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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관의 요리사-198화 (198/314)

환관의 요리사 198화

더는 찾아올 손님도 결례임을 알고 방문을 삼갈 시간. 그 야심한 시각까지 금조는 잠들지 않은 채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탁자에 두 잔의 차를 준비해 둔 채로. 차에서 피어오르는 김이 식은 것을 확인한 금조는 말없이 찻잔을 비우고는 새로운 차를 준비했다.

찻잎을 다기에 담을 때는 먼지나 잔돌이 섞이지는 않았는지 유심히 살펴보아야 한다.

찻잎은 넉넉히 사용하되 물의 양은 신중히 조절하고, 부르르 끓어오르면 차의 맛이 흐려지니 불은 은은하게. 차를 끓이며 금조는 자신에게 처음으로 다도를 가르쳐준 사람에 대해 떠올렸다.

찻잎을 고르는 법.

차를 마시는 법.

다기를 다루는 법. 그것들은 모두 장 태감이 그에게 가르친 지식이었다. 술은 적을 만들지만, 차는 친구를 만드는 법이라며. 장 태감은 그에게 술보다 차를 먼저 가르쳤다.

그리고, 차에 관한 당부 또한.

그와 함께 걸어왔던 시간.

그의 등을 바라보며 걸어온 시간.

발돋움하여 그의 어깨너머를 보기 위해 애써온 시간.

뭉근한 불빛을 가만히 들여다보던 금조는 새로운 찻잔에 새로운 차를 따랐다.

맑은 옥빛으로 우러난 찻물이 찻잔에 담기고, 그에 맞추어 손님이 찾아왔다.

쫓기듯 초조한 발걸음 소리. 문이 열리고 주름진 얼굴이 들어온다. 자리에서 일어선 금조는 정중히 그를 맞이했다.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태감님.”

“잠깐, 네 생각이 나 들렀다.”

피로에 젖은 듯 말꼬리를 흐린 장 태감은 말없이 고개를 두리번거리고는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여전히 변한 게 없구나. 여전히 살풍경한 방이야.”

네 몸치장 하는 것의 반만큼만 관심을 기울였으면 조금은 사람 사는 냄새가 났을 터인데. 장 태감의 짓궂은 농담에 금조는 면목 없다는 듯 그의 방을 새삼 돌아보았다.

옷장 하나, 침대 하나, 책이 가득 꽂힌 책장. 그리고 장 태감과 마주 앉은 탁자와 의자 두 개. 창틀에 흔한 화분 하나 놓아두지 않은 방 안이 오늘따라 을씨년스럽게 느껴졌다.

“몸가짐이야 장 태감님께서 늘 신경 쓰라 하셨으니 챙기는 것이지요. 아시지 않습니까. 제가 물욕이 없다는 건.”

“그래. 그랬지. 넌 어렸을 때부터 짐이 많은 걸 싫어했어. 유난스러웠지.”

넌 어렸을 때부터 영민한 아이였지. 철이 일찍 들기도 했었고. 훈훈한 옛이야기는 서늘한 방 안의 공기를 누그러뜨리게 했다.

찻잔을 손에 쥔 장 태감은 잠시 그것을 들여다보고는 거리낌 없이 찻잔을 기울였다.

뜨거운 액체가 혀를 적시고, 흘러 넘어간다. 금조는 말없이 그가 차를 마시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잘 우려냈구나. 찻잎도 좋고, 우려낸 솜씨도 좋아.”

“가르쳐주신 분께서 잘 가르쳐주신 덕분이지요.”

“녀석, 너도 이젠 공치사가 제법 능숙해졌구나. 전에는 대나무처럼 꼿꼿하던 녀석이.”

“그 역시, 가르쳐주신 분께서 잘 가르쳐 주셔서…….”

예끼, 녀석. 같은 칭찬을 두 번 반복하는 것은 상대를 비웃는 거라고 누누이 말하지 않았느냐. 칭찬은 창의력이 있어야 한다니까.

핀잔을 준 장 태감은 흐릿한 눈으로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 그가 늙은 만큼, 노쇠해진 만큼 한껏 성장한 아이를. 코흘리개 시절부터 보아온, 그의 후계자를.

처음에는 그저 장기판의 말로서, 필요할 때에 쓰기 위해 가까이 두었던 아이다.

