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관의 요리사 188화
이튿날. 태양이 기지개를 켜고 새가 둥지를 박차고 날아오르는 시간. 태감을 기다리며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소년은 멍하니 화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화로에선 벌건 잉걸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괜히 말했나.
지난밤. 자리를 박차고 뛰쳐나간 태감의 뒷모습을 떠올리며 소년은 혀를 찼다.
괜히 들쑤셔서 여러 사람 피곤하게 만들었군. 그냥 다물고 있었어야 했는데. 뭣 하러 입을 열어서.
후회로 물든 소년의 눈동자는 음울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래, 염병할 일이지. 주윤 그 양반이 말을 안 한 것도 이해가 가.”
분기를 참지 못할 것을 염려하여 그간 말하지 못했다는 주윤의 말을 떠올리며 소년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의 염려대로, 소년은 그 잠깐의 화를 참지 못해 저지른 실수를 후회를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병신 새끼. 차라리 뒤졌어야지. 그새를 참지 못하고 떠벌려?”
태감에게 가장 중요한 순간에. 이조 상서를 견제하고 장태감을 실각시켜야 한다는 막중한 책임을 지고 있는 그를 돕지는 못할망정. 그 잠깐을 기다리지 못하고 주둥이를 나불대다니.
격렬한 자아비판에 열중하고 있던 소년은 주방 문을 두드리는 나지막한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뉘십니까?”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하지만 소년은 문밖에 누가 서 있을지 예상할 수 있었다.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난 소년은 바깥에 선 사람이 부딪히는 불상사가 벌어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서늘한 새벽의 한기에 움츠러든 태감이 문 앞에 서 있었다.
“오셨습니까?”
“그래…….”
실망감과 후회, 그리고 죄책감에 눌려 축 늘어진 어깨를 본 소년은 그를 화롯가로 이끌었다.
화로의 따스한 열기에 굽은 손을 녹이는 태감의 모습은 처량하기 그지없었다.
“아침 드셔야지요.”
소년은 그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산스럽게 아궁이에 장작을 채워 넣고 큰 솥을 가져다 아궁이에 올린 소년은 그제야 태감에게 의중을 물었다.
“호랄탕(糊辣湯)을 만들 생각인데, 드셔보신 적 있으십니까?”
“아직 먹어본 적 없구나. 서안 쪽에서 많이 먹는다고 들어는 봤는데…….”
“그러십니까? 한번 드셔보시면 분명 마음에 드실 겁니다.”
호랄탕은 서안 사람들이 가장 사랑하는 아침 식사로 양고기와 채소를 듬뿍 넣고 진하게 끓여낸 탕 요리였다.
“채소는 어떤 걸 넣어도 좋지만, 최고로 치는 것은 역시 배추 겉잎과 부드러운 껍질콩. 그리고 감자입니다. 특히 다른 건 안 들어가도 감자는 꼭 들어가야 제맛이 나지요.”
감자에서 우러나온 전분이 국물을 걸쭉하게 해주거든요.
육수를 불에 올린 소년은 양고기와 감자, 껍질콩, 배춧잎, 당근을 큼직하게 썰어 육수에 밀어 넣고는 센 불에 육수가 확 끓어오르게 했다.
육수가 부르르 끓어오르자 양고기에서 우러나온 핏물이 거품에 엉겨 붙어 육수 위로 떠올랐다.
“전 거품을 깨끗하게 걷는 편이지만, 어떤 사람은 거품을 완전히 걷지 않고 끓이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야 맛이 더 진하다나요.”
거품을 꼼꼼하게 걷어낸 소년은 뽀얀 육수가 감자의 전분에 걸쭉해지기 시작하자 뚜껑을 덮고는 불을 은은하게 줄였다.
요리하는 동안 소년은 그 어떤 날카로운 질문도 태감에게 던지지 않았다. 시시콜콜한 잡지식을 주절거리며 시종일관 대화를 주도하던 소년은 국자를 내려놓는 순간 입을 멈추었다.
그 짧은 침묵이 이어지는 동안 태감은 가슴 저린 불안감 속에서 소년의 입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뭔가 성과가 있었느냐는 질문.
혹은 빈손으로 돌아온 자신에 대한 책망.
