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관의 요리사 191화
경계심을 드러내는 이삼을 제지하며 소년은 가식적인 웃음을 띄웠다. 교활한 매부리코 아래로 가느다란 호선이 그려지고, 날카롭게 찢어진 눈에는 기만과 조롱의 빛이 감돈다.
달콤한 꿀로 혀를 치장한 다음, 혀 밑으로 칼 한 자루를 숨긴 소년은 반갑게 인사했다.
“이거 반갑습니다. 전에 장 태감님과 함께 뵈었던…….”
“내관감의 금조라 합니다. 오상호 님. 그저 금조라고만 불러주십시오.”
“좋습니다. 금조 님. 그렇다면 저 역시 오운이라고 불러주십시오.”
친근감이 느껴져서 아주 좋군요.
굳이 이름으로 불리기를 고집하는 젊은 환관을 보며 소년은 기묘한 의문을 느꼈다. 하지만 그 의문을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잠시 그를 바라보던 소년은 시선을 하늘로 향했다.
하늘은 어느새 붉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끝자락부터 붉어지기 시작한 하늘을 보며 시간을 가늠한 소년은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벌써 저녁이 다 되었군요. 시간을 길게 내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어차피, 진짜 목적은 제가 아니지 않습니까?
혀끝에서 맴도는 말을 가라앉힌 소년은 눈을 가늘게 뜨고는 잠시 고민하는 척 팔짱을 꼈다. 소년의 허락을 기다리던 금조는 그 난처한 반응에 서둘러 이야기했다.
“그렇다면 가면서 이야기하시는 건 어떠신지요.”
“사정을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제가 먼저 청을 드렸는데, 받아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지요.”
금조는 조금 과하다 싶을 만큼 정중한 태도로 감사를 표했다.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그 감사를 받은 소년은 자신이 대화를 나눌 준비가 되었다는 의미로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그럼 가실까요?”
소년은 청자로서 함양해야 할 미덕을 두루 갖춘 이야기 상대였다. 부드러운 표정, 관용적 태도. 주의 깊은 시선과 때때로 터져 나오는 맞장구. 하지만 금조는 그런 소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쉽사리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지 않았다.
“이번 겨울은 유독 춥고 혹독한 것 같습니다.”
“예. 특히 눈이 소복이 쌓인 날이면 더욱 그러지요. 서까래 위로 눈이 가득 쌓인 걸 보면 숨이 턱턱 막히지 않습니까?”
“후후, 말단 시절에는 정말 힘들었지요.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지붕 위에서 눈을 쓸어야 하는데, 그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정말이지 아찔하지요.”
벌써 세 번째 반복되는 겨울 이야기에 소년은 약간의 짜증과 함께 피로감을 느꼈다.
이 정도쯤 되었으면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야 하지 않겠는가. 만약 이 젊은 환관이 진심으로 사사로운 이야기만을 나누기 위해 소년을 찾아온 것이라면, 그는 얼마든지 어울려줄 용의가 있었다.
하지만 젊은 환관의 차갑게 가라앉은 눈동자는 누가 보아도 가벼운 사담을 나누기 위해 찾아온 이의 것이 아니었다.
인내심의 한계를 느낀 소년의 시선이 점점 노골적으로 변하자 금조는 빙그레 웃으며 걸음을 멈추었다. 어느새 그들은 후궁과 외궁의 경계에 도달해 있었다.
“오운 님. 겨울이 길어지고 있습니다.”
주고받던 이야기의 연장선상에 있는 말이었으나 소년은 그 속에 스며든 뾰족한 가시를 느낄 수 있었다. 눈을 가늘게 뜬 소년은 덤덤한 어조로 대답했다.
“예, 이번 겨울은 쉬이 가지 않을 것 같군요.”
“참 고집스러운 겨울입니다.”
고집스러운 겨울. 그 말에 내포된 뜻을 이해한 소년은 불신의 눈동자로 금조를 올려다보았다.
그를 들여다보는 듯한 소년의 눈동자에도 금조는 웃음을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복심을 보여주겠다는 듯이 소년의 시선을 마주하기까지 했다.
“오운 님. 만약에 말입니다.”
그 고집을 꺾을 수 있다면, 어찌하시겠습니까?
