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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관의 요리사-189화 (189/314)

환관의 요리사 189화

인간은 먹어야만 한다. 설령, 내일 죽을 운명이라 하더라도.

후궁 최고의 권력자. 사례 태감이 뽑아 든 칼은 지독하고도 매서웠다.

긴 시간 공들여 갈아낸 칼날의 공포 아래 후궁의 모두가 숨죽이는 동안, 그 공포의 칼자루를 쥔 사례 태감이 기거하는 연좌궁의 내원에서는 흰 구름 같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바싹 마른 참나무 장작을 태우는 연기였다.

“어디, 좀 달궈졌나?”

내원의 한 구석. 손에 부지깽이를 든 소년은 거대한 돌 화덕 안쪽에서 이글거리는 불꽃을 보며 손을 슬쩍 내밀었다.

넘실거리는 열기는 손끝을 화끈거리게 했고 허공의 습기를 증발시켜 목과 입술을 메마르게 했다.

화덕이 충분히 예열되었음을 확인한 소년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선언했다.

“그럼 이제 요리를 해도 되겠구나.”

소년의 말이 떨어지자 기다리고 있던 장소와 이삼은 사이좋게 부삽과 부지깽이를 나눠 들고 화덕 안쪽의 잿가루를 긁어냈다.

아이들이 화덕을 비우는 동안 소년은 널찍한 면판 위에 반죽을 올리고는 손으로 꾹꾹 눌러가며 반죽을 얇게 폈다.

“가끔은, 양식도 먹어줘야지.”

노인네라고 맨날 국에 밥만 먹으라는 법 있나. 가끔은 입술에 기름칠을 해줘야 사는 맛이 나지.

얇게 편 반죽 위로 지난여름에 병조림해둔 토마토를 듬뿍 올리며 소년은 변명하듯 중얼거렸다.

“그래. 스파게티나, 돈가스. 아니면, 피자 같은 거.”

원래 애들 입에 맛있는 건 노인네 입에도 맛있어. 나잇값 한다고 대놓고 좋아하지 못해서 그렇지. 손주 있는 것들은 손주 사준다고 핑계라도 대지만.

고독했던 회색빛 노년기를 떠올린 소년은 구시렁거리며 피자 도우 위로 갖은 토핑을 올렸다.

사과나무로 훈제한 수제 베이컨, 기름에 한 번 튀겨낸 감자, 다진 양파, 돼지고기와 소고기를 반씩 섞은 미트볼 그리고 치즈.

“신선한 모짜렐라 치즈였다면 더 바랄 게 없었겠지만, 아쉽게도 구할 수가 없으니 어쩔 수 없지.”

결대로 찢어지며 녹으면 쭈욱 늘어나는 쫄깃한 모짜렐라 치즈는 아니었지만, 젊은 백작이 선물하고 간 빨간 밀랍에 쌓인 치즈는 유제품을 향한 갈망을 상당 부분 충족시켜 주었다.

밀랍을 벗겨낸 치즈는 매끄러운 상아색이었으며 질감은 견고했다. 얇게 잘라 입에 넣으면 순한 소금기와 함께 풍부한 버터 향기, 그리고 견과류향이 두드러지지만 군데군데 나긋나긋한 풀향기와 같은 것이 감돈다.

소금기가 과하지 않아서인지 맛은 부드러운 유지방의 달콤함이 지배적이며 발효식품 특유의 날카로운 톡 쏘는 맛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그뤼에르 치즈에 가까운 맛인데. 짠맛이 덜하고 더 달콤하군. 이 정도면 넉넉하게 올려도 괜찮겠어.”

얇게 깎은 치즈를 도우 위에 넉넉하게 올리고 나면 사람의 손이 해야 할 일은 끝이 났다.

남은 일은 이제 달궈진 돌 화덕 안에서 치즈가 녹진하게 녹아내리고 반죽이 바삭하게 부풀어 오르기를 기다리는 것뿐.

화덕 안으로 도우를 밀어 넣은 소년은 갈증이 난다는 듯 연거푸 찬물을 들이켰다.

저릿한 냉기가 위장을 오그라들게 했지만, 소년은 탐탁지 않다는 듯이 혀를 찼다.

차가운 물로는 역시 자극이 부족했다. 목구멍에 낀 기름때를 긁어 내리는 싸한 자극이,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탄산, 맥주. 아니면 콜라라도.

