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관의 요리사 197화
역적의 누명을 쓰고 몰락한 가문. 살아남은 단 한 명의 아이. 아이는 살기 위해서 거세를 하고 환관이 된다. 그 흔하디흔한 이야기를 들은 소년은 한숨을 내쉬었다.
“멸망한 일족의 아이가 살아남기 위해 환관이 되었다. 진부한 이야기지만, 남 일 같지 않아서 웃을 수가 없군요.”
전 거세는 안 했지만 말입니다.
실없는 농담을 내뱉은 소년은 상 위의 가계도를 집어 올렸다. 한 가문이 누대에 거쳐 쌓아 올린, 이제는 시간의 모래 속에 파묻혀 스러진 역사. 소년은 그 끝자락에 써진 이름 석 자를 가리켰다.
“금조. 그 친구 본명이 이진백(李進伯)이었군요.”
“그래. 이(李)가. 그 이씨 가문 출신이었군.”
“아십니까?”
“알다마다. 대대로 용림원 학사를 배출한 명문 이가를, 어찌 모르겠느냐.”
그래. 살아남았구나, 한 명은.
이진백이라는 이름을 되뇌는 태감의 얼굴에는 쓰디쓴 감정이 맴돌았다. 무너진 옛 시대의 영광을, 그 처참한 퇴락을 지켜본 이의 덧없는 허무함. 태감은 찬물 한 잔을 들이켠 다음 입을 열었다.
“이가는 경사에 뿌리를 내린 토박이로, 대대로 뛰어난 학사를 배출한 가문이었다. 덕이 높고 재주가 뛰어나며 지혜로워 속인들의 존경을 받았지.”
“존경만큼 시샘도 많이 받았겠군요.”
그리고 결국, 버티지 못했으리라. 자신보다 우월하고, 뛰어난 이를 질시하는 인간의 추악한 본성 앞에서 그들은 결국 무너지고야 말았다. 태감은 조금 지체한 후 말을 이었다.
“황제 폐하께서 즉위하신 지 얼마 되지 않아, 사달이 났지. 평소 이가를 눈엣가시처럼 여겼던 이들이 손을 잡았고, 권력 기반이 미약하셨던 폐하께서는 결국, 그들을 막지 못하셨지. 대대로 황실의 지낭 역할을 해온 이가는 그렇게 몰락했다.”
“그들의 마지막 후손은 금조라는 이름으로 환관이 되어 있군요.”
환관이 된 아이. 일족의 멸망을 지켜보며 숨죽이고 살아남은 아이는 무엇을 꿈꾸는가.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갈망하는가.
권력이라는 칼자루를 쥐게 된 아이는 무엇을 이루겠는가. 소년은 그제야 마지막 순간 금조가 숨기지 못했던 비통한 감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을 거두고, 가르친 은인의 등을 찔러서라도. 속인들에게 손가락질받고 백안시당할지라도. 인륜을 저버리고, 결국에는 피눈물을 흘리며 후회하게 될지라도.
그가 후궁에서 살아남아야만 하는 이유. 살아남고, 버텨서 권력으로 향할 동아줄을 기어올라야만 하는 이유.
소년은 그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복수로군요.”
“그럴 테지. 내관감의 주인, 내관 태감이란 그만한 힘이 있는 자리니까. 후궁에서 가장 큰돈을 움직이는 그 자리에 앉는다면, 멸족의 한을 푸는 것 또한 불가능은 아닐 테지.”
과연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인가. 소년은 도저히 그 말을 입에 담을 수 없었다.
가슴속에 스며든 한의 무게는 오직 본인만이 알 수 있는 법이다. 은혜를 원수로 갚게 되더라도. 은인의 피로 손을 물들이게 되더라도. 젊은 환관은 포기할 수 없었으리라. 그렇기에.
소년은 늘어지는 상념을 털어내기 위해 잔에 물을 가득 따랐다. 하지만 지금 그에게 필요한 것은 차가운 물 한 모금이 아니라 목구멍을 뜨끈하게 달궈줄 술이었다.
말간 물잔을 들여다보던 소년은 바싹 마른 입술을 열었다.
“최소한, 금조 그 친구의 진실성은 확인이 되었군요. 역적의 후손인 그가 자신의 이름이 적힌 가계도를 맡겼다는 것은, 스스로 목줄을 찰 각오가 되어 있다는 의미이니.”
