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관의 요리사 183화
노인의 비릿하면서도 질척한 목소리에 금학은 섬뜩한 한기를 느꼈다. 등골을 타고 기어오르는 불길하면서도 불안한 예감. 뇌리를 울리는 본능의 경종에도 불구하고 금학은 제안을 거부하지 못했다.
황금의 향기가 났다. 너무나 진했다. 코가 아릴 만큼, 뇌가 짓무를 만큼. 이성을 마비시킬 만큼. 입술을 달싹이는 금학을 보며 노인은 쐐기를 박아넣듯 입을 열었다.
“난 자네 같은 사람들을 잘 알지.”
사회에서 천대받는 이들. 모욕과 저주와 멸시에 찌든 친구들. 늘 태양 아래로 나가고 싶어 하지만, 결국에는 더럽고 축축하고 습한 시궁창에 발이 묶여 버린. 자네와 나 같은 사람들 말일세.
“아무리 많이 돈을 벌고, 벌고. 또 벌어도. 우린 결국, 밑바닥 시궁쥐일 뿐이야. 아래에서 돈을 착취해, 윗분들에게 착취당하는 신세일 뿐이지. 그렇지 않나.”
“그렇……지요.”
“자네도 모시는 분이 있겠지?”
금학은 대답하지 못했다. 침묵하는 그의 입을 본 노인은 대충 짐작이 간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 장사도 어딘가 비빌 언덕이 있어야 하지. 하지만 아득바득 긁어모아 봤자 뭐하나. 결국, 여기저기 찔러주고 상납하고 우리 주머니에 남는 건 잔돈푼뿐인데.”
그게 우리 팔자 아니겠나.
노인의 서글픈 중얼거림 속에는 비통한 회한이 담겨 있었다. 젊은 고리대금업자는 그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깊이 공감했다. 아무리 돈을 벌어도, 아득바득 빼앗고 착취해서 부를 쌓아도 결국, 그 돈의 종착지는 자신이 아닌 윗분들의 주머니였다.
온갖 모욕과 원한을 뒤집어쓴 대가로 얻는 것은 고작 실효성이 있는지조차 의심스러운 윗분들의 비호뿐.
그 말뿐인 약속을 위해 상납해야만 했던 황금을 떠올리며 금학은 가슴이 찢어지는 통증을 느꼈다.
황금이 빠져나가고 그 빈자리에 남은 것은 멸시와 비난, 빛이 보이지 않는 팔자뿐이었기에 통증은 더욱 가슴에 사무쳤다.
가슴이 울렁거리는 것을 느끼며 금학은 입술을 비집어 열었다.
“선배님.”
“돈을 벌게나. 젊은 친구.”
너무나 당연하고, 그렇기에 더욱더 무거운 조언이었다. 노인의 눈동자에 굶주린 광기가 맴돌았다.
서릿발처럼 차갑고, 칼날처럼 날카로웠으며, 독사처럼 소름 끼치는. 그 번들거리는 광기가 자신을 응시하자 금학은 심장이 저며지는 듯한 공포를 맛보았다.
“돈을 벌게나. 벌 수 있을 만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악착같이. 인두겁을 뒤집어쓴 악귀처럼 인정 사정 보지 말고 돈을 벌게나. 팔자를 고칠 수 있을 만큼. 천박한 고리대금업자라 욕하던 놈들의 아가리를 닥치게 할 만큼.”
자네를 손에 쥐고 흔들던 윗분들에게 소변을 갈겨줄 수 있을 만큼. 돈을 벌게나.
노인의 말은 절대적인 명령이자 복음이 되어 금학의 심장에 각인되었다. 지독하리만치 달콤한 희망적 미래는 의심과 경계의 칼날마저 녹슬게 했다.
어째서, 도대체 왜? 난 저 노인의 한마디에 이토록 휘둘리는 거지?
하지만 노인이 속삭이는 황금의 유혹은 그런 의심의 씨앗을 스스로 뿌리 뽑게 했다. 그 달콤함에 매몰된 금학은 싹튼 의심을 헛된 망상으로 치부했다.
설마, 선배님께서 그러실 리가 없어. 나 같은 놈을 속여서 저분이 무슨 득을 보시겠어?
자신을 기만하는 금학의 충혈된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소년이 대답을 재촉했다.
“잡설이 너무 길었군. 그래서, 내기하겠나? 안 하겠나?”
