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관의 요리사 195화
“아니, 어딜 가시려고 그리 차려입고 오셨습니까?”
거나한 저녁상을 차리고 태감을 맞이한 소년은 화려하게 차려입은 그의 모습에 실소를 금치 못하였다.
보라색 비단에 금실로 기린과 구름무늬 자수를 수놓은 예복, 물소 가죽으로 만든 가죽신. 혁대는 운남에서 들여온 비단뱀 가죽에 대모갑을 댄 것이었다.
그릇에 흠을 내지 않도록 반지는 끼지 않았지만 팔에는 금 사슬로 옥구슬을 꿴 화려한 팔지를 찼고 흑단처럼 고운 머리카락은 석류석으로 장식한 은비녀로 곱게 틀어 올렸다.
편안한 저녁 식사를 위하여 가볍게 차려입은 복장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격식을 갖춘 그 차림새에 소년이 혀를 내두르자 태감은 당연한 일이라는 양 거드름을 피우며 고개를 까딱였다.
“특별한 만찬에 초대받았다면, 응당 그에 어울리는 격식을 갖추는 것이 도리인 법이지.”
그것이 만찬을 준비한 주최자에 대한 예의 아니겠느냐.
그 배려심 깊은 품성에 깊은 감명을 받은 소년은 콧방귀를 끼었다.
“잘 차려입으면 음식 맛이 변합니까. 어디 좋은 데 나가서 먹는 것도 아니고 집에서 먹는 건데. 편하게 먹는 게 제일이지요.”
“커흠, 그래도 분위기가 달라지지 않느냐.”
“늘 밥 먹던 곳에서 옷 좀 잘 차려입었다고 분위기가 변합니까?”
이 양반 아침에 약술이라도 했나.
소년의 핀잔에 멋쩍은 웃음을 지은 태감은 치렁치렁하게 늘어지는 소매 끝자락을 들어 올렸다.
“역시, 갈아입고 오는 게 좋겠지?”
“그럼 요리가 식겠지요.”
“진퇴양난이로구나.”
“좋은 교훈을 얻으셨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래, 확실히 쓸개만큼이나 쓰고도 통렬한 교훈이로구나.
거추장스러운 옷소매에 체념한 태감은 소매를 한껏 접어 옷을 민소매로 만들고는 자리에 앉았다.
“이리하니 한결 낫구나.”
“예, 뭐. 그걸로 좋으시다면야, 이 이상 뭐라 하지는 않겠습니다.”
떨떠름하게 그를 바라보던 소년은 입을 굳게 다물고는 준비해 둔 음식을 내와 상을 차렸다.
태감 한 명이 드러누워도 공간이 남을 만큼 널찍한 상 위를 빈틈없이 채우는 요리(주로 고기류)의 향연. 그야말로 현기증이 날 만큼 매혹적인 광경에 태감은 넋을 잃어버렸다.
지금 이 순간, 천당과 가장 가까운 곳이 있다면 틀림없이 바로 이곳. 연좌궁의 식당이리라.
식탁을 가득 채운 요리는 하나하나가 식탁의 주역을 차지하기에 모자람이 없을 만큼 화려한 것들이었다.
뼈를 통으로 발라 쪄낸 쏘가리찜 퇴골어, 갈비뼈를 발라내고 그 안을 영계로 채워 쪄낸 오리찜 요리.
밤과 함께 조린 어린 비둘기와 바삭하게 튀겨낸 메추라기. 꿀을 발라 가마에 구워낸 광동식 차슈와 송아지 골수로 만든 완자 요리.
곰 발바닥과 사슴의 꼬리, 상어 지느러미와 말린 전복으로 진하게 끓여낸 불도장.
그중에서도 태감의 시선은 유독 한가지 요리에 쏠려 있었다. 태감의 시선이 머무른 곳을 확인한 소년은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
‘식탁에 오른 요리는 많으나, 가장 빛나는 주연의 자리는 결국 하나인 법.’
태감의 시선을 사로잡은, 저녁 만찬의 주역. 소년이 선택한 태감을 가장 만족시킬 수 있는 요리. 바로 동파육(東坡肉)이었다.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기름진 고깃덩어리. 불그스름한 갈색의 짙은 양념과 매끄럽고 탱글탱글한 껍질. 노르스름한 색으로 물든 비곗살.
보기만 해도 군침이 절로 흐를 만큼 완벽한 동파육이었으나, 그 옆으로 수북하게 곁들여진 하얀 빵은 태감에겐 무척이나 낯선 음식이었다.