소년은 엄습해 오는 불쾌감에 입술을 깨물었다. 금조는 그 침묵을 조금 더 명확히 이야기해 달라는 요구로 받아들었다. 하지만 그런 중요한 이야기를 나누기엔 장소가 좋지 않았다.
지나치게 개방되어 있는 장소에 불만을 느낀 금조는 안타깝다는 듯 대화를 중단할 것을 권했다.
“죄송하지만, 자세한 이야기는 조금 더 은밀하고 사적인 곳에서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만.”
“예, 중대사를 논하기에 길바닥은 좋은 곳은 아니지요.”
“괜찮으시다면 언제 한번 좋은 곳으로 모시고 싶습니다.”
살다 보니 접대를 다 받아보게 생겼군. 금조의 은근한 권유에 소년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금조 님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기대되는군요.”
“언제든 편하실 때 말씀해 주십시오. 좋은 차가 있는 곳으로 모시겠습니다.”
오늘, 즐거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떠나려 하는 젊은 환관의 등을 낮고 날카로운 목소리가 붙잡았다. 금조는 조금 늦게 고개를 돌렸다.
“뭔가, 더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신지요?”
“마지막으로, 뭔가 전하실 말씀 없습니까?”
사례 태감께 말입니다.
그의 의중을 꿰뚫어 보는 듯한 소년의 말에 처음으로 금조의 얼굴에 갈등의 빛이 서렸다. 잠시 입술을 달싹이던 금조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오운 님과 대화를 나눈 것으로 충분합니다.”
* * *
“라더군요. 염병할 놈입니다.”
금조와 나누었던 대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줄줄 외운 소년은 젊은 환관을 향한 걸쭉한 욕설로 마무리했다.
길고도 지루한 잡담을 곱씹으며 소년과 장단을 맞춰야 했던 태감은 고픈 배를 부여잡고는 책상 위에 널브러졌다.
“금조. 금조라.”
“염병할 놈이지요?”
소년은 태감이 동조할 때까지 멈추지 않겠다는 듯 거듭 욕설을 내뱉었다. 태감은 하는 수 없이 소년의 분이 풀릴 때까지 금조를 씹어주었다.
“그래. 아주 쓰레기 같은 놈이구나.”
“똥독이 올라 뒤져도 시원치 않은 놈입니다.”
“그건 조금 심하지 않으냐?”
“심하긴 뭐가 심합니까? 그런 육시랄 놈들은 자고로 똥물에 튀겨 죽여야-”
소년은 유독 남을 욕할 때 풍부한 어휘력을 발휘하곤 했다. 그 현란하고도 화려한 언어구사력에 혀를 내두른 태감은 소년의 분노가 가라앉을 때쯤 입을 열었다.
“아무튼, 그자가 무엇을 말하려 했는지는 대충 짐작이 가는구나. 만약 그 말이 사실이라면.”
“장 태감님께서 사람을 잘못 보신 거지요.”
자고로 머리 검은 짐승은 거두는 게 아니라더니, 하여간 옛말 틀린 게 하나도 없습니다.
또다시 자신의 어휘력을 과시하려는 소년을 보며 태감은 재빨리 말을 가로챘다.
“아직 확실한 것은 아니니, 속단할 문제가 아니다. 나는 오히려 장 태감이 함정을 판 것은 아닌지 의심되는구나.”
그 말에 멈칫한 소년은 신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깊은 생각을 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듯한 얼굴이었지만 태감은 그가 하는 생각이 빤히 눈에 보였다.
잠시 후, 대략 차 한 잔이 식을 정도의 시간이 지난 후 태감은 입을 열었다.
“욕은 다 했느냐?”
“예, 할 만큼 했습니다.”
“그래. 마음속으로만 해줘서 고맙구나.”
소년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평생 분량의 욕설과 저주를 받았을 금조에게 잠시 애도를 보낸 태감은 그들 앞으로 다가온 뜻밖의, 그리고 달갑지 않은 행운을 의심해 보았다.
“배신, 배신이라. 이용할 수만 있다면 참으로 달콤하고, 감미로운 일이지.”
“물론, 이용할 수 있다는 전제조건 하의 이야기지요. 하지만 그러기에는 저희가 감당해야 할 위험부담이 너무 큽니다.”
