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관의 요리사 193화
“그러니까, 취업 청탁을 하러 갔다가 갑자기 가배 대결을 하게 되었다?”
“살다 보면 그런 일도 있지요.”
태감은 도저히 취업 청탁에서 대결로 연결되는 그 중간 과정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피로에 찌든 표정을 짓고 있는 소년을 존중하여 자세한 사항을 캐묻지는 않았다.
그리고, 지금 태감의 관심을 사로잡고 있는 것은 가배 대결 따위의 사소한 문제가 아니었다.
걸쭉하게 흘러내리는, 거의 검은색에 가까운 짙은 갈색의 진득한 액체. 소년이 주걱을 휘저을 때마다 솥 안에선 이성을 야금야금 허물어뜨릴 만큼 달착지근한 냄새가 피어올랐다.
창백하게 질리도록 주먹을 그러쥔 태감은 떨리는 목소리로 질문했다.
“지금 뭘 만드는 거냐?”
고개를 돌린 소년은 목소리만큼이나 떨리는 태감의 눈동자를 들여다보고는 실소를 흘렸다.
“캐러멜입니다. 캐러멜. 설탕 태운 거요.”
지나치게 간략한 설명에 태감은 불만을 느꼈다. 소년은 하는 수 없이 캐러멜의 제작법과 캐러멜을 이용해 만들 수 있는 음식. 그리고 그것들을 만드는 목적에 대해 소상히 보고했다.
“과자를 만들 생각입니다. 예전에, 그러니까 전생에 즐겨 먹던 과자요.”
“전생에?”
“예, 씁쓸한 가배와 아주 기가 막히게 잘 어울리는 과자였지요.”
예전에 다방에 가서 커피를 시키면 무조건 그 과자가 딸려 나왔지. 좋은 시절이었어.
빛바랜 추억을 떠올린 소년은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
확실히 늙긴 늙었구나. 옛날이 좋았다는 말이 나오는 걸 보면. 나도 다 된 모양이야.
소년은 세월의 더께가 두껍게 쌓인 노인의 얼굴로 말을 이었다.
“향긋하고 바삭바삭한 것이, 가배 한잔이랑 먹으면 끝도 없이 들어가지요. 앉은 자리에서 열 개 스무 개 먹어치우는 건 일도 아니었습니다.”
“말만 들어도 군침이 나오는구나.”
“그래서, 이번에 다관 막심에 새로운 메뉴로 올려 볼 생각입니다.”
다관 막심은 지금까지 계절 한정상품에만 주력해서, 스테디셀러라 부를 만한 메뉴가 부족했거든요.
영어가 섞인 소년의 말을 태감은 완벽히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그 느낌만큼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서, 마침 이번 가배 대결을 이용해서 새로운 과자를 홍보할 생각이로구나.”
“뭐, 이왕 하는 일 아닙니까. 써먹을 수 있는 건 써먹어야지요.”
윤기가 흐르는 우아한 고동색으로 캐러멜을 완성한 소년은 과자를 만들기 위한 다른 재료들을 가져오기 위해 잠시 자리를 비웠다.
박력분에 버터, 설탕, 신선한 계란과 약간의 계피. 소금. 소년이 재료들을 품 안 가득 챙기는 동안 슬며시 눈치를 보던 태감은 손가락을 솥으로 가져갔다.
“아뜨!”
“아이고 저 인간 내 저럴 줄 알았다.”
아니, 김이 펄펄 나는 거 뻔히 눈에 보이는데 이 모자란 인간아. 그걸 굳이 손으로 찍어봐야 뜨거운 줄 알아?
황급히 미적지근한 물을 가져온 소년은 태감이 손가락을 식히는 동안 온갖 욕설을 골고루 내뱉었다.
“그…… 그래도 손가락을 데어서라도 먹어볼 만한 가치는 있었다. 끈적하고 농후하게 졸아든 설탕의 단맛이 두드러지지만, 그 안쪽으로는 겹겹이 쌓인 복잡한 풍미가 섬세하게 얽혀있는 것이 느껴지는구나. 불에 그을린 듯한 향미와 은근한 쌉싸름함이 과하다 싶은 강렬한 단맛과 절묘하게 균형을 이루고 있어. 그 안쪽으로는 살짝 사탕수수에서 갓 뽑아낸 갈색 원당을 연상시키는 풍성함이 느껴지는구나.”
“얼씨구, 누가 뺏어간답니까. 식은 다음에 먹어도 될걸.”
