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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관의 요리사-199화 (199/314)

환관의 요리사 199화

태어나기를 강자로 태어났기에, 그녀는 단 한 번도 나약함을 실감하지 못했다.

그 어떤 어려움도, 그 어떤 절망도, 그 어떤 고독도. 그것이 설령 원치 않은 정략혼이라 할지라도. 그 암담한 현실이 그녀를 두려움에 떨게 하지는 못했다.

노력한다면 이룰 수 있는 것이었고, 인내한다면 견뎌낼 수 있는 것이었으며, 맞서 싸운다면 이겨낼 수 있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처음으로 느낀 자신의 나약함. 무력감 앞에서. 그녀는 절망감에 앞서 당혹스러움을 느꼈다.

자신의 수족이었던. 지지자였던. 정치적 동반자였던. 그리고 친우였던 자를 죽인 원수이며, 배신자인 사내가 그녀 앞에 앉아 있었다.

뻔뻔한 얼굴로 차를 홀짝이며, 변명조차 하지 않고. 그녀를 설득하려 하고 있었다.

“안양비 님. 올바른 선택을 하셔야 합니다.”

“올바른 선택이라. 납작 엎드리고, 목줄을 차는 것이 올바른 선택인가? 언제부터 비굴하게 목숨을 구걸하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 되었지?”

“안양비 님께서 와신상담(臥薪嘗膽)의 고사를 모르실 거라 생각되지는 않습니다만.”

장 태감. 이자요? 자네가 그토록 믿던 사내가, 후계자로 삼겠다고 자랑했던 사내가. 당신은 이런 자에게 등을 내어준 거요?

아릿한 상실감과 함께 실망감이 밀려왔다. 주름진 노인의 얼굴을 떠올린 안양비는 빈정거리기 위하여 입을 열었다.

“장작을 베고 눕고 쓸개를 핥더라도 뜻을 이룰 수만 있다면 그리 해야지. 하지만 사례 태감은 그렇게 녹록한 자가 아니야. 그는 단 한 번도 화근을 남겨둔 적이 없었다. 난 폐비 되는 거로 끝나겠지만, 자네는 독을 마실 시간도 없이 목이 잘려 저잣거리에 내걸릴 텐데?”

독이라는 단어는 유난히 분명하고 선명하게 들렸다. 찌르는 듯한 조롱이었음에도 금조는 낯빛 하나 바꾸지 않고 차분히 대답했다.

“그러니 목줄이라도 차야지요. 쓸개를 핥는 거로 부족하다면, 예. 개처럼 짖기라도 해야지요. 그렇게라도 살아남아야 기회가 오지 않겠습니까.”

설득은 집요했고 어조는 도발적이었다. 반복되는 이야기에 일말의 흥미조차 느끼지 못한 안양비는 어느 순간 자신이 그의 말은 한 귀로 흘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신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 편협한 자가 아니었다. 그것이 아무리 무가치하고 허황한 이야기일지라도, 그 말을 입에 담는 이가 증오스러운 배신자라 할지라도.

최소한, 이야기를 들었다면 검토는 해보았을 것이다. 이용하기 위해서. 그 무지함과 허술함을 꼬집어 상대를 비웃기 위해서. 안양비는 곧 그 거부감의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안양비 님께선 출혈을 감수하셔서라도 건곤일척의 승부를 준비하시겠지요. 가진 모든 정치 역량을 총동원하여, 반드시 한쪽이 죽지 않으면 끝나지 않을 만한. 하지만 그런 무모한 승부수는 파국으로 수렴하는 단초가 될 뿐입니다.”

“아주 인상적인 의견이군. 그 말인즉, 나와 장 태감이 틀렸단 말인가?”

“불쾌하셨다면 죄송합니다.”

안양비가 불쾌감을 숨기지 않고 표정에 드러내자 금조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안양비는 그의 등허리 쪽을 살폈다.

내관 태감의 품격에 어울리는 훌륭한 청색 비단옷은 식은땀으로 흥건히 젖어있었다. 안양비는 그가 긴장감을 느낄 수 있도록 충분히 지체한 후, 고개를 끄덕였다.

그 동작을 발언의 허가로 이해한 금조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일대일의 대결이라면. 무인이신 안양비 님께선 익히 아시겠지만, 병장기를 쥐고 단둘이서 맞붙는 싸움이라면 육참골단(肉斬骨斷)의 결단을 악수라 말할 수는 없을 겁니다. 오히려 그 용맹함과 결단력을 칭송해 마땅하겠지요.”

