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관의 요리사-201화 (201/314)

환관의 요리사 201화

“죄인이 자신의 죄를 황제 폐하께 고할 수 있도록. 황제 폐하께서 그 직소를 들으실 수 있도록. 세상 어디에서건. 아무리 먼 곳에서건. 황제 폐하께서 그 죄를 사하실 수 있도록. 참주패는 하늘 아래 가장 크고 웅혼한 외침인 우레를 담아 만들어졌다.”

때아닌, 벼락을 동반한 우레는 후궁의 하늘을 뒤흔들고는 경사 전체에 울려 퍼졌다.

집무를 보고 있던 황제와.

노심초사 소년을 기다리던 태감.

생업에 종사하던 경사의 백성들.

그리고 시대를 뒤로한 채 은둔한 은둔자에게까지.

모두가 소년의 죄를 알 수 있도록.

천공을 찢는 뇌성이 잦아들기를 기다린 안양비는 소년의 손에서 두 조각 난 옥패를 집어 들었다.

“제 일급, 어사참주(御史斬主)패로구나.”

칼자루를 문 용이 새겨진, 청색의 옥패. 그것이 설령 역모죄일지라도. 하해와 같은 황제의 성은으로 용서할 것을 약속하는 황실의 신물. 안양비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물었다.

“어떤 물건인지는, 알고 있는가.”

“모르고 썼을 리가 없지요.”

“그 대가를 알면서도. 후회하지 않는가?”

“후회하기엔 너무 멀리 왔습니다. 안양비 님.”

차갑게 식어가면서도 소년은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 그는 이미 각오가 되어 있었지만, 안양비는 그것을 알면서도 질문할 수밖에 없었다.

“죄를 무마하는 대가는, 자네의 목일세. 그것을 알면서도…….”

“황후 후보자를 암살하려 한 죄입니다. 고작 환관 놈, 그것도 성치 못한 절름발이 놈의 목 하나로 무마할 수 있다면 값싼 대가 아닙니까.”

소년의 시간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새빨간 색의, 한때 뜨거웠던 액체는 소년의 가슴팍을 적시며 흘러나와 바닥에 고였고 싸늘하게 식은 웅덩이가 되었다.

소년이라는 생명을 구성하였던 것. 그것들을 게워낼수록 소년은 몸이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몸이 가벼워지는 걸까. 아니면…….

묘한 탈력감 속에서 몽롱한 시선을 들어 올린 소년은 안양비가 쥐고 있는 참주패의 반쪽을 향해 손을 뻗었다. 안양비는 거부하지 못하고 그의 손에 패의 반쪽을 쥐여주었다.

소년의 손에서 쪼개졌던 패가 다시 합쳐졌다. 만족감이 번진 소년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안양비는 입을 열었다.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자였나. 사례 태감이란 자는.”

자네가 목숨을 바쳐 충성할 만한 가치가 있는 자였냔 말일세.

그 구차한 말은 투정과도 같았다. 사례 태감을 향한 시기로 얼룩진 안양비의 시선에 소년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동작은 느릿했지만 분명한 의미를 담고 있었다.

“글쎄요. 그분이 얼마나 큰일을 하실지, 그분이 얼마나 가치 있는 분인지 저는 모릅니다.”

“그렇다면.”

“저는 그저, 태감께서. 저런 분이시기 때문에. 믿고, 따르고. 모신 것이지요.”

안양비는 소년의 눈이 한쪽에 고정되어 있음을 깨달았다. 초점이 제대로 맞지도 않는 흐릿한 시선이 향하는 곳. 그곳에는 사례 태감 양단이 있었다.

흐트러진 머리칼을 비녀로 틀어 올리지도 못하고 흘러내리는 가면을 간신히 부여잡은 채 숨을 몰아쉬는.

급박하게 달려오며 신발 한쪽을 잃어버린.

그리고 그런 것을 신경 쓰지 못할 만큼 다급히 달려온 사례 태감이 그 자리에 있었다.

그것이 그와 그녀의 차이었다. 사례 태감 양단과 황후 후보자 안양비의 차이였다. 숨을 헐떡이는 태감을 보며 소년은 면목 없다는 듯 멋쩍은 웃음으로 그를 맞이했다.

“태감님, 잘 해보려고 했는데…… 어떻게. 안 되더군요.”

