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관의 요리사 200화
“한 가지, 대답해 주게. 사례 태감인가?”
“금조. 그 친구를 부추긴 게 태감님이냐. 그 말씀이시군요.”
변명에 불과할지라도, 그녀가 그것을 원하였기에 소년은 입을 열었다.
“아니라고 한다면, 믿으시겠습니까.”
“물론 믿을 수 없지.”
“그리고 사실, 대답이 중요한 건 아니지요.”
제가 어떤 대답을 늘어놓든, 결국 결과는 정해져 있지 않습니까. 소년의 말에 안양비는 자조적인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에게 유감은 없네만. 미안하네.”
“어쩌겠습니까. 고약한 상관을 모시다 보면, 이리 덤터기를 쓸 때도 있는 법이지요.”
“억울하지도 않나?”
“억울할 것 뭐 있겠습니까. 살다 보면 횡액을 당할 때도 있지요. 팔자소관 사납다 보니, 이제는 그러려니 하고 넘기게 되더군요.”
비열하게 일그러진, 그러나 앳된 티가 군데군데 묻어나는 얼굴에 온화한 미소가 번진다.
그것은 달관이라기보다는 체념에 가까운 것이었다. 이제 고작 열둘, 혹은 셋. 많아도 열다섯은 넘기지 않았으리라.
피로감 섞인 숨을 몰아쉬는 소년을 향해 안양비는 다시 한번 사과했다.
“미안하네.”
“사과하실 일 아닙니다. 이 후궁이란 곳이 이런 것을 어쩌겠습니까.”
서로 밖에서 만났다면 조금 더 좋은 인연으로 만났을 수도 있었겠지요? 소년의 너스레에 안양비는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밖에서 자네를 만났다면, 분명 전속 요리사로 고용했겠지. 누구에게 뺏기기 전에 얼른 거금을 들여서.”
“너무 매력적인 제안은 하지 말아주십시오. 살짝 혹할 뻔했습니다.”
“내 품은 늘 열려있네만. 혹시 생각 있는가?”
“이번 생에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아쉽지만, 내세를 기약해야겠군.
안양비가 웃었고, 소년이 따라 웃었다. 은은한 향냄새가 번진 허공에 유쾌한 홍소가 울린다.
“그건 그렇고, 참 공교롭습니다. 설마, 여기서 뵙게 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습니다만.”
이로써 안양비 님께 기회가 왔군요. 황후 후보자의 암살 시도라니. 태감께서도 쉽사리 넘기기 어려운, 중대한 사건이지요.
넘겨짚듯 이야기하던 소년은 입꼬리를 한껏 끌어올렸다. 귀밑까지 찢어진 흉소. 소년은 마치 자신의 광기를 과시하듯이 그녀를 도발했다.
“하지만 태감께서 그리 허술한 분은 아니시지요.”
“그래. 내가 설령 자네를 죽이고 암습을 당했다고 떠든들, 사례 태감은 자네의 단독 범행이라 하며 혐의를 부인할 거다?”
“늘 있는 일 아니겠습니까.”
격정과 적의, 굳은 각오로 내뱉어진 말에 대한 대답은 단조롭고도 처연한 것이었다.
우울함 마저 느껴지는 안양비의 태도에 소년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녀를 보았다.
“자네가 추측한 것은. 자네가 판단한 자네의 가치는, 고작 그것뿐인가?”
“전 단 한 번도 제 목에 서푼 이상의 가치를 부여해 본 적이 없습니다.”
“자랑스럽게 이야기할 만한 것은 아니군.”
자넨 자네의 가치를 모르는군. 그렇기에 이런 실수를 한 것이겠지. 안양비는 안타깝다는 듯이 중얼거렸고, 서서히 손을 들어 올렸다.
“내가 자네를 노린 이유는, 단순히 사례 태감을 찌를 모략이 필요했기 때문이 아니야. 자네가 사례 태감의 가장 아픈 손가락이기 때문이네.”
이런 수 만큼은 쓰고 싶지 않았네만, 궁지에 몰리니 다른 도리가 없더군. 붙일 필요 없는 사족이었으나 안양비는 굳이 그것을 입에 담았다.
“정치란 것이 정정당당히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요.”
