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관의 요리사 181화
주윤은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누군가에게 애걸하고 있었다. 처음 보는 놈이었다. 코가 크고 얼굴은 말상이었는데 입가에 걸린 미소는 음흉하면서도 사나웠다.
소년은 고개를 돌려 옆에 선 백윤을 보았다.
혹시, 아는 놈이요?
백윤은 대답 대신 혀를 찼다.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십시오. 반드시 갚겠습니다.”
“거 참, 자꾸 이러면 곤란해. 이거 저번 달 이자도 못 갚았잖소.”
“이번 달은 반드시 갚겠습니다.”
“참나, 이런 다 쓰러져가는 시술소를 붙잡고 뭘 하는 건지. 쯧쯧, 처음 제안대로 약이나 팔았으면 서로 좋았잖아? 우리도 좋고 댁도 좋고. 빚도 갚고 돈도 벌고. 병신 짓 그만하고, 서로 좋게 합시다.”
누군가의 입에서 뜨거운 숨이 토해졌다. 이삼이었을까. 백윤이었을까. 아니면 소년이었을까. 셋 모두였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껄렁거리며 한참을 지분거리던 사내는 혀를 끌끌 차며 돌아갔다. 그 얄팍한 등에 대고 한참 동안 인사를 하던 주윤이 고개를 들자 참지 못한 백윤이 그에게 다가갔다.
“야 이 멍청한 놈아.”
“어르신?”
“어딜 돈 무서운 줄 모르고 염왕채를 써 이 모자란 놈아. 어?”
“어르신, 그게.”
백윤은 깡마른 팔로 주윤의 멱살을 잡고는 그를 몰아붙였다. 강퍅한 얼굴에 드러나는 숨길 수 없는 염려의 기색에 주윤은 쩔쩔매며 고개를 숙였다.
일수꾼에게 시달리고 백윤에게 변명하는 그의 모습은 꼭 불어터진 만두 같았다. 퉁퉁한 볼을 붉히며 떠듬거리는 모습에 소년은 한숨을 내쉬며 백윤을 말렸다.
“일단 가서 이야기합시다. 뭐라도 좀 먹고.”
일단 배는 채워야 하지 않겠수.
소년의 만류에 백윤은 분기를 참는다는 듯한 표정으로 손을 내렸다. 늙은 대장장이가 등을 돌리자 주윤은 마치 죄인인 것처럼 어깨를 늘어트리고 그를 뒤따랐다.
그렇게 넷은 입을 굳게 다문 채 단 한 마디도 나누지 않고 철방에 도착했다.
소년은 도착하자마자 이삼을 데리고 주방으로 들어갔다. 주윤이 어려운 이야기를 꺼낼 수 있도록, 눈치껏 자리를 피해 준 것이다.
그 배려에 감사함을 느끼며 주윤은 조심스럽게 백윤과 마주 앉았다. 목이 탄다는 듯 마른 침을 삼키는 주윤을 보던 늙은 대장장이는 이내 한숨을 푹 쉬며 술잔을 내밀었다.
“됐다. 내가 네 사정 모르는 것도 아니고. 술이나 받아라.”
“예, 어르신.”
백윤은 그의 잔에 넘치도록 술을 부어주었다. 넘실거리는 술이 주윤의 퉁퉁한 손가락을 적실 만큼 술을 따라준 백윤은 술병을 입으로 가져갔다.
“의원이라는 놈들은 참, 개자식들이야. 그렇게 돈을 끌어다 바쳤으면, 어떻게 해서든 살려 줬어야지. 염병할 놈들.”
“어쩌겠습니까, 대라신선이 와도 못 살린다는데. 사람 손으로 될 일이 아니었던 게지요.”
백윤은 술이 쓰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오늘따라 유독 술이 쓰게 느껴졌다. 한참을 우물거리며 술을 삼키지 못하고 물고 있던 백윤은 차마 입에 담지 못할 말과 함께 술을 삼켰다.
그러면 포기했어야지. 이 미련한 놈아. 대라신선이 와도 못 살린다는 병을 붙잡고 늘어졌으니 지금, 이 모양 이 꼴 아니냐. 그렇게 잘 나가던 놈이, 일수꾼 놈한테 쩔쩔매면서. 이게 무슨 꼴이냐.
혀끝에서 맴도는 그 모진 말을 씹으며 백윤은 한숨을 내쉬었다.
