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관의 요리사 194화
먹과 종이 냄새가 물씬 감도는 연좌궁의 집무실. 옥벼루에 먹을 갈던 위정은 창틀을 타고 넘어온 햇살이 자신의 손등에 드리운 그림자를 보았다.
오후 네 시 경을 넘어가는 시간. 태양은 저물어버린 시간 만큼 무거워진 채 느릿하게 떨어지고 있었다.
늦은 오후의 햇살은 이미 정오의 뜨거움과 강렬함을 잃어버린 채 느릿하게 허공에 번지고 있었다.
고개를 들어 활짝 열린 창 너머로 하늘을 올려다보던 위정은 고개를 태감 쪽으로 돌렸다.
“저녁이 거의 다 되었군요. 벌써 노을이 지려 하는 걸 보니. 역시 겨울이라 그런지 해가 짧은 것 같습니다.”
태감의 대답은 조금 늦게 돌아왔다. 퀭한 눈으로 양손에 든 보고서를 번갈아 보던 태감은 무겁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초점을 맞추지 못하고 방황하던 눈동자는 활짝 열린 창밖에 잠시 머물렀다가 다시 책상 아래로 떨어졌다.
정확히는, 조금 전까지 따끈따끈한 찰떡이 담겨 있던 접시로. 찰떡은 설탕과 아삭한 코코넛 과육, 그리고 깨와 호두로 만든 소에 고소한 콩고물을 묻힌 것이었다.
접시 위의 노란 콩고물을 보며 갈등하던 태감은 결국 고개를 떨구고 보고서로 시선을 옮겼다.
후궁 제일의 권력자. 사례감의 태감.
황실 직속 첩보 기관의 장 동창 제독의 처량한 모습에 위정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긴, 슬슬 배가 고프실 때로군.’
점심시간인 열두 시로부터 무려 네 시간. 오후의 간식 시간인 두 시부터 세더라도 태감은 무려 두 시간 동안이나 공복을 유지하고 있었다.
위정은 태감이 큰 석반어 찜과 반건조한 민어구이. 산서성에서 결혼식 피로연에 꼭 오르는 호박과 돼지고기찜 요리인 남과구육(南瓜扣肉)과 바삭바삭한 거위 튀김에 귀한 오징어 알을 듬뿍 넣고 시큼하고 얼얼하게 끓여낸 산라탕(酸辣湯)으로 점심을 먹고,
후식으로 녹차 크림과 단팥을 푸짐하게 넣은 롤케이크와 검은깨 소를 넣은 새알심을 매콤한 생강탕에 띄운 탕원(汤圆)을 먹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확실히, 오늘 식사를 조금 부실하게 드시기는 하셨군. 일이 바빠 식사 시간이 촉박했으니 어쩔 수 없지.’
뭔가, 군입거리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떡이나 과자 같은 간식거리가 아닌, 짭짤하고 그윽한, 포만감이 있는 것. 고기. 태감의 여윈 뺨을 본 위정은 고민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조금 다녀오겠습니다.”
태감은 어디로 가냐는 말도 묻지 않고 멀건 표정으로 힘없이 손을 흔들었다. 맥없이 늘어지는 그 모습에 위정은 발걸음을 재촉하여 주방으로 향했다.
중턱을 넘어 어느덧 저물어가는 겨울. 눈 내린 연좌궁의 정원은 계절의 마지막을 알리듯 쓸쓸한 모습으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위정은 감상에 젖는 그 잠시간의 여유도 허락하지 않고 곧바로 주방의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어두컴컴한 주방 안에선 소년이 칼을 갈고 있었다.
가슴을 에는 그 섬뜩한 소리. 검보라빛 칼날은 흐릿한 어둠 너머에서 우아하게 빛났다.
번뜩이는 아름다움에 한순간 마음을 빼앗겼던 위정은 곧 정신을 차리고는 진중한 목소리로 소년을 불렀다.
“잠시 시간 좀 내다오.”
“위정 나으리 아니십니까. 여긴 어쩌신 일로.”
목구멍이 칼칼하셔서 찾아오신 거라면, 마침 좋은 물건이 있습니다만. 짓궂은 미소를 지은 소년은 꿀에 절인 사과만큼이나 달콤한 제안으로 위정을 유혹했다.
그 악마의 꼬드김과도 같은 제안에 혹했던 위정은 기다리고 있을 태감을 떠올리고는 근엄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보다는, 태감께서 드실만한 간식이 필요하다. 뭔가 기운이 날 만한 거로.”