노인의 말에 금학은 맹목적으로 찬동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게 기회를 주시는군요. 선배님. 거절한다면 예의가 아니겠지요.”
마침, 사흘 후 투기장에서 특별한 경기가 있습니다. 고르고 고른 투사 중에서 투기장의 왕자를 뽑는 대전인데, 여기서 승자를 가리는 것은 어떻습니까.
금학의 제안에 노인은 명안이라며 껄껄 웃었다.
“그거 좋네. 그럼 사흘 후에 보세나.”
“예. 선배님. 오늘 즐거웠습니다.”
“나도 장래가 유망한 후배를 볼 수 있어서 즐거웠네.”
노인이 굳은살 박이고 갈라진 손을 내밀자 금학이 공손히 손을 맞잡았다. 그의 손을 쥔 노인은 의미심장한 웃음을 띠며 길게 악수를 한 후,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노인의 손은 묘하게 미끌미끌해 금학은 의아함을 느꼈다.
“그럼, 다음에 보세나.”
“예! 선배님!”
노인은 지팡이를 짚으며 절뚝거리는 걸음으로 응접실을 빠져나왔다. 입구까지 안내하겠다는 직원들의 배려를 거절하며 투기장을 빠져나온 노인은 짜증스러운 숨을 토해내며 답답한 옷깃을 풀어헤쳤다.
“시부럴, 더럽게 덥네.”
“고생 많았다.”
골목의 어둑한 그늘 너머로 미려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익숙한 목소리에 노인은, 노인으로 분장한 소년은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나도 볼 일이 있어서.”
“볼 일이요?”
흐음, 분장이 아주 그럴듯하구나. 역시 동창의 인피면구야. 이죽거리는 듯한 태감의 목소리에 소년은 볼 거죽을 덮고 있는 주름진 인조 피부를 떼어내 태감에게 던졌다.
너풀거리는 조각을 받아든 태감은 아깝다는 듯 그것을 곱게 접어 품에 넣었다.
“저런, 이래 보여도 비싼 거다. 조심히 다뤄야지.”
“땀 차서 죽는 줄 알았네, 뭐로 만들었는데 그렇게 통기성이 없습니까?”
“글쎄? 최소한 사람 가죽은 아닐 거다.”
그것참 안심이 되는군요. 소년이 구시렁거리는 동안 태감은 주변을 둘러보며 사방에 인기척이 없음을 확인했다. 그리고 이야기의 비밀성이 유지될 만하다는 확신을 가진 후에야 입을 열었다.
“일은 잘 처리했느냐?”
“예. 맡기신 대로, 염사방주와 내기 약속을 잡았습니다. 별로 의심하지도 않더군요.”
의심을 안 한 게 아니라 못한 거겠지. 소년의 분장을 떠올렸던 태감은 몰래 고소를 지었다. 그 소름 끼치는 연기와 교활한 풍모. 간사한 혓바닥.
미숙하고 야망이 넘치는 젊은이 따위는 그 기세에 질려 흐물흐물 녹아버렸을 것이 뻔하다.
노련한 늙은이의 사특한 혀 위에서 애간장을 태웠을 염사방주를 떠올리면 도저히 웃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한참을 키득댄 태감은 소년이 삐딱한 시선으로 눈치를 주고 나서야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들었다.
“그래, 그러면.”
“예. 말씀하신 대로, 그 친구 손에 그 만리향인지 뭔지 하는 연고를 듬뿍 발라주었습니다.”
덕분에 제 손도 끈적끈적합니다만. 소년이 손을 들어 보이자 태감은 품에서 손수건 한 장을 꺼내 그에게 쥐여주었다.
“잘했다. 만리향을 묻혀두었으니, 앞으로 그놈은 동창의 감시망을 벗어나지 못할 거야.”
만리향의 향기는 물에 씻어도 지워지지 않고 시간이 지나도 옅어지지 않으니, 이제 놈은 독 안에 든 쥐나 다름없다. 자신만만한 태감을 보며 소년은 코웃음 쳤다.
“그리고 저도 함께 감시당하게 생겼군요. 동창에.”
“좋게 생각하자꾸나. 네가 납치당하면 언제든지 동창의 요원들이 널 찾아낼 수 있지 않으냐?”
“말은 하기 나름이군요.”