“자네의 깊은 아량에 감사를 표하고 싶네만, 아쉽게도 우리에게 남은 시간이 그리 많지 않군.”
제가 바쁘신 분 시간을 너무 끌었군요. 그녀의 손끝을 보던 소년은 갑작스럽게 질문 하나를 꺼냈다.
“실례되지 않는다면, 하나 여쭙고 싶은 게 있습니다만.”
안양비는 소년을 존중하는 의미로 잠시 하려 했던 행동을 유보했다. 그녀의 배려에 감사를 느끼며 소년은 입을 열었다.
“아이들은, 어찌하셨습니까.”
“자네가 늘 데리고 다니던 호위 말인가?”
“예, 중간부터 아이들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더군요.”
“자네와 진솔한 대화가 나누고 싶어, 잠시 자리를 비켜달라 했지. 너무 걱정하지 말게. 털끝 하나 다치지 않게 얌전히 돌려보낼 테니.”
사려 깊은 당부에 소년이 만족하자 안양비는 잠시 멈추었던 손을 다시 들어 올렸다.
그녀가 소매 춤에서 무언가를 꺼내는 것을 본 소년은 비수를 꺼내는 것으로 생각했다.
품이 넉넉하다고는 하나 기다란 장병기를 숨길 정도로 여유가 있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그녀가 품에서 뽑아낸 것은 소년의 기대를 완벽하게 배신하는, 날이 좁고 긴 협봉검 한 자루였다.
우아한 청백색 검집은 상어 가죽으로 겉을 댄 것이었고 칼자루 끝에는 청홍 수실이 달려 있었다. 마치 묘기와도 같은 광경에 소년은 혀를 내둘렀다.
“남다른 재주를 가지고 계시는군요.”
“별것 아닌 재주지만, 이럴 땐 요긴하게 쓰이지.”
“기회가 된다면 저도 좀 배우고 싶군요.”
“한번 배워 보겠나? 그리 어려운 재주는 아니네만.”
검을 뽑아 든 안양비에 비해 소년이 꺼내 든 것은 초라한 비수 두 자루뿐이었다.
한 자루는 당장에라도 핏방울이 떨어질 것처럼 새빨간 비수였고, 다른 한 자루는 무기로서의 기능성이 의심스러운 화려한 장식이 달린 황금빛 비수였다.
안양비는 후자가 도저히 못 미더워 보인다는 듯 혀를 찼다.
“무기를 고르는 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의 취향이지만, 그 비수의 실용성에 대해서만큼은 이의를 제기할 수밖에 없군. 괜찮겠나?”
살점을 헤집고 뼈를 가르기에, 그 비수는 지나칠 만큼 화려하고 무뎌 보이는군. 안양비의 염려에 소년은 싱긋 미소 지었다.
“이래 보여도 나름 고르고 골라 준비해온 물건입니다. 안양비 님을 위해서.”
“호오? 이런 일이 일어날 거라고 예상하였나?”
“설마 이런 형태로 이루어질 거라고는 생각 못 했습니다만.”
마치 금강저를 연상시키는 손잡이와 연꽃 모양으로 섬세하게 조각된 코등이. 기묘하게 비틀린 칼날. 차라리 종교적인 법구에 가까운 그 자태에 안양비는 의심스럽다는 듯 물었다.
“혹시 베이면 저주라도 걸리는 건가? 하긴, 그런 신비한 기능이라도 있으니 쓰는 물건이겠지?”
“한번 시험해 보시겠습니까?”
“배려는 고맙네만, 내 사정이 여의치 않아 사양하도록 하지.”
가볍게 한숨을 내쉰 안양비가 검을 뽑아 들었다.
양손으로 자루를 가볍게 쥐고 상대를 향해 겨누는, 모든 검술의 기본이 되는 상단 자세. 그에 비해 소년이 취한 자세는 무척이나 독특한 것이었다.
오른발에 체중이 과도하게 쏠린, 마치 바닥에 엎드리려는 듯한 자세. 안양비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깨달았다.
“독각투신의…… 설마 전인이 남아있었을 줄이야.”
“세상엔 저 같은 절름발이 놈을 위한 무술도 있더군요.”
“확실히, 자네에게 정말 잘 어울리는 무술이군.”
사설이 너무 길었어. 안양비의 말에 소년은 동의했고, 그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사납게 달려들었다.