태감은 다가올 쓰디쓴 목소리를 기다리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창백하게 굳은 태감의 얼굴을 들여다본 소년은 그만 참지 못하고 피식 실소를 내뱉었다.
“일이 잘 안 풀리신 것 같습니다. 얼굴이 우중충하신 걸 보니.”
태감의 대답은 한참 후에 돌아왔다. 잠겨 있는 목소리로 떠듬거리며 태감이 말한 것은 사죄였다.
“미안하다.”
“문일, 그 양반 때문에 그러신 거면, 사과하실 필요 없습니다. 그 신출귀몰한 양반을 뭔 수로 잡겠습니까.”
“그것 말고도, 또…….”
“거, 너무 신경 쓰지 마십쇼. 사람 하는 일이 다 잘될 수는 없는 거 아닙니까.”
서투른 위로였다. 몇 마디 말로 자신이 위로에 재능이 없음을 실감한 소년은 한숨을 내쉬며 아궁이 앞으로 돌아갔다.
고기가 부드러워지고 국물이 걸쭉해진 것을 확인한 소년은 마지막으로 소금과 후추로 간을 하고 새빨간 고추기름을 넉넉하게 띄워 탕을 완성했다.
“원래 호랄탕은 밀가루 전병이랑 같이 먹어야 하는데, 오늘은 시간이 없어서 준비를 못 했습니다.”
면목 없다는 듯 호랄탕 한 그릇과 하얀 쌀밥을 상에 올린 소년은 벌건 고추기름이 뜬 국물을 휘휘 저은 다음 후루룩 소리가 나게 마셨다.
“크으, 좋다. 속이 아주 뻥 뚫리네!”
역시 아침에는 뜨끈한 국물에다가 밥 한 사발 말아먹는 게 최고지. 들으라는 듯이 중얼거리는 소년의 말에 태감은 자신도 모르게 숟가락을 들어 올렸다.
고추기름이 뜬 얼큰하고 뜨끈한 국물이 목구멍을 뜨겁게 달구자 긴장감에 굳어 있었던 위장이 깨어났다. 차가웠던 위장으로 흘러든 온기는 점차 핏줄을 타고 온몸으로 스며들었다.
백 마디의 말보다도 따뜻하고 진한 소년의 위로에 눈물이 핑 돈 태감은 급히 소매를 들어 눈가로 가져갔다.
“맛있구나. 정말로, 정말로 맛있어.”
“뭘 또 새삼스럽게. 언제는 맛없었던 적도 있었습니까?”
“그래. 네 요리는 늘 맛있었지. 늘. 내게 맛있는 걸 해주었어. 날 위해서, 넌 늘 수고를 마다치 않았지.”
그런데 난…….
태감의 목소리에 물기가 어리자 소년은 짜증스럽다는 듯이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아 거, 밥상머리에서 우울한 말 하지 맙시다. 밥맛 떨어지게.”
“미안하다.”
“사과도 하지 말고. 어여 밥이나 드쇼.”
참나, 별걸 가지고 다 지랄이야. 사람이 살다 보면 실패도 할 수 있는 거고, 다 그러는 거지.
소년의 걸쭉한 욕설에 태감의 입가에 슬그머니 미소가 번졌다. 국물을 한술 떠 마신 태감은 소년처럼 밥을 가득 말았다.
“좀 빡빡해 보이는데, 국물 좀 더 드릴까요?”
“그럼 고맙겠구나. 고추기름도 더 주겠니?”
“아침부터 너무 맵게 드시지 마쇼. 속 버립니다.”
태감에게 핀잔을 주면서도 소년은 자신의 탕에도 고추기름을 추가로 끼얹었다. 벌게지다 못해 시뻘건 국물을 만족스럽게 본 태감과 소년은 그릇을 들어 올렸다.
후루룩.
목구멍을 타고 맵고 기름진 국물이 흘러내려 갔다. 지난밤의 추위와 피로를 녹여내는 뜨거운 국물에 둘은 탄성을 내질렀다.
“이제야 속이 좀 풀리네.”
“역시 아침은 매운 걸 먹어야 위장이 확 깬다니까.”
걸쭉한 고기 육수에 말은 쌀밥. 더할 나위 없이 든든한 아침 식사로 배를 채운 태감은 식곤증이 몰려오는지 의자에 앉은 채로 꾸뻑꾸뻑 졸기 시작했다.
