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관의 요리사-196화 (196/314)

환관의 요리사 196화

“오늘 초청에 응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오운 님.”

“허허, 아닙니다. 안 그래도 금조 님과 이렇게 진솔한 대화를 나눌 시간을 가지고 싶었는데, 이리 먼저 청해 주셨으니 제가 감사드릴 일이지요.”

금조와 형식적인 인사를 나누며 소년은 다실을 둘러보았다.

좁은 듯 안락한 듯 아담한 넓이의 다실은 사치스럽고도 고풍스럽게 꾸며져 있었다.

깊이 있는 붉은색의 자단목 가구는 길이 잘 들어 부드러운 윤기가 흘렀고 벽에 걸린 족자는 안료에 금분(金粉)을 섞어 그려낸 화려한 봉황도였으며 마른 억새와 동백꽃 가지가 꽂힌 화병은 우아한 상아색의 백자기였다.

서역에서 들여온 황금 촛대 위에서 일렁이는 촛불을 바라보던 소년은 입꼬리를 씰룩였다.

“잘 꾸며진 다실이군요. 과연, 다관 막심의 특실입니다.”

“오운 님께서 그리 말씀해 주시니 저도 보람이 있군요. 오운 님께선 혹시 전에 방문하신 적 있으신가요?”

돈 내고 들어와 본 건 처음이군요. 표자승과의 친분으로 제집 드나들 듯이 특실에 드나들었던 소년은 헛기침하며 고개를 저었다.

“커흠, 아니요. 특실은 처음입니다.”

“오운 님께선 막심의 점주인 표대인과 친분이 두터우시다고 들었습니다만…….”

“표대인과 사적인 친분이 있기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사적인 관계일 뿐입니다. 친분을 앞세워 편의를 제공받은 적은…….”

“없으시겠지요. 과연, 공사 구분이 철저하시군요.”

주문한 가배가 나올 때까지, 둘은 한가로운 사담을 나누었다.

어디에서나 들을 수 있는 일상적이고 평범하며, 트집 잡을 만한 구석 없는 긴장과 불신으로 날이 바짝 선 대화.

뱃속 깊은 곳에 본의를 숨긴 채, 사교적인 척 웃음을 지으며 마음에도 없는 헛소리를 떠드는 것은.

대단히, 창자가 뒤틀릴 만큼 아니꼬운 일이다. 여우처럼 가느다란 금조의 눈을 마주 보며 소년은 흥건하게 젖은 뒷덜미를 향해 손을 가져갔다.

식은땀에 젖은 옷깃은 축축했고 쓸어 만진 손아귀에는 질척한 물기가 남았다.

어울리지도 않는 정치가 흉내를 내니 이 모양이지. 아니면 나이가 들어서인가. 금조와 대화를 나눌수록 소년은 짙은 피로감이 뼈마디 안쪽에 쌓이는 것을 느꼈다.

마치, 몸의 빈 공간에 물이 차오르는 것처럼. 무겁고, 늘어지고. 축축해진다. 소년은 피로를 내색하지 않기 위해 딴청을 피우는 척 시선을 돌렸다.

‘늙어서 그렇구나. 늙어서.’

혀는 여전히 독살스럽고 교활했으며, 젊어진 심장은 뜨겁게 뛰고 있었지만 마음은 늙어버렸다.

노쇠했다.

지쳐버렸다.

마음이 버티질 못한다.

소년은 진정으로 자신이 늙었음을 실감했다.

사소한 말실수로 책잡히지 않기 위해서, 명분을 내주지 않기 위해서 한껏 긴장하고 의심하는 것은. 상대의 실수를 유도하기 위해 일부러 살가운 척 대화를 주도하는 것은. 노인에게는 너무나 힘겨운 일이었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휘청거리는 마음을 다잡기 위해 소년은 혀끝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리고 보란 듯이 싱긋 웃어 보였다.

얄팍하고 창백한 입술이 그려낸 긴 호선에 눈을 동그랗게 뜬 금조는 이내 그에 화답하듯 화사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볼썽사납고 비열해 보이는 소년과는 다르게 그가 그려낸 미소는 퍽 그럴듯한 것이었다.

“유쾌하고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만, 슬슬, 여기까지 할까요.”

“애석하지만, 바쁘신 분을 계속 잡고 있을 수는 없으니. 그리하지요.”