“네가 보기엔 어떻더냐. 제 목을 걸고 희생할 만한, 그런 사람인 것 같더냐?”
“글쎄요. 그래 보이지는 않더군요. 물론 사람 속을 누가 알겠습니까. 속으로는 누구보다도 뜨겁고 곧은 충성심이 있을지.”
하지만, 일단 그 부분은 차치하도록 하고. 가래가 끓는다는 듯 쿨럭거린 소년은 목을 쓰다듬으며 태감을 바라보았다.
이야기도 지지부진한데, 좀 뜨끈한 걸로 목을 데워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능청스러운 소년의 말에 태감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나도 목이 뜨끔뜨끔 하구나. 이럴 때는 한 잔 마셔줘야지.”
“예. 술상을 봐오겠습니다.”
저녁을 배부르게 먹었기 때문에 술상은 비교적 간소하게 차려졌다.
소고기 육포와 소금을 뿌려 볶은 견과류, 생강즙을 뿌린 송화단. 그리고 맑은 술 한 병.
잔을 받은 태감은 그 투명하고 고운 붉은빛에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빛깔이 참 좋구나. 과실주는 아닌 것 같은데.”
“차조에 수수로 담근 술입니다. 수수 때문에 색이 불그스름하지요.”
“수수. 어쩐지, 수수 때문에 이런 그윽한 색이 나온 것이구나.”
그 빛깔에 취했는지 태감은 술이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볼을 발그레하게 물들이고 있었다.
원체 왕성한 식욕에 가려져 눈에 띄지는 않았지만, 태감은 술에 조예가 깊은 애주가이기도 했다. 코끝에 잔을 대어 향기를 즐긴 태감은 조심스럽게 한 모금을 입에 머금었다.
“생각보다 톡 쏘는 산미가 강하구나.”
“차조로 술을 담그면 신맛이 강하지요.”
“하지만 불쾌하지는 않아. 오히려 상쾌하고 신선한 느낌을 주는군. 설익은 과실을 연상시키는 풋풋함이 살짝 느껴지고, 은근하게 풀 향기가 깔리고 나면 마지막으로는 고소한 곡물 향기와 함께 달큰한 맛이 혀를 부드럽게 녹이는구나.”
첫맛은 자극적이지만 뒷맛은 고소하고 순하며 부드러우니, 마시기에 편한 술이다. 견과류 몇 알을 집어 오도독 씹은 태감은 위정이 있는 방향을 슬쩍 돌아보고는 배시시 웃었다.
“가는 길에 위정에게도 한 병 챙겨주거라.”
“나으리! 술 창고 세 번째 선반에 있습니다!”
위정의 떨떠름한 헛기침을 들은 둘은 한바탕 폭소를 터뜨리고는 잔을 기울였다. 석 잔. 넉 잔. 달착지근한 술기운이 오른 태감은 달뜬 숨을 토해내며 고개를 뒤로 꺾었다.
사과처럼 발그레한 볼, 몽롱해진 시선, 헤실거리며 풀린 입꼬리. 취기가 단단히 오른 그 모습을 보며 소년은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이런, 조금 약한 술을 가져올 걸 그랬군.’
흥청망청 마시고 취할 때라면 모를까. 어려운 결정을 내리기 전 분위기를 풀어주기 위해 마실 술로는 부적절한 선택이었다.
도수가 낮고 씁쓸한 술을 가져올 것을. 낭패감을 느낀 소년은 어색한 웃음을 띠며 일어섰다.
“오늘은 이만 마시는 게 좋겠습니다. 밤도 늦었고, 달은 중천이군요. 이만 들어가 쉬시지요.”
“어딜 가느냐, 아직 이야기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오늘만 날은 아니지 않습니까.”
“오늘만 날은 아니지, 하지만, 미적거리며 어물쩍 넘어가면 또 잊어버리고 말게야. 흔들리고, 고민하다가. 미뤄버릴 테지.”
쇠뿔도 단숨에 뽑아야 하듯이, 결정하기로 마음먹었다면…….
태감은 흐늘거리는 정신을 다잡기 위해 양손으로 볼을 때리고는 고개를 흔들었다. 멍한 눈동자에 초점이 돌아오자 소년은 떼었던 궁둥이를 다시 붙이고는 그를 마주 보았다.
“괜찮으시겠습니까?”