태감은 소년이 그의 낙관성에 대한 비난을 늘어놓기 전에 서둘러 화제를 바꾸었다.
“경기가 사흘 후라지? 선수를 미리 준비해 둬야겠구나. 시간이 조금 촉박한걸?”
“뭐, 계획이 있으시겠죠? 알고 지내는 실력 좋은 격투가라도 있으니 이런 계획을 짜셨겠지요. 예. 아무렴요.”
소년의 말에 태감은 엉뚱한 소리를 한다는 듯이 되물었다.
“무슨 소리냐. 싸울 사람은 네가 준비해야지.”
“예?”
“이럴 때가 아니면 네 인맥을 또 언제 써먹겠느냐?”
소년은 한참 후에야 태감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태연자약한 표정으로 웃고 있는 태감을 향해 비명과 같은 질문을 쏟아냈다.
“금군의 무장 나으리들을 뒷골목 투기장에 동원하잔 말씀입니까? 지금? 공직자이신 분들을?”
“물론. 이런 자극적인 기회를 거절할 무장이 세상에 어디 있겠느냐?”
소년은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한 채 멍하니 태감을 올려다보았다.
* * *
다관 막심의 특실. 두 명의 무관과 마주한 소년은 허탈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정말로, 괜찮으십니까?”
“아, 좋지요.”
“오랜만에 몸을 좀 풀고 싶었는데 이런 제안을 해주다니. 고맙소. 오상호.”
무례하기 그지없는 부탁을 드리기 위해 어렵사리 악진평과 배금성을 초청한 소년은 선뜻 부탁을 수락하는 둘의 태도에 할 말을 잃었다.
‘내가 혹시 술이나 한잔하자고 했었나?’
잠시 자신의 혀가 의사와는 다른 말을 내뱉은 것은 아닌지를 의심한 소년은 조심스럽게 다시 물었다.
“저, 그러니까. 지하 투기장에 선수로…….”
“이거 흥분되는군요. 무규칙 무제한의 지하 투기장이라.”
“마음껏 날뛰어본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군.”
과도한 열의를 발휘하는 둘의 모습에 소년은 석연치 않은 기분을 느꼈다.
자신의 상식이 부정당하는 듯한, 보편타당한 진리를 홀로 아니라 하는 얼뜨기가 된 기분을 느낀 소년은 잠시 공직자에게 불법 투기장에 출전해달라는 부탁이 감사를 받을 만한 일인지에 대해 고민해 보았다.
하지만 사유에 잠기기에 앞서, 소년은 그를 위해 시간을 내어준 두 무관에게 감사 인사를 올렸다.
“어…… 그…… 예. 감사합니다.”
“저희가 더 감사하지요. 이렇게 차도 사주시고 과자도 주시고 싸울 곳도 주시는데.”
“근래 몸이 좀 찌뿌둥했는데, 좋은 운동이 되겠구려. 고맙소.”
“허, 허허.”
소년은 자신이 지나치게 고리타분하고, 꽉 막힌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했다. 허탈한 웃음을 터뜨린 소년은 자포자기에 가까운 상쾌한 표정을 지으며 상에 술병을 올려놓았다.
“감사의 의미로 두 분께 술을 좀 대접하고 싶군요.”
“우리야 더할 나위 없이 좋지만, 다관의 점주께 폐가 되지는 않을는지.”
“괜찮습니다. 특실은 방음이 원체 좋아서.”
악진평은 교양인의 휴식처인 다관에서 술판을 벌이는 것이 부담스러운 듯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훌륭한 도덕성에 깊은 감명은 받은 소년은 그의 뜻을 존중해 얌전히 술병을 도로 집어넣었다.
“이것 참, 어쩔 수 없군요. 하긴, 오늘만 날이 아니니. 술자리는 다음에 해도 좋겠지요.”
“옳은 말씀이오. 다관의 탁자에 어울리는 것은 역시 술이 아니라 따뜻한 차와 과자겠지.”
“쩝, 다관에서 술 마시지 말라고 제국법에 명시되어 있지는 않을 텐데.”
투덜거리는 배금성을 올려다본 소년은 슬그머니 밀어 넣던 술병을 슬쩍 올리며 흘리듯 중얼거렸다.
“여러분은 혹시 사과주를 드셔보신 적 있으십니까?”
“사과주? 사과주야 뭐…….”
“그냥 사과주 말고, 초겨울 된서리를 맞은 사과로 담근 사과주 말입니다.”