반달 모양의 폭신폭신한 찐빵. 그 속에 무언가를 끼워 먹기 좋은 구조로 만들어진 찐빵을 보며 태감은 본능적으로 이 빵이 무엇을 위해 준비되었는지를 이해했다.
“호오, 이 빵 안쪽에 동파육을 끼워 먹으면 되는 건가? 난 동파육에는 밀가루보다는 쌀이 어울린다고 생각한다만.”
“그래도 속는 셈 치고 한번 드셔보시지요. 이래 보여도 저희 쪽에선 차이니즈 번 이란 이름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빵입니다.”
타원형으로 민 반죽에 기름을 바른 다음 반으로 접어 쪄내는데, 기름을 발라 접었기 때문에 접었던 모양 그대로 펴져서 그 속에 무언가를 채워 먹기 좋지요. 주로 튀긴 돼지갈비나 닭고기, 완자 등을 넣어서 먹었지만, 특히 유명했던 것은.
“두툼한 동파육을 통째로 넣어 만드는 동파육 버거였지요.”
“버거라. 들어본 적 없는 요리지만, 어째선지 무척 매력적으로 들리는군.”
“정확한 유래는 나중에, 진짜 버거를 만들어 드릴 때 설명해 드리지요.”
태감은 거침없이 빵을 반으로 편 다음 그 안에 동파육 한 토막을 올렸다. 하얀 빵 사이에 끼워진 동파육 한 토막. 그 고혹적인 자태에 이성의 한계를 느낀 태감은 다급히 소년을 재촉했다.
“이제 뭘 더 넣어야 하지?”
“뭐, 느끼하신 걸 싫어하신다면 생양파나 고수, 상추나 풋고추 같은 생채소를 넣기는 하지요. 물론, 굳이 넣을 필요는 없습니다만.”
“굳이 넣을 필요는 없다. 그렇다면.”
“그대로 드셔도 무방합니다.”
태감은 사양하지 않고 그대로 빵을 덮었다.
하얀 빵과 고기.
탄수화물과 단백질, 지방.
오직 세 가지 영양소만으로 구성된 그 요리는 때 묻지 않은 순결함 마저 느껴졌다. 비타민, 식이섬유 같은 건강을 생각해야 한다는 구차한 변명 따윈 조금도 담겨 있지 않은 순진무구한 욕망의 결정체.
그 담대하기 그지없는 버거를 움켜쥔 태감은 거리낌 없이 그것을 베어 물었다.
송곳니와 앞니에 휘감기는 폭신한 식감. 찜기에서 한없이 말랑말랑하게 부풀어 오른 밀가루 빵은 이빨이 폭 잠길 만큼 포근하고도 보들보들했다.
그 부드러운 도화지를 수놓는 진한 감칠맛. 녹아내릴 듯 고소한 돼지기름의 향기.
말캉하게 씹히는 껍질 아래로 야들야들한 식감의 비계가 얼어붙은 겨울 땅을 깨우는 때 이른 봄비처럼 입술 안쪽을 간지럽히고, 혀로 누르면 그대로 풀어질 만큼 보드라운 고기는 묵직하고 진한 여운을 남긴 채 사르르 목구멍 안쪽으로 미끄러졌다.
남는 것은 찰나의 순간 혀끝을 황홀하게 적시고 사라진 돼지기름의 달착지근한 여운과 참을 수 없는 허기뿐이었다.
허망한 시선으로 텅 빈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던 태감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지금 내가 동파육 한 토막과 빵 하나를 먹어치운 것이 맞느냐?”
한입, 아니, 귀퉁이를 조금 떼어 맛만 본 것이 아니라? 무시무시한 상실감에 사로잡힌 태감을 본 소년은 말없이 그의 손에 두 번째 버거를 만들어 쥐여주었다.
“무엇을 두려워하십니까. 성에 차지 않으신다면, 더 드시면 되지요. 동파육도, 빵도 아직 많이 남아 있지 않습니까.”
만약 부족하다면 얼마든지 더 만들어 드리지요. 두 번째 버거를 입에 물고 세 번째 버거를 조립하는 태감을 보며 소년은 배시시 미소 지었다.
“역시, 좋아하는 요리를 양껏 먹는 것만큼 기운 나는 일도 없지요.”
많이 드십시오. 태감.
* * *
“이제 좀 허기가 가시는구나.”