“저녁 식사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만, 나으리께서 그리 말씀하시는 것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겠지요. 알겠습니다.”
수락은 시원스레 떨어졌지만, 소년의 얼굴은 난처한 고민으로 굳어 있었다.
지금 당장 무언가를 내기에는 준비할 시간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고뇌하던 소년은 머리를 긁적거리며 물었다.
“뭔가 기운이 날 만한 거라면, 역시 고기겠지요?”
“고기라면 좋겠지.”
“그렇다면…… 방법이 없지는 않군요.”
나으리. 혹시 유저육(油底肉)을 드셔보신 적 있으십니까? 소년은 상 위로 작은 단지 하나를 올리며 위정에게 물었다. 단지 안에는 허연 돼지기름이 가득 담겨 있었다.
“유저육이라. 들어본 적 있다. 돼지기름에 익힌 고기를 절여 만드는 저장식품이라지?”
“예, 보통 남부에서 많이 먹지요.”
유저육은 프랑스의 콩피(confit)와 흡사한 저장식품으로 보통 삼겹살이나 목살 같은 기름이 많은 부위로 만들었다.
돼지기름에 고깃덩어리를 통째로 튀겨낸 다음, 그 기름과 함께 단지에 보관하는데 기름이 하얗게 굳으며 산소를 차단하기 때문에 습도와 온도에만 조심한다면 거의 반년 이상을 보관할 수 있는 훌륭한 저장식품이었다.
소년은 단지에 긴 젓가락을 넣어 어른 주먹만 한 고깃덩어리 몇 개를 건져내었다.
흰 돼지기름이 덕지덕지 묻어 있는 고기는 보기만 해도 속이 느글거릴 만큼 느끼해 보였다. 위정의 불편한 시선을 느낀 소년은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
“느끼해 보이죠? 기름이 많은 삼겹살을 기름에 튀김 다음 또 그 기름에 묻어두었으니.”
“조금 과해 보이기는 하구나.”
“후후, 하지만 한번 드셔보시면 생각이 확 달라지실 겁니다.”
기름에 묻어둔 채 숙성되는 과정에서 고기의 근섬유가 부드러워지고 기름이 배어들어 촉촉해지지요, 완성된 유저육은 입술로 문대도 뭉개질 만큼 사르르 녹는답니다.
어떤 요리에 넣어도 감초 역할을 하는 다재다능한 친구지만, 가장 맛있게 먹는 방법은 역시.
“철과에서 튀기듯 굽는 것이지요. 기름이 적당히 빠지며 껍질과 비계 부분은 아삭아삭해지고, 기름이 밴 고기는 보드랍고도 감칠맛이 나지요.”
소년의 설명은 기름진 것을 그리 즐기지 않는 위정조차 군침을 삼키게 할 만큼 감미롭고도 그윽했다.
입은 열심히 떠벌거리면서도 소년의 손은 착실하게 요리를 준비하고 있었다. 고깃덩어리를 통째로 철과에 넣은 소년은 고기 안쪽에서 기름이 충분히 녹아 나오도록 은근한 불에서 고기를 익혀냈다.
“유저육의 가장 큰 장점은, 바로 이미 조리가 끝났기 때문에 조리시간이 짧다는 점입니다.”
“지금 같은 때에 가장 고마운 장점이로구나.”
“허기진 태감님께 딱 어울리는 요리지요.”
녹아 나온 기름에 고기의 겉 부분이 바싹하게 튀겨지자 소년은 철과를 기울여 기름을 따라냈다. 그러고는 센 불에서 고기를 한 번 확 그을린 다음 재빨리 철망 위로 건져내었다.
기름방울이 뚝뚝 덜어지는 것을 가만히 보던 소년은 위정을 돌아보지 않고 입을 열었다. 소년이 입에 담은 것은 차마 숨길 수 없었던 염려의 말이었다.
“요즘 많이 수척해지셨더군요. 태감님. 고민이 많으신가 봅니다.”
“그럴 수밖에. 책임이 무거우시니, 부담도 크시겠지.”
“그러실수록 잘 드셔야 할 텐데 말입니다.”
제가 요즘 밖으로만 돈 탓에, 식사도 제대로 챙겨드리지 못했군요.
경쾌하고 발랄한 목소리에 스며든 쓰디쓴 자책을 느낀 위정은 소년의 왜소한 어깨 위에 손을 얹었다.
