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관의 요리사 184화
두 수컷이 마주 본다. 입가에 사나운 미소를 걸고, 주먹을 그러쥔다. 팽창하는 근육, 분노한 대흉근 위로 숫소와 같은 핏줄이 융기한다.
야수와 같은 육체에 초일류의 기술을 담은, 제국의 인적 자원을 거르고 걸러 뽑아낸 최강의 전사들. 싸움의 신들이 지극히 사소한 이유를 걸고 투쟁을 시작했다.
주먹이 교차하고 함성이 폭발하는 순간, 그 사소한 이유마저 전투의 흥분에 매몰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지리라. 그렇다면 남는 것은 구질구질한 당위성 따윈 생각할 필요 없는 근사한 혈투뿐이다.
파국으로 수렴하는 현장의 한가운데에서 소년은 품속에 넣어두었던 비수를 뽑아 들었다.
요사스러운 핏빛으로 빛나는 혈옥비수. 신선이 벼려낸 상고시대의 기물이 소름 끼치는 예리함을 드러내며 번뜩였다.
독살스러운 송곳니가 향한 곳은 좁고 가는, 그리고 사랑스러운 병목이었다.
다급한 손길로 입구를 봉한 밀랍을 뜯어낸 소년은 칼날을 지렛대 삼아 마개를 뽑아냈다.
뽕!
경쾌한 소리를 내며 마개가 뽑혀 나온다. 병의 안쪽에선 기포가 솟아오르는 소리가 속살거렸다.
살짝 탄산이 느껴지는 약발포성의 사과주. 초겨울에 담아 늦겨울에 무르익은 과실주의 향긋함이 허공에 번지자 뜨거운 숨을 토해내던 짐승들의 시선이 그에게로 모였다.
“오, 이런 세상에! 그만 실수로 병을 따버렸군요.”
이런 실수를 하다니!
난처하다는 듯 중얼거리던 소년은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병을 상에 올렸다.
“이것 참, 이 술은 한 번 딴 채 방치해 두면 맛이 달아나 버리는데.”
“그렇다는데. 진평이.”
어쩔 텐가? 심술궂은 표정으로 수염을 씰룩거리며 배금성이 묻자 악진평은 자세를 풀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강직한 무인의 얼굴에는 체념의 감정이 드러나 있었다.
“어쩔 수 없지. 오상호께서 이렇게까지 배려해 주시는데, 이 이상 거절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니.”
어쩔 수 없는, 실수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면죄부를 받아든 악진평은 홀가분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았다.
참나, 진작에 그랬으면 좀 좋은가? 서로 입씨름할 필요도 없고.
악진평에게 핀잔을 준 배금성은 풀어헤친 옷깃을 여미며 소년에게 고개를 숙였다.
“이거, 상호 님도 계시는데 못 볼 꼴을 보여드려서…….”
“허허, 괜찮습니다.”
살다가 열 좀 뻗치면 옷 좀 풀어헤치고, 뭐 그럴 수 있지요.
소년은 넉넉한 이해심을 발휘하여 둘의 허물을 덮어주었다.
‘그래도 다들 얌전하네, 싸울 때 정직하게 맨손으로 싸우려고 하고.’
그의 젊은 시절을 함께했던 실용적이면서도 어디서나 쉽게 구할 수 있었던 친구들(의자, 파이프, 각목, 술병) 등을 떠올리며 소년은 흐뭇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안줏거리를 조금 내올 테니, 우선은 한 잔씩 하고 계십시오.”
소년이 총총걸음으로 떠나자 배금성은 입술을 씰룩거리며 이죽거렸다.
“어차피 마실 거, 그냥 마셨으면 좀 좋나? 괜히 말씨름이나 하고, 오상호 님께 폐나 끼치고.”
“커흠, 술 받게나.”
“그래, 오늘 비룡대주님께 술이나 한잔 받아볼까.”
배금성이 입꼬리를 씨익 올리며 잔을 들자 악진평은 그의 술잔에 가득 술을 따라주었다.
하얀 도기 잔을 가득 채우는 황금빛 물결이 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넘실거리자 배금성은 호들갑을 떨며 잔에 입술을 대었다.
거품이 입술을 타고넘어 입안에 흘러넘친다. 혀 위로 미끄러지며 잇몸을 부드럽게 간지럽히는 상쾌한 자극. 향긋한 사과 향기에 몸서리친 배금성은 황홀함에 젖은 숨을 토해 냈다.
