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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관의 요리사-179화 (179/314)

환관의 요리사 179화

“잠깐 자리 좀 피해다오. 오상호와 긴히 할 이야기가 있으니.”

넌 아직 대화에 낄 주제가 못 된다는, 젊은이에게는 지나칠 만큼 도발적인 언사였다.

소년은 저 젊은 환관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기대가 되었다. 분기를 참으며 수긍할까, 아니면 참지 못하고 튀어 오를까. 하지만 젊은 환관은 소년이 기대한 극적인 반응을 보여주지 않았다.

“예, 태감. 이만 가보겠습니다.”

품위 있는 자세로 고개를 숙인 젊은 환관은 오른발을 축으로 정확히 반 바퀴를 돈 다음 소년에게도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소년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의 인사를 받았다.

젊은 환관. 금조가 그들을 떠나고 한참 후에서야 소년은 다시 입을 열었다.

“길이 잘 들었군요.”

“그래 보이나?”

공을 들인 보람이 있군. 장 태감은 소년을 돌아보며 웃음 지었다. 아직 미덥지 못하다는 듯이. 소년은 멀어지는 젊은 환관과 장 태감을 번갈아 본 후 고개를 끄덕였다.

저 친구인가 보군요.

소년의 시선에 장 태감은 입꼬리를 씰룩거렸다. 잠시 눈을 통해 대화를 나누던 둘은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자네가 보기엔 어떤가.”

이번엔 육성으로 이루어진 질문이었다. 소년은 잠시 고민하는 척 턱으로 손을 가져갔다. 아직 수염도 나지 않은 반들반들한 턱을 검지로 긁으며 소년은 코웃음 쳤다.

“젊군요. 자신만만하고.”

“다루기 어려운 친구지. 그래서 재밌기도 하고.”

“심려가 크시겠습니다.”

“어쩌겠나. 다른 인물이 없으니.”

어쩌면 차기 내관감의 태감이 될지도 모르는 사내의 얼굴을 소년은 머릿속에 단단히 각인시켰다.

소년의 얼굴을 굽어본 장 태감은 그와의 대화 속에서 우스웠던 부분을 찾아냈다. 그리고 그것을 지적했다.

“그런데, 저 친구를 젊다고 하기에는…….”

장 태감의 혀끝에 스며든 짓궂은 가시에 소년은 자신이 실수했음을 깨달았다.

그의 실제 나이가 어쨌든, 그는 청소년이라는 말조차 부끄러운 어린아이였다. 자신의 작은 손을 내려다본 소년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군요. 바삐 살다 보니 제 나이가 몇 살인지도 잊고 살았군요.”

“그래. 고단한 삶에 치여 살다 보면 그럴 수 있지.”

원래 고생을 많이 하면 빨리 늙지 않나. 장 태감은 세월에 짓눌려 가라앉은 소년의 어깨를 보며 미지근한 위로를 건네었다. 절뚝거리는 왼 다리 아래로 길게 늘어지는 그림자에선 허옇게 세어버린 시간을 흘려보내는 노인의 피로감이 묻어났다. 늙은 환관은 그 서글픈 그림자에서 묘한 동질감을 느꼈다.

“자네도 참 고생 많았겠군.”

“고생이야 많았지요.”

“참 많은 일이 있었어.”

자네와 함께했던 시간이 떠오르는군.

장 태감의 말에 소년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주름진 그의 얼굴은 추억의 기쁨이 떠올라 있었다. 소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뵌 건 늦봄이었지요?”

“초여름이었던 것 같으이. 그때 자네는 참 풋풋하고, 재밌었지.”

“세상 무서운 줄을 몰랐지요.”

아니면 너무 무서워서 움츠러들었던가. 소년의 말을 들으며 장 태감은 뜨거운 햇살 아래에서 보았던 소년을 떠올렸다.

독이 바싹 오른 싸움닭처럼 사나웠던 소년은 풋풋하고도 어리숙했다.

참 후궁에선 보기 드문 인재로구나.

그렇게 감탄했던 지난날을 회상하며 장 태감은 현재의 소년을 보았다. 지금은 능구렁이가 다 되었군.