하지만 사람 마음이란 것이 어디 뜻대로 되던가. 가까이 두고, 가르치고. 그러는 사이에 금조라는 젊은 환관은 간교한 음모와 모략으로 가득한 노인의 심장 한구석에 스며들어 버렸다.

더는 떼어놓을 수 없을 정도로.

‘칼로 살점을 끊을 수는 있을지언정, 한번 맺어진 정은 끊을 방도가 없지.’

지나간 세월만큼 부드러워진 미소가 그의 입에 걸렸다. 덧없이 흘러가 버릴 듯 흐릿한 미소였다. 한참 동안 말없이 미소 짓던 장 태감은 찻잔을 다 비웠을 때쯤 입을 열었다.

“네가 나와 함께한 지 얼마나 되었지?”

곰곰이 시간을 세어보던 금조는 고개를 돌려 창밖을 내다보았다. 틀림없이, 그때도 겨울이었다.

벌겋게 언 손을 호호 불며 녹였던 기억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을 보면. 그리고 그 기억 너머에선 흐릿하게 장 태감의 얼굴이 떠올랐다.

주름이 더 옅었고, 머리가 아직 검었던 시절의 장 태감이.

“꼬빡 십오 년이 되는군요. 태감님께서 저를 거두어 주신지.”

“그래. 그렇게 되었구나.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되었어. 내 바삐 살아 그간 너를 제대로 돌아보지 못했구나. 이리 훤칠하게 자란 것을. 가까이 두고 보면서 어찌 몰랐을까.”

조금만 더. 너를 제대로 보았으면 좋았을 것을. 한숨 섞인 회한을 토해낸 장 태감은 마지막이라는 듯이 담담한 어조로 물었다.

“아직 잊지 못하였느냐.”

잊을 수 없는 일임은 알지만, 가슴속에 묻고 나아갈 수는 없는 것이냐. 너는 금조가 아니냐.

더는 가만히 장 태감의 말을 경청하던 금조는 발작적으로 외쳤다.

“저는 이진백입니다!.”

금조는 자신이 내지른 소리에 놀란 듯 주춤거렸다. 하얗게 질린 그의 얼굴을 올려다본 장 태감은 말없이 손을 저어 그를 앉혔다.

아직 그의 가슴 속에는 흉터가 되지 못한, 딱지도 채 앉지 않은 상처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상처에서 방울져 떨어지던 핏방울이 왈칵 스며 나온 것을 본 장 태감은 그 이상 그를 재촉할 수 없었다.

그는 여전히 이진백이었다. 멸족한 이씨 가문의 마지막 생존자. 살아남은 아이. 거세하고 환관이 되어서도. 십오 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더라도. 그는 여전히 그 멍에를 벗지 못하고 있었다.

느릿한 노인의 시선 속에선 과거와 현재가 겹쳐 보였다.

오기와 아집만이 남아 있었던 어린 시절의 이진백과 현재의 금조를 보며. 장 태감은 마음 한구석이 무너지는 것을 느꼈다.

조금 더 잘 되었으면 좋았으련만. 잊고 살아간다면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을 텐데.

하지만 가시밭길을 걸으려 하는 금조를 장 태감은 말릴 수 없었다.

‘네가 그토록 원하는 내관감의 태감 자리에 오른다 한들, 복수를 달성할 수 있을 것 같으냐. 너 역시 막대한 피를 흘려야 할 게야. 어쩌면, 그토록 고생해서 오른 태감 자리를 내주어야 할 정도로.’

그렇다면 차라리. 장 태감은 그 말 만큼은 입에 담지 않았다. 잠시 숨을 고른 후, 늙은 환관이 입에 담은 것은 부탁이 아닌 명령의 말이었다.

“잠시 궁을 떠나 있거라.”

“궁을, 떠나란 말입니까?”

“이번 일이 마무리될 때까지만. 겨울이 지나면 다시 너를 부를 것이다.”

그의 대답은 한참 후에야 돌아왔다.

“저를 믿지 못하시는 겁니까.”

“믿기 때문에 보내는 것이다. 너를 믿기 위해서.”

“그렇다면.”

그만. 반문을 허락하지 않는 강압적인 명령에 금조가 입을 다물었다. 불쾌함과 만족감을 동시에 느낀 장 태감은 표정을 일그러트린 채 말했다.

“안양비 님께서 너를 의심하고 계신다. 네가, 나를 배신할 거라고. 그리 말씀하시더구나.”