그의 도움이 없이도 충분히 이룰 수 있는 일입니다. 굳이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머리 검은 짐승을 품에 안을 필요는 없지요.
소년의 설득에 태감은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그의 도움이 없더라도 장 태감을 실각시키는 것은 문제가 아니다. 물론, 그자가 내부에서 장 태감을 찌른다면 더욱 손쉽게 무너뜨릴 수 있겠지. 하지만.”
“불쾌하지요.”
그래. 불쾌하지, 불쾌하고말고.
태감의 동조를 얻은 소년은 더욱 사나운 어조로 말했다.
“매듭은 묶은 사람이 풀어야 하는 법입니다. 이 일을 처음 계획하신 것도, 실행하신 것도, 태감님이시지요. 그렇다면 응당 완성하는 것 또한 태감님이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야지만 의미가 있지. 특히, 이번 일은 내가 사례 태감으로서 계획한 마지막 모략이니 더욱 그렇다.”
비합리적이고 감정적인 이유를 대며 입꼬리를 끌어 올린 둘은 곧 현실적인 이유 또한 빠짐없이 검토했다.
“앞서 말했던 대로, 그것이 장 태감의 함정일 가능성 또한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장 태감이 계획했다고 하기엔 너무나 뻔하고 어설퍼. 그는 이런 허술한 음모를 꾸밀 사람이 아니다.”
장 태감과 긴 시간 대립해 온 태감은 어떤 의미로는 안양비 이상으로 그를 신뢰했다. 그의 간교함과 치밀함에 치를 떠는 태감을 보며 소년은 피식 웃음 지었다.
“장 태감님이 아니라, 금조 그 친구 개인이 멋대로 저지른 일일 가능성 또한 간과할 수 없지요.”
“차라리 그편이 더 현실성이 있어 보이는구나.”
젊은 혈기와 과잉 충성은 때론 비합리적인 판단을 빚어내는 법이니.
경우의 수를 따져보며 고뇌하던 태감은 이렇다 할 시원한 대답을 내놓지 못한 채 한숨을 내쉬었다.
“성급한 결정은 실패의 근원인 법이지. 좀 더 명확한 근거가 생기기 전까지는 판단은 미뤄두겠다.”
“합리적인 선택이십니다. 우선은, 그 친구에게 접대를 받아본 후에 결정해도 늦지 않을 겁니다.”
“네가 고생을 하겠구나.”
“현장에서 구르는 게 저희 일 아닙니까. 괘념치 마십쇼.”
말을 마친 소년은 이내 진중하게 표정을 다잡았다. 이제 그간 유보해왔던 중대한 문제를 논할 차례였다. 소년의 엄숙한 재촉에 태감은 자세를 다잡았다.
“이제는 선택의 시간이구나.”
“이 문제 만큼은 미룰 수 없지요.”
영원히 풀리지 않을 인류의 숙제.
저녁 식사라는 이름의 달콤한 고민 앞에서 주종은 맹렬하게 토론했다.
“가끔은 생선을 드셔보시지요. 속이 가볍고 편해 잠도 잘 오실 겁니다. 마침 크고 살이 단단한 메기가 들어왔으니 그 유명한 호남의 생선 전골 호접표해(蝴蝶漂海)를 해드리지요.”
싱싱한 생선 살이 나풀나풀 떠오르니 바다 위를 나는 나비와 같구나. 생선 전골 화로를 끌어안고 있는데 황궁 부마 자린들 부럽겠는가.
그 맛이 어찌나 뛰어난지 호남에는 이런 시도 있을 정도입니다.
소년의 설명에 순간 혹한다는 듯 군침을 삼킨 태감은 이내 결연한 의지로 고개를 저었다.
“무슨 소리냐. 자고로 잠이 잘 오려면 고기로 배를 든든히 채워야 하는 법이거늘. 하지만 너의 염려 또한 일리가 있으니, 그 점은 고려하도록 하마.”
소년은 일단 들어는 보겠다는 듯이 삐딱한 자세로 고개를 기울였다. 당장에라도 말 같지도 않은 소리 집어치우라며 들러 엎을 것만 같은 섬뜩한 눈동자 앞에서 태감은 식은땀을 흘렸다.
