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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관의 요리사-185화 (185/314)

환관의 요리사 185화

땀과 분뇨와 희열이 번질거리는 환호성 속에서 투사 한 명이 모래판에 고개를 처박았다.

핏물과 이빨과 고통을 게워내는 투사의 입에선 허파를 쥐어짜는 듯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목구멍 안쪽에서 기포가 부글거리는 듯한 소리가 울린다. 피와 가래가 끓어오르는 소리.

그런 투사의 위로 그림자가 드리운다. 복면을 쓴 거한. 방금 전 투사에게 내장을 끊어내는 듯한 통증을 선물한 이가 허리를 숙인다.

마치 단말마를 듣는 듯한 동작에 관중들의 눈동자 속에 저열한 기대감이 타올랐다.

“죽여!”

“그래! 편하게 해주라고!”

“목을 부러트려! 피를 보게 해줘!”

광기에 전염된 관중들의 간절한 부르짖음에도 불구하고 복면을 쓴 거한은 심판을 향해 손짓했다.

탐탁지 않은 기색의 심판은 쓰러진 투사를 대충 흘겨보고는 거한의 승리를 선언한다.

겁쟁이, 멍청한 놈. 개자식.

영광된 승자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야유가 쏟아졌음에도 거한은 여유로운 동작으로 다음 싸움을 준비했다.

한 명의 승자가 승리를 자축하는 가운데, 투기장의 한 편에서는 또 다른 복면인이 승부를 겨루고 있었다.

육중한 곰 같은 체격의 복면 거한과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왜소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통 사람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복면인을 상대로 투사는 거의 자살행위에 가까운 무모한 돌진을 감행했다.

“으, 으아아아아아아!”

비명에 가까운 절박한 기합성과 함께 투사가 달려든다. 느슨해 보이는 자세로 선 복면인의 지척에 도달한 순간 투사는 승리를 확신했다. 이대로 넘어뜨리기만 한다면.

승패의 갈림길이라는 그 찰나의 순간, 확정된 승리의 안도감에 취한 투사의 턱을 향해 육중한 철퇴가 날아들었다.

마치 전투함의 충각처럼 솟아오른 무릎은 투사의 아래턱을 으스러뜨렸다.

탐욕스러운 모래 위로 시뻘건 얼룩이 흩뿌려진다. 남은 생을 유동식만으로 연명해야 할 투사를 향한 관객들의 악의적인 웃음소리를 뒤로한 채 복면인은 새로운 상대를 찾아 나섰다.

“쯧쯧.”

흘러내리는 유혈과 비례하여 열광하는 잔혹한 관중들을 내려다보며 누군가가 혀를 찼다.

밑바닥의 비릿한 악취가 닿지 않는 곳. 높은 곳에 마련된 관람석에서 노인은 못마땅하다는 듯 불편한 심기를 숨기지 않았다.

딱. 딱.

신경질적으로 지팡이가 바닥을 두드릴 때마다 옆자리에선 금학이 움츠러든 어깨를 떨었다. 심장을 에는 듯한 소리. 그 낮고 단조로운 울림은 그의 불안감을 고조시켰다.

“이보게. 젊은 친구.”

“예. 예…… 선배님.”

가혹한 긴장감에 얼어붙은 금학을 향해 노인은 느릿하게 시선을 돌렸다. 천천히 자신을 흝어 보며 올라오는 시선을 느끼며 금학은 마른 침을 삼켰다.

대접이 미흡했을까? 아니면 관중들이 너무 소란스러웠나? 아니면. 혹시 실망스러우셨던 걸까.

최악으로 수렴해가는 망상을 밀어 넣으며 금학은 가까스로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를 바라보는 노인의 눈동자는 건조했다.

“내가 너무 과한 기대를 했나 보군.”

금학이 상상했던 최악의 반응이었다. 한순간의 실수가 기회를 앗아간 것은 아닌지, 금학은 노인의 의중을 헤아리려 하며 조심스럽게 고개를 숙였다.

초조하게 그의 말을 기다리는 금학의 정수리를 내려다보며 노인은 입술을 비틀어 열었다.

“나이가 들면 말이지. 이런 자극을 느낄 여흥의 기회가 참 소중하고 간절해. 해가 지날수록 심장은 둔해지고 감성은 무뎌지거든.”