“태감님.”

“네가 그럴 사람이 아니란 것은 누구보다도 내가 잘 안다. 하지만, 네가 계속 후궁에 남아 있다면 안양비 님께서 손을 쓰실 것이야. 그분은 결코 타협하실 분이 아니시지.”

의심을 피하기 위해선 이것이 최선이다. 잠시만 떠나 있거라. 일이 마무리되고, 안양비 님께서 의혹을 거두시면 내 다시 너를 부를 것이니. 그리고 그때는.

“내관감의 태감 자리는 너의 것일 것이야.”

희망적인 말로 말을 마무리한 장 태감은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젊은 환관을 바라보았다.

과연 그는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기뻐할까. 아니면 화를 내고 있을까. 체념했을까.

조심스럽게 고개를 든 장 태감에게 보인 것은 차갑게 굳어진 금조의 얼굴이었다. 각오를 다진 듯,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버린 이의 얼굴.

“안양비 님께선 단호한 분이시지요. 흑과 백이 명확하시어, 한번 검다 규정하신 것을 다시 희다 말씀하실 분이 아니시지 않습니까.”

“금조야.”

“한번 눈 밖에 난 이상, 그분은.”

결코, 저를 다시 쓰려 하지 않으실 겁니다.

그 단정적인 말에 장 태감은 참을 수 없다는 듯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하지만 그 순간 치밀어오른 무언가가 그의 말을 삼켰고, 그는 울컥 뜨거운 무언가를 토해냈다.

그 질척한 감촉. 장 태감은 조용히 고개를 내려 왈칵 흘러내린 것을 바라보았다. 그의 예상대로, 그것을 새카만 피였다.

“늘 말씀하셨지요. 후궁에서 살아남으려면, 세 가지를 조심해야 한다고.”

이유 없는 선물과 문서로 남기지 않은 약속. 그리고 남이 대접하는 차. 그 세 가지를 조심해야 한다고요.

목에 메인다는 듯 잠겨 든 그 목소리에 장 태감은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랬지.”

“사죄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렇지, 사죄는 이중의 기만이니. 그래, 그렇게 내려다봐야지.”

핏물을 게워내며 주저앉은 장 태감은 스쳐 지나가는 오래전 기억들을 흘려보내며 금조를 올려다보았다.

“참지 못하였구나.”

“예, 참지 못했습니다.”

“안양비 님과 협상하기 위해서. 그래.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내관 태감의 자리를 가진다면, 안양비 님도 널 어찌하지 못하실 테니까. 내관감은 곧 그분의 수족이니.

점점 장 태감의 숨결이 가늘어지자 금조는 황급히 몸을 숙였다. 떠듬거리며 갈라진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앞으론 어쩔 생각이냐.”

“안양비 님을, 설득해 볼 생각입니다. 이 시국을 조용히 넘길 수 있도록. 최소한의 피해로 지나갈 수 있도록. 그리하여 후일을 도모해볼 생각입니다.”

“사례 태감께는 이미, 언질을 드렸겠구나.”

“예, 목줄을 내어드렸습니다.”

떨리는 입가가 천천히 위로 올라갔다. 끝자락이 다가온 장 태감을 보며 금조는 자신도 모르게 그의 손을 잡았다.

핏기없이 창백한 손은 물에 빠진 시체처럼 차가웠다. 그 소름 끼치는 감촉에도 불구하고, 금조는 그 손을 놓을 수가 없었다.

가슴 속에서 끓어오르는 후회의 말. 진탕된 심장은 용서를 빌라며 애걸하였지만, 금조는 끝까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래야지. 정치판에서는. 그리. 해야지. 그렇게 오만하고, 차갑게.”

씩씩거리는 숨을 몰아쉬며 점점 식어갔지만, 그 최후의 순간에 장 태감은 만족스러워 보였다.

이제야 껍질을 까고 나온 자식을 보듯이, 원망보다 기쁨이 앞선다는 듯이. 그가 마지막 순간에 남긴 것은 비탄에 찌든 저주도, 절망에 찌든 절규도 아니었다.

그것은 염려의 말이었다.

“나 역시 그리 올랐다. 빼앗고, 짓밟고. 독살하여서. 그렇게 올랐지. 그리 볼 것 없다. 언젠가, 나 역시 이렇게 될 거란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태감님.”

“너는 이리되지 말거라.”