“너는 이미 태감님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하지 않았느냐?. 네 몸이 둘도 아닌데, 태감께서도 그 이상을 바라시지는 않을 거다.”
“그래도……. 아니, 아닙니다.”
말꼬리를 흐리던 소년은 고기에서 기름이 적당히 빠지자 칼로 얄팍하게 썰어냈다. 위정은 이 이상 말하고 싶지 않다는 소년의 의지를 존중하여 화제를 바꾸었다.
“이제 어떻게 요리할 생각이냐.”
“이대로 먹어도 좋고, 아니면 채소와 함께 슬쩍 볶아도 좋지요. 씁쓸한 맛이 나는 채소와 함께 먹으면 맛의 균형이 잘 잡힙니다.”
“태감님께선 별로 좋아하지 않으시겠구나.”
“태감님께서는 그러시겠지요.”
그럼, 이대로 밥에 올려서 덮밥으로 만들까요. 밥에 고소한 돼지기름이 배어들어 윤기가 자르르 흐르겠지요. 배덕적인 칼로리와 콜레스테롤의 압박에 한 차례 몸을 부르르 떤 소년은 그 부도덕하며 사회적으로 지탄받아 마땅한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하얀 쌀밥을 반들반들하게 물들이는 돼지기름. 넘쳐 흐르는 돼지고기. 그 육중한 한 접시에 곁들여진 채소라고는 고작 세 조각의 무 짠지뿐이었다.
생색내기라 평하기도 부끄러운 그 분량에 위정은 감탄스럽다는 듯 혀를 내둘렀다.
“난 도저히 엄두도 안 나는구나.”
“태감님이 아닌 한 그 누구도 엄두를 내지 못하겠지요.”
자신이 만들어낸 악마의 산물을 보며 망설이던 소년은 결국 눈을 질끈 감고 접시를 위정에게 내밀었다. 위정은 긴장된 표정으로 접시를 받아들었다.
“이미 충분히 간이 되어 있지마는, 만약 간이 부족하다 하시면 이 매운 간장을 조금 뿌려 드시라 하십시오. 그리고 만약에, 혹시나. 느끼하다 하시면…….”
“그 당부는 들을 필요 없을 것 같구나.”
소년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확실히 태감께서 고기가 느끼하다 하실 일은 없지요.
입술을 우물거리던 소년은 젓가락을 챙기는 위정을 보며 말했다.
“태감께 전해주십시오. 오늘 저녁은 거나하게 차리겠노라고.”
“괜찮겠느냐?”
“요즘 고생이 많으신데, 기운을 북돋워 드려야지요. 잘 먹는 것만큼 좋은 보약도 없지 않습니까.”
사람은 먹은 만큼 일하는 법이지요.
소년의 말에 위정은 드물게도 몹시 감격했다는 표정을 보여주었다. 물론, 그 표정이 얼굴에 머무른 것은 찰나에 불과했다.
“그래. 그리 전해드리마.”
그 말을 끝으로 입을 굳게 다문 위정은 살짝 고개를 숙이고는 행여나 고기가 식을세라 잰걸음으로 주방을 나섰다.
멀어지는 등을 보던 소년은 자신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만큼 위정이 멀어지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내가 나의 소임을 다하지 못하였구나.”
요리사로서의 소임을 다하지 못했어. 주름지고 갈라진 손을 내려다보던 소년은 입꼬리를 사납게 끌어올리며 칼을 뽑아 들었다. 이제, 그의 소임을 다해야 할 시간이었다.
* * *
“근래 어울리지도 않는 정치판을 구르며 정치인 노릇을 했더니, 정작 다해야 할 소임을 잊고야 말았구나.
그는 염탐꾼도, 협잡꾼도, 정치꾼도 아니었다. 그는 요리사였다.
태감의 요리사.
그를 배불리 먹이고, 살찌우고, 건강하게 할 사람. 그런데 그 소임을 다하지 못하였으니. 자책감을 곱씹던 소년은 도마 위로 손질해둔 칼들을 늘어놓았다.
번뜩이는 칼날의 준엄한 빛은 태만했던 소년을 꾸짖는 듯했다. 소년은 고개를 숙여 잘 손질된 칼들을 굽어보았다. 빛나는 칼날들은 저마다 일그러진 소년의 얼굴을 비치고 있었다.
“그래, 심통이 단단히들 났구나. 보채지 마라. 오늘은 마음껏 활개 치게 해줄 테니.”