그래서 자네에게 기대를 많이 했네. 이 늙은이에게 오랜만에 짜릿한 승부의 긴장감을 느끼게 해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그런 전율은 소중한 것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있어야만 더욱 빛나지 않는가. 그런데…….

노인은 씁쓸한 얼굴로 턱을 괴었다. 침묵함으로써 발언권을 넘겨준 노인의 배려에 젊은 고리대금업자는 필사적으로 그를 만족시킬 만한 대답을 궁리했다. 하지만 달변가는 아니었으며, 설령 달변가였다 한들 노인이 원하는 것이 뛰어난 웅변이 아닌 이상 그를 만족시킬 수는 없었기에 금학은 솔직한 태도로 그에게 애원했다.

“후반부는 다를 겁니다. 전반부의 경기는 그저 어중이떠중이를 거르기 위한 예선전에 불과했습니다. 후반부에 출전할 투사들은 틀림없이 선배님을 만족시켜 드릴 겁니다.”

“흐음, 자네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한 번 더 믿어보겠네.”

부디, 내 기대가 실망으로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군. 상투적인 경고를 남기며 노인은 지팡이를 짚고 일어섰다.

“잠깐 내 선수들을 만나야겠네. 대기실은 어느 쪽이지?”

“아, 선배님의 선수분들은 개인실로 모셨습니다.”

직접 안내하려는 금학을 만류한 채 노인은 적당한 직원 한 명에게 안내를 부탁했다.

그가 참담한 기분에 젖은 채 괴로워할 시간을 주기 위한 노인의 배려였다. 정중한 안내에 대한 감사로 직원에게 은전 몇 푼을 안겨준 노인은 대기실의 문을 열자마자 살가운 인사를 전했다.

“아이고, 고생들 하셨습니다.”

“고생이랄 것도 없었소. 다들 뼈마디가 부실하더군.”

“재미를 보기도 전에 픽픽 쓰러지니 원.”

정체를 숨기기 위해 복면을 쓰고 있던 배금성과 악진평은 노인이 들어서자마자 복면을 벗어 던지며 푸념을 했다.

두꺼운 복면을 쓰고서도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은 둘의 모습에 노인으로 분장한 소년은 낄낄거리며 얼굴에 달라붙어 있는 피부 거죽을 벗겨냈다. 주름진 인피면구 아래로 소년의 창백한 뺨이 드러났다.

“그래도 후반부부터는 제법 기대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그 친구 말로는, 진짜 실력자는 후반부터 등장한다는군요.”

“그 친구라.”

이 불법 투기장의 주인이며, 고리대금업자이며, 노예 상인이기도 한 그 유능한 사람을 말하는 것이오?

침중한 목소리로 악진평이 묻자 소년은 긍정도, 부정도 될 수 있는 모호한 웃음으로 대답했다.

“예, 뭐. 그렇지요.”

“사람이 사람을 팔아먹는 것이 보통 독심으로 할 일이 아니지. 참 지독한 작자요.”

“지독한 놈이지요. 그러니 이번 기회에 뿌리를 뽑아놔야지요.”

그래야 경고가 되지 않겠습니까. 소년의 스산한 말에 악진평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우리가 더 도울 일은 없겠소?”

“돈에 눈이 먼 얼간이들을 늘씬하게 주물러 주시는 거로 충분합니다. 아, 개중에는 빚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끌려 나온 친구들도 있으니, 그런 친구들은 사정 좀 봐주십시오.”

“물론, 그래 보이는 이들은 적당히 사정을 두고 있으니, 걱정하지 마시오.”

그럼요, 상호 님 말씀대로 얼굴이 우중충한 친구들은 살짝 어루만져만 주고, 의욕 만만한 친구들은 뼈마디를 분질러 주겠습니다.

배금성의 익살스러운 농담에 소년은 꺽꺽거리며 숨을 몰아쉬었다. 한참을 웃은 후 눈꼬리에 눈물을 매단 소년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입을 열었다.

“그럼 슬슬 점심을 드셔야겠군요.”

“마침 가벼운 운동으로 딱 출출하던 참이었소.”

“너무 과하게 먹으면 몸이 둔해지니 점심은 가벼운 음식으로 준비했습니다.”