무의미한 사담은 그만두자는 소년의 제안에 아쉬움을 표명한 금조는 웃음기를 거둔 건조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사례 태감께선 이미 저의 목적을 알고 계시겠지요. 제가 오운 님을 청한 이유 또한.”

“약속드리지요. 오늘 나눈 대화는 어떠한 사견도 첨가되지 않고 고스란히 태감께 전달될 겁니다.”

금조는 만족스럽다는 표정으로 소년의 노고에 감사를 전했다. 하지만 소년은 그가 진정 자신의 다짐을 신뢰하리라고는 믿지 않았다.

그리고 금조는 그런 의심에 개의치 않는다는 듯 담담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예, 맞습니다.”

전 장 태감님을 배신할 계획을 준비했습니다.

그를 키우고, 가르치고. 후계자로 선택한 이를 배신할 계획을 이야기하는 것 치고는 지나치게 담백한 태도였다. 그 상쾌하기까지 한 고백에 당황한 소년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무척 담대한 계획이로군요.”

“부도덕하고, 저열하며, 이기적이고, 사회적으로 지탄받아 마땅한 계획이지요.”

그걸 아는 사람이 배신을 준비했나?

턱밑까지 차오른 경멸과 혐오에 찬 질문을 삼킨 소년은 마치 이해한다는 양 그를 위로했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어쩔 수 없으셨겠지요.”

그 상황을 초래한 장본인 중 한 명이 입에 담기엔 적절치 않은 위로였다. 하지만 소년은 이 이상 그럴듯한 위로를 생각해낼 수가 없었다.

과연 배신을 정당화해 줄 만한 위로란 것이 존재할까?

소년은 고개를 저었고, 금조 또한 그 이상의 위로를 바라지는 않았다.

“굳이 저의 양심과 도덕성을 위하여 변명하지는 않겠습니다. 저를 도저히 상종 못 할 배신자라 멸시하고 비난하셔도 좋습니다. 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그 저열하고 추잡한 행위가 사례 태감께 도움이 된다는 사실이지요. 그것만큼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일 겁니다.

젊은 환관의 설득에 소년은 내키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요. 중요한 것은 바로 그것이지요. 금조 님께서 협조하신다면, 태감님께 큰 도움이 될 거라는 것.”

“그리고, 향후에도 태감님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다는 것 또한.”

물론, 장래의 내관감 태감직을 맡으실 금조 님께서 협조하여 주신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요. 다만…….

말끝을 흐리며 고민하던 소년은 눈을 가늘게 뜨고는 젊은 환관을 올려다보았다.

“다만 그러기 위해선, 우선 선결되어야 할 문제가 하나 있지 않습니까.”

“무척 어려운 문제가 남아 있지요.”

“늘 어렵지요. 신뢰를 사는 것은.”

금조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 어색한 침묵은 궁색한 변명을 짜내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순간 눈동자에 스치고 지나간 갈등의 빛. 소년은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알고 있었다.

숨기고만 싶은, 남에게 보여줄 수 없는 부끄러운 민낯.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야만 하는 이의 각오. 망설이던 젊은 환관은 소태를 씹은 듯한 표정으로 품 안쪽에서 정중히 봉해진 서찰을 꺼내 들었다.

“이것을 사례 태감께 전해주십시오.”

“이것은?”

“태감께선 알아보실 겁니다.”

제가 배신을 결심해야 했던.

장 태감님을 배신해서라도 후궁에서 살아남아야만 하는 이유를. 말을 마친 금조에게서 서찰을 받아든 소년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 * *

“금조. 그 친구가 내게 보내는 서찰이라. 과연 어떤 내용이 적혀있을지 궁금하구나.”

“우선, 식사하신 후에 말이죠?”

“주린 배보다 더 다급한 문제가 이 세상에 어디 있겠느냐?”

태감의 너스레에 피식 실소를 흘린 소년은 꺼내 들었던 서찰을 다시 품에 넣고는 그와 장단을 맞추었다.

“그렇지요. 우선은 배를 든든히 채워야 마음에 여유도 생기지요. 그러실 줄 알고 오늘은 속이 든든하면서도 편한 은행을 넣은 닭백숙 백과소계(白果燒鷄)를 준비했습니다.”

