄성을 모조리 박탈당한 채 그저 숨이 끊어지기만을 기다리며 살았던 시절.
그 가혹했던 겨울을.
땔감이 없어 생쌀을 씹어야 했던 시절도 있었다. 그마저도 없어 손톱을 씹으며 밤을 지새워야 했던 시절도 있었다.
거적때기 하나를 걸치고 버텨야 했던 그 시린 밤 들. 그 모질었던 밤 들. 고통의 시간이 가슴 깊숙한 곳에서 스며 나왔다.
말라붙었던 상처에서 새로운 핏물이 방울져 떨어진다. 그에게 남은 마지막 온기가 모조리 빠져나가기 전에, 소년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의 손에는 새빨간 비수가 들려 있었다.
“이제야, 기억이 나는군.”
달밤. 연좌궁의 정원에서. 본 기억이 나. 바위나 나무 따위의 무정물만큼이나 생기가 느껴지지 않는 그 건조한 얼굴에서 입꼬리만이 살짝 올라갔다.
마치 강제로 찢어놓은 듯한 흉측한 웃음. 텅 빈 허무감만이 느껴지는 새카만 눈동자에 문일이 담긴다.
“그때는, 정원사였어.”
“예. 그때는 정원사의 모습으로 전하를 찾아뵈었었지요.”
“나에게 글자를 가리켰던 환관. 그게 너였나.”
“예. 선황 폐하의 명을 받아, 전하께서 스스로 걸으실 수 있게 될 때까지 제가 전하를 모셨습니다.”
그리고 나에게 후궁에서 사는 법을 가르친 것 또한.
말하지 않고, 듣지 않고, 보지 않고. 숨죽인 채, 벌레처럼 살아남는 법을 가르친 것 또한.
너였구나.
소년의 말에 문일은 그 시절을 회상하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선황께서 명하신 대로. 그렇게 사는 법을 알려드렸지요. 바닥을 기며, 숨죽여 사는 법을. 하지만 전하께서는 결국 스스로 일어서셨군요.”
“전하, 전하라. 어제는 미천한 환관 나부랭이였던 놈이 오늘은 황족이란 말이지.”
“예. 선황 폐하께서 전하의 피를 인정하시고, 왕의 작위에 봉하셨으니. 전하께선 틀림없는 황실의 일원이십니다.”
소년은 감흥 없는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기쁨도, 회한도 담겨 있지 않은 그의 눈에 남아 있는 것은 가없는 증오뿐이었다.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눈동자 앞에서 문일은 변명을 늘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전하. 이제 전하께서 응당 누리셨어야 할 권리와 명예를 돌려드리겠…….”
“한 가지만. 더 묻겠다.”
문일은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쓰러질 듯 위태롭게 선 소년은 자신이 흘리고 있는 피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는 듯했다.
당장에라도 싸매고 봉해야 할 위중한 상처. 촌각을 다투는 상황이었음에도 소년은 자신의 상처에 눈길을 주지 않았다.
“선황 폐하라, 그래. 그자가 날 후궁 밑바닥에 처박아둔 이유는 알겠다. 그 점을 문제 삼지는 않겠어. 하지만, 그렇다면 최소한 끝까지 버려두었어야지.”
끝까지, 죽게 놔두었어야지.
소년의 추궁에 문일은 대답할 수 없었다.
영원히 녹지 않을 것만 같았던 그 원망. 핏줄을 향한 증오도, 결국 시간 앞에 누그러졌다는 그 말을 어찌 내뱉을 수 있을까. 그의 앞에서.
십 년의 고통, 십 년의 고독, 십 년의 절망 앞에서.
문일은 도저히 그것을 이해해달라 말할 수 없었다. 선황이 그의 딸. 주화 공주를 용서할 수 없었듯, 그 또한 선황을 용서할 수 없으리라.
소년의 추궁은 어느새 독백으로 변해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내가 쌓아 올린 모든 것을 망가뜨리는군. 내가 완성할 인생에, 빌어먹을 사족을 붙였어.”
후궁의 상호. 오운이라는 인간으로 완성된 나의 삶을 원치 않던 가필로 망쳐 버렸어. 문일은 소년의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해묵은 피로감에 동요했다.