긴 시간 잊고 살았던 전생의 향수에 젖은 소년은 우울한 한숨을 내쉬었다.

불합리하고 가혹한 운명 앞에서도, 목전까지 치밀어 오른 죽음 앞에서도 꺾이지 않았던 소년이지만, 지금만큼은 절망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간신히 남은 자존심으로 떨리는 무릎을 짚은 소년은 멀리서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태감을 발견했다.

“태감님? 어쩐 일이십니까?”

“네가 특식을 준비한다는 소식을 들어서.”

참, 여유로우십니다그려. 소년의 불량한 태도에도 태감은 공경심을 함양하라는 엄중한 경고 대신 살가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다 네 활약 덕분이지. 그리고, 네 덕에 잡아 온 그 친구 덕분이기도 하고.”

“허어, 그 친구는 아직 살아 있습니까?”

“살아는 있다. 살아는.”

젊은 고리대금업자의 얼굴을 떠올린 소년은 다시금 찬물을 들이켰다. 물잔을 손에 쥔 채 망설이던 소년은 결국 마음속에 남은 의혹 한 점을 넘기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역시, 너무 쉽게 잡았습니다.”

“그래. 확실히 그 친구와의 만남은 작위적인 느낌이 있었지.”

고리대금업자에 노예 상인. 그는 지나칠 만큼 눈에 띄는 인물이지. 마치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만들어낸 것처럼 말이다. 황제 폐하께서, 동창에서 그를 알아차릴 수밖에 없도록.

태감의 말을 곱씹던 소년은 불쾌하리만치 불안한 예감을 받고는 몸을 떨었다.

“그 누군가가 혹시, 이조 상서입니까?”

“뭐, 내 추측일 뿐이다. 확실한 건 아니니, 신경 쓰지 말아라.”

“그가 일부러 자신의 약점을 노출 시키고, 그것을 태감님의 입에 떠먹여 주었단 말입니까? 굳이 금학이라는 인물을 준비하면서까지?”

도대체 왜?

의문을 입에 담으면서도 소년은 이조 상서가 그려낸 섬뜩한 청사진을 본능적으로 이해했다.

자신의 약점을 태감에게 쥐여주고, 그 대가로 이조 상서가 손에 넣은 것. 그것은.

“명분이로군요. 장 태감님을 돕지 않을, 돕지 못할 명분.”

“그래. 그렇겠지. 장 태감은 안양비 파벌의 주축이니, 장 태감을 실각시킨다면 안양비로서는 팔다리를 모두 빼앗기는 셈이다.”

“그렇다면, 이조 상서는 안양비 님을 견제하기 위해서 이 일을 꾸며냈다는 겁니까?”

둘은, 부모 자식 관계가 아닙니까. 그 말을 입에 담은 소년은 그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말인지를 깨달았다.

권력자 앞에서 혈육의 정을 논하는 것만큼 무가치한 일이 또 어디 있을까. 태감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안양비와 이조 상서. 둘은 서로 이득을 주고받는 정치적 동반자 관계지.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권력의 균형이 이조 상서 쪽으로 치우쳐졌을 때의 일이다.”

만약 안양비가 황후라는 권력을 손에 쥔다면. 태감은 거기서 말을 멈추었다. 하지만 그 침중한 표정은 이미 그 이후의 말을 모두 말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안양비 님의 원대한 계획에는, 이조 상서 또한 포함되어 있는 모양이군요.”

“혈육의 정에 흔들릴 여인은 아니지 않으냐.”

“예. 그분은 그렇게 녹록한 분이 아니시지요.”

소년은 그 차가운 독기에 몸을 떨었다. 어찌 인두겁을 뒤집어쓴 자들이 그리도 차갑단 말인가.

자신의 부모, 자신의 자식을 향해 그토록 지독한 칼날을 들이밀 수 있다니. 그 냉정한 권력자들의 독심에 소년은 치를 떨었다.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딸을 번제물로 내놓은 거로군요. 이조 상서는.”

“권력은 필연적으로 희생을 야기한다. 높은 자리에 있을수록 더더욱 그렇지.”

권력이란 그런 것이다. 한번 손에 쥐면 결코 놓을 수 없는 것이지. 그것을 영원히 누릴 수 없음을 누구보다도 잘 알면서도.

태감의 목소리는 무거운 회한에 젖어 있었다. 자신 또한 그 벗어날 수 없는 권력의 늪에 잠겨 있기 때문일까. 그늘진 그의 눈동자를 들여다보던 소년은 가만히 입을 열었다.