닭고기는 몸이 허할 때 기를 보충해주고 피를 돌게 하는 효능이 있고 은행은 노화를 방지하며 몸속의 독기를 빼주지요. 거기에 양념을 과하게 쓰지 않고 푹 우려내 백숙으로 만들었으니 진하면서도 산뜻하고 가벼워 몸에 부담이 없을 겁니다.

소년의 정성스러운 설명에 태감은 대번에 실망감을 드러내며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이왕 먹는 닭 튀기면 더 좋았을 텐데. 바삭바삭한 닭튀김에 산초 소금을 콕 찍어 먹으면 얼마나 좋으냐. 향긋하면서도 얼얼한 산초가 기름진 튀김의 느끼함을 잡아줘 그야말로 천하 일미지. 산초 하니 또 사천식으로 마른 고추와 산초를 듬뿍 넣고 알싸하게 볶은 닭볶음 요리가 생각나는구나. 야들야들하고 기름이 노란 닭을 먹기 좋게 토막 쳐 센 불에 확 볶아내면…… 크으!”

아니면 또 달착지근한 간장 양념에 푸욱 조리면 또 기막힌 별미가 되지. 그도 아니면 꿀을 발라 꾸덕꾸덕하게 말린 다음 가마에서 구워내면 또 어떨까. 껍질은 아삭하면서도 살점은 촉촉하고, 기름이 쏙 빠져 담백하고도 고소하겠지. 아니면 삶아 결대로 찢은 다음 고추기름과 다진 마늘을 넉넉하게 넣어 무치면 또 좋지 않으냐.

“세상에 이 좋은 방식을 다 놔두고, 굳이 닭을 물에 빠뜨렸어야 했을까? 물론 삶은 닭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왕이면 삶은 닭보다는…… 크흠.”

“예. 제가 잘못 생각했군요. 전날 조금 과하게 드셔서 속이 불편하시지는 않을지 염려하여 백숙을 준비하였는데.”

소년은 야차처럼 표정근을 일그러트리며 참혹한 저주를 내뱉었다. 태감에게는 그야말로 사형 선고와도 같은 끔찍한 말이었다.

“역시 건강에는 채식이 제일이지요. 마침 이번에 장 태감님을 실각시킨다는 중대사를 앞두고 있는데, 치성을 드리는 의미로 채식을 해보시는 건 어떠신지요. 육식을 금하고 몸과 마음을 정갈히 해서-”

“역시 닭은 백숙이 최고지! 그 쫄깃하고 고소한 육수! 담백하고 맑은 살점!”

혀가 꼬여 어순이 뒤바뀐 태감을 보며 흉험한 흉소를 지은 소년은 코웃음 치며 그를 만류했다.

“아니 뭐, 꼭 그러실 필요는 없는데. 맛이 진한 요리를 원하신다면 얼마든지 해드리지요. 오리구이 풍으로 두부껍질을 튀긴 과작비압(鍋炸肥鴨)은 어떠신지.”

“아니다, 난 꼭 닭백숙이 먹고 싶구나. 닭백숙이 먹고 싶어 참을 수가 없어!”

뭐, 정 그러시다면야.

소년은 하는 수 없다는 듯 툴툴거리며 상을 차렸다. 큼직하고 싱싱한 겨울 농어찜에 보들보들하고 사르르 녹는 돼지고기 완자. 배추와 표고버섯, 죽순을 볶은 백체초동순(白菜草冬筍), 돼지고기를 속에 끼워 튀긴 가지를 매콤 새콤하게 볶은 어향가지 등등으로 풍성하게 차려진 저녁상의 한가운데에 웅장한 백자 탕관이 오르자 태감은 언제 시무룩했냐는 듯 탄성을 질렀다.

“향이 기가 막히는구나. 역시 겨울철에는 몸을 뜨끈하게 해주는 국물 요리가 최고지.”

“저야말로 기가 막힙니다. 처음에 백숙 싫다던 양반은 어디 갔습니까?”

“모르겠구나, 어디 갔겠지.”

하여간 뻔뻔하기는, 하긴, 저러니까 정치가 하지.

혀를 끌끌 찬 소년은 닭을 먹기 좋게 잘라 그중 살점이 튼실하고 쫄깃한 다리를 태감의 앞접시에 올렸다.