콧방귀를 뀐 소년은 캐러멜이 식는 동안 반죽을 준비했다. 박력분은 고운 체로 체를 쳐두고, 버터는 설탕과 계란을 넣어 부드럽게 풀어둔다. 설탕이 녹은 매끈한 버터크림을 보며 강렬한 충동을 느낀 태감은 단단히 뒷짐을 지고는 입을 열었다.
“큰일이구나. 표자승과 솜씨도 겨루어야 하고, 금조 그 친구에게 접대도 받아야 하니.”
“한 철 바쁘게 살면 좋은 날도 오겠지요.”
“그래. 좋은 날이 오겠지. 분명히.”
소년의 말에 적당히 맞장구친 태감은 표자승의 이름 석 자를 혀 위에 올려놓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표자승.
그 이름은 태감에게 거북하고도 불편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어쩔 수 없었다는 변명으로 포장되어 있는, 죄책감이라는 감정을.
그 석 자를 입안에 담고 우물거리던 태감은 반죽에 캐러멜과 계핏가루를 섞으려는 소년을 향해 물었다.
“어쩔 생각이냐.”
“예?”
“표자승 말이다.”
인정해 줄 생각이냐?
태감은 목소리에는 묘한 기대감이 담겨 있었다. 고개를 슬쩍 돌려 태감을 힐끔 본 소년은 툭툭 끊어지는 어조로 대답했다.
“마음에 들면 인정하겠지요. 마음에 안 들면 뭐, 인정 못 하는 거고.”
“져줄 생각은 없어 보이는구나.”
소년은 코웃음조차 아깝다는 듯 혀를 찼다. 그리고 불손하게 느껴질 만큼 차갑고 날카로운 눈으로 태감을 노려봤다. 그 건조한 눈동자에 순간 스치고 지나간 감정은 틀림없이 분노였다.
“지금 그 말은, 못들은 걸로 해두겠습니다.”
“내가 실언을 했구나.”
태감은 불쑥 치밀어오른 그 말이 실언이었음을 인정했다. 한동안 태감을 쏘아보던 소년은 시선을 다시 과자 반죽으로 돌렸다.
“그 친구가 들었으면 분통을 터뜨렸을 겁니다.”
“그래. 조금 전 말은 그의 결심을 모욕하는 것이었지.”
얄팍한 두께로 반죽을 민 소년은 직사각형 모양으로 반죽을 잘라내었다. 길이는 검지 만큼, 폭은 손가락 두 마디쯤 되도록. 철판 위에 반죽을 죽 늘어놓은 소년은 뜨겁게 달궈진 화덕 안으로 철판을 밀어 넣었다.
“늦은 시간이기는 하지만, 가배 한 잔 정도는 괜찮겠지요.”
이미 하루의 반절이 흘러 가버린 늦은 오후였지만, 한 잔 정도는 마셔도 괜찮으리라. 건조한 과자에 따뜻한 가배 한 잔이 없다는 것은 너무나도 가혹한 일이었으니까. 태감의 적극적인 동의를 얻은 소년은 작은 맷돌을 가져와 가배 콩을 갈기 시작했다.
“그 녀석, 솜씨는 꽤 나쁘지 않은 편입니다. 장사꾼으로서, 그만하면 훌륭한 편이지요.”
“장사꾼으로서 말이냐?”
“장사꾼으로서 말입니다.”
전 그만하면 충분하다고 생각했습니다만, 그 녀석은 아니었나 봅니다.
가배를 내리는 동안 소년은 그가 자신에게 도전한 이유에 대하여 고민했다.
‘뛰어난 상인으로서, 경영인으로서. 나는 이미 너를 인정했건만. 그걸로는 부족했느냐?’
뜨거운 물이 담긴 황동 주전자가 부드럽게 원을 그리며 움직일 때마다 잔 아래로 감미로운 이슬이 떨어졌다.
정확히 두 잔 분량. 두 잔 분량의 가배를 내린 소년은 조심스럽게 주전자를 들어 올렸다. 때마침 과자 또한 다 구워졌는지 화덕 안쪽에선 향기로운 단내가 솔솔 풍겨오고 있었다.
“드셔보시지요. 손가락 조심하시고요.”
“걱정 말거라. 손은 두 개이지 않으냐?”