그것은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더 많은 아이의 절망이 아니었다.
삶의 끝자락에서, 더 나아갈 수 없기에 멈춰서 살아온 족적을 돌아보아야 하는 이들의 절망이었다.
노쇠한 숨을 몰아쉰 소년은 혀끝을 지그시 깨물었다. 하지만 그 아릿한 통증에도 불구하고 눈꺼풀은 쉬이 올라가지 않았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인가.
무심코 발밑을 내려다본 소년은 실소를 흘렸다. 오직 한 사람이 흘렸다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의 피였다.
마치 집단 살육이라도 벌어진 것처럼 얼룩진 바닥을 본 소년은 현기증을 느끼며 고개를 들었다. 그의 시선 끝에는 문일이 놓여 있었다.
그는 결국 이런 사람이었다.
용서하지 못하고. 화해하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고.
마지막까지 칼을 들이미는. 원수와 함께 죽을지언정 원수와 함께 살아남지는 못하는. 마지막까지 증오를 포기할 수 없는. 그런 사람.
피가 빠져나간 혈관에 증오가 들어찬다. 차갑게 굳은 어깨가 부드러워지고 식어버린 심장이 다시 맥동한다. 주먹을 그러쥐고, 비수를 치켜세우고. 오른발을 내디딘다. 자세를 잡는다.
그 순간 누군가가 문일과 소년의 사이로 뛰어들었다. 둘의 사이를 가로막은 것은 태감이었다.
소년은 태감의 어깨너머로 문일을 보려 애쓰며, 정확히는 태감에게 시선을 두지 않으려 애쓰며 말했다.
“비키십시오, 태감. 그러다 칼 맞습니다.”
“비켜선다면 네가 칼을 휘두를 것 아니냐.”
“예, 휘두를 겁니다.”
“휘둘러서 어찌할 생각이냐.”
어리석은 질문이었으나 태감은 소년에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소년은 그가 원치 않는 대답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원한을 갚을 겁니다.”
“원한을 갚은 다음에는.”
그다음에는. 어찌할 생각이냐. 소년의 시선이 잠시 태감에게 머물렀다. 가면 너머로 소년의 시선을 느낀 태감은 가면을 벗었다. 그리고 물기 어린 눈으로 소년을 마주 보았다.
“이제, 모두 끝나지 않았느냐.”
“끝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태감.”
“잊고 살 수도 있지 않으냐. 용서하라고는 하지 않겠다. 선황께서 네게 행하신 일은 너무나 가혹한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행복한 미래로. 눈앞의 꿈으로. 조금만 눈을 돌릴 수는 없는 것이냐.
소년은 대답하지 않았다. 메마른 눈으로 그를 보던 소년은 다시 문일이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동자에 또다시 증오가 피어올랐다.
“죄송합니다.”
왼 다리를 질질 끌며 소년은 태감을 지나쳐 문일에게로 향했다.
오른손에 비수를 쥔 채로.
등 뒤로 태감이 허물어지는 것을 느끼면서도 소년은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통증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둔탁한 울림이 있었을 뿐이다. 가슴께를 쓸어 만진 소년은 문일을 향해 노호하며 달려들었다.
* * *
처마 끝에 열렸던 고드름 끝자락에 물방울이 맺힌다. 눈이 녹고, 새순이 움트는 계절이 온다.
마침내 다가온 겨울의 끝자락.
봄의 문턱을 밟는 시간.
가슴팍에 붕대를 동여맨 소년은 침상에 누워 정원을 내다보고 있었다.
겨울이 지나가고 있었다. 그는 살아남았고, 황족이 되었다. 남의 일이었다면 헛웃음이라도 지었을 것을.
초점 없는 흐릿한 시선으로 창밖을 내다보던 소년을 향해 태감이 물었다.
“괜찮느냐.”
“괜찮아 보입니까?”
“별로 그래 보이지는 않는구나.”
“알면서 왜 물어봅니까.”
멀건 표정으로 그를 돌아본 소년은 이내 침상 위로 풀썩 쓰러졌다. 가슴팍의 상처에서 쓰라린 통증이 올라온다.
