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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관의 요리사-192화 (192/314)

환관의 요리사 192화

“하늘에 두 개의 태양은 있을 수 없고, 영광의 왕좌는 오직 하나뿐. 마파두부에 들어갈 두부 또한 오직 하나뿐입니다.”

갈등과 번민의 화신. 뱀의 혀를 가진 악마가 태감에게 선택을 재촉했다.

먹을 것인가. 아니면 멈춰서 있을 것인가.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영원히 고뇌에 잠겨 있을 것인가.

배를 채울 것인가. 아니면 굶주릴 것인가.

기로 앞에서 태감은 자꾸만 뒷걸음질 치려 하는 자신의 발을 붙들기 위해 안간힘을 다했다.

위장은 맹포하게 선택을 촉구하고 있었지만 결정권을 쥔 혀는 결단을 보류한 채 입술 안쪽에서 차갑게 굳어 있었다.

자꾸만 벼랑 끝으로 물러나려 하는 자신의 우유부단함에 염증을 느낀 태감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더 이상 도망칠 수 없다. 이제는 선택의 시간이었다. 드리운 그림자 속에서 자신을 조롱하고 있는 왜소한 악마를 노려보며 태감은 굳은 입술을 억지로 비틀어 열었다.

“연두부! 연두부로 하겠다!”

“연두부. 예, 그리하지요.”

선택이 입 밖을 떠난 순간 태감은 가슴 한구석에서 무언가가 무너져내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모래성이 허물어지는 듯한, 마음의 일부분이 쏟아져버린 듯한 상실감. 바닥에 엎질러진 후회의 조각들을 내려다보며 태감은 쓰러질 듯 휘청거렸다.

별스럽다는 듯 구경하던 소년은 오늘의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식사는 어디서 하시겠습니까? 집무실? 식당? 아니면.”

“주방에서 하마. 마침, 네가 요리하는 것도 보고 싶고.”

“하긴, 추운 겨울에는 따뜻한 아궁이 불을 쬐며 먹는 것도 괜찮겠지요.”

코와 눈이 조금 매울 수 있습니다만.

무의미한 주의사항을 당부한 소년은 잰걸음으로 주방으로 향했다. 아궁이에 불이 꺼진 주방은 싸늘한 냉기가 감돌았고 어두컴컴해 스산했다.

옷깃을 여민 소년은 멀건 표정으로 주방 문에 기대있는 태감을 돌아보고는 재빨리 아궁이에 불을 피웠다.

“곁들이는 뭘로 하시겠습니까?”

“마파두부면 밥 아니냐.”

“만두나 면에 먹어도 괜찮습니다. 특히 면을 비벼먹으면 의외로 잘 어울립니다.”

“아니, 밥이 좋겠다. 밥으로 다오.”

태감은 밥이 아닌 마파두부는 상상할 수도 없다는 듯이 완고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가 극렬한 마파 순수주의자임을 확인한 소년은 순순히 아궁이 위에 솥을 걸고 쌀을 안쳤다.

물은 조금 적게. 걸쭉한 마파두부 양념을 비벼먹기에는 꼬들꼬들한 된밥이 제격이었다.

“그럼 이제 시작합니다?”

기운 빠진 표정으로 고개를 까닥이는 태감을 보며 코웃음 친 소년은 본격적으로 마파두부 조리를 시작했다.

우선은, 중국 요리에 빼놓을 수 없는 돼지기름. 철과에 돼지기름을 넉넉하게 두른 소년은 거기에 파란 마늘잎을 쫑쫑 다져 넣고는 향이 충분히 우러나도록 시간을 들여 볶아내었다.

“다진 마늘을 듬뿍 넣으면 단맛이 살지만, 마늘잎만 살짝 볶는 편이 더 깔끔하지.”

마늘잎이 충분히 볶아지면 그다음에는 잠두콩과 고추로 만든 두반장을 넣는다.

최소 오 년 이상 숙성되어 검붉어진 두반장에 다진 생강 조금, 중국식 청국장과 유사한 발효식품인 두시(豆豉)와 오래 묵은 간장. 텁텁한 양념들이 기름에 튀겨지며 구수한 향기가 피어올랐다.

“좋은 향기가 나는군.”

“두반장 향이 아주 좋지요? 조금 쿰쿰하지만 구수하고, 기름에 볶다보면 부드럽고도 그윽해지지요.”

고춧가루와 간 소고기. 생강 조금. 뜨거운 물에 데쳐 콩비린내를 제거한 연두부. 마지막으로 산초와, 초피가루.