“손이 두 개라고 양쪽 손가락을 다 데이실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못 미덥다는 듯 태감을 보던 소년은 자꾸만 뜨거운 철판 근처에서 얼쩡거리는 못된 손가락을 쫓아내고는 자신이 직접 과자를 집어 서늘한 저녁 바람으로 그것들을 식혔다.
“이제 드셔도 되겠습니다.”
“나 원, 요즘 나를 너무 과보호하는 것 아니냐?”
“평소 행실을 되짚어보길 바란다고 말씀드리고 싶지만, 잔소리를 들어도 개선될 만한 연세가 아니시니 참도록 하겠습니다.”
물기 없이 단단하고 건조한 과자는 아직 따스한 온기가 남아 있었다. 늦은 저녁에 따뜻한 과자를 먹는 것만큼 행복하고 보람 있는 일이 또 어디 있을까?
이 이상의 행복은 없을 거라고 확신하며 태감은 과자를 베어 물었다.
아삭. 새하얀 앞니에 뚝 부러진 과자는 달콤한 잔향을 남기고 혀 위에서 사르르 녹아내렸다.
딱딱하고 메마른 식감을 기대했던 태감은 타액과 섞이며 달콤하게 풀어지는 그 보드라움에 깜짝 놀라 외마디의 탄성을 질렀다.
“아!”
번갯불처럼 번뜩인 찰나의 감격을 토해낸 태감은 그 순간을 가슴 깊숙한 곳에 묻어두고 싶다고 생각했다. 가장 깊은 곳에 그 달콤함을 묻어 영원토록 향유하고만 싶었다.
“달콤하고, 부드럽고. 여운이 길게 남는다. 차 과자로서 이보다 더 훌륭한 과자는 또 없을 것이다.”
나긋나긋하게 혀 위에서 녹아내리고 나면 그 뒤로 진하게 남는 캐러멜의 짙은 잔향.
그 달콤함을 깔끔하게 쓸어내는 가배의 개운함.
그리고 그 뒤로 다시 찾아오는 과자의 진득한 달콤함.
아스라이 스러지는 계피의 향긋함.
그리고 또 가배.
영원히 반복되는 과자와 가배의 무한 굴레에 빠진 태감을 바라보며 소년은 자신의 잔을 기울였다.
가배. 맨 처음 표자승에게 알려준 것도 가배를 내리는 법이었다.
콩을 고르는 법, 원두를 볶는 법, 가배를 내리는 법.
그것들을 알려주며 그는 자연스레 표자승의 스승이 되었다. 스승. 그 무거운 이름을 곱씹던 소년은 갑작스럽게 홍소를 터뜨렸다.
“멍청한 고민에 빠져 있었군요. 참 쓸데없는 고민이었습니다.”
제자가 스승에게 도전하는 데 무슨 이유가 필요하겠습니까. 제자에게 스승은 당연히 뛰어넘어야만 하는 벽이고 목표일 진데, 그 자연스러운 순리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이유를 찾고 있었으니 제가 멍청한 놈이지요.
마음속에 맺혀 있었던 불편한 고민을 해소한 소년은 기분 좋게 뜨거운 가배를 들이켰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태감은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질문했다.
“그래. 장강의 앞 물결은 뒤 물결에 밀려나고, 스승은 제자에게 자리를 내어주는 것이 세상의 순리인 법. 너도 그 순리를 따를 테냐?”
“아직 십 년은 이르지요. 고작 그 정도 실력으로 스승님을 넘보았으니, 쓰디쓴 교훈을 안겨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전력을 다해서 깨부숴 줘야지요. 자고로 매를 아끼면 제자를 버린다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참된 스승으로서, 제자를 위해 사랑의 매를 들 때로군요.
가식적인 웃음을 짓는 소년을 보며 태감은 마음속으로 표자승을 향해 애도를 보냈다.
* * *
“이건, 지금껏 경사 사람들에게 익숙해진 가배의 상리를 완전히 벗어난, 그런 가배입니다.”
“도대체 이건 뭐죠? 구름을 베어 문 것처럼 한없이 가볍게 녹아내리는 이 서늘한 감촉. 은은한 달큰함과 고소함. 그리고 그 농후한 풍미가 가배의 쌉싸름한 맛을 중화시키면서-”
“맛뿐만 아니라 보기에도 훌륭합니다. 마치 흰 설산을 잔 위에 담아놓은 듯한 이 순백의 자태를 보십시오. 감히 입에 대기가 아까울 지경입니다.”