사람 마음이란 것이 그렇게 끊는다고 끊어지던가. 재산을 다 탕진해서라도, 염왕채를 끌어다 써서라도. 그렇게 해서라도 살아만 줬으면. 연민이 맺힌 그의 눈을 들여다보며 주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후회는 안 합니다.”
제가 그 사람에게 해줄 수 있는 최선이었으니까요.
그 고집스러운 표정에 순간 웃음이 감돌았다. 가슴 속에 담아둔 채 의식적으로 무시해 왔던 추억이 떠오른 것이리라.
찰나의 순간 맴돌았던 행복했던 기억은 지독한 상실감으로 그에게 다가왔다. 맥이 풀린 듯 창백해진 주윤의 얼굴을 보며 백윤은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네가 돈을 빌린 놈들, 염사방(鹽沙幇) 놈들이지?”
지독한 놈들에게 돈을 빌렸어.
백윤은 혀를 차며 병을 기울였다. 염사방. 본래 밀염상 노릇으로 세를 불린 그들은 경사에서 가장 지독한 고리대금업자로 유명한 자들이었다.
하필, 돈을 빌려도 그 소금쟁이 놈들한테 돈을 빌렸냐. 백윤의 타박에 주윤은 연신 고개를 떨구었다.
“그래도 지금까지는 방주의 전속 추나 시술사 노릇을 해서 이자를 면제받았지만, 하필 이번에 방주가 자리를 물려줘서…….”
“왜. 그놈은 관심 없다더냐?”
“아직 건강해서 괜찮다더군요.”
벼락 맞아 뒈질 사채꾼 놈이 왜 건강하고 지랄이야?
백윤이 툴툴거리자 주윤은 냉큼 맞장구를 쳤다. 둘은 서로 경쟁하듯 원색적인 비난을 늘어놓았다. 하지만 맹목적인 분노와 욕설도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해소해 주지는 못했다.
“이제 어쩔 거냐.”
가늘게 떨리는 백윤의 목소리에 주윤은 들어 올리던 잔을 도로 내려놓았다. 그의 얼굴에는 이미 체념의 빛이 맴돌고 있었다.
풍미라곤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싸구려 분주로 목을 달군 주윤은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
“어쩌겠습니까. 사정사정 해보고, 안되면 뭐. 어쩔 수 없지요.”
“그놈들, 듣기로는 사람 장사도 한다며. 잘못되면…….”
“그래도 배운 기술이 있는데, 죽기야 하겠습니까. 까짓거, 어디서든 먹고는 살겠지요.”
하여간 말이나 못 하면. 육시랄 놈 같으니.
백윤의 쌍소리에도 주윤은 곰살맞게 굴며 웃음을 지었다. 마치 한 치 앞도 모르는 머저리처럼 싱긋 웃는 주윤의 태연한 태도는 늙은 대장장이를 분개하게 했다.
참지 못한 백윤이 목에 핏대를 세울 때. 소년이 주방 문을 걷어차 열었다.
“국수 좀 드쇼.”
소년은 아무 이야기도 듣지 못했다고 선언하듯 시큰둥한 표정이었다. 듣지도 못했고, 굳이 귀 기울일 만큼 관심도 없다는 듯한 소년의 얼굴에 둘은 무안하다는 듯 어색한 표정으로 국수 그릇을 받아들었다.
뽀얀 양고기 국물에 넓적하고 얇은 면이 담긴 국수는 파 약간과 삶은 양고기가 고명으로 올라가 있었다.
소년이 말없이 후추통을 내밀자 연장자인 백윤이 먼저 통을 받아들었다.
“좀 많다 싶게 뿌리쇼.”
“오냐. 잘 먹으마.”
백윤에게 후추통을 건네어 받은 주윤도 소년에게 심심한 감사를 전했다. 소년이 나른한 얼굴로 고개를 까닥이자 주윤은 까만 후추 알이 떠오른 육수를 한술 떠 마셔보았다. 기름이 둥둥 뜬 뜨끈한 육수. 입에 쩍 달라붙는 구수한 감칠맛 너머로 알알한 후추의 톡 쏘는 맛이 느껴졌다.
삼삼한 소금간은 육수의 감칠맛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 수저로 육수를 뜨던 주윤은 참지 못하고 그릇을 들어 올렸다.
꿀꺽. 뜨겁고 진한 국물이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며 온몸에 열기를 퍼뜨렸다. 불안과 공포로 언 가슴을 녹이는 뜨끈한 국물은 경직되어 있었던 그의 입꼬리마저 흐물흐물 녹아내리게 했다.