“난 자네가 금방 스러질 줄 알았네. 대쪽같은 인물인 줄 알았거든.”

“살려면 휘어질 줄도 알아야 하더군요.”

“그렇지. 허리가 유연한 사람만 살아남을 수 있지.”

여름의 자네는 제법 귀염성이 있었어.

장 태감은 유쾌한 농담으로 소년을 즐겁게 해주었다. 태어나 처음 들어보는 말에 소년은 폭소를 터뜨렸다.

“지금은 안 귀엽나 봅니다.”

“귀엽기는. 징글징글하지. 능구렁이야 아주.”

“장 태감님 덕분입니다.”

“이런, 못된 것만 배웠어.”

짐짓 실망스럽다는 듯 타박을 하는 장 태감을 보며 소년은 허리를 굽혀 굽실댔다. 그 밉상스러운 모습에 입꼬리를 끌어 올린 장 태감은 문득 생각났다는 듯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 보니, 자네를 보았던 돌담길이 이 근방이군.”

“낙엽이 쌓여있었지요.”

퍽 아름다웠지요. 소년이 웃자 장 태감은 성큼 앞서 걸으며 산책을 권유했다. 눈 내린 풍경도 가을 낙엽 못지않을 걸세. 소년은 거절하지 않았다.

사박사박. 낙엽 대신 눈이 밟히며 귀를 즐겁게 해주었다. 뒤로 길게 이어지는 흰 족적을 돌아보며 소년은 야트막한 돌담 앞에 섰다.

돌담 아래론 소복하게 눈이 쌓여 있었다. 저 눈이 다 녹기 전까지는 봄이 오지 않으리라.

이번 겨울은.

“이번 겨울은 유독 길고 춥군요.”

“그러게나 말일세. 이런 노인에게는 혹독한 겨울이야.”

“경사는 춥지요. 눈도 많이 오고.”

남쪽은 따뜻할 텐데 말입니다.

소년의 말에 장 태감은 제법이라는 듯 고개를 한번 까딱했다. 하지만 그 얕은 수긍은 소년에게 만족감을 주지는 못했다.

“나쁘지 않았네. 하지만 너무 직설적이고 노골적이야.”

“다음엔 좀 더 은유적으로 말할 수 있도록 노력해 보겠습니다.”

“하지만 너무 은유적이면 상대가 이해하지 못할 수 있으니 그 점 유념해두게.”

하지만 남쪽을 제시한 것은 나쁘지 않았네. 마음이 지친 상대였다면 분명 혹했을 것이야.

장 태감은 혀 위에서 소년의 말을 굴리며 음미해 보았다. 조금 전 완곡한 은퇴 권유를 들은 사람치고는 산뜻할 만큼 가벼운 태도였다.

“남쪽이라. 만약 간다면, 자네는 어느 지방을 추천하겠는가?”

“역시 광동이지요. 아니면 소주도 좋고요.”

“항주는 추천 안 하나?”

“항주는 놀기 좋은 곳 아닙니까.”

그렇지. 자네처럼 젊은이라면 모를까, 나 같은 늙은이에게 항주는 너무 소란스럽지. 빙그레 웃던 장 태감은 제안을 역으로 돌려 소년에게 물었다.

“그렇다면 자네는 어떤가. 이 추운 겨울, 따뜻한 곳으로 떠나고 싶은 생각 없나?”

“떠나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지요. 하지만, 전 매인 몸 아닙니까.”

자신의 발목을 내려다보며 소년이 부럽다는 시선을 보내오자 장 태감은 흥미롭다는 듯 그에게 발언할 기회를 주었다.

“허어, 자네는 벌써 은퇴를 꿈꾸나 보군?”

“꿈만 꿀 뿐이지요. 전 개인적으로 은퇴하면 호남에 가 살 생각입니다. 동정호 근처에서요.”

“허허, 풍류를 즐기기에 동정호만 한 곳이 없지.”

“아침에 배를 띄워 술 한잔하고, 저녁에 돌아와 악양루를 보며 또 한잔하면 천당이 따로 있겠습니까.”

호들갑을 떠는 소년의 말에는 진실한 간절함이 배어 있었다.