* * *
칼날이 비명을 지를 때마다 허공에선 번갯불이 번뜩였다. 그리고 그때마다 소년에 대한 안양비의 평가는 조금씩 상향되고 있었다.
그럭저럭 봐줄 만한. 썩 괜찮은. 이만하면 훌륭한. 그리고 나이에 비하면 믿을 수 없는 성취. 사자분신의 기세로 격렬하게 몰아치는 소년의 맹공을 받아내며 안양비는 환희를 느꼈다.
‘이만한 상대와 부딪혀본 것이 얼마 만인가.’
상대의 공격을 받아칠 때마다 손아귀에 가해지는 그 충격.
때때로 그녀를 놀라게 하는 그 변칙적인 동작.
어떠한 사심도 섞이지 않는 순수한 적의.
그것들은 긴 시간 갈증에 허덕여 왔던 그녀를 충족시켜 주었다.
파고들 때는 마치 들불이 번지듯 사납고, 물러나야 할 때는 바람처럼 날렵하며, 절뚝거리는 위태로운 동작 속에는 치명적인 독니가 숨겨져 있다.
발등을 내리찍어오는 소년의 비수를 가벼운 동작으로 피한 안양비는 놀라움을 숨기지 못했다.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군. 오상호. 자네가 사례 태감의 호위 무사가 아닌 요리사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야.”
숨을 헐떡이던 소년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삼십 여분에 가까운 시간 동안 공격을 퍼부었음에도 상처를 입기는커녕 숨조차 흐트러지지 않은 그녀의 모습은 소년에게 절망적인 상황을 강하게 인식시켰다.
“지금껏 봐주셨던 분이 그런 말씀을 하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딱히 그대를 조롱하기 위하여 그런 것은 아니었네.”
자네의 그 색다른 단검의 위험성을 경계하여, 그만큼 신중하게 싸움에 임하였을 뿐이지. 그것은 소년의 자존심을 배려하기 위한 말이 아니었다.
그녀는 진심으로 독특한 비수의 예리함과 단단함에 감탄하고 있었다.
안양비는 소년의 단검과 부딪혀온 자신의 검을 내려다보았다.
비록 황제의 총애를 얻은 장수만이 하사받는다는 오철이나 하늘에서 떨어진 운철은 아니었지만, 그녀의 검 또한 그에 버금가는 철을 이름난 야장이 벼려낸 것이었다.
그런 그녀의 검이 소년의 비수와 충돌할 때마다 야금야금 파먹히고 있었다.
도대체 무엇으로 비수를 벼려내었길래 저 얇고 가는 칼날이 저리도 단단하단 말인가. 괴이하다는 듯 소년의 비수를 보던 안양비는 피식 웃음 지었다.
“자네의 비수와 더 부딪혔다가는, 아끼는 애검이 부러지겠군. 어떤 명인께서 벼리신 물건인가?”
“붉은색 비수는 혈옥비수라는 물건으로 상고시대에 신선이 운철을 벼려 만든 물건이고, 이 황금빛 비수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냥 창고에서 주워온 거라.”
“어찌 되었든, 무기로서의 실용성이 의심된다는 조금 전 발언은 실언이었음을 인정하겠네. 장식이 조금 과하게 달려있기는 하지만, 틀림없이 무기로군.”
소년은 안양비가 왼손을 허리춤에 두는 것을 보았다. 오른손으로 가볍게 검을 쥔, 그 파지법은 베기가 아닌 찌르기를 위한 것이었다.
위기감과 함께 소년이 크게 뒤로 물러서는 순간 안양비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오른쪽 겨드랑이 아래. 찔러 들어온 검날은 마치 독오른 뱀처럼 집요했다. 찌르고, 날을 뒤집어 그대로 베어 온다.
예리한 통증이 가슴께에 번지자 소년은 어금니를 꽉 깨물고는 손으로 상처를 짚었다. 깊이는 얕았지만, 길게 찢어진 상처에선 피가 송골송골 샘솟았다.
“독을 바른 것인지, 아니면 다른 장치가 되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한 번만 공격을 성공시키면 된다는 초조함이 공격을 점점 무디게 하고 있네.”