하지만 정쟁, 암투는 그렇게 정정당당한 승부가 아니란 것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금조는 간절한 목소리로 호소했다.

“상처뿐인 승리일 겁니다. 막대한 출혈을 감당하셔야 하겠지요. 그리고.”

“피투성이가 되어 이리떼에 포위당한 꼴이 될 거다. 그 말이 하고 싶은가?”

“지금까지는, 안양비 님과 사례 태감, 두 분 모두 강대한 세력을 유지하고 계셨기에 바깥의 이리들이 감히 눈길을 주지 못했지만.”

한 명이 쓰러지고, 상처투성이가 된 다른 한 명은 이리 떼의 사냥감이 될 뿐입니다. 안양비 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사례 태감과의 공멸이라면 모를까, 진정 승리를 바라신다면 지금은 인내하셔야 할 때입니다.

안양비는 감흥이 없다는 듯 건조하게 대답했다.

“그래. 타당한 제안이군.”

“감사합니다.”

무기력함마저 느껴지는 무성의한 태도였으나 금조는 실망하지 않았다. 안양비가 결국 자신의 제안을 수락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관 태감의 자리는 그런 것이었다. 안양비의 수족이자 자금줄이며, 그녀의 파벌을 구성하는 핵심. 달리 주춧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의 예상대로 안양비는 손익의 저울을 재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기대와는 달리 안양비는 굴종의 제안을 저울추로 올리지 않았다. 그녀가 저울추로 삼은 것은, 금조라는 신임 내관 태감의 이용가치였다.

냉혈한 눈동자로 그를 굽어보며 안양비는 그를 죽이지 말아야 할 이유를 꼽아보았다.

‘그는 내관 태감이며, 파벌을 운용하는 데 필요한 자금을 담당하는 인물이다. 결국, 개인의 재산으로는 한계가 있지. 단체에는 늘 혈관을 도는 피처럼 움직이는 자금이 필요해.’

그것은 첫 번째 이유였다.

‘그가 장 태감이 쌓아 올린 인맥을 전부 제 것으로 삼지는 못했겠지만, 내관 태감이라는 이름 하나만으로도 앞으로의 이용가치는 무궁무진하다.’

그것이 두 번째.

‘그리고, 그는 장 태감이 남긴 마지막 후계자이니까.’

별로 고려하고 싶지 않은 세 번째 이유. 그것들을 꼽아본 안양비는 마지막으로 그를 죽여야 하는 이유를 찾아보았다.

개인의 만족감과 장 태감의 복수라는 명분. 안양비는 깊은숨을 몰아쉬었다.

포용할 수 있는가. 대의를 위하여. 원대한 뜻을 위하여. 사적인 감정을 접고, 손을 잡을 수 있는가. 끌어안을 수 있는가. 용서할 수 있는가.

눈앞의 배신자를.

안양비는 답을 내렸다.

“나 역시, 약자였구나.”

안양비의 손이 금조의 목을 틀어쥐었다. 맹수의 발톱과도 같은 다섯 손가락이 기도를 압박하자 금조의 입에서 기묘한 신음이 새어 나온다.

마치 폐부를 짓눌러 공기를 짜내는 듯한 신음. 당혹스러움과 공포, 고통으로 일그러진 그의 얼굴이 새빨갛게 변하고, 이내 창백해진다.

“안……양비…… 님……!”

“자네의 말이 옳네. 지금 사례 태감과 겨루는 것은 승률이 낮은 도박이지. 고약한 상황이야. 나의 수족이자 지지자였던 장 태감의 빈자리를 메울 수 있는 것이 오직 자네 한 명뿐이라니.”

자신의 몸값을 높이는 법을 아주 잘 알고 있군. 아주 유능해.

감탄했다는 듯 말하는 안양비의 눈은 새카만 증오로 타오르고 있었다. 가래 끊는 소리를 내는 금조를 심문하듯 안양비는 지긋이 손에 힘을 주었다. 연약한 피부가 찢어지며 핏물이 흘러나온다. 손가락 틈을 타고 방울져 떨어지는 피는 뜨거웠다.

“내가 두려웠겠군. 그렇지?”