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에서 스며 나온 핏물이 붕대를 붉게 물들인다. 신경질적인 표정으로 붕대를 푼 소년은 깨끗한 새 붕대를 꺼내며 입을 열었다.
“안양비 님께서는 어찌 되셨습니까.”
“우선은, 북림궁에 유폐되었다. 차후 어찌 될지는 모르나. 황족인 너를 시해하려 했으니 그냥 넘어갈 수는 없겠지.”
“처지가 완전히 반대가 되었군요. 인생사 새옹지마라더니.”
황족, 황족이라. 후궁 밑바닥을 기던 구더기 주제에 황족이라. 믿을 수 없는 출세로군요.
어이가 없다는 듯 중얼거리던 소년은 재차 확인하기 위하여 입을 열었다.
“제가, 황족이란 말이지요.”
“그래. 주화 공주. 누님께서 너를 낳으셨으니. 너 또한 존귀한 용의 피가 흐르는 황손이라 할 수 있지. 그중에서도 선황께서 너를 왕의 작위에 봉하셨으니 친왕(親王)이라 해야겠구나.”
“뭔 염병할 감투는. 그런데 공주가 낳은 자식인데도 왕이라 부르는 겁니까?”
저희 세계에선 보통 시집간 공주가 낳은 자손은 부마의 가문에 속해서…….
말꼬리를 흐린 소년은 태감의 지긋한 시선에 고개를 돌렸다.
“왜 그리 보십니까.”
“궁금해서 말이다. 네가 아직도…….”
“포기 못 했습니다.”
태감의 말을 차갑게 끊으며 소년은 고개를 저었다. 잠시 말을 멈춘 태감은 이해한다는 듯 화사한 웃음을 지었다.
“안다. 네 고집을 모를 내가 아닌데. 그래도, 네가 살아서 좋구나.”
안도감이 스며든 태감의 말에 콧방귀를 뀐 소년은 문득 생각났다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소년의 표정엔 불쾌감이 떠올라 있었다.
“그러면 일단은, 태감님을 그…… 삼촌이라 불러야 하는 겁니까?”
“일단 촌수를 따지면…… 그렇게 되지?”
삼촌? 이 나이를 처먹고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을 삼촌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둘은 찝찝한 불쾌감에 치를 떨었다. 소년 만큼이나 태감 역시 웃어른 조카를 부담스러워 했다. 말없이 시선을 교환한 둘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호칭은 평소 사용하던 걸 씁시다.”
“그게 좋겠다. 괜히 바꿔서 불러 봐야 괜히 헷갈리기나 하고 불편하지.”
호칭에 대한 문제를 합의하고 나서야 소년은 진정 자신이 황족이 되었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그는 이제 후궁의 상호가 아니었다. 메마른 고목처럼 뒤틀리고 마디가 굵어진 자신의 손을 내려다본 소년은 침상을 박차고 일어섰다.
“밥이나 먹읍시다.”
“뭐?”
“출출해서 못 살겠습니다. 몸도 찌뿌둥한데, 밥이나 거하게 차려 먹읍시다.”
“바로 어제 칼 맞은 중환자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아직 상처가 아물지도 않아 핏물이 배어 나오는데. 그러다 상처가 심해지면 어쩌려고.
태감의 염려에 소년은 상쾌한 미소로 대답했다.
“제가 누누이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뒈질 놈은 뭘 해도 뒈진다고. 뒤질 팔자면 가만히 누워 있어도 뒤집니다.”
해괴한 궤변을 늘어놓은 소년은 잰걸음으로 방을 나섰다. 침상에 누워 있어야 할 중환자가 갑작스럽게 달리자 화들짝 놀란 장소와 이삼이 그의 뒤로 따라붙었다.
“지금 뛰시면 안 돼요!”
“마침 잘 왔구나. 삼아, 뭐 먹고 싶은 것 없니?”
“없어요! 없으니까 가서 누우세요!”
“그래? 그럼 장소가 좋아하는 물만두나 만들어야겠다. 고추기름 듬뿍 얹어서 칼칼하게.”
호쾌하게 주방 문을 걷어차 연 소년은 먼지가 앉은 주방을 돌아보고는 혀를 찼다.