“감사한 조언입니다만, 유념하기 위해선 시간을 조금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럴 수는 없지. 대련이 아니지 않은가.”
정정당당히 실력을 겨루고, 승패가 갈리면 웃으며 서로의 솜씨를 치하하는. 그런 우정을 쌓기 위한 행위가 아니었다.
유혈을 흩뿌리고 고통과 분노를 나누어야만 하는. 그 어떤 유익한 것도 생산하지 못하는 행위였다. 지성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그 무의미함을 성토하였을.
그러나 유사 이래 단 한 번도 중단되었던 적 없었던 행위. 그 행위의 결말이 서서히 다가옴을 느끼며 안양비는 칼날을 비틀어 소년의 피를 털어내었다.
흘러내린 피가 나뭇결의 골을 따라 번지며 기이한 얼룩을 그려낸다. 그리고 그 붉은 족적을 밟으며 소년이 비수를 휘두른다.
흘린 피만큼 몸이 가벼워지기라도 했다는 듯이. 소년의 기세는 처음보다 더 사납고 매서워졌다.
칼날을 향해 대담하게 뛰어드는 소년의 공세에 안양비는 마른침을 삼키며 응수했다. 손아귀를 타고 검이 비틀리는 것이 전해진다.
‘만약 십 년 후였다면 어땠을까, 조금만 더 시간이 있었더라면. 조금만 더 성숙했더라면.”
소년의 집념은 그녀를 설레게 했다. 만약 그에게 충분한 시간이 있었더라면. 만약 그가 불편하지 않은 신체를 가지고 있었더라면. 하지만 그 번뜩이는 희열은 결국 찰나에 불과했다.
싸움은 언젠가 결착이 나기 마련이고, 승자는 언제나 단 한 명뿐이었다.
두 조각난 칼날이 떨어진다.
날카로운 소리.
그와 함께 바닥에 핏물이 흘러내린다.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부러진 자신의 칼을 내려다보던 안양비는 자신이 다할 수 있는 최대한의 경의를 담아 허리를 숙였다.
“훌륭했네. 참으로.”
그와 함께 소년의 몸이 힘없이 허물어졌다. 왼쪽 빗장뼈에서부터 오른쪽 옆구리까지 길게 갈라진 상처에선 새빨간 피가 왈칵 솟구쳤다.
버둥거리며 상처를 부여잡은 소년은 손가락 틈새로 흘러나오는 뜨거운 액체를 움켜쥐지 못한 채 허망한 웃음을 흘렸다.
“제가 졌군요…….”
“자네가 졌네.”
“그래도 안양비 님의 검을 부러뜨렸으니, 조금은 자랑스럽게 생각해도 되겠지요?”
“그 검, 비싼 거였네. 그 값어치만큼 자랑스러워하게나.”
저런, 죄송하지만 물어드릴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정 아까우시면, 나중에 태감님께 물어달라 하십시오. 키득거리던 소년의 숨은 점점 거칠어졌고, 가늘어졌다.
흐릿해지는 그의 시선을 마주하며 안양비는 차마 말하지 못한 위로의 말들을 곱씹었다.
만약. 만약 자네에게 조금만 더 시간이 있었더라면. 안양비는 그 말을 내뱉지 않기 위하여 입술을 깨물었다. 그것은 지독한 기만일 뿐이었다.
입술을 달싹이던 안양비는 결국 무의미한 위로 대신 소년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을 내어주기 위해 반 토막 난 검을 높이 들었다.
“남길 말이 있는가?”
이 이상 고통이 길어지기 전에. 최소한의 자비를. 안양비의 뜻을 이해한 소년은 하얗게 질린 손을 품에 넣었다. 무기도, 기력도 모두 소모한 그에게 남은, 최후의 보루. 소년이 갑작스럽게 웃음을 터뜨렸다.
“싸움에선 제가 졌지만, 명분까지 내어드릴 수는 없지요.”
뒤늦게 소년이 꺼내 든 것을 확인한 안양비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그를 제지하려 했다.
하지만 그보다는 소년의 동작이 조금 더 빨랐다.
새파란 색의 옥패. 붉은 수실이 달린 그것을 본 안양비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외쳤다.
“참주패!”
핏빛 칼날이 옥패를 부수는 순간, 그 비명마저 집어삼키는 거대한 폭음이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