이대로 얌전히 생선을 먹을 것인가. 아니면, 쟁취할 것인가. 태감이 이를 악물었다.
“그렇다면 두부는 어떠냐.”
“두부라!”
소년의 입에서 뜻밖의 탄성이 흘러나왔다.
“두부 좋지요. 담백하고 부드러우며 기름기도 없으니 위장에 부담이 없고, 고단백 저지방이라 체중 감량에도 효과적이며 포만감이 있으면서도 저탄수화물 식품이라 혈압 억제에도 도움이 되지요. 늦은 시간에 먹기에 제격인 식재료입니다.”
자고로 좋은 수면은 장이 편해야 하지요.
다시 봤다는 듯 감탄을 연발하는 소년을 보며 태감은 조심스럽게 결정을 내렸다.
“그러니, 오늘 저녁은 마파두부로 하자꾸나.”
“아하, 속이 편하자고 두부를 먹는데 거기다 뻘건 기름칠을 하자?”
터지기 직전의 활화산처럼 들끓어 오르는 소년의 얼굴을 본 태감은 필사적으로 변명을 쥐어 짜냈다.
“하지만 자기 전에 매운 걸 먹는 것이 과연 나쁜 선택일까? 내 말을 들어보거라.”
예부터 장수하기로 유명한 사천 지방 사람들은 매운 음식으로 땀을 쭉 빼는 것이 최고의 건강 비결이라 자부하였다.
산초와 고추의 알싸함으로 몸을 후끈 달아오르게 하면 그로 인에 몸 안에 쌓여있었던 노폐물들이 땀에 녹아 배출된다는 것이지.
“그렇다면, 자기 전에 땀을 잔뜩 흘려 노폐물을 배출한다면 더욱 개운하게 단잠에 들 수 있지 않겠느냐?”
그 어처구니없는 궤변에 소년은 황당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설득력이…… 있어!”
자신의 변명이 먹힐지에 대해 스스로도 회의적이었던 태감은 소년이 수긍하자 믿을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진심이냐?”
“오늘만 속아드리는 겁니다. 오늘만.”
두 번은 꿈도 꾸지 마십쇼.
차갑게 못 밖은 소년은 태감에게 새로운 고민거리를 안겨주었다. 그것은 저녁 식사를 고르는 것만큼이나 결정장애를 불러일으키는 문제였다.
“두부는 뭐로 하시겠습니까? 전통적인 연두부? 아니면 요즘 유행하는 튀긴 두부?”
뛰어난 달변가이며 웅변가이기도 한 태감은 태어나 처음으로 입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진귀한 난관에 봉착하게 되었다.
반드시 후회가 남을 선택의 기로 앞에서 태감은 심각한 정신적 공황에 빠졌다.
말문이 막혀 버린 태감을 보며 실소를 흘리던 소년은 그의 고민을 덜어주기 위해 입을 열었다.
“전통을 중시한다면 단연 연두부지요.”
“그렇지. 수많은 사람의 입으로 긴 시간 검증되어 온. 전통은 늘 안전한 선택지이지.”
“혀끝에서 보드랍게 뭉개지는 연두부는 단 한 번도 우리를 실망시킨 적 없지요. 매끄럽게 녹아내리는, 말캉한 식감. 혀를 찌르는 매운맛을 다잡아주는 콩의 은근한 단맛.”
“크으…… 그렇다면.”
하지만 연두부를 선택하자니, 튀긴 두부가 아쉽지요?
소년은 태감을 조롱하듯 입꼬리를 길게 찢어 올렸다.
“무거운 돌로 둘러 물기를 뺀 단단한 두부를 넉넉한 기름에 바싹하게 튀겨내면 향긋하면서도 고소하지요. 거기에 알싸한 마라 양념. 말이 필요 없지 않습니까?”
고소한 두부의 향에 얽혀드는 톡 쏘는 산초와 고추의 향기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렇지. 유행하는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법.”
“하늘 아래 두 개의 태양이 뜰 수는 없지요.”
그리고, 마파두부에 들어갈 두부 또한 오직 하나뿐이지요.
새빨간 혀로 갈등을 자아내며 소년은 차가운 피가 흐르는 뱀처럼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