그리 살 수만 있다면 근심이 어디 있고 걱정이 어디 있겠는가.

꿈과도 같은, 그리고 장 태감이라면 충분히 이룰 수 있는 달콤한 미래를 이야기하며 소년은 재차 말했다.

“장 태감님. 이번 겨울은 유독 추울 것 같습니다.”

뼛속까지 냉기가 스며드는, 그런 겨울이 될 겁니다. 칼바람에 살이 터지고 뼈마디가 얼어붙겠지요.

소년의 말에도 장 태감은 미소를 거두지 않았다.

“자네가 나에게 했던 말, 아직 기억하나?”

“태감님.”

“눈앞에 산 정상이 있는데, 고민한다면 바보 같은 일이 아닌가.”

고지가 눈앞에 있는데, 한번 밟아는 봐야지. 그 후에 내려오더라도. 일단은 밟아보고 난 후에 결정할 일 아닌가.

부드럽지만 단호한 거절이었다. 소년은 그의 결심을 꺾을 수 없음을 알고는 고개를 떨구었다. 이미 알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소년은 입술을 비집고 튀어나오려는 말을 억지로 삼켰다.

그 말은 장 태감에게 지나칠 만큼 모욕적이었다. 입술을 깨문 소년을 보며 장 태감은 그가 입에 담으려 했던 말이 무엇인지를 짐작했다. 그 어리숙한 염려를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며 장 태감은 입을 열었다.

“나는 지금껏 많은 겨울을 보내왔네. 이번 겨울 또한 나에겐 지나가는 계절의 일부일 뿐이야.”

영원한 겨울은 없는 법이네. 참고, 기다린다면. 봄은 반드시 오지.

그 말을 끝으로 장 태감은 등을 돌렸다. 왜소한 노인의 등을 바라보며 신음을 삼키는 소년에게 장 태감은 마지막 인사를 남겼다.

정적에게, 그리고 친구이고 싶은 이에게 남기는 마지막 인사였다.

“봄이 오면, 함께 술 한잔하세.”

정적관계이며. 동시에 친구인 이에게 소년은 화답했다.

“예,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 * *

“그래. 장 태감은 결국 선택을 했군.”

태감은 오랜만에 정치가로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새카만 가면을 눌러쓰고 차가운 판단을 내리는 그의 냉정한 모습에 소년은 감개가 무량함을 느꼈다. 감격으로 물든 소년의 시선에 태감은 머쓱한 듯 가면을 고쳐 썼다.

“하지만 의외로구나. 네가 장 태감에게 기회를 주자 할 줄은 몰랐다.”

“그분께서 돌아서신다면, 안양비 님께 심대한 타격을 입힐 수 있을 테니까요.”

밑져볼 만한 도박 아닙니까.

소년의 변명에 태감은 의뭉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소년을 압박했다.

호오, 진정 그뿐이냐?

“난 네가 장 태감에게 정을 주었다고 생각했다.”

넌 은근히 사람이 무른 구석이 있으니까. 소년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정이 쌓일 만한 관계도 아니지 않습니까.”

정적관계이고. 존경할 만큼 청렴결백한 분도 아니지요. 아니, 오히려 수없이 많은 비리를 저질러온 악덕 환관이니 경멸해야 마땅하겠지만.

“어쩐지 미워할 수 없는 분이더군요.”

아마 함께 늙어가는 처지라 그런가 봅니다.

소년의 말에 태감은 헛웃음을 흘렸다. 비웃음 같기도 했다.

“같은 노인 동지다 이거냐?”

“나이 들면 마음이 약해지는 법입니다. 아직 젊으셔서 모르겠지만.”

“내가 말 안 해줬느냐? 용의 피는 늙지도 않는단다.”

서른쯤에서 노화가 멈추지.

태감의 뻔뻔한 말에 소년은 역정을 내었다.

아주 다 해 먹으시지 그러십니까. 예? 비도 내려, 늙지도 않아. 병도 안 걸려. 염병하겠네, 진짜.

“어쩐지, 폐하께서도 이상할 정도로 피부가 고우셔서 묘하다고 생각은 했습니다만.”

“너무 부러워 말거라. 사람이 때 되면 늙어가야 자연스러운 일이지.”