소년의 말이 끝나자마자 대기하고 있던 시종으로 분장한 동창의 요원들이 능수능란한 솜씨로 준비해 두었던 요리를 데워 가져왔다.

전투에 나서기 전 가볍게 요기할 만한 점심치고는 지나치게 화려하게 차려진 식탁에 두 무관은 입을 쩍 벌렸다.

“이것 참, 상다리가 부러지겠습니다. 상호 님.”

“그래서 일부러 식탁도 튼튼한 거로 가져왔습니다. 어서 드시지요.”

아, 가운데에 있는 탕은 가장 마지막에 드십시오. 소년의 엄중한 경고에 악진평은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으며 소년을 바라보았다.

“그 탕인가 보오?”

“예. 전에 드셨던 그 탕입니다.”

“그 탕이 무슨 탕인데 그러십니까?”

저도 좀 끼워주십시오. 투덜거리는 배금성을 보며 별것 아니라는 듯 손사래를 친 악진평은 딴청을 피우며 젓가락을 들었다.

데친 청경채를 곁들인 돼지고기 조림에 새우 완자 튀김. 짭조름한 소고기 장조림과 통통한 농어찜. 어느 것을 먼저 먹을지를 고민하며 방황하던 악진평은 식탁의 한구석에서 기묘한 요리를 발견했다.

참으로 기묘한 요리였다.

뱀 같기도, 생선 같기도 한 기묘한 고기 토막을 고추와 함께 볶아놓은 듯한 요리였는데 향은 좋으나 어딘가 꺼림칙한 것이 선뜻 젓가락이 가질 않았다.

가만히 접시를 들여다보던 악진평은 고개를 돌려 소년에게 물었다.

“이건 본 적이 없는 음식인데, 뱀은 아닌 것 같고. 혹시 민물장어요?”

“비슷한 거긴 합니다만. 황선자자보(黄鳝啫啫煲)라고, 드렁허리를 볶은 요리입니다. 복건성에서 즐겨 먹지요.”

드렁허리라?

그 낯선 이름에 호기심 어린 무관들의 시선이 접시 위로 모였다.

드렁허리라면 그것 아니오? 그, 논두렁을 허물어 버리는. 장어 비슷하게 생긴 민물고기.

악진평의 말에 소년은 아쉽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으음, 정확히는 장어류가 아니라 등목어류입니다만. 그건 중요하지 않지요. 중요한 것은 효능 아니겠습니까.”

경사 인근에서는 징그럽다 하여 잘 먹지 않지만, 남방에서 드렁허리는 고급 식재료로 통합니다. 원기를 보충해 주고 피를 샘솟게 해 옛부터 산모들의 보양으로는 최고로 치지요. 특히…….

“환관 나부랭이가 말하는 것도 우습지만, 남자에게는 이만한 것이 또 없다 합니다. 커흠, 정말 좋은데, 이것 참 뭐라 설명할 방법이 없군요.”

크흐흠.

소년의 노골적인 시선이 아래쪽을 향하자 우애 깊은 친구들의 사이로 전의가 감돌았다.

“진평이. 자네는 최근에 득남하지 않았나. 이번엔 양보 좀 하게.”

“허허, 양보할 것이 따로 있지.”

무인으로서 세운 전공은 양보할 수 있어도, 남자로서 이건 양보 못 하겠네.

피할 수 없는 싸움을 마주한 사내들은 험악한 단어들로 서로의 우정을 재확인했다. 고양되다 못해 과열되기 시작한 분위기에 보다 못한 소년은 나지막하게 뇌까렸다.

“오늘 싸움이 끝나면, 연회엔 더 많은 드렁허리를 약속드리겠습니다.”

소년이 약속하고 나서야 무관들은 눈에 힘을 풀고 정겨운 담소를 나누며 식사를 시작했다.

* * *

사형권(蛇形拳)의 달인. 투기장의 왕자. 진문철이 모래판 위로 쓰러지는 순간 금학은 가슴 속에서 무언가가 깨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코앞까지 다가왔던 달콤한 미래에 대한 기대감. 희망. 꿈 따위의 것들이 깨진 파편은 가슴에 옅은 상처를 남겼다.

“내기는 내가 이겼군.”

“네. 선배님.”

노인은 지극히 사무적인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마치 용건은 끝났다는 듯이, 실망감조차 내비치지 않는 건조한 모습에 금학은 암담함을 느꼈다.