“그러면. 그러면 도망쳤어야지.”

미련하게, 원망 섞인 타박을 늘어놓으며 태감은 그에게 다가섰다.

찰박거리는 소리. 새빨간 액체가 그의 발을 적신다.

한 걸음. 두 걸음.

태감이 그를 향해 다가온다. 손을 들어 올릴 기력마저 남아 있지 않았던 소년은 부드러운 말로 그를 만류했다.

“옷 버리십니다. 피는 잘 지워지지도 않는데.”

“이깟 옷이 다 뭐라고.”

마치 얼음처럼 차갑고 예민해진 그의 어깨에 따스한 온기가 내려앉는다.

가늘고 섬세한 흰 손가락. 태감의 온기. 느릿하게 맥동하는 심장에 파고드는 온기를 느끼며 소년은 그와 함께했던 사계절을 보았다.

이름을 받고, 그의 사람이 되었던 봄. 무더웠던 여름. 그리고 가을.

얼어붙은 채 후궁 밑바닥을 기어왔던 십 년이라는 시간을 누그러뜨린 그 짧았던, 짧고도 강렬했던 그와의 추억. 그와 나누었던 비밀. 울고 웃었던 일들.

그의 시간이 스러진다. 저물어 간다.

소년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가만히, 태감의 어깨를 떠밀었다.

“이만 가셔야 합니다. 태감님.”

“내가 가면, 너는.”

“어서요.”

일어나셔서, 후일을 대비하셔야지요.

첫눈처럼 가벼이 스러질 것만 같은, 소년의 팔이 떠미는 것을 태감은 거부할 수 없었다.

조금만 힘을 주면 소년이 그대로 무너질 것만 같아서. 태감은 소년이 떠미는 대로 속절없이 일어서야만 했다.

그의 요리사가.

그를 위해 일하였던.

그를 위해 차갑고도 지독한 정치판을 구르고 뛰었던 그가.

그와 함께 웃고, 술잔을 기울이며 함께 꿈을 이야기했던 친구가.

식어간다. 사그라진다. 가라앉는다. 멈추어 선다. 잠든다.

죽어간다.

태감은 그를 붙잡으려 하는 주먹을 그러쥐었다. 말라붙으며 엉긴 핏자국 위로 새로운 핏방울이 떨어진다.

손가락 틈으로 방울져 떨어지는 진득한 것. 그와 함께 흘러내리는, 투명한 액체. 흐트러진 가면의 틈새로 뜨거운 액체가 흘러내린다.

신음성과도 같은, 가느다란 흐느낌에 소년은 시선을 위로 올렸다. 광택 없는 새카만 가면 안쪽에선 억눌린 감정이 스며 나오고 있었다.

떠나야 하는 이의. 해야 할 모든 소임을 다하고 이제 그만 훌훌 털어버린 채 떠나야 하는 이의 발목을 붙잡는 그런 흐느낌이었다.

잠시 안양비 쪽으로 시선을 돌린 소년은 숨을 내쉬고는 가늘게 떨리는 태감의 손을 쥐었다.

그 소름 끼치는 감촉에 놀란 태감은 그것이 곧 소년의 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메마른 나뭇가지처럼 세게 쥐면 그대로 부러질 것만 같은 손. 그 손이 그를 끌어당기고 있었다.

그 미약한 힘에 이끌린 태감은 허물어지듯 소년에게 다가왔다. 그를 끌어안고,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소년은 피딱지가 엉겨 붙은 입술을 비집어 그에게 무언가를 속삭였다.

그것은 작별 인사가 아니었다.

건강하라는 당부, 그간 즐거웠다는 감사와 너무 자책하지 말라는 위로.

태감에게 소년이 전한 것은 그런 따뜻하고 다정한 것이 아니었다.

마지막 순간, 소년이 최후의 기력을 짜내어 태감의 귀에 속삭인 것은.

“안양……비를…….”

“지금이야말로, 더할 나위 없는 기회입니다. 태감님.”

안양비를 공격하라는 교활하고도 잔혹한 조언이었다.

당혹스러움으로 눈물이 말라붙은 태감을 올려다보며 소년은 홀가분하다는 듯 웃었다.

작별 인사도, 당부도 남기지 않고 태감을 밀어낸 소년은 창백한 손으로 자신이 흩뿌린 얼룩을 짚으며 일어섰다.