소년의 말에 방 안에 묵직한 긴장감이 흘렀다.
핏발선 시선이 자신에게 모이는 것을 느낀 소년은 입꼬리를 길게 찢어 올렸다. 지옥 유부에서 기어 올라온 야차와 같은 웃음이었다.
“된서리를 맞으면 사과가 얼어 터지지요. 그리고 그것을 녹이면 어떻게 되는 줄 아십니까?”
사과가 흐물흐물해지지요. 껍질이 쭈글쭈글해지고 과육은 푸석푸석한데 쥐어짜면 그대로 사과즙이 주르륵 흘러내립니다.
“그 즙은 몸서리칠 만큼 달고 향긋하지요.”
침을 삼키는 소리가 천둥처럼 울렸다. 움찔거리는 악진평의 목울대를 응시하며 소년은 달콤한 속삭임으로 그를 충동질했다.
“그 향긋하고, 진하고, 달콤한 즙으로 술을 담그니 궁 안에 사과 향이 진동하더군요.”
항아리 뚜껑에 새들이 날아들고 고양이가 담을 넘어와 고생도 많이 했지요. 참, 그 달콤한 향기는 짐승들도 참기 힘들었나 봅니다.
술이 익기를 기다렸던 인고의 시간을 떠올리며 소년의 눈가는 어느새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참 좋은 술인데, 이걸 표현하기가 어렵군요. 입에 머금으면 어찌나 향기로운지, 꼭 하얀 사과꽃을 가득 입에 물고 꿀을 마시는 것 같지요. 달착지근한 맛이 혀 위에 감돌고 나면 어렴풋이 새큼함이 기분 좋게 혀를 간지럽히고, 마시고 나면 진한 사과 향이 날숨에 섞여 코를 자극하는데-”
어쩔 수 없지요. 다관에서 술을 마시는 것은 예의가 아니니까요.
소년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참으로 아쉽지만, 소년이 보따리를 질끈 싸매는 순간 억눌린 신음성이 터져 나왔다. 배금성이었다.
핏발선 눈으로 주먹을 그러쥔 배금성의 모습은 꼭 분노한 아수라와도 같았다.
뜨거운 숨을 몰아쉬며 자리에서 일어선 배금성은 곰의 앞발처럼 우악스러운 손으로 악진평의 어깨를 짚었다.
“진평이, 이 친구야. 상호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데, 아직도 고집을 부릴 건가?”
“그것이…….”
“만약 정 뜻을 꺾지 못하겠다면, 내가 좀 도와줄 수 있는데.”
그 도발적인 말에 악진평이 송곳니를 드러내었다. 정중하고 중후한 사내의 얼굴에 떠오른 폭력성을 본 순간 소년은 무언가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했다.
그냥 술 좀 마시자고 투정 좀 부려본 것이 이런 파국을 불어올 줄이야. 소년의 초조한 긴장감 속에서 두 수컷은 서로를 마주 보며 사납게 미소 지었다.
“서로 주먹을 겨뤄본 게 몇 년 만이지?”
“창칼이라면 모를까, 주먹은 오랜만이군.”
“많이 컸구나. 악진평.”
“확실히, 맨주먹 싸움은 자네가 늘 한 수 위였지. 배금성.”
하지만 오늘은 다를걸세.
악진평은 잡아 찢듯이 옷깃을 풀었다. 두툼한 솜옷 사이로 탄탄하게 조여진 사자와 같은 근육이 드러났다. 섬세하게 갈라진 복직근, 날개를 펼친 독수리와도 같은 광배근에 감탄하던 소년은 시선을 배금성 쪽으로 돌렸다.
“오늘도 기나긴 패배의 역사에 한 장을 써넣겠구나. 악진평.”
악진평이 사자였다면, 배금성은 그야말로 곰이었다. 악진평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우람한 체격에 빈틈없이 들어찬 근육은 험준한 산맥과도 같았다.
체급 차이만 보아도 한 체급 이상. 누가 보아도 악진평에게 불리한 싸움이었으나 그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배금성을 향해 손짓했다.
“길고 짧은 것은 대보기 전엔 모를 일이지.”
“자신만만하군. 어디 실력도 자신감 만큼 늘었는지 확인해 볼까!”
당장에라도 주먹이 튀어 나갈 것 같은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소년은 품속의 비수를 꺼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