태감의 헛소리에 소년은 기가 막힌다는 듯 두 눈을 부릅떴다. 침 한 방울 바르지 않았는데도 태감의 입술은 돼지기름에 젖어 촉촉하니 윤기가 흘렀다.
가증스러움에 치를 떨던 소년은 들고 있는 쟁반으로 그의 머리를 내려찍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쟁반은 결이 촘촘하고 묵직한 참나무로 만든 것이었다.
“혹시 양심이란 게 있으시다면, 고개를 돌려 식탁을 봐주시겠습니까?”
“정치인에게 양심이 있는지를 물은 게냐?”
“얻다 팔아먹고 오셨는지는 몰라도 다시 주워 오십쇼.”
아니, 그리고 이번 기회에 솔직하게 짚고 넘어갑시다. 점심 부실하게 드셔서 속이 헛헛하다 하시는데, 그게 부실하게 먹는 거면 남들은 다 결식아동입니까?
예? 뭐? 일에 쫓겨서 밥 먹을 시간이 없어? 고민이 깊어 밥이 안 넘어가? 태감님 점심에 밥만 한 솥 비우신 건 기억하십니까?
소년의 목에 점점 핏대가 서기 시작하자 태감은 헛기침하며 다급히 화제를 돌렸다.
“내가 진짜 부하직원 신분이라 지금까지는 참고 살았는데, 어? 누가 보면 세상일 다 지가 떠안고 있는 것처럼…….”
“커흠, 크흠. 그보다 후식, 후식 먹어야지. 응? 빙과류인 것 같은데 녹으면 안 되지 않느냐.”
소년은 고개를 삐딱하게 쳐들고 태감을 보았다. 입술을 달싹거리며 한참 동안 씨근덕거리던 소년은 퉁명스럽게 후식이 담긴 그릇을 내려놓았다.
“홍시 시미로(西米露)입니다.”
“시미로?”
“설명하자면 좀 복잡한데, 사고 녹말로 만드는 음, 알갱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그 녹말 알갱이를 과즙이나 코코넛 밀크(椰子汁)에 넣어 달콤하게 먹는 음식입니다.”
그러니까 타피오카 펄 같은 건데……. 태감을 이해시키기 위해 고민하던 소년은 결국 설명을 포기하고는 직접 경험해 보라며 숟가락을 쥐여주었다.
“그래, 실물을 놔두고 굳이 설명을 들을 필요는 없지. 직접 먹어보마.”
오후 여섯 시의 노을을 담아낸 듯한 다홍색의 홍시와 투명하게 빛나는 알갱이들. 뚝뚝 흘러내리는 홍시를 숟가락으로 뜬 태감은 조심스럽게 입술을 비집어 열었다.
혀 위로 미끄러지는 서늘한 감촉. 반쯤 녹은 홍시의 매끈하고 시린 촉감은 기름기로 달아오른 혀를 차갑게 식혀주었다.
말캉한 과육의 달큰함을 만끽하던 태감은 혀 위에 남아 데굴데굴 구르는 알갱이를 살짝 씹어보고는 웃음을 터뜨렸다.
“재밌는 식감이구나. 쫄깃하고 탱글탱글한 것이, 달콤한 홍시와도 잘 어울려.”
“원래 홍시가 아니라 망고(芒果)로 만들면 더 맛있습니다. 이 겨울에 열대과일을 구할 수 없어서 이번엔 홍시로 만들었습니다만.”
“그거 아쉽구나. 아쉽지만, 그건 여름을 기다려야겠군.”
여름. 겨울이 끝나고, 봄이 지나고 나서야 찾아오는 무더운 계절. 그 순간 소년의 입가에 통증과도 같은 슬픔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 일그러짐이 떠올랐던 것은 찰나에 불과했다. 태감이 보지 못하도록 고개를 잠시 돌린 소년은 이내 싹싹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더운 여름에 먹기엔 최고지요. 새콤달콤한 망고를 과육이 살짝 씹힐 정도로 으깬 다음에…….”
“으음, 경사에서는 자주 먹기 힘들지만, 망고는 참 맛 좋은 과일이지.”
“여름에 맛있는 과일이 망고만 있는 건 아니지요.”
높게 뜬 태양과 더위. 길 위로 피어오르는 아지랑이. 그 뜨거운 열기 속에서 무르익은 즙 많고 달콤한 과일들.
자두, 복숭아, 참외. 포도.