통통하면서도 맵시 있게 뻗은 닭 다리와 황금빛 은행알. 마치 신선의 상에 오를법한 고상한 조화에 태감이 넋을 잃는 동안 소년은 백과소계에 얽힌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옛날 옛날 아주 먼 옛날에, 청성산(靑城山) 자락에 한 늙은 도사가 살았다는군요. 그런데 그 도사가 노령도 노령인 데다 지병까지 있어 몸져누운 채 나날이 야위어 갔다 합니다. 보다 못한 그의 친구 도사가 그 늙은 도사를 위해 백방을 수소문하며 돌아다녔다는군요.”

“아아, 그래서 이 요리를 먹고 나았다? 참 훌륭한 요리로구나. 나도 어서 먹어서 기운을 얻어야겠어.”

말을 탁 끊고 가로채는 태감에게 소년은 온화한 어조로 남의 말을 끝까지 경청한다는 지극히 기본적이고 당연한 예의를 함양해 달라고 정중히 요청하였다.

그 상냥하고도 조곤조곤한 소년의 태도에 심장을 짓이기는 듯한 공포를 느낀 태감은 열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튼, 결국 방도를 찾지 못한 도사는 마지막 방법으로 청성산에서 오백 년간 자란 큰 은행나무의 은행을 주워다 닭과 함께 삶았다 합니다. 그리고 그 요리를 먹은 도사는 건강을 회복하였고, 그 닭 요리는 일대의 명물이 되었다. 그런 이야깁니다.”

“세상에 이런 감동적인 일화가 있다니, 그 도사분들의 눈물겨운 우정에 건배하고 싶구나!”

예. 이제 지랄 적당히 하고 드십시오.

소년의 말에 태감은 기다렸다는 듯이 닭 다리를 집어 들었다.

오동통한 다리 살에 입에 넣고 쪽 빨면 살이 쏙 발라질 만큼 부드럽고 연한 날개. 파삭한 식감의 가슴살. 오돌오돌 씹히는 연골. 살점이 실팍한 허벅지살. 그리고 잘근잘근 씹히는 고소한 은행.

건더기를 골라 먹은 후에는 이제 뽀얀 우윳빛 국물을 마실 차례였다. 태감이 기대감 서린 표정으로 그릇을 내밀자 소년은 은 국자로 노란 기름을 걷어낸 다음 황홀하리만치 진한 국물을 가득 부어주었다.

입안 가득 차오르는 온기. 심심한 소금간 덕분에 더욱 돋보이는 은은한 달콤함. 닭과 은행에서 우러나온 은근한 감칠맛은 그간 진하고 강렬한 맛에만 취해 살며 잊고 살았던 담백함이라는 맛을 혀에 다시 인식시켰다.

“그간 왜 이 맛을 모르고 살았을까. 왜 놓치고 살았을까. 이토록 소박하고, 이토록 정겹고, 이토록 상냥한 맛이 있었다는 것을. 왜 잊고 살았을까.

“때론 잊고 지나간 후에, 뒤를 돌아봐야만 보이는 것도 있는 법이지요. 혀를 톡 쏘는 자극적인 요리 후에 즐기는 이 닭백숙처럼 말입니다.”

따스한 온기로 위장에 활기를 불어넣은 태감은 자연스레 매콤 새콤한 어향가지와 달콤 짭짤한 완자 볶음을 향해 젓가락을 옮겼다.

진득하고 은은한 국물 후에 즐기는 짜릿한 청춘의 맛. 매콤한 어향가지 양념에 밥을 그득하게 비벼 먹고 나서야 태감은 만족했다는 듯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이제 좀 마음에 여유가 생기셨습니까?”

“흐음, 후식으로 식사를 마무리해 줘야 마음에 여유가 깃들 것 같다만.”

“금조 그 친구의 서한부터 읽어 보시지요. 후식은 다 읽으시면 드리겠습니다.”

“녀석, 꼭 어린아이 구슬리듯이 하는구나.”

하는 수 없이 서한을 받아든 태감은 건성으로 봉투를 뜯어 안의 내용물을 상 위로 펼쳤다.

곱게 접힌 종이에 가는 세필로 적힌 문자들. 그것을 읽어내려가던 태감의 표정이 갑작스레 굳어졌다.

“이건 서한이 아니로구나. 여기에 적힌 것은.”

가계도. 이건 가계도로구나.

빼곡하게 적힌 인명을 읽어 내려가던 태감은 창백해진 얼굴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그런 이유로 집착했던 거였나. 권력이, 힘이 필요했기 때문에. 그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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