“크으, 시원하다.”
소년은 말없이 국물이 사라진 그의 그릇에 새로운 육수를 부어주었다. 파도 조금 더, 양고기 수육 한 첨은 덤이었다.
아까보다 조금 많이 후추를 친 주윤은 젓가락으로 국수를 양껏 집어 올렸다. 얇고 부들부들한 면발. 후루룩 빨아올리면 매끈하면서도 낭창낭창한 면발이 잇몸을 간지럽힌다.
주윤은 육수를 마셔 면발을 목구멍 안쪽으로 넘겼다. 입안 가득 욱여넣은 면이 육수와 함께 목구멍을 타고 넘어간다.
묵직하고 뜨거운 것이 식도를 타고 미끄러지는 감각. 위장을 두둑하게 채워주는 포만감. 입술에 반지르르하게 도는 기름기를 핥으며 주윤은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참, 사람이란 어찌 이리도 간사한 건지.
조금 전까지 노비로 팔려갈 걱정에 전전긍긍하던 놈이. 지금은 국수 한 그릇을 배불리 먹었다고 이렇게 웃는다.
자신의 대책 없는 낙관성에 실소를 흘리던 주윤은 양고기 수육 한 첨을 입에 넣으며 남아 있던 근심과 불안마저 휘발되는 것을 느꼈다.
“그래. 어떻게든 되겠지.”
일단 배가 부르니 자연스레 졸음이 오고, 졸음이 오니 우울한 상념 또한 스러졌다. 부른 배를 두드리며 실실 웃던 주윤은 마음 깊이 우러나오는 감사를 전하기 위해 고개를 들어 소년을 보았다.
“정말 배부르게 잘 먹었다. 고맙구나.”
“잘 드셨다니, 다행입니다.”
잠시 여쭙고 싶은 것이 있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소년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주윤에게 점잖은 태도로 물었다. 그 태도가 퍽 정중하고 온화하였기에 주윤은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전에, 그 염사방이라는 친구들이 사람 장사를 한다고 하셨는데. 이게 어떤 뜻인지 정확하게 알려주시겠습니까?”
“뭐, 말 그대로의 의미란다. 사람을 사고판다는 뜻이지.”
노비를 사고파는 거야 하루 이틀 일도 아니지 않으냐.
주윤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이 이상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는 완고한 표현이었으나 소년은 고집스럽게 되물었다.
“단순히 노비로 만들어 판다는 말씀은 아닌 것 같군요.”
조금, 자세하게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단조로운 어조로 이야기하는 소년의 얼굴은 소름 끼칠 만큼 냉담했다.
* * *
“해외에 판다는군요. 그 개잡놈들 말입니다.”
국내에 있으면 면천될 기회라도 있지. 천하에 그런 잡놈들은 처음 봅니다.
끓어오르는 분노를 눌러 담은 듯한 소년의 말에 태감은 심각한 표정으로 턱을 당겼다.
“확실한 방법이기는 하구나. 이역만리 타향에 팔아넘기니 돌아와 복수 당할 걱정도 없을 것이고. 목소리 낼 사람이 없으니 신고당할 걱정도 없을 것이고.”
자칫 익살스럽게 들릴 수 있는 말이었으나 웃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입술을 씹으며 신음을 삼키던 태감은 이내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내 책임이다.”
사례 태감으로서의 일에만 중하여 동창 제독으로서의 업무에는 소홀했어. 은퇴라는 달콤한 미래에만 취해 현재의 의무를 방임하고야 말았다. 지시를 내려야 하는 제독이 업무에 소홀하니 첩보 기관인 동창이 제 역량을 발휘하지 못했고, 그 탓에 감시망이 허술해졌다. 이건 내 탓이구나.
태감의 자책을 듣던 소년은 혀를 차며 짜증을 냈다.
“아니, 그게 동창 일입니까? 포청 놈들이 할 일이지. 동창은 관료들의 감시가 주 업무 아닙니까.”
“그래. 그랬기에 내가 더욱더 중심을 잡고 철저히 해야 했어. 포도청 관리들에 대한 감시를 소홀히 하지만 않았다면…….”
의기소침해진 태감을 보며 소년은 그의 방식대로 기운을 북돋워 주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주로 주먹이나 발 등을 이용한, 투박하고 서투른 사나이의 방식대로. 하지만 그런 무례를 저지르기 직전 소년은 감탄스러운 자제력을 발휘하여 주먹을 주머니에 꽂아 넣었다.