“아무튼, 저희로서는 나쁜 이야기는 아니군요.”

“우리로서는 호재라 할 수 있지.”

호재라. 소년은 고개를 북쪽으로 틀었다. 안양비가. 그 범과도 같은 여인이 있는 방향으로. 그녀는 이 결과를 어떻게 받아들일까. 사례 태감과 이조 상서가 합의한 그녀의 몰락을.

소년은 상념을 털어내듯 고개를 부르르 털었다. 그러고는 벌떡 일어나 화덕을 들여다보고는 호들갑스럽게 손짓했다.

“피자 다 익었네! 일단 먹고 합시다!”

“그래? 피자라. 어떤 음식일지 궁금하구나.”

화덕에서 금방 나온 피자는 모락모락 김을 피워올리며 경직된 겨울의 공기를 춤추게 했다.

먹음직스러운 갈색빛 테두리와 붉은빛의 토마토소스. 그 위로 슬며시 녹아내린 치즈와 욕심껏 올린 풍성한 토핑.

봄날의 훈풍처럼 화사한 피자 한 접시는 잔혹하고 교활한 권력자의 입가를 한없이 들뜨게 했다.

“이것이 피자인가……. 근사한 향기구나. 질 좋은 밀가루의 구수함이 잘 살아 있어. 거기에 이 자극적인 짭조름함과 새콤함, 흘러내리는 고기의 기름진 향. 참으로 근사해.”

바삭하고 얇은 나폴리식 도우와 넘쳐 흐를 만큼 풍성한 미국식 토핑. 만든 사람은 중화 요리사.

정체성을 상실한 무국적 피자였으나 다행히도 태감은 피자의 출신 성분보다는 피자의 맛에 더 관심을 기울였다.

못 참겠다는 듯 손가락을 움찔거리는 태감을 보며 소년은 느릿한 동작으로 피자를 육 등분 했다.

갸름한 세모꼴로 여섯 등분된 피자. 한 조각으로는 부족하고, 두 조각으로도 부족하며, 여섯 조각 전부를 집어삼켜도 성에 차지 않을 피자 한 조각은 손안에서 한없이 가벼웠다.

갈등과 식욕으로 번민하는 태감을 바라보며 소년은 과연 태감이 몇 판의 피자를 먹어치울지를 가늠해 보았다.

분명히, 한 자릿수로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황급히 밀가루 포대 쪽으로 달려가려던 소년은 문득 생각났다는 듯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 보니, 주윤 그 양반도 만나 봐야 하는데.”

“주윤? 그자는 어떤 일로?”

“그 양반도 저 때문에 마음고생께나 했을 것 아닙니까.”

별일 아니었다고, 마음 쓰지 말라고 말이라도 해 줘야지요. 귀찮음에 찌든 표정으로 한숨을 쉬는 소년을 보며 태감은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그럼 내일 다녀오거라.”

* * *

후궁의 누군가가 뜨거운 이국의 요리로 배를 채우는 동안, 누군가는 쓰디쓴 신음을 삼키며 고통을 삭이고 있었다.

내관감 내에 마련된 집무실에서 장 태감은 초조함을 곱씹으며 신음을 흘렸다.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젊은 환관. 금조는 장 태감의 말을 들으며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피 끓는 젊은이에게 참고 인내하라는 것은 지나친 요구였을까.

기름을 발라 넘긴 머리칼을 바라보며 장 태감은 못 박듯이 말했다.

“대세는 거스를 수도, 거슬러서도 안 되는 것이다. 지금 대세는 사례 태감이시지.”

“그렇다면 견뎌야 하겠군요. 겨울이 지날 때까지.”

“그래. 봄이 오기를 기다려야지.”

하지만, 이 겨울이 쉽게 끝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만약 겨울이 끝나기 전에 힘이 다한다면, 그때는 어찌하지요?

젊은 환관의 말에 장 태감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명백히 언짢음을 드러내는 표정이었으나 젊고 야심만만한 환관은 교만한 혀를 멈추지 않았다.

“안양비 님의 도움 또한 기대할 수 없지 않습니까.”

이조 상서께서 곤궁에 빠지셨다지요. 사례 태감께 발을 묶이셨으니. 안양비 님께서도…….