“초피는 매운맛이 강하고 산초는 향이 좋으니 적절하게 섞어 써야 제맛이 납니다.”

“그래. 아주 향긋하구나. 기대가 돼.”

“너무 맵지는 않게 했습니다. 정히 맵게 드시고 싶으시면 날 밝을 때 한번 더 해드리지요. 아주 화끈하게 말입니다.”

소년은 마파두부 한 접시와 고슬고슬한 쌀밥 한 대접으로 상을 차렸다. 검소한 저녁상이었지만 태감은 그 단촐한 차림새에 깊은 만족감을 느꼈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마파두부 한 접시와 하얀 쌀밥 한 대접. 무엇이 더 필요한가.

태감은 마치 용의 눈을 그려 넣는 화가의 심정으로 마파두부를 떠올렸다.

흰쌀밥을 물들이는 붉은 양념. 시뻘건 양념이 흠뻑 배어든 쌀밥은 태감의 이성을 불살라 버렸다.

탐욕스러운 숟가락이 양껏 퍼올린 마파두부가 볼 안쪽을 가득 채운다.

비강으로 치밀어오르는 신선한 산초와 초피의 향기. 혀를 찌르고 잇몸을 마비시키는 얼얼함.

그 뜨거운 자극은 핏줄을 타고 돌며 나른하게 늘어진 육신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백자같이 하얀 이마 위로 구슬땀을 흘리면서도 태감은 쉬지 않고 마파두부를 입에 욱여넣었다.

창백하리만치 희고 고왔던 두 볼을 벌겋게 물들인 태감의 모습에 소년은 실소를 흘렸다.

“입에 좀 맞으십니까?”

“조금만, 조금만 기다려다오. 아직 이 마파두부에 어울릴 만한 찬사를 떠올리지 못했으니.”

칼칼하면서도 묵직한 양념에 촉촉하게 젖은 비단결 같은 연두부. 혀 위에서 살며시 미끄러지면 소박한 콩의 단맛이 고추와 초피에 달아오른 혀 위로 상냥하게 스며든다.

넉넉하게 사용한 돼지기름의 진한 감칠맛. 혀 위를 알알이 구르는 고기 알갱이. 마늘잎의 풋풋한 향기.

그 아찔하리만치 정교한 맛의 합주는 혀를 찌르는 자극에 불과한 매운맛에 극적인 감동을 부여했다.

벅차오르는 감동과 식욕을 주체하지 못하는 태감에게서 시선을 돌린 소년은 입을 쩍 벌리며 하품을 했다. 태감은 그제야 고개를 들어 올렸다.

“졸린가 보구나.”

“좀 피곤하군요.”

“저런, 내일도 나가야 한다 하지 않았으냐. 이만 자러 가보거라.”

그럼 설거지는 태감님이 하시겠습니까?

소년은 퉁명스러운 핀잔 대신 품위 있는 하품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손에 물 한 방울 묻혀본 적 없는 도련님취급을 하는 소년의 태도에 태감은 쓴웃음을 지었다.

“설거지 정도는 나도 할 줄 안다.”

“실제로 해보신 적은 있으십니까?”

“해 본 적은 없다만, 설거지 정도야-”

“아이고, 됐습니다. 그냥 제가 하지요.”

물가에 내놓은 아이 보듯이 자신을 보는 소년의 시선에 태감은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화제를 돌렸다.

“그래, 내일은 표자승을 만나러 간다 했지?”

“예, 부탁 좀 할게 있어서 갑니다.”

떠벌려 놓은 게 있으니, 책임을 져야지요.

썩 내키지는 않는다는 듯 부루퉁한 소년의 표정을 본 태감은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무슨 부탁이길래?”

“쯧, 취업 청탁 좀 하러 갑니다.”

“청탁? 청탁이라고?”

소년의 말을 한참 동안 곱씹어본 태감은 결국 참지 못하고 폭소를 터뜨렸다. 태감의 웃음은 소년이 점잖은 태도로 주먹을 들어 올릴 때까지 계속되었다.

끅끅거리며 당겨오는 배를 감싸 안은 태감은 매달린 눈물방울을 훔치며 말했다.

“하지만 뜻밖이구나. 취업 청탁이라. 굳이 표자승에게 갈 필요가 있느냐?”

내가 원래 이런 부탁을 잘 들어주는 사람은 아니다만, 네가 원한다면 내가 힘 좀 써보마.