살점을 헤집고 뼈를 긁어내는 활약을 약속한 소년은 거침없이 식재료 창고의 문을 열어젖혔다.
겨울의 냉기가 천연의 냉장고 역할을 했기 때문에 보관된 식재료들은 하나같이 갓 잡은 신선함을 간직하고 있었다. 요리사를 설레게 만드는 광경이었다.
낙타의 혹이나 상어 지느러미와 같은 진귀한 식재료. 또는 신선한 바다의 진미들 또한 널려있는 창고에서 소년의 선택을 받은 것은 다소 평범하고 밋밋한 쏘가리 한 마리였다.
“이거 크고 물 좋은 쏘가린데, 오랜만에 탈골어(脫骨魚)나 만들어볼까.”
양주 요리의 최고봉. 탈골어(脫骨魚)는 말 그대로 뼈를 발라낸 생선찜 요리였다.
그렇게만 들으면 그리 어려울 것 없어 보이나, 뼈를 발라낼 때 생선의 배를 가르거나 토막 치지 않고라는 단서가 붙는다면 얘기가 달라질 것이다.
생선의 뼈를 통째로 발라내기 위해선 뼈와 살의 구조를 완벽하게 꿰고 있어야 함은 물론, 칼을 자신의 수족처럼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기술 또한 필요했다.
그렇기에 탈골어는 전생의 중국에서도 요리사의 공력을 대변하는 보증수표와 같은 취급을 받았다.
폭이 좁고 긴 칼을 집어 든 소년은 아가미의 아래쪽으로 깊게 칼집을 넣은 다음 칼을 밀어 넣었다.
힘이 과하면 칼날이 삐져나와 볼품이 없어지고 힘이 부족하면 잔가시가 남아 요리를 망친다. 신중한 표정으로 칼을 밀어 넣던 소년은 칼끝이 꼬리 끝에 도달한 순간 부드럽게 손목을 돌렸다.
둥근 곡선을 따라서, 천천히 뼈를 도려낸 다음. 소년은 조심스럽게 뼈를 잡아 뽑았다.
“후, 아직 실력 안 죽었군.”
살점이 살짝 붙은 뼈가 주르륵 딸려 나오자 소년은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어 보였다. 젊은 날, 이 탈골어를 능숙하게 만들기 위해 얼마나 노력을 했던가.
“생선 구조를 파악하겠다고 X-RAY까지 찍어본 보람이 있구만.”
풋풋했던 젊은 날의 추억을 떠올리며 슬며시 미소를 지은 소년은 뼈를 발라내어 허전해진 쏘가리의 배 속에 든든한 생선 살 반죽을 가득 채워주었다.
통통해진 쏘가리 위에 간장과 생강 채 조금을 올려 찜기에 밀어 넣은 소년은 다음 요리를 구상하기 위해 잠시 눈을 감았다.
무엇을 만들 것인가. 어떤 요리로 상을 채울 것인가.
어떤 요리를 식탁의 주역으로 삼을 것인가.
끓어오르는 욕구를 잠시 가라앉힌 소년은 초점을 자신이 아닌 태감에게로 맞추었다.
요리하는 것은 자신이었지만, 먹는 것은 태감이었다. 그러니 저녁상의 주역. 가장 빛나는 자리는 응당 태감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으로 선정해야 하지 않겠는가.
“당연히 고기겠지.”
문제는 어떤 고기를 고르느냐에 있었다. 물에 사는 고기는 제외하고 뭍에 사는 고기와 날아다니는 고기만 한정하더라도 그 가짓수는 한도 끝도 없이 많았다.
네 발 달린 것을 고를 것인가.
아니면 두 발 달린 것을 고를 것인가.
물론 개중에는 다리가 없는 고기 또한 있었지만, 소년은 그 의외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고려하지 않기로 했다.
네 발 달린 것.
소, 돼지, 양, 말, 사슴, 토끼 등등.
두 발 달린 것.
닭, 오리, 거위, 비둘기, 메추리 등등.
과연 이들 중 태감이 가장 좋아하는 고기는 무엇일까. 소년은 그것이 상상 이상으로 난해한 문제라는 것을 깨닫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다 올리면 가장 기뻐하시겠지만.”
고기라면 한도 끝도 없이 드시는 양반이니. 실없는 소리를 흘려본 소년은 그것이 별 유쾌하지 않은 농담이라는 것을 깨닫고는 다시 기나긴 사유에 빠져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