소년은 더 이상 태감을 보고 있지 않았다. 마치 어둠 속에서 촛불이 타오르듯, 흐릿한 동공 속에 불길이 타오르는 것을 본 태감은 천천히 그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후궁의 상호. 오운. 참주패를 울렸는가.”

용의 아들. 제국의 주인. 만백성의 아버지. 율법의 수호자. 참수도의 주인.

황제가 참주들을 거느린 채 그들을 굽어보고 있었다.

* * *

“후궁의 상호. 오운이 황제 폐하께 죄를 고하나이다.”

소년. 김승조가 무릎을 꿇는다. 무릎걸음으로 걸어, 황제의 앞에서 고개를 숙인다.

황제는 심호흡을 한 후 입을 열었다. 그 목소리는 잠겨 있었다.

“후궁의 상호. 오운. 죄를 고하여라.”

동생의 이름을 받은 아이. 요리사. 후궁의 상호. 그에게 참주패를 내어주었을 때 황제는 그때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에게 패를 내어준 것은 이런 결말을 원해서가 아니었다. 이렇게 그를 내려다보기 위하여 패를 내어준 것이 아니었다.

그의 최후가 이런 것인 줄 알았다면.

이렇게 피투성이가 되어 파리하게 질린 안색으로 꿇어 엎드린 채 죄를 고하게 될 것이라고 알고 있었더라면.

더는 돌이킬 수 없기에, 걷잡을 수 없기에 회한은 늘 사무치도록 고통스럽다.

소년이 죄를 고한다. 안양비를 암살하려 했다는 거짓된 죄를 입에 담는다.

사례 태감을 위하여.

자신의 동생을 위하여.

안양비가 그를 공격할 명분을 내어주지 않기 위하여. 소년은 마지막까지 자신의 단독 범행임을 호소했다.

“후궁의 상호. 오운이여. 지금 그 말에 한 치의 거짓도 없음을, 맹세하는가.”

“맹세하나이다. 제가 읊은 죄목에 한 치의 거짓도 없음을, 이 천것의 목을 걸고 맹세하나이다.”

마지막까지, 그는 동생의 사람이었다. 얼이 빠진 채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는 동생을 향해 시선을 돌린 황제는 표정을 굳힌 채 손을 뻗었다.

“참수도를 다오.”

흰 면포로 얼굴을 가린 참주가 패용하고 있던 참수도를 끌러 양손으로 받쳐 올렸다.

부드럽게 휘어 있는 날. 죄인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하여 참수도의 날은 날카롭고도 무겁게 벼려졌다.

두 뼘이 넘는 넓은 폭에 비해 기형적으로 얇은 날. 오직 사람의 목을 베기 위해서 만들어진 자비의 칼날.

코등이도, 다른 장식도 없이 오직 날과 자루만으로 이루어진 참수도를 황제가 쥔다.

가슴을 에는 섬찟한 소리.

날이 칼집을 빠져나오는 그 소리에 혹여 소년이 놀랐을까 황제는 고개를 숙였다.

각오를 마쳤다 해도 눈앞에 들이 밀어진 죽음 앞에서 어느 누가 초연할 수 있단 말인가.

자책감에 얼룩진 한숨을 내쉬던 황제는 소년의 얼굴을 보고는 들어 올리던 칼을 멈추었다.

두려움과 후회로 일그러져 있어야 할 소년의 얼굴에 떠오른 것은 시원한 미소였다.

오히려 황제를 염려하는 듯한, 그에게 짐을 남겨 미안하다고 말하는 듯한 미소. 그 표정. 황제는 한참 후에야 그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 너에게는, 고통이었겠구나. 피로했겠구나. 그렇기에 그토록.’

호기심과 즐거움으로 지켜봐 왔던 그의 활약상을 떠올린 황제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쌓아 올린 빛나는 업적의 그늘에 숨어 홀로 삭여야 했던 그의 피로가.

그 좁은 어깨와 굽은 등으로 감당해야만 했던 책임의 무게가.

그제야 보였다.

식방각주를 꺾은 천하제일의 요리사. 황제에게도 서슴없이 독설을 내뱉는 담대하고 호방한 걸물. 그 화려한 장막 너머에서 들여다본 소년은, 한없이 작고 초라했다.

‘조금 더 일찍, 관심을 기울였더라면.’