거리낌 없이 비리를 저지를 것을 선언하는 태감을 보며 소년은 황당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공직자가 그래도 됩니까?”

“안 될 건 또 뭐냐.”

그럼 당연히 안 되지 이 양반아.

끓어오르는 양심의 충동을 느낀 소년은 잠시 이 부패한 공직자를 세상에 고발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느꼈다. 소년의 눈동자에 고결한 신념이 깃든 것을 확인한 태감은 재빨리 말을 돌렸다.

“그건 그렇고 역시 마파두부는 연두부가 제격이구나. 혀끝으로 문대면 사르르 녹아내리는 이 촉감, 역시 튀긴 두부 따위는 스쳐 지나가는 유행에 불과해.”

“호오, 그렇다면 아쉽지만 어쩔 수 없군요.”

모처럼 수고를 들여서 튀긴 두부도 준비해 보았지만, 그리 말씀하시니 어쩔 수 없지요. 소년의 입꼬리가 길게 찢어지고 그 아래로 송곳니가 드러나는 순간. 태감은 지체 없이 자신의 신념을 번복했다.

* * *

경사에서 가장 품격있고, 가장 값비싼 다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일 발 디딜 틈 없이 붐비는 다관 막심 앞에서 소년은 한숨을 내쉬었다.

“청탁이라니. 이런 건 평생 연이 없을 줄 알았는데.”

살다 보니 별일이 다 있군. 다관 앞에서 한참을 서성이던 소년은 결국 책임감을 이기지 못하고 다관의 문을 열었다.

황동 종이 딸랑거리는 소리와 함께 직원들의 시선이 그를 향해 모였다.

한차례 경악이 번지고, 곧바로 과도한 열의를 가진 직원들이 호들갑스럽게 소년을 맞이했다.

경애하는 점주님의 스승을 뵌 것에 감격하여 울먹이는 직원들을 다독이며 한동안 실랑이를 한 끝에 소년은 간신히 막심의 특실에 들어설 수 있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스승님.”

공손히 인사를 올리는 표자승에게 소년은 부드러운 미소로 화답했다. 인자한 웃음을 지으며 직원들이 물러날 때까지 기다린 후, 특실의 문을 걸어 잠근 소년은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표자승에게 질문했다.

“혹시 이 특실은 방음이 잘 되나?”

“예, 잘 됩니다. 스승님, 안에서 비명을 질러도 모를 정도지요.”

“호오, 그래? 그럼, 이 문은 얼마나 튼튼하지?”

“도끼로 찍어도 꿈쩍도 안 할 만큼 튼튼합니다.”

허허, 그래? 그럼 너 잘 걸렸다 이 새끼야. 표자승에게 특실의 방음성과 밀폐성을 다짐받은 소년은 야차와 같은 얼굴로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노도와 같은 스승의 맹공에 표자승은 쩔쩔매면서도 놀라운 유연성으로 그 사나운 공격을 회피했다.

“내가 직원 교육 잘시키라고 했지? 어? 올 때마다 지랄이야 아주!”

“스승님, 저희 직원들의 스승님을 향한 존경이 넘쳐 흐르는 것을 어쩌겠습니까. 불편하시더라도 부디 넓은 아량으로 허락해 주시면…….”

“허허, 제자야. 지금 네가 말해야 할 건 변명이 아니라 비명이란다.”

험난한 상행으로 단련된 표자승의 호신술은 노련한 것이었으나 소년의 주먹은 모질고도 집요했다.

결국, 옹골찬 주먹에 늘씬하게 두들겨 맞은 표자승은 비루먹은 개마냥 끙끙대며 바닥에 널브러졌다. 송장 부럽지 않은 그 애처로운 모습에 깊은 만족감을 느낀 소년은 그제야 오늘 막심을 방문한 목적을 꺼내놓았다.

“실은, 너에게 부탁할 것이 하나 있어서 왔다.”

“예, 그러셨군요.”

일단 상대를 흠씬 두들겨 패고 부탁하는 그 놀라운 교섭술에 표자승은 혀를 내둘렀다.

그에게서 스승에 대한 존경심이 충분히 함양되었음을 확인한 소년은 입을 열었다.

“그, 사람을 좀 부탁하고 싶은데. 두 명 정도.”

“말씀하시지요.”

“한 명은 죽을 날 잡아놓은 늙은이고, 한 명은 중년이야.”