정녕 기회가 자신을 떠났음을 실감한 젊은이의 얼굴에는 멍울진 후회만이 맴돌았다. 그것을 가만히 들여다보던 노인은 가늘게 숨을 내쉬었다.

“어찌하겠는가.”

만약 원한다면, 한 번 더 기회를 줄 수도 있네만. 어찌하겠냐는 짧은 물음에는 그런 뜻이 내포되어 있었다. 일말의 자비심이었을까, 아니면 단순한 변덕이었을까.

하지만 분명한 것은, 노인이 금학에게 다시 한번 기회를 주었다는 사실이었다.

예상치 못한 행운을 앞에 둔 금학은 한참 동안 망설였다. 노인의 시선이 의문에서 희미한 분노로 변할 때까지. 식은땀을 흘리며 망설이던 젊은이는 결국 고개를 저었다.

“오늘은, 좋은 교훈을 얻었습니다.”

주윤의 채권을 넘겨드리겠습니다. 순순히 결과에 승복하는 금학의 모습에 노인이 흥미롭다는 듯 턱을 까딱였다.

가까운 의자를 가리키는 턱짓에 금학은 조심스럽게 의자를 끌어와 앉았다.

“그래. 어떤 교훈을 얻었는가?”

“첫 번째는, 분수에 어울리는 것만을 탐해야 한다는 점. 그리고 두 번째는.”

승산이 없다면 미련 없이 물러나야 한다는 점입니다. 쓰디쓴 반성이 깃들어있는 금학의 말에 노인이 처음으로 웃음을 터뜨렸다.

천장이 울릴 만큼 쩌렁쩌렁한 가가대소(呵呵大笑)였다.

“그렇지. 주제를 모르고 분수에 맞지 않는 것을 탐하다간 화를 당하기에 십상이고, 가능성이 없는 일에 매달린다면 가산을 탕진해 고꾸라지지.”

사업을 하는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그거야. 자기 주제를 아는 것. 그리고 미련 없이 손을 터는 것. 이 두 가지만 지킬 줄 알면 사업을 말아먹을 일은 없지.

노인은 유쾌하다는 듯 낄낄거리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의 목소리는 까마귀의 목을 비트는 것처럼 날카롭고도 끔찍했다.

“자넨 참 요즘 보기 드문 젊은이야. 젊은이라면 으레 혈기가 넘쳐 객기를 부리기 마련인데, 자네는 오히려 이런 기회의 순간에 차분해지는군. 이는 자기 자신을 객관적으로 볼 줄 안다는 뜻이지.”

“젊은 혈기에 저지른 실수라는 말로 용서받을 수 없는 곳에서 살다 보니, 이렇게 되더군요.”

“그렇지. 우리가 사는 세계는 실수에 너그러운 곳이 아니지.”

자네 같은 이는 오래 살아남지. 난 자네가 마음에 드네. 아낌없는 칭찬으로 금학의 기분을 들뜨게 만든 노인은 그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갑작스러운 노인의 행동에 금학은 소스라치게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선배님!”

“자네에게 사과하고 싶네.”

자네를 시험해 보겠다는 명목으로 장사를 방해하고 무례한 언동으로 자네를 도발한 점. 부디 용서해 주길 바라네.

당혹스러움에 뇌가 멈춰버린 금학은 노인의 말을 들으면서도 그 의미를 이해하질 못하고 있었다.

제삼자의 시선으로 노인이 사과하는 모습을 구경하던 그가 노인의 말을 이해한 것은 상당한 시간이 지난 후의 일이었다.

“아닙니다. 선배님. 그것이. 그.”

“일단 진정하게. 차라도 한 잔 마시면서.”

뇌와 혀가 서로 다른 것을 말하려 해 버벅거리는 금학에게 노인은 따스한 차를 건네었다.

손바닥을 타고 스며드는 온기에 금학이 평정을 회복하자 노인은 빙그레 미소 지었다.

“좀 진정이 되나?”

“예, 선배님. 진정 됐습니다.”

“그럼 이제 내 말을 들을 수 있겠군?”

금학은 멍청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미심쩍다는 듯 그를 보던 노인은 이내 코웃음 치며 입을 열었다.

“자네, 나와 일 하나 하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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