“크으! 죽이는군.”
“참으로 달콤하군. 그런데도 취기가 날카롭지 않고 순해. 보통 당도가 높은 술은 그만큼 도수도 센 편인데, 이건 나긋나긋하고 부드럽군.”
아내가 좋아하겠어.
무심코 집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을 아내를 떠올린 악진평이 중얼거리자 배금성이 느물거리는 웃음을 띄웠다.
“역시 소문난 애처가다우시군. 응? 아주 지극정성이야.”
“훗, 소문난 공처가인 자네에 비할까.”
아니 그, 공처가라니. 그 무슨 섭섭한 소리인가. 난 그저 가정의 평화와 화목을 위해 양보하는 것뿐이지, 여보님, 아니, 아내가 무서워서 그런 건…….
횡설수설하며 변명을 늘어놓던 배금성은 가늘게 휜 친구의 눈웃음을 보고는 앓는 소리를 내며 술잔을 기울였다.
“속이 쓰린데도 술은 참 달군. 야속할 만큼 달아.”
“많이 드시게. 집에서는 한 방울도 마시지 못하잖나.”
“누가 보면 꼭 아내가 무서워서 못 마시는 줄 알겠군. 난 그저 건강을 생각해서 자제하는 것뿐일세.”
아무렴. 그렇겠지.
뜨뜻미지근한 동정의 시선에 배금성은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그건 그렇고, 정말 호사스러운 방이군. 이것 좀 보게. 그 귀하다는 자단목으로 만든 탁자에, 이 의자에 깔린 건 진짜 호랑이 가죽이야. 깔고 앉기가 황송할 정도군.”
“이런 곳에 드나들려면 녹봉 만으론 힘들지.”
“아무렴. 청렴하게 녹봉만 모아서는 어림도 없지.”
짭짤하게 모으지 않으면 말이야.
다분히 함축적인 의미를 포함한 배금성의 말에 악진평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렇지. 근데 우린 그런 재주는 또 없지 않나.”
“무식한 무관 놈들이니 어쩌겠나. 그렇다고 실실 웃으면서 남 비위 맞추는 재주도 없고.”
“그런 건 배알이 꼴려서 못하지.”
참, 오상호 님 덕분에 이런 곳도 다 와보는군. 과분한 대접을 받았어.
마지막 술 한 방울을 잔에 따른 배금성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연유는 여쭙지 않아도 되겠나?”
사례 태감께서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시는지. 지하 투기장에 우리를 출전시켜 무엇을 얻으려 하시는지. 알고는 있어야 하지 않겠나.
배금성의 의문은 타당한 것이었다. 침중한 표정으로 침묵을 지키던 악진평은 결심을 굳히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자네 말이 옳아. 나는 이미 사례 태감 쪽에 한 발 걸친 몸이네만, 자네는 아니지 않나. 굳이 정치적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지.”
“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니었네.”
“물론, 자네의 신의를 의심하는 것은 아닐세.”
부드러운 표정을 짓는 악진평을 보며 배금성은 그가 자신에게 발을 빼도 좋다고 말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 사려 깊은 모욕에 분노를 느끼며, 배금성은 다짐하듯이 또박또박 힘주어 말했다.
“이제 와 발을 뺄 생각은 추호도 없네. 만약 거절할 것 같았으면 처음부터 거절했을 게야. 날 겁쟁이로 만들고 싶지 않다면 그런 말은 입에 담지도 말게.”
내가 그런 신나는 싸움판을 포기할 것 같은가? 사납게 쏘아붙이는 배금성의 말에 악진평은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물론 자네가 그럴 사람은 아니지. 다만, 그 후의 정치적 영향 때문에 자네가 부담스러울까 봐.”
“흥, 나도 비빌 언덕 하나쯤은 있어야 하지 않겠나.”
나 원. 알았네. 알았어.
못 당하겠다는 듯 고개를 저은 악진평은 의심받았다며 투덜거리는 친구를 보고는 흘리듯 뇌까렸다.
“그래도, 확실히 해두는 것이 좋겠지.”
* * *
솔직하게 자신의 의문을 털어놓는 악진평을 보며 소년은 당혹스러움을 느꼈다. 혹시, 자신이 했던 말 중에 그들의 상상을 비약할 만한 근거가 있는지를 고민해 본 소년은 이내 자신의 설명이 부족했음을 깨닫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들이 너무 흔쾌히 승낙하는 바람에 그만 사건의 경위를 이야기하는 것을 깜빡 잊어버린 것이다. 소년은 다급히 설명을 시작했다.