인생 팔자 기구하게 꼬인 양반들인데, 그래도 실력 하나는 일품이다. 늙은이는 전에 철왕 당백이라는 야장 밑에서 사사한 인물이고, 중년은 유운 거사라는 추나술 명인의 수제자 출신이라 하니 네가 거두어서 손해 볼 일은 없을 거다.

소년의 말이 끝나자 표자승은 감격스러운 표정으로 넙죽 고개를 숙였다.

“그런 분들을 소개시켜 주신다니, 스승님께선 늘 이 불민한 제자에게 베풀어 주시기만 하는군요.”

“내가 부탁하는 거다. 이놈아.”

“크흑, 이 못난 놈이 부담스러울까 봐 일부러…… 스승님!”

그 퉁방울 같은 눈에 눈물이 맺히려 하자 소년은 질색을 하며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험한 인생을 살며 볼꼴 못 볼꼴 다 봐온 소년도 수염이 부숭부숭한 산적 같은 사내의 눈물만큼은 참을 수가 없었다.

“아무튼, 네가 내 부탁을 들어줬으니 나 또한 너의 부탁 한 가지를 들어줘야겠지. 그래야 공평하지 않겠느냐.”

“스승님. 어찌 그리 섭섭한 말씀을 하십니까. 이 못난 제자는 이미 스승님께 갚을 수 없는 크나큰 은혜를 받지 않았습니까. 이 표자승, 비록 우둔할지언정 은혜를 모르는 배은망덕한 놈은 아닙니다.”

길어지는 설전에 진절머리가 난 소년은 백 마디의 말보다도 진솔하고 효과적인 주먹을 들어 보였다.

핏줄이 불거진 주먹이 턱 쪽을 겨냥하자 표자승은 하는 수 없이 고집을 꺾어야 했다.

“그러면, 저도 부탁 한 가지 드리겠습니다.”

부탁을 예고한 이후, 표자승의 입이 다시 열리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부탁을 드리는 것 자체가 송구하게 느껴진 탓인지, 아니면 입 밖에 내기 어려울 만큼 엄청난 부탁을 하려는 건지. 소년은 끈기있게 그의 부탁을 기다렸다.

잠시 후, 표자승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스승님. 스승님께선 저희의 첫 만남을 기억하십니까?”

그 뜻밖의 질문에 소년은 새삼스럽다는 듯 대답했다.

“기억하고야 말고. 그래, 그때의 넌 가배 자루를 짊어지고 있었지.”

“예, 스승님께선 가배를 찾아 저희 상단에 침입, 아니, 찾아오셨지요.”

“네가 가배를 팔지 않겠다고 고집만 부리지 않았으면 우리의 시작은 퍽 원만한 것이었을 거다.”

“오히려, 제가 고집을 부렸기에 저희가 이런 인연으로 맺어진 것은 아닐까요?”

한차례 너스레를 떤 표자승은 이내 진지한 표정으로 소년의 잔에 가배를 따랐다. 잔을 가득 채운 검은 액체를 굽어보는 표자승의 시선은 물기가 어려있었다.

“저희의 시작이었지요. 가배는. 스승님께 처음으로 받은 가르침도, 가배를 내리는 법이었고요.”

스승님께선 많은 것을 가르쳐 주셨지요. 새로운 문화. 새로운 방식의 장사. 그리고 새로운 시대까지. 하지만 이 어리석은 제자는 스승님께서 보여주신 물질적인 것에만 집착해, 정작 가장 중요한 것에는 소홀히 했습니다.

“스승님. 전 아직까지 단 한 번도, 가배로 스승님께 인정받은 적이 없지요.”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으니까. 넌 장사꾼이 아니냐.”

넌 장사꾼이지, 장인이 아니지 않으냐.

그 타당하고 합리적인 말은 표자승을 납득시키지 못했다. 그는 장사꾼이었지만, 동시에-

“전 장사꾼이지만, 그 이전에 애호가이기도 합니다. 스승님.”

그 누구보다도 가배를 사랑하고, 가배를 즐겨온. 애호가 말입니다.

표자승의 간절한 목소리에 점차 힘이 실렸다.

인정받고 싶다는 욕망.

자신이 아끼고, 즐기는 분야에서 최고가 되고 싶다는 집념이 그의 목소리에 실려있었다.

“스승님. 부디 기회를 주십시오.”

제자가, 단순히 가배를 파는 장사꾼이 아닌. 진정 가배를 아끼고 사랑하는 애호가라는 것을 증명할 기회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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