“해야지, 해야 하고말고.”
잔을 들어 올리려던 태감은 잔이 비었다는 것을 알고는 소년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소년은 쓴웃음을 지으며 병을 흔들었다.
찰랑거리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고, 태감은 아쉽다는 듯 잔을 내려놓았다.
“금조. 그 친구를 이용한다면 확실히 장 태감에게 심대한 타격을 줄 수 있겠지. 아니, 그 친구를 꼭 이용하지 않더라도.”
“그 정보를 장 태감님께 흘리기만 하더라도. 저희로서는 남는 장사지요. 한번 시작된 의심은 끝도 없지 않습니까.”
“정치인이란 작자들은 적은 믿어도 아군은 믿지 못하는 법이다. 한번 의심암귀를 싹틔우면, 그걸 이용하기는 너무나 쉽지.”
정쟁(政爭)이란 것은, 암투란 것은 그런 것이다. 비열함이 최고의 미덕이 되는 곳. 창과 칼 대신 독오른 혀를 이용해 상대를 고꾸라뜨려야 하는 이들의 세계. 정적의 심장을 찌를 기회라는 천고의 행운 앞에서 태감은 입을 떼지 못했다.
“하지만. 그래, 난 도저히 그런 방식으로 장 태감을 이기고 싶지 않구나.”
정치인이라 해도, 결국은 사람이었다. 뜨거운 피가 흐르는, 비합리적이고 비이성적인 가치에 목을 매는. 어리석고 우둔한. 사람. 태감의 눈동자에 아득한 과거의 흔적이 떠올랐다.
“햇수로 벌써 오 년이 되었구나. 그와 대립해온 지. 벌써 오 년이 되었어.”
“길고도 질긴 인연이로군요.”
“지긋지긋한 인연이지. 난 아직도 그와 처음 만난 날을 잊을 수가 없다. 내가 폐하의 제안을 받기 전부터 그는 내관감의 태감이었지.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그는 이미 내관감의 태감이었어. 그런 정계의 늙은 괴물을 상대로 어리숙한 초짜 환관이 뭘 할 수 있었겠느냐?”
당황하신 모습이 눈에 훤하군요. 소년이 피식거리며 웃자 태감은 따라 웃었다. 아직 어리숙하고 때가 덜 묻은, 순수했던 시절의 태감은 어떠했을까.
스무 살도 채 넘지 않은, 그 풋풋하고 여린 십 대의 태감은. 우스꽝스러운 실패담을 이야기하며 한껏 웃고 떠들었던 태감은 지나간 세월만큼 독이 오르고 무뎌진 현재의 자신을 바라보았다.
“참으로 무섭고, 두려웠지. 아니, 난 여전히 그가 무섭다. 그토록 노련하고, 교활한 괴물을 여기까지 몰아붙였다는 것도 사실 믿기지 않아. 물론, 네 도움이 없었다면 불가능했겠지.”
“갑자기 웬 공치사를 다 하십니까. 사람 부끄럽게.”
키득거린 소년은 부드러운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그가 내릴 결정을 알고 있다는 듯이. 그 속 깊은 미소에 태감은 왈칵 말을 쏟아 내었다.
“멍청한 짓이고, 미련한 짓이다. 이용할 수 있는 것을 왜 이용하려 하지 않느냐?. 금조 그자를 이용한다면 손쉽게 장 태감을 떨어트릴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만큼, 너에게 더 신경을 써줄 수 있을 텐데.”
그 굽은 등 위로 물기 어린 시선이 쏟아졌다. 너무 많은 짐을 떠받들고 있는 소년의 등을 바라보던 태감은 차마 소년을 직시하지 못하고 고개를 떨구었다.
사실은 지금 당장에라도 폐하께 달려가 간청하고 싶었다.
문일. 그자를 잡기 위해서.
그를 위해 노고를 마다치 않은 소년을 위해서.
자신의 총력을 기울이고 싶었다.
떨리는 그의 손을 내려다보던 소년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그만큼, 마음의 짐이 남겠지요.”
이 노인네가 한평생 살아보니, 한번 새겨진 후회는 평생 지워 지지가 않더군요. 평생 후회만 하고 살아온 늙은이가 하는 말이니 믿으셔도 좋습니다.