네 목적을 달성하면, 복수를 이루었다면. 미련 없이…… 금조는 그의 입가를 향해 귀를 가져갔다.

하지만 한 번 잦아든 숨이 다시 쉬어지는 일은 없었다.

“태감님. 저는.”

마지막까지, 금조는 용서를 빌지 않았다.

* * *

소년은 마치 얼빠진 사람인 양 되물었다.

“예?”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고, 소년 역시 그것을 기대하지 않았다. 멀건 표정으로 태감을 바라보던 소년은 그의 옆자리에 앉고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태감의 흐리멍텅한 시선을 따라가던 소년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실소를 터뜨렸다.

“돌아가셨다고요. 장 태감님께서.”

이번엔 대답이 있었다. 한참 동안 달싹이기만 했던 태감의 입술이 마침내 열리고, 믿을 수 없는 이야기가 내뱉어졌다.

“그래. 사인은, 독살이라더구나.”

“독살. 독살이라. 도대체 누가 그분을 독살했단 말입니까.”

의심의 시선을 느낀 태감은 고개를 저었다. 부정의 의미였고, 소년은 수긍했다. 태감이 그런 잔혹한 수를 썼을 거라고는 믿지 않았다.

미궁으로 빠져든 상념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소년은 혼란 속에서 돌출되어있는 결과에 집중했다.

“그렇다면, 저희의 목적은 달성된 것과 다름없군요.”

“그렇다고 봐야겠지. 원치 않던 형태였지만.”

“웃어야 할까요?”

잘되었다 할까요. 목적이 이루어지지 않았습니까. 안양비 님의 세력은 약화 될 것이고, 그 사이에 난화비 님의 세력은 더욱 강성해지겠지요. 저희의 은퇴도 머지않았겠군요. 예. 좋은 일 아닙니까.

소년은 도저히 그 말을 입에 담을 수 없었다. 무겁게 가라앉은 정적 속에서 그가 말할 수 있었던 것은 소름 끼치는 의혹뿐이었다.

“과연, 누가 그분을 독살했을까요. 구분의 죽음으로 이익을 볼 사람은 저희뿐이지 않습니까.”

“세세하게 따져본다면, 장 태감은 나만큼이나 적이 많은 사람이다. 언제 암살당하더라도 이상할 일은 아니지.”

“하지만, 그 이상하지 않은 일을 의심하는 것이 저희 일이지요.”

가장 타당한 가정은 역시, 누군가가 저희에게 누명을 씌우기 위해 암살을 계획했다. 그리고 그 계획의 입안자는.

“안양비 님이라던가.”

“그녀는 그럴 사람이 아니지.”

“예. 그분이 그럴 분은 아니지요. 차라리 태감님께 암살자를 보낼지언정, 자신의 사람을 희생시키실 분은 아니시지요.”

그렇다면 남은 것은. 소년은 치를 떨었고, 태감은 동의했다. 엄습해 오는 불안과 장 태감을 향한 연민에 몸을 떨던 소년은 금조가 자신에게 맡긴 가계도를 찢어발기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그 역겨운, 혐오스러운, 배은망덕한, 천하의 상종 못 할 후레자식. 배신자가 받아 마땅한 지탄을 단번에 쏟아낸 소년은 어지럽다는 듯 오른손을 들어 눈을 가렸다.

“그자겠지요. 금조. 그가 장 태감님을.”

“그럴 테지.”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그런 짓을 저지른 걸까요. 저는 도통 모르겠습니다.”

“누가 알겠느냐. 그를 잡아다 꿇어 앉혀놓고 묻기 전까지는, 누구도 모를 테지.”

무미건조한 이야기가 오간 것은 거기까지였다. 소년은 허물어지듯 등받이에 몸을 늘어뜨렸고, 태감은 깍지낀 손에 이마를 기대었다.

말없이 한숨만을 내쉬던 소년은 문득 고개를 들었다.

“한번 뵈러 가야겠습니다.”

“장 태감 말이냐.”

“가시는 길, 한번은 뵈어야지요.”

마지막 가시는데, 향이라도 꽂아드려야지요.

비칠거리며 몸을 일으켜 세운 소년을 본 태감은 다급히 그의 손목을 잡았다. 힘없이 늘어지는 태감의 만류에 소년은 멈춰 섰다.

“잠깐만 다녀오겠습니다. 잠깐만. 그래도 명복은 빌어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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