“우선, 설명이 부족했던 것에 대해 사과드리겠습니다.”
“아니요. 우리야말로 지레짐작으로 억측을 늘어놓은 점. 사과드리겠소.”
거듭 고개를 숙이며 사과한 소년을 보며 악진평과 배금성은 무안함에 헛기침하며 변명하듯 입을 놀렸다.
“하긴, 태감께서 그러실 분이 아니지. 난 처음부터 알고 있었네.”
“그럼. 사례 태감께서 사리사욕으로 움직이실 분이 아니지. 그럼.”
“허허.”
헛웃음을 터뜨린 소년은 문득 둘이 제안을 받아들인 이유가 궁금해졌다. 태감과 정치적으로 엮일 위험성을 알면서도 자신의 청을 받아들인 이유는 무엇일까.
그 무례하고 구차한 질문을 입에 담아본 소년은 한참을 망설인 끝에 그것을 꺼내놓았다.
“오상호의 청을 받아들인 이유 말이오?”
그야 당연한 것 아니겠소.
소년의 질문에 악진평과 배금성은 입을 모아 대답했다.
“오상호께서 부탁하셨는데, 당연히 응해야 하지 않겠소.”
“그간 얻어먹은 술과 밥을 생각해서라도 당연히 도와드려야지요.”
한 치의 의심도 의혹의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단호한 신뢰 앞에서 소년은 입을 다물었다.
한참을 떠듬거리며 마음속에서 뭉클거리는 감정을 표현할 단어를 찾던 소년은 괜한 쑥스러움에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아, 예. 두 분의 마음은 잘 알겠습니다. 그럼 슬슬 안줏거리를 내올까요?”
“이거 술이 다 떨어졌는데.”
“술도 한 병 더 내오지요.”
흔쾌히 병을 받아든 소년은 잠시 후 술독 하나와 함께 요리를 가져왔다. 등이 굽고 다리를 저는 소년이 어깨에 술독을 짊어진 모습에 무관들은 질겁을 하며 일어섰다.
“아이고 상호 님!”
“어서 내려놓으시오, 우리가 들 테니.”
“이 정도는 괜찮습니다. 뭐 무거운 것도 아니고.”
낄낄거리며 술독을 탁자 옆에 내려놓은 소년은 젓가락과 함께 준비해 온 안주를 상에 올렸다.
달콤짭짜름한 간장 냄새가 뭉근히 피어오르자 악진평은 입맛을 다시며 접시를 내려다보았다.
“돼지머리, 이것 참 군침이 도는구려.”
“참 잘 조려졌군요. 반질반질하니 윤기가 자르르 도네.”
“허허, 배소정저두(扒燒整猪頭)라 하는 요리로, 양주의 어느 절에서 손님들을 맞이하기 위해 스님들이 만들던 음식입니다.”
“예? 절간에서 고기를 요리했단 말입니까?”
눈이 휘둥그레진 배금성에게 소년은 요리의 유래에 대해 들려주었다.
“사실 초기의 불교는 육식을 금하지 않았답니다.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시주를 받아야 했느니 주는 음식을 가릴 수가 없었지요. 다만 시간이 지나며 마음 수양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육식을 금하는 계율이 생겨난 것이지요.”
배소정저두는 양주 수서호(瘦西湖) 기슭에 위치한 어느 절에서 유래된 음식으로 맛이 순하고 부드러워 일대의 명물로 손꼽혔던 요리다.
본래 스님들이 조리법을 비밀로 삼아 외부에 공개되지 않았지만, 육식을 금하는 계율이 세워진 이후로는 민간에 조리법이 널리 퍼져 양주의 명물이 되었다.
“돼지머리를 통째로 조렸기 때문에 부위마다 다른 맛과 식감을 느낄 수 있지요. 코 부분은 껍질이 두툼해 씹는 맛이 좋고, 볼은 살이 많지요. 하지만 제일 맛좋은 별미는 역시.”
오도독 씹히는 귀 아니겠습니까. 소년이 귀 부분을 저며내 앞접시에 올려주자 젓가락이 앞다투어 귀를 집어 들었다.