“지금 책임소재 구분이나 하고 있을 땝니까?”
정신 차리라는 의미를 다분히 함유한 소년의 목소리에 태감은 고개를 들었다. 가라앉아 있었던 그의 눈동자 속에서 끔찍한 열기가 스며 나왔다. 관용과 배려를 모조리 태워 버린, 철저히 악의만을 남긴 눈동자였다.
“그래.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그렇지요. 그 개잡놈들을 모조리 잡아다가 주리를 틀어서 입을 열고, 연관된 놈들을 잡아다가 물고를 내야지요. 우는 건 그다음에 해도 늦지 않을 겁니다.”
일단 염사방인지 뭔지 하는 놈들부터 시작합시다.
소년의 말에 태감은 석연치 않다는 듯 입술을 닫았다.
“염사방. 염사방이라. 들어본 적 있는 이름이군.”
본래 밀염상으로 세를 키운 조직이었지. 그리고 고리대금업을 하고, 불법 투기장과 도박장을 운영하고 있었지. 특이하여 기억에 새겨두었다만…….
“과연, 노비 밀매를 할 만큼 세력이 큰 조직은 아니었을 텐데.”
“저도 백윤 영감한테 이야기를 좀 듣고 왔습니다. 최근에 방주가 바뀌면서 급격하게 세가 불어났다고 하더군요.”
사람 장사도 최근에 바뀐 방주가 시작한 사업인 것 같습니다. 소년의 말을 듣던 태감의 뇌리에 불쾌한 확신이 떠올랐다.
“새로 방주 자리에 오르며 시작한 사업이 노예 밀매라. 대단히 진취적인 인물이군.”
“그놈 잡으면 한번 배를 갈라봐야겠습니다. 간이 얼마나 큰지 궁금하군요.”
이제 막 사업을 물려받은 놈이 그런 담대한 일을 벌였다면, 분명히 이유가 있기 마련이지요.
소년의 말에 태감은 음습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래. 그런 짓을 무마해 줄 만한 뒷배가 그에게 붙었다는 뜻이지. 포도청 관리들을 휘어잡고, 동창 제독과 황제 폐하의 눈을 가릴 만한 인물이.”
“권세를 유지하는 데는 돈이 필요하지요.”
전 누군지 대충 짐작이 가는데, 태감님은 어떠십니까?
소년의 짓궂은 눈웃음에 태감은 속단하지 말라는 의미로 엄중한 헛기침을 날렸다. 하지만 태감의 눈은 부드러운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 일을 맡길 만한 사람이 필요한데.”
“제가 하지요. 마침 아는 사람도 얽혀 있으니.”
소년이 임무에 자원하자 태감은 선뜻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고민했다. 칼로 짼 것처럼 날카롭게 찢어진 눈동자에 창백한 피부. 교활함이 깃든 매부리코와 얇은 입술. 흉계를 실행하는 데 이보다 더 적합한 인물이 또 있을까. 거기에 소년은 의외로 연기력이 탁월한 편이었다.
분명, 태감이 그리는 그림에 가장 적합한 주역은 소년일 것이다. 하지만 태감은 결단을 내리기 전 한 번 더 망설였다.
“괜찮겠느냐?”
피를 봐야 할 수도 있다. 태감의 말에 소년은 입꼬리를 길게 찢어 올렸다.
“사람 피를 보는 일이라면 주저했겠지요. 하지만 이번에 잡을 놈은 사람 취급할 필요가 없는 놈 아닙니까.”
그렇다면 망설일 필요가 없지요.
태감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공적인 책임감에 사적인 원한까지 얽혀 있으니, 그 열의가 하늘을 찌를 정도였다.
“그렇다면 무대를 마련해 줘야겠구나.”
“굳이 그럴 필요가 있습니까?”
그냥 쳐들어가서 다 때려잡아 오면 될 것 같은데. 소년의 단순 무식한 발언에 태감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분명히 비웃음이었다.
“동창이 정보를 물었다고 광고를 할 생각이냐?”
“그럼 어찌하면 되겠습니까.”
조금 수고를 들여서라도 조용히, 조심스럽게 목을 졸라야지. 남들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천천히. 노련한 정치가의 표정을 연출한 태감은 소년의 귓가에 차가운 계획을 속삭였다.
간교하고 음흉하며, 극적인 연출이 가미된 계획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