“역시 사람 손을 조금만 안 타면 금세 티가 난다니까. 삼아, 거기 빗자루 좀 가져오렴, 장소는 행주 빨아다가 면판 좀 닦아주고.”
껄껄 웃으며 주방을 지휘하는 소년의 모습은 칼을 맞기 전보다 더 활기가 넘쳐 보였다.
하는 수 없이 장소와 이삼이 움직이자 소년은 창고로 가 기름진 돼지고기 덩어리를 꺼내왔다.
껍질을 벗겨낸 삼겹살, 목살과 등심, 뒷다릿살.
두툼한 고깃덩어리를 도마 위에 올려놓고 굵게 다지며, 소년은 말할 수 없는 편안함을 느꼈다.
비로소 제자리를 찾은 듯한 안정감. 후궁의 상호에서 황족이 되었더라도. 결국, 그의 본질은 요리사였다.
이곳이 그가 있어야 할 장소였다.
굵게 다진 돼지고기에 부추 약간과 다진 생강, 마늘. 간장과 후추, 약간의 술 등으로 간을 하는 소년을 보며 면판을 깨끗하게 정리한 장소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소에 두부는 안 넣으세요?”
“두부를 넣으면 고기의 양이 줄어들잖니.”
그 놀라운 대답에 말문이 막힌 장소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러 번 치대에서 소를 완성한 소년은 반죽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반죽을 주무르고, 치대며 소년의 이마에선 더운 땀이 흘러내린다. 그와 함께 가슴 쪽에서 뻐근한 통증과 함께 축축한 느낌이 올라왔지만, 소년은 손을 멈추지 않았다.
반죽을 숙성시키는 동안 아궁이에 불을 피우고, 그가 없었던 동안 먼지가 앉은 주방 기구를 청소하고.
소년은 고집스럽게 그 모든 과정을 홀로 하려 했다.
마치 의식을 치르는 것처럼 신성한 사명감마저 느껴지는 소년의 옆얼굴을 본 장소와 이삼은 차마 그를 제지하지 못하고 태감을 돌아보며 발을 동동 굴렀다.
“태감님. 어떡하죠?”
“그냥, 내버려 두어라. 성에 찰 때까지 멈추지 않을 것 같으니까.”
도톰한 피 위에 고기소가 담뿍 담기고, 반달 모양으로 접는다.
기교를 부려 예쁘게 만들기보다는 가능한 한 빨리 그리고 많이. 더 내려놓을 공간 없이 빽빽하게 만두가 늘어선 쟁반을 내려다보며 소년은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다행히, 손기술은 그대로군요.”
“병상에 누운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손이 무뎌졌겠느냐?”
“원래 기술이란 게 그렇습니다. 하루 손을 놓으면 손끝이 무뎌지고, 이틀을 쉬면 혀가 둔해지고. 삼 일을 놀면 감각이 녹슬지요.”
참 고달픈 직업입니다만, 어쩌겠습니까. 그걸 알면서도 발을 빼지 못한 놈이 멍청한 거지요.
삶은 만두를 뜰채로 건져내며 자조적인 태도로 뇌까린 소년은 우묵한 그릇에 만두를 담고는 벌건 고추기름을 양껏 끼얹었다.
“홍유수교자(紅油水餃子) 나왔습니다. 고추기름은 부족하면 더 끼얹어 드십시오.”
그릇은 받아든 태감은 머뭇거리며 소년의 가슴 쪽을 바라보았다.
왼쪽 빗장뼈에서부터 오른쪽 옆구리까지 길게 사선으로 붉은 얼룩이 번지고 있었다.
태감의 시선을 느낀 소년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그를 재촉했다.
“안 드십니까?”
“지금 먹으마.”
소년의 재촉에 태감은 서둘러 젓가락을 들어 올렸다.
발간 고추기름에 젖어 반들거리는 물만두. 한입에 쏙 넣으면 야들야들한 피의 매끄러운 촉감이 혀를 간지럽힌다.
뒤이어 고추기름의 향긋한 매운맛이 톡 쏘고, 조심스럽게 씹으면 만두 안에 꽉 차 있던 육즙이 혀를 흥건하게 적신다. 태감은 코를 훌쩍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맛있구나. 조금도 변하지 않았어. 최고의 맛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