소년이 제출한 가배. 아인슈패너에 쏟아지는 심사위원들의 극찬은 부담스럽다 못해 낯부끄럽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마치 경쟁하듯 아인슈패너를 찬미하는 심사위원들의 열기를 피해 눈을 돌린 소년은 홀가분하다는 듯 시원한 미소를 짓고 있는 표자승을 향해 핀잔을 던졌다.
“이 녀석아. 분하지도 않으냐?”
“스승님께 진 것은 당연한 일인데 어찌 분하겠습니까. 그저, 저의 미숙함을 실감하게 된 계기가 되었음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하여간, 말은 청산유수라니까. 그럴 거면 이렇게 거창한 대회는 왜 준비했느냐?”
“그야 홍보를 위해서지요.”
표자승은 살가운 미소를 지으며 소년에게 다가왔다. 그 넉살 좋은 태도에 소년은 쓴웃음을 지으며 그에게도 아인슈패너 한 잔을 내주었다.
“자, 너도 맛 좀 보거라.”
“감사히 마시겠습니다. 스승님.”
굽실거리며 잔을 받아든 표자승은 이내 진지한 표정으로 아인슈패너의 맛을 음미했다.
첫 번째로는 입안에 차오르는 크림의 달착지근함과 고소함.
두 번째로는 그 고소함이 느끼함으로 변할 때쯤 흘러들어와 입안을 개운하게 정리해주는 가배의 씁쓰름함.
마지막으로 크림과 가배가 입안에서 섞이며 완성되는 조화로운 향긋함.
입안에서 세 번 변화하는 아인슈패너의 참맛을 꼼꼼히 분석한 표자승은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납득할 수밖에 없는 맛입니다. 스승님.”
“너는 납득했을지 모르겠지만, 난 아직 납득 못했다.”
내게는 가배 한 모금 내주지 않을 생각이냐? 소년의 말에 표자승은 난처한 표정으로 발을 뒤로 뺐다.
“아직 부족함이 많은 솜씨인지라, 조금 더 수행한 다음에 맛보여 드리면 안 되겠습니까?”
“그런 말은 도전하기 전에 했어야지.”
“역시, 안 되겠지요?”
너스레를 떠는 표자승의 손에서 빼앗아 들 듯이 잔을 받아든 소년은 신중하게 그의 가배를 입안으로 흘려 넣었다.
표자승의 가배는 그에게 처음 가르쳤던 융 드립 방식으로 내려진 것이었다. 한참 동안 입안에서 가배를 우물거린 끝에 소년은 자신이 느낀 점을 가감 없이 이야기했다.
“확실히, 아직 맛에 망설임이 남아있구나. 맛에 분명한 기준점이 없이 흔들렸다는 것이 느껴져.”
“스승님의 가르침을 되새기며 이래저래 궁리를 해보았는데, 영 신통치가 않더군요.”
면목 없다는 듯 표자승이 고개를 숙이자 소년은 그의 등허리를 퍽 소리가 나게 쳤다.
격려치고는 조금 과격했지만, 소년은 그 의도가 분명하게 전달되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실망할 것 없다. 망설임이 남아 있다는 게 꼭 나쁘다는 것은 아니니까.”
지난날 네가 우려낸 가배는 완벽하게 나의 가르침을 그대로 따라 한 맛이었다. 그렇기에 망설임도 없고, 흔들림도 없었지. 그대로 따라 했을 뿐이니까.
“하지만 오늘 가배에선 너의 고민과 노력이 느껴졌다. 나의 가르침을 넘어서, 너 스스로 나아가려는 흔적이 느껴졌단 말이다. 그러니까…….”
조금 장황하게 길어지기는 했다만, 한마디로.
잠시 말꼬리를 늘인 소년은 속에 담아두었던 수백 마디의 칭찬 중 가장 퉁명스럽고 무뚝뚝하게 들리는 말을 골라 내뱉었다.
“나는 마음에 들었다.”
“그러니까, 그 말씀은…….”
“그보다 지금 뭐 하는 거냐. 관객분들 기다리고 계시는데.”
어? 과자라도 들고 가서 인사라도 나누지 않고. 이럴 때가 아니면 또 언제 홍보를 하겠냐.
어젯밤 밤새도록 만들어 가져온 과자를 품에 안겨 등 떠밀어 보낸 소년은 표자승이 군중들에게 둘러싸여 멀어지고 나서야 간신히 칭찬 한마디를 입에 담았다.
“고생 많았다. 표자승. 오늘, 아주 훌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