말을 이으려던 금조는 장 태감의 얼굴을 올려다보고는 급히 입을 다물었다. 불편한 숨을 내쉰 장 태감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안양비 님께서도 이 늙은이를 구제하실 수 없으니. 나의 정치 역량이 도마 위에 올랐구나.”

이 늙은이가 후궁에서 공연히 늙기만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사례 태감께 보여드려야겠어. 사납게 번득이는 장 태감의 눈동자에 금조는 마른침을 삼켰다. 수십 년간 후궁에서 살아남은 늙은 독사의 각오는 섬뜩하면서도 독살스러웠다.

금조는 장 태감이 승부를 준비하고 있음을 확신했다. 그의 정치 인생을 모두 건, 내관감의 총력을 기울인 건곤일척의 한 수를 준비하고 있으리라. 후궁에서 가장 큰돈을 움직이는 내관감을 통째로 쥐어짜 벼려낸 칼을.

언젠가 그가 물려받아야 할 내관감을. 젊은 환관의 눈동자 안쪽으로 차마 가라앉히지 못한 탐욕이 떠올랐다.

“하지만, 꼭 그래야만 할 필요가 있습니까?”

꼭, 사례 태감님과 척을 져야만 합니까? 참으로 당돌하고도 불순한 말이었다.

이미 그 뜻이 무엇인지를 짐작하면서도 장 태감은 모른 척 되물었다.

“허어? 그것이 무슨 말이냐.”

“꼭 사례 태감님과 싸워야만 할 필요가 있습니까?”

“불온한 말이로구나. 네 말은 꼭, 그분과 손을 잡자는 말처럼 들려.”

은근하게 늘어지는 장 태감의 목소리는 젊은 환관을 선택의 기로 앞에 놓이게 했다.

너의 가능성이 어느 정도인지를 시험하겠다는 듯한, 대답을 종용하는 목소리에 금조는 자신 있게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태감께서 굳이 안양비 님의 수하를 자처하실 필요가 있겠습니까? 차라리 사례 태감님과 손을 잡으시지요.”

“그래서, 안양비 님을 물어뜯을 사냥개가 되어라?”

“개는 주인을 고를 수 없지요. 하지만 저희는 개가 아니지 않습니까.”

어차피 주인을 모셔야 한다면, 이득이 되는 주인을 모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젊은 환관은 한 치의 흔들림 없이 당당하게 대답했다.

장 태감은 흥미롭다는 듯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

“그래. 어차피 먹이를 받아먹는 처지에, 이왕 주인을 모시는 거 먹이를 잘 주는 주인을 모시자 이거구나.”

그래. 네 말이 틀린 건 아니지. 환관 주제에 자존심이 어디 있고 충성심이 어디 있겠느냐?

유쾌하다는 듯 껄껄 웃던 장 태감의 얼굴이 갑작스럽게 일그러졌다.

그의 표정을 일그러트린 것은 실망감과 희미한 분노였다.

“진정으로 그리 생각하느냐?”

그렇다면, 내 너를 크게 잘못 보았구나. 그 말은 젊은 환관의 가슴 속에 새카만 오기의 불꽃을 타오르게 했다.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못하는 젊은이를 바라보며 늙어 고개가 무거워진 장 태감은 날카롭게 그를 질책했다.

“고작 한 번의 위기를 넘기지 못하고 손바닥 뒤집듯 신뢰를 저버린다면 누가 나를 믿고 따르겠느냐?. 신뢰를 파는 것은 단기적으로는 이득일 수 있으나 장기적으로는 정치생명을 갉아먹는다.”

“예. 그렇기에 더욱더 신중히 해야 한다고 하셨지요. 그리고 진정 팔아야 할 때라면 망설이지 말라는 말도 함께 하셨고요.”

“네가 보기에는, 지금이 그때란 말이냐?”

신뢰를 팔아넘겨야 할 때라고? 너는 진정으로 그리 생각하느냐? 그리하지 않으면 이 겨울을 버티지 못할 거라고. 진정으로 그리 생각했단 말이냐.

희미하게 떨리는 장 태감의 목소리에도 젊은 환관은 고집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태감님. 지금이 아니면…….”

“되었다. 그만 나가보거라.”

“태감님!”

“그만. 나가보거라.”

반문을 허락지 않는 냉담한 축객령에 금조는 이를 악물고는 허리를 숙였다.

“예. 실례했습니다. 태감님.”

그리 말씀하신다면. 저 또한…….

섬뜩한 결의를 다진 환관은 정중하게 인사를 올리고는 집무실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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