소년은 태감의 어깨 위에 가만히 손을 올렸다. 힘없이 늘어진 그 섬세한 어깨. 책임에 짓눌린 어깨를 두드리며 소년은 그에게 약속했다.
“내키는 대로 하십시오. 마음이 가는 대로. 문일은 잡는 것은 그다음에 해도 늦지 않지요. 이 늙은이가 어디 가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어디 안 갈 테니, 부디 원하는 대로 하십시오.
* * *
갈등과 고뇌로 밤을 지새우는 것은 태감뿐만이 아니었다. 야심한 시간의 북림궁. 장 태감과 마주 앉은 안양비는 거한 한숨을 내쉬며 미지근하게 식은 차를 들이켰다.
“답이 없군. 답이 없어.”
“이조 상서께서도 어려우시겠지요.”
“그래. 어려우시겠지. 이 가녀린 딸이 부담스럽다며 후궁에 가둬두실 만큼 심약한 분이시니, 얼마나 심적으로 힘드시겠나.”
꼭 이조 상서님이 아니시더라도, 안양비 님은 누구나…….
차마 입에 담지 못한 말을 우물거리던 장 태감은 괜스레 헛기침하며 시선을 돌렸다. 그 곤혹스러운 고갯짓의 의미를 알아차린 안양비는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
“그러니 상황이 나아진다면, 필히 도와드려야지. 사례 태감에게 발목을 잡혀 쩔쩔매시는 모습을 보니 가슴이 아파 잠을 이룰 수가 없더군.”
“허허, 역시 안양비 님은 참으로 효녀이십니다.”
“효녀라니, 과찬일세. 그저 자식 된 도리를 다할 뿐이지.”
그토록 심약하신 분께서 이조 상서라는 무거운 책임을 떠안고 계시니, 어서 그 무거운 짐을 내려놓으실 수 있도록 도와드려야지. 아버지도 이제 연세가 있으신데, 남은 생을 걱정 없이 편하게 지내셔야 하지 않겠나.
“그래. 아버지는 산을 좋아하시니 산세가 수려한 곳에 별장을 지어드려야겠어.”
“예, 상서께서도…… 기뻐하시겠지요.”
“하지만 그러기 위해선, 자네의 도움이 꼭 필요하네.”
안양비의 말은 놀라울 만큼 솔직한 것이었다. 거리낌 없이, 그 어떠한 것도 숨기지 않고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는 안양비의 진솔함은 노쇠한 환관을 미소 짓게 했다.
“난 자네를 도울 여력이 없네. 지금 파벌을 추스르는 것만으로도 벅찬 실정이야. 물론, 자네가 진정 위급한 상황이라면 어떻게든 칼을 뽑아 보겠네만.”
“그러실 것 없습니다. 안양비 님.”
주름진 입꼬리를 한껏 끌어올린 장 태감은 부드러운 표정을 짓고는 고개를 저었다.
피로감이 느껴지는 느릿한 동작, 하지만 안양비는 그 속에서 한껏 독기를 품은 결의를 느낄 수 있었다. 후궁에서 수십 년간 살아남은 늙은 독물의 섬뜩한 각오에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이 또한 지나가는 겨울일 뿐입니다. 지난 수십 년간, 이 늙은이가 후궁에서 보내온 겨울이지요.”
창틀 너머에서 쏟아진 환한 달빛이 그에게 짙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스쳐 지나간 세월만큼 패인 주름과 쌓인 지혜만큼 깊어진 피로가 그림자에 삼켜진다.
새까만 장막 안쪽에서 늙은 환관의 눈동자가 번뜩였다.
“안양비 님께서는, 봄을 준비하셔야지요.”
겨울은, 이 늙은이가 물러나게 할 터이니. 안양비 님께서는 다가올 봄을 준비하십시오.
그 차가운 다짐을 받은 안양비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태감. 겨울을 나려면 곳간을 잘 방비해야 하지 않나.”
“안양비 님.”
“곡식을 갉아먹고 병을 퍼뜨리는 쥐는, 미리미리 잡아 죽여야지. 사특한 마음을 먹고 곳간 주인을 물려는, 그런 배은망덕한 쥐 말일세.”
만약 손을 쓰기 어렵다면. 내가 고양이를 빌려줄 수도 있네만.
안양비의 어조는 나른하고도 평이했으나, 장 태감은 그녀의 말에 스며든 소름 끼치는 피비린내를 맡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