그의 동생이 일찍이 제기해 왔던 문제. 소년의 혈통에 대한 문제를 상기하며 황제는 타는 듯한 갈증을 느꼈다.

조금 더 일찍 주의를 기울였어야 했다. 하지만 과거와 마주해야만 하는 것이 두려워 도망치고, 방임한 끝에 그는 결국 최후의 기회마저 잃어버렸다.

그의 손에는 참수도가 들려 있었고, 소년은 그의 앞에 꿇어앉아 있었다. 자신의 부덕으로 인하여 벌어진 파국을 직시한 황제는 갈등 속에서 칼을 늘어뜨렸다.

칼끝이 바닥에 닿으며 생긴 둔탁한 소리를 들은 소년은 칼끝을 바라보고는 힘없이 숨을 내쉬었다.

“후궁의 상호. 오운이여. 그대는…….”

“폐하.”

무례임을 알면서도, 소년은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황제 폐하. 위대한 용의 아들이시여. 만백성의 아버지시여. 지엄한 황실의 법도를 능멸하고 끔찍한 죄악을 저지른, 이 가증스러운 죄인을 사하여 주시옵소서.”

소년의 어조는 단조로웠고 그가 뜻하는 바는 분명했다. 그 단호한 의지에 황제는 그 이상 자신의 고집을 강요할 수 없었다.

황제가 참수도를 들어 올리자 조용히 시립하고 있던 참주들은 태감의 앞에서 벽을 만들었다.

“오운. 후궁의 상호여. 그대의 죄를. 사하노라.”

목덜미의 솜털이 곤두서는 그 소름 끼치는 예감을 느끼며 소년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마치 잠기운이 내려앉는 듯 몽롱한 눈꺼풀이 스르륵 감기고, 적막함 속에서 평온이 찾아온다.

하나. 둘. 셋.

그 순간 소년의 머리 위에서 소름 끼치는 소리가 울렸다.

울려서는 안 될, 칼날이 우는 소리. 그 찢어지는 울림에 소년은 다급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하지만 너무 많은 피를 소모했기 때문인지 손아귀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소년은 일어서던 자세 그대로 주저앉고야 말았다.

일어설 수가 없었기에 소년은 고개를 힘껏 들어 머리 위를 확인해야 했다. 참수도를 막은 것은 어딘가 익숙한 형태의 새파란 비수였다.

초점을 잡지 못하는 눈에 한껏 힘을 주고 나서야 소년은 그 비수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주름이 자글자글한, 관짝에 한 발 걸치고 있을 듯 노쇠한 노인이었다. 피부는 생기를 잃어 푸석푸석했고 단정하게 빚어 넘긴 머리는 허옇고 숱이 적었다. 처음 보는 것이 분명한 노인의 얼굴을 본 소년이 어딘가 익숙하다는 느낌을 받은 순간, 누군가가 억눌린 신음성으로 노인의 정체를 폭로했다.

“문일. 돌아온 것인가.”

신음을 토해낸 것은 다름 아닌 황제였다. 가만히 칼을 거둔 문일은 깊게 허리를 숙여 황제의 행사를 가로막은 자신의 무례를 사죄했다.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폐하.”

“대답하게. 선황 폐하와 함께 궁을 떠난 그대가, 어찌 다시 돌아온 것인가.”

시뻘겋게 변한 얼굴로 황제는 사납게 참수도를 치켜세웠다. 섬뜩한 예기가 턱 끝에 겨누어졌음에도 문일은 담담한 태도를 유지했다.

“선황 폐하께서 명령하셨기에, 다시 돌아왔나이다.”

“이미 권좌를 두고 떠나신 그분께서. 이제 와 어떤 연유로.”

“긴 시간 묶여 있었던 매듭을 풀고 오라 명하시더군요.”

사람들은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마치 수수께끼와 같은 말로 시선을 잡아끈 문일은 갑작스럽게 몸을 돌려 소년을 바라보았다.

아직 상황을 이해하지 못해 멀건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만 있는 소년을 향해 문일이 무릎을 꿇었다.

“비록 의무를 저버리고 도망친 공주의 자손이나. 그의 핏줄에 흐르는 것은 틀림없이 존귀한 용의 피이니. 그간의 허물을 덮고 마땅히 왕의 작위를 내려 황족으로 복권함이 옳다. 이것이 선황께서 내리신 명이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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