그 달콤함을 떠올린 소년은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달콤한 여름 과일이야 많고도 많지만, 역시 여름의 왕은 수박 아니겠습니까.”
“수박! 그래, 수박은 빼놓을 수 없는 여름의 별미지.”
신장 질환이 있는 불행한 이들을 제외한다면, 누구도 그 물 많고 달콤한 과일을 거부할 수 없을 것이다.
차갑게 식힌 수박의 상쾌함, 땀을 쥐어짠 끝에 말라비틀어진 육신을 적시는 그 달콤한 감로수. 수박에 대한 찬사는 아무리 많더라도 지나치지 않다는 것이 소년과 태감의 의견이었다.
“마크 트웨인이라는 작가는 수박을 가리켜 이 세상 사치품의 제일이라 칭송하였지요.”
“가혹한 혹서기를 지내본 이라면 공감할 수밖에 없는 찬사로구나.”
여름. 여름이라.
만복감으로 나른하게 풀린 태감의 얼굴에 들뜬 기대감이 번지기 시작했다. 춥고도 고되었던 겨울을 보내고, 처음으로 맞이하는 여름. 그 어떤 과일보다도 달콤할 자유라는 이름을 앞에 둔 태감은 흥분을 숨기지 못했다.
“여름이라. 이번 여름은 답답한 경사가 아닌 탁 트인 피서지에서 보내보는 것도 괜찮겠지.”
“여름 하면 또 동정호 아니겠습니까. 동정호에 배를 띄우고 악양루를 바라보며 술잔을 기울이면 신선이 부럽지 않다지요?”
“호수 하면 또 항주의 서호(西湖)가 빠질 수 없지. 낮에는 흐드러지게 핀 연꽃을 보며 뱃놀이를 하고, 오후에는 그 유명한 서호의 용정차를 마시며 풍류를 즐기고, 밤에는.”
“소흥주를 마셔야지요. 항주의 옆 동네가 소흥주의 산지인 소흥(绍兴) 아닙니까.”
까마득하구나. 봄도 아직 멀었는데, 여름은 언제 기다릴꼬.
태감의 입에서 지친 한숨이 흘러나오자 소년은 이제 현실로 돌아와야 할 시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꿈이 너무 길어지면 마음이 무너지니까. 그들은 아직 정치인이었고, 황제의 사람이었다. 소년의 입꼬리에 스산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럼 이제 슬슬, 미뤄두었던 일을 처리해야겠군요.”
“금조 말이냐.”
“예, 마침 내일쯤 시간이 괜찮냐고 연락이 왔더군요.”
언제까지 미뤄두고만 있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소년의 말에 태감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를 받아들이든 내치든, 아니면 장 태감에게 그 사실을 넌지시 알려 내분을 초래하든.
우선은 그를 만나본 다음에 결정해야 할 일이었다.
금조. 젊은 환관의 이름을 입에 담은 태감은 탐탁지 않다는 듯 혀를 찼다.
“피곤하겠지만, 수고 좀 해다오.”
“수고랄 게 뭐 있겠습니까. 만나서 차나 한잔하는 건데요.”
남의 돈으로 차를 얻어먹는 것도 오랜만이군요. 가능하면 비싼 거로 시켜야겠습니다.
낄낄거리며 너스레를 떨던 소년은 시선을 창밖으로 향했다. 북쪽으로 트인 창밖으로는 별 하나 뜨지 않은 새카만 밤이 내려앉고 있었다. 소년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기대되는군요. 믿을 수 있는 친구인지, 아니면 이용할 수 있는 친구인지.”
“경계해야 할 친구일 수도 있지.”
“차라리 그렇다면 좋겠군요.”
장 태감님께서…….
무언가를 말하려 했던 소년은 태감을 올려다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아마 자신과 비슷한 연배일 그 늙은 환관을 떠올린 소년은 그의 마지막이 배신의 칼날 아래서 완성되기를 원치 않았다.
비록 정적의 사이일지라도. 서로 칼을 겨두고 독을 풀어야만 하는 사이일지라도.
‘함께 늙어가는 사이라고, 그새 정이라도 들었나.’
소년은 치밀어오른 심려를 가라앉히기 위해 사나운 어조로 뇌까렸다.
“내일이면 알 수 있겠지요. 금조. 그 친구가 머리 검은 짐승 놈일지, 아닐지는.”
“너는 어찌 되기를 바라느냐.”
태감의 나지막한 질문에 궁리하던 소년은 피식 웃으며 답했다.
“내일 알려 드리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