양념에 졸여진 껍질 부분은 말캉하면서도 쫀득하고, 그 안쪽으로 씹히는 연골은 오돌오돌하니 식감의 대비가 어금니를 즐겁게 했으며 돼지기름이 녹아든 양념은 달착지근하면서도 진득해 혀에 착 달라붙었다.
“술안주로 참 좋은데.”
“정말 좋기는 한데.”
하지만. 이 감칠맛 나는 양념은, 이 입술을 번들거리게 하는 기름진 맛은 참을 수 없을 만큼 하얀 쌀밥을 부르는 마력이 깃들어 있었다.
마른 침을 삼키며 갈등하는 두 무관을 올려다보며 소년은 코웃음 쳤다.
“확실히, 이 양념에 밥을 비벼 먹으면 정말 끝내주지요.”
술은 그만 드시겠습니까?
둘의 의사를 재차 확인한 소년은 양측의 동의를 받은 후, 안줏거리를 식사로 변신시켰다.
넓은 그릇에 흰 밥을 그득하게 담고, 그 위에 두툼하게 썬 머리 고기를 올린 다음, 마지막으로 졸아든 양념을 듬뿍 끼얹어 주면 쉽고도 간편한 머리 고기덮밥이 완성되었다.
“원래 이건 팔고 남은 고기를 닥닥 긁어서 한 끼를 때우던 직원 식사용 음식입니다만.”
“이런 요리를 매일 먹을 수 있다면 무관이 아니라 요리사를 했을 거요.”
“어쩌면 아직 늦지 않았을지도.”
아이고, 참아주십시오. 나라의 대들보이신 무관 나으리들께서 요리사가 된다고 하시면 폐하께서 경을 치실 겁니다.
소년은 엄살을 떨며 둘에게 숟가락을 나누어 주었다.
불그스름한 기가 도는 간장 양념에 비벼진 고슬고슬한 쌀밥, 푹 졸여진 야들야들한 고기. 둘의 조합은 위험할 만큼 매혹적이었다.
두 사람은 마치 통증과도 같은 굶주림을 느끼며 소년을 빤히 바라보았다.
“어서 드시지요.”
“그럼, 잘 먹겠소.”
“잘 먹겠습니다. 상호 님.”
거기까지가 그들의 한계였다. 감사를 표하기 위해 숙였던 고개를 들어 올린 순간 그들은 본능을 억누르고 있던 심리적 제어 기제를 모조리 놓아버렸다.
몸에 익은 교양, 체면, 부끄러움 따위의 것들. 문명인으로서 지켜야 할 것들을 내려놓은 그들은 야수처럼 게걸스럽게 접시에 달려들었다.
숟가락으로 떠서 입으로 넣는다는 과정마저 길게 느껴진 그들은 조금 더 획기적인 식사법을 개발해냈다.
접시를 들어 올려 숟가락으로 밥을 쓸어 담는다는, 쾌속하면서도 효율적인 식사법에 소년은 감탄사를 흘렸다.
“참 잘 드시는군요.”
이렇게 잘 드셔주시니 저도 열심히 만든 보람이 있습니다. 둘이 민망함을 느끼지 않도록 좋은 말로 배려한 소년은 후식으로 따뜻한 매실차를 내왔다.
“후식은 매실차를 준비했습니다. 매실은 소화를 돕고 장운동을 촉진하지요. 혹시 급하게 드시다가 속이 놀라셨을까 봐 준비했습니다.”
말을 끝맺은 소년은 그것이 곧 불필요한 조언이었음을 깨달았다. 무쇠도 씹어먹을 만큼 강건한 무장들이 소화불량에 걸릴 것을 걱정하다니.
세상에서 가장 무의미한 걱정을 뒤로한 채 소년은 엄숙한 목소리로 선언했다.
“일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면, 성대한 연회를 열어드리겠습니다. 물론, 비용은 태감께서 내시겠지요.”
“감미로운 제안이로군요.”
절대로 질 수 없는 이유가 생겼군요. 배금성이 수염투성이 입가를 씰룩거리며 장난스러운 미소를 짓자 소년은 음흉한 표정으로 말을 받았다.
“달콤한 보수도 좋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지 않겠습니까?”
예를 들자면, 몸이 후끈 달아오르는 보양탕이라던가. 소년의 음산한 웃음에 악진평은 뒷덜미를 저릿하게 하는 한기를 느꼈다.
“보양탕이라. 확실히, 몸이 달아오르긴 하겠군.”
오상호께서 끓여주시는 탕이라면, 효능은 확실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