금조는 실핏줄이 터져 벌겋게 물든 눈동자로 그녀를 보았다. 점점 뻣뻣하게 굳어가는 혀가 간신히 한마디를 자아낸다.

“저는 그저, 안양비 님을 위하여.”

“마지막 순간까지 변명인가. 차라리 담대하게 내질러보게. 그럼 마음이 바뀔지도 모르잖나.”

친절한 권유와 함께 안양비는 대답이 나오도록 손아귀에 힘을 더했다. 하지만 나오는 것은 만족스러운 대답이 아닌 쥐어 짜내는 비명뿐이었다.

“자넨 참 똑똑한 친구야. 위험을 알아차린 것을 넘어, 상황을 피하지 않고 이용하려 하다니. 자네의 선택은 정답이었네. 장 태감이 죽은 이상, 그리고 자네가 내관 태감의 자리를 차지한 이상. 난 절대로 자네를 죽일 수 없지. 자네를 중용할 수밖에 없어.”

이기기 위해선. 이 정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선. 대의를 위해선.

떨어진 핏물이 바닥을 적신다. 빨간 얼룩이 번지고, 그 위에서 금조는 마치 부러져 매달린 나뭇가지처럼 흔들렸다.

“이 안양비를 상대로 굴복을 강요하는 그 담대함. 지금껏 보살피고 가르쳐온 은인의 등에 칼을 꽂는 그 비정함. 그리고 하루 만에 그 내관 태감의 자리를 차지한 그 수완. 자네는 참 매력적인 친구야.”

만약 상황이 이렇지만 않았다면, 자네의 가치를 진작 알았다면 조금 더 일찍 자네를 크게 썼을 텐데. 유감스럽게도.

“자네의 유일한 실책은, 내가 자네의 제안을 받아들일 만큼 합리적이지 못한 인간이었다는 것. 그뿐일세.”

그를 보는 안양비의 시선은 체념으로 가라앉아 있었다.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는 듯한 씁쓸한 표정으로. 안양비는 서서히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그래. 나 또한 결국에는 약자였던 게지. 나의 그릇은 결국 이 정도였어.”

도저히, 자네를 용납할 수가 없더군. 독백하듯 이야기하며 안양비는 조용히 그의 최후를 내려다보았다. 단단한 심지가 뚝 부러진다.

피거품을 게워내며 그녀의 손목을 움켜쥐었던 희고 가는 손가락에 힘이 빠지고, 축 늘어진다. 안양비는 움켜쥐고 있었던 그것을 아무렇게나 내던졌다.

“천하를 꿈꾸는 자라면 사사로운 감정을 잊어야만 하거늘, 결국 이겨내지 못했구나. 사람의 나약함을 알아야 한다고 말했지만, 결국 자신의 나약함은 알지 못하였어.”

풀썩하는, 가벼운 소리가 울린다. 일부러 인기척을 내며 떨어진 그녀의 암살자. 소영(燒影)이었다. 침묵하는 암살자를 돌아보지도 않은 채 그녀는 명령을 내렸다.

“시체는 들판에 내다 버리거라. 들개가 뜯어 먹고 새가 쪼아먹도록.”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암살자가 익숙한 동작으로 흔적을 지우고 시신을 둘러업는 동안 안양 비는 단 한 마디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그렇게 배신자. 금조라고 하는, 멸족된 가문의 마지막 후계자가 살아있었다는 흔적이 모조리 지워진 후에야 안양비는 입을 열었다.

“장 태감. 당신은 분명 이런 복수를 원하지 않았을 테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복수라는 명분을 빌릴 수밖에 없었소.”

삶은 결국 살아가는 이들의 몫이니. 한때 장 태감과 마주 앉았던 탁자를 돌아본 안양비는 흘리듯 실소를 터뜨렸다.

“그래. 향이라도 꽂으러 가야겠군.”

* * *

아내도, 자식도 두지 못한 환관의 마지막은 쓸쓸하고 적막하다. 장 태감은 양자를 두지 않았기에 그의 장례는 궁인들이 말년을 보내는 기관인 완의궁에서 치러졌다.

문상객 하나 찾아오지 않은 외로운 영정 앞에서 소년은 조용히 향에 불을 붙였다.

“정승 집 개가 죽으면 문상을 와도, 정승이 죽으면 문상을 안 간다더니.”