지난밤부터 아침까지, 어지간히도 피곤했으리라. 소년은 조심스럽게 그의 어깨를 흔들었다.
“그만 가서 주무십쇼.”
“그래도 아직 할 이야기가…….”
“한숨 주무시고 해도 안 늦습니다.”
어디 안 도망가고 여기 있을 테니, 걱정하지 말고 들어가 주무십시오.
억지로 태감의 등을 떠밀어 보낸 소년은 자신 또한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하아, 그냥 다 때려치우고 한숨 자고 싶구만.”
하지만 소년에게는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다. 어질러진 탁자를 힐끗 본 소년은 창고 한편에서 술 한 병을 꺼내왔다.
“위정 나으리. 저희 이야기 좀 합시다.”
마침 좋은 술 한 병도 있는데. 소년의 말이 텅 빈 주방 안에 울렸다. 그리고 잠시 후, 그늘진 구석에서 위정이 모습을 드러냈다.
“알고 있었느냐?”
“그냥, 오늘은 왠지 계실 것 같았습니다.”
술 한잔 어떠십니까? 좋은 안줏거리도 있는데.
소년이 어질러진 탁자 위로 술병과 사슴고기 육포를 올려놓자 위정의 강직한 얼굴에 음흉한 웃음이 걸렸다.
“이런, 근무시간에 낮술이라니.”
“원래 술은 근무시간에 마셔야 제맛이지요.”
“뭘 좀 아는구나.”
소년이 술병의 마개를 뽑자 근사한 향기가 물씬 피어올랐다. 시린 새벽의 냉기를 누그러뜨리는 달콤한 주향에 위정의 코가 벌름거렸다.
“달착지근한 것이 과일주인 것 같은데.”
“복분자로 담근 복분자주입니다.”
도저히 거절할 수가 없는 제안이었다. 타락의 끝자락에 한 발자국 걸친 듯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은 위정은 술잔 중 가장 큰 것을 고르며 말했다.
“그래. 어떤 이야기가 듣고 싶으냐.”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문일. 그 양반에 대해서 좀 들어야겠습니다.
소년의 말을 들은 위정의 얼굴에 순간 흐릿한 거부감과 두려움이 떠올랐다.
“그렇다면 조금, 긴 이야기게 되겠구나.”
소년은 위정의 잔에 술을 가득 따랐다.
* * *
석 잔. 석 잔의 술을 마신 끝에 위정은 간신히 입을 뗐다.
“문일. 그분을 처음 본 것은 내가 막 코 밑이 거뭇거뭇하던 시절. 금린대의 훈련병으로 있을 때였다.”
“금린대에 계셨습니까? 금린대라면…….”
“그래. 선황 폐하의 친위대였지.”
지금은 해체된 지 오래지만 말이다. 위정은 입이 쓰다는 듯 연거푸 술을 들이켰다.
선황의 친위대였던 그 빛나는 시절이 그리운 걸까. 아니면. 소년은 위정의 얼굴에 스며든 회한을 보았다.
그것은 책임에서 도망친 이의 것이었다. 도망치고, 살아남은 이의. 평생을 이고 가야만 하는 후회를 떠안은 이의 것이었다.
소년은 말없이 그의 잔에 계속 술을 따라주었다. 넉 잔, 닷 잔. 술을 마시던 위정은 억눌린 듯한 숨을 내쉬었다.
“당시의 난 어렸다. 남보다 체격이 조금 좋았고, 징병관의 눈에 들어 금린대에 들어갈 자격을 얻을 수 있었다. 친위대. 그 빛나는 명성에 끌린 난 그 길이 영광의 길일 것이라 믿었다.”
그의 말에선 짙은 피비린내가 느껴졌다. 외적이 아닌, 같은 제국민이었던 상대에게 칼을 겨누어야 했던 시대. 그 참혹한 시대는 젊은 병사에게는 무거운 짐이었을 것이다.
소년이 고개를 끄덕이자 위정은 말을 이었다.