옛말 틀린 게 하나 없어. 향로에 향을 꽂고 종이돈을 태운 다음, 마지막으로 술 한 잔을 올린 소년은 먹으로 그려진 장 태감의 영정을 올려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어찌 그리 가셨습니까. 어찌 그리 허무하게.”

그리 무서우시던 양반이,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오실 것 같았는데. 휑한 빈소를 한번 둘러본 소년은 쓰디쓴 넋두리를 늘어놓았다.

처음 만났던 이야기. 그와 나누었던 말들. 간담 서늘했던 기억. 차마 털어낼 수 없었던 연민과 서글픔. 그리고 동질감을 털어놓으며 그는 고개를 떨구었다.

“좋아할 수는 없었지만, 싫지는 않았습니다.”

결국에는 이렇게 되었군요. 언젠가 함께 술 한잔을 기울이고 싶었는데.

나이를 먹어도 익숙해지지 않는. 오히려 나이를 먹을수록 선명하게 다가오는 상실의 허무함 속에서 소년은 이제 과거가 되어버린 그를 향해 마지막 인사를 전했다.

언젠가 흐릿한 추억 속에서 마주 볼 그 날까지. 일어서려던 소년은 두 번째 손님을 발견하고는 안색을 굳혔다.

“조금, 일찍 오셨군요.”

“심복이었던 이의 마지막을 전송하는 일인데, 만사 제쳐 두고 와야 하지 않겠나.”

검소한 복장을 차려입은 안양비가 그의 앞을 막고 있었다. 소매가 넓고 품이 넉넉한 그녀의 차림새를 주의 깊게 살핀 소년은 창문 쪽으로 뒷걸음질 쳤다.

마지 탈출구를 찾는 듯한 그 동작 안양비는 웃음을 터뜨렸다.

“어딜 그리 급하게 가는가. 누가 보면 내가 잡아먹기라도 할 것처럼 구는군.”

“죄송합니다. 안양비 님. 오늘은 제가 급한 볼일이 있어서.”

“앉는 게 좋을 텐데?”

그 불길하고도 위협적인 말에 소년은 발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경직된 소년을 보는 안양비의 시선은 먹잇감을 눈앞에 둔 뱀과도 같았다. 차갑고, 무감정하며. 비릿한.

머리는 긴장감에 얼어붙어 있었지만, 그 속에서 헐떡이는 본능은 그녀의 의도를 이해하고 있었다.

‘언젠가는, 이런 날이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설마 그날이 오늘일 줄이야.’

가슴께를 쓸어 만진 소년은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품 안에서 느껴지는 단단한 감촉. 그 매끈하고 서늘한 감촉은 미친 듯이 퉁탕거렸던 심장을 가라앉혔다.

단 한시도 떼어놓은 적 없었던 최후의 보루가 그 자리에 있음을 확인한 소년은 담대한 미소를 지으며 안양비의 앞에 앉았다.

“홀로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기다리던 사람이라도 있었나?”

“어찌 사는지 낯짝 한번 보고 싶은 사람이 있기는 합니다만.”

천하의 배은망덕하고 후안무치한 사람인데, 얼마나 뻔뻔한 얼굴로 잘살고 있을지, 궁금하기는 하더군요. 소년의 원색적인 험담에 안양비는 안타깝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자네가 말하는 그 친구, 아마 못 올걸세.”

소년은 애석하다는 표정으로 짧게 고개를 까딱였다. 소년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던 안양비는 그 애석함이 조롱의 의미로 이용되었다는 것을 깨닫고는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

“그리 슬퍼 보이지는 않는군?”

“천벌 받을 사람이 천벌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요. 통쾌해한다면 모를까, 애통해할 이유는 없지 않습니까.”

“그래? 난 자네들의 관계가 퍽 끈끈한 줄 알았네.”

금조. 그 친구가 연신 사례 태감 이야기를 하길래, 난 틀림없이 둘이 교분을 나눈 줄 알았네만. 안양비의 말에서 소년은 금조의 최후가 어찌 되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잠시 장 태감의 영정 쪽으로 시선을 돌린 소년은 품 안에 손을 넣으며 말했다.

“이야기를 나누기엔 장소가 좋지 않은 것 같습니다.”

“난 이곳이 마음에 드네. 조용하고, 사람이 찾을 일도 없지.”

그리고, 곧바로 장례를 치를 수 있다는 점도 매력적이지. 소름 끼치는 농담을 내뱉으며, 안양비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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