“금린대는 가장 혹독하고 가혹한 전장이라면 어디든 향했다. 선황께선, 당시의 황제께선 늘 가장 험난한 전장에서 최전선에 서셨다. 금린대는 그분의 창이었으며, 방패였지. 난 그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그때의 난 몰랐어. 나의 칼에 맞아 쓰러진 것이 같은 제국민 이라고는. 말발굽 아래에 짓밟히고 창에 꿰인 적들이 제국민일 거라고는. 아니, 몰랐던 게 아니지. 인정하지 않았던 거지. 나는. 그것을 인정한다면…….
위정은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그의 흔들리는 눈동자를 본 소년은 자신의 술잔을 기울였다. 달콤한 술이 유독 쓰게 느껴졌다.
“사설이 길었구나. 그래, 문일. 그분에 관해 이야기하던 중이었지. 그분은 선황 폐하의 심복이셨다. 황궁 제일의 고수였으며, 뛰어난 암살자였고, 고문관이었지.”
그는 대단한 고문관이었다. 소름 끼칠 만큼 뛰어났지. 기골이 장대하고 기가 센 장수도 그가 손을 쓰면 어린아이처럼 울부짖었어. 그가 심문할 때면 우린 그가 있는 막사 곁으로 다가가지도 못했다.
“선황 폐하는 칼과 공포로 백성들을 다스렸다. 덕으로 다스릴 수 있는 시대가 아니었지. 문일. 그분은 선황 폐하의 공포정치를 상징하던 인물이다.”
그분에 관한 전설과도 같은 일화는 수도 없이 많으나, 굳이 들을 필요는 없을 거다. 소름 끼치는 것들뿐이니.
말을 마친 위정은 잔 바닥을 들여다보고는 손을 들어 잔을 덮었다. 새빨간 술의 얼룩이 꼭 핏자국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위험한 사람이군요. 한마디로.”
“한마디로 축약한다면. 그래. 위험한 사람이지. 지독한 사람이고.”
선황 폐하를 향한 그분의 충성심은 비정상적일 정도였지. 마치 귀신이 들린 것 같았어. 그 맹목적인 충성은 광기에 가까웠다.
가라앉은 눈으로 옛 시대를 떠올리는 그를 향해 소년은 달갑지 않은 추억을 이야기했다.
“기억하십니까?”
전에, 나으리께서 제 목을 조르셨던 일 말입니다.
마치 즐거웠던 추억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유쾌하게 이야기하는 소년을 보며 위정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그랬었지.”
“문일, 그 양반 때문이었지요.”
위정은 담담한 태도로 소년의 이야기를 들었다. 지난날의 원망을 이야기하려는 거라면 얼마든지 들어주겠다는 듯이. 하지만 소년은 해묵은 원한을 토로하기 위해 입을 연 것이 아니었다.
소년은, 그에게 그날의 각오를 되새길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만약 그렇다면, 미리 대비해 두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냐.”
“확실히 하자는 거지요.”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자는 겁니다. 원인이 없으면 결과도 없지 않습니까?
한없이 가볍게 자신의 죽음을 이야기하는 소년의 태도에 위정은 신음을 삼켰다. 입은 웃고 있었지만, 소년의 눈은 지독하리만치 차가웠다. 흔들림 없는 그 눈동자는 이미 각오를 마친 이의 것이었다.
“언젠가, 이런 날이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태감님을 위해서 죽어야만 하는 날이, 언젠가는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요.
소년은 잠시 시선을 하늘로 돌렸다. 좁은 창틀 안으로 하늘은 새파랬고,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다행입니다. 각오를 마친 후라서.”
마침, 일도 거의 마무리가 되었군요. 이젠 제가 없어도 괜찮을 겁니다.
홀가분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린 소년은 일그러진 위정의 얼굴을 보며 손을 내저었다.
“뭐, 지금 당장 죽여달라는 건 아닙니다. 아직 못다 한 일이 많은데, 벌써 죽을 수는 없지요.”
모아둔 재산을 다 쓰지도 못하고 죽으면 얼마나 억울하겠습니까.
소년은 한참 동안 혼자서 낄낄거렸다. 그리고는 위정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만약에 말입니다. 만약에. 정말 혹시라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온다면.”
“너를, 죽여달란 말이냐.”
“부탁할 다른 사람이 없더군요. 그렇다고 제 손으로 직접 끊기는 무서워서 말입니다.”
나으리. 만약 피치 못할 상황이 닥쳐온다면, 망설이지 마십시오.
위정에게 차가운 약속을 강요한 소년은 환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