아이고, 지랄을 하십니다.

소년이 표정으로 업신여기는 것을 모른 척하며 태감은 시선을 돌렸다. 태감은 한참을 소년과 아웅다웅한 끝에야 본제로 돌아올 수 있었다.

“아무튼, 이제는 서로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군.”

남은 건 전면전이군요. 후궁의 패권을 건.

소년이 무덤덤하게 말하자 태감은 내키지 않는다는 듯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망설임이 느껴지는 그 동작에 소년은 의문을 표했다.

“뭐 문제 있으십니까?”

“문제야 많지. 아주 도처에 널려있지.”

장 태감이 그리 녹록한 사람은 아니지 않으냐. 그리고. 태감은 잠시 숨을 들이마신 다음 가늘고 느릿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장 태감을 친다면. 필연적으로 안양비가. 그리고 그 뒤의 이부상서가 움직이겠지.”

정계의 거물. 그를 묶어둘 만한 수단이 없다면…….

소년은 태감이 흐린 말끝을 이어받았다.

“어렵겠지요.”

“그래, 어렵지. 흔들고 상처를 입힐 수는 있어도, 숨통을 끊지는 못하겠지.”

다만, 한동안 경거망동하지 못하도록 위축시키는 정도라면 가능할 게야.

말을 매듭지은 태감은 가면을 벗고는 늘어지게 기지개를 켰다. 서늘한 공기가 살짝 땀이 맺힌 그의 이마를 식혀주었다.

“공적인 이야기는 끝. 이제 사적인 시간이다.”

“어째 사적인 시간에 더 집중하시는 것 같습니다.”

“공과 사를 철저히 구분하는 것뿐이다.”

“공직자의 귀감이십니다 그려.”

예, 그렇지요. 고위 공직자도 사람인데. 먹고 살아야지요.

소년의 비아냥에도 태감은 뻔뻔하게 낯빛 하나 바꾸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 당당함은 오히려 소년을 질리게 했다. 잠시 재치 있는 농담을 생각하던 소년은 결국 자신의 패배를 선언했다.

“야식거리를 내오지요.”

“오늘은 새우라 하였지?”

“예, 새우요립니다.”

싱싱한 보리새우가 들어와서, 한번 튀겨보았습니다.

소년의 말에 태감은 열광적인 반응을 보였다. 싱싱하고 달콤한 새우튀김! 야식에 이보다 적절한 메뉴가 또 있을까! 자고로 야식은 기름져야 한다는 태감의 지론에 완벽하게 부합하는 음식이었다.

“호오, 정확히 어떤 요리지?”

“간소하인(干烧虾仁)이라 불러야 하겠지만. 부디 친근하게 이렇게 불러주시길 바랍니다.”

깐쇼새우라고요.

소년은 둥근 은쟁반을 가득 채울 만큼 큰 접시에 산더미처럼 많은 새우튀김을 담아왔다.

불그스름한 소스에 볶아진 새우튀김은 머리부터 꼬리까지 온전하게 달려있었으며 향긋하고 알싸한 향기가 솔솔 피어올랐다.

“껍질은 제거하였지만, 머리는 제거하지 않았구나. 어째서지?”

“싱싱하고 질 좋은 새우입니다. 내장의 그윽한 풍미는 단연 압권이지요.”

“그렇다면. 머리부터?”

“머리부터 덥석 드셔주십시오.”

머리부터라.

태감은 두 번 묻지 않았다. 호쾌하게 머리를 베어 문 태감은 그 아삭아삭하고 경쾌한 식감에 눈을 부릅떴다.

예상했던 불쾌한 딱딱함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기분 좋게 바스러지는 바삭함. 그 속으로 느껴지는 진한 새우의 내장. 씹을 때마다 향긋한 내장과 어우러지는 새콤달콤하면서도 톡 쏘는 양념.

게의 내장과는 비교할 수 없는 그윽하고 섬세한 새우내장의 짙은 감칠맛이 혀에 스며든다. 찰나의 순간 혀를 스치고 지나가는 풍미가 스러지고 난 후. 허무감에 사로잡힌 입안에 태감은 새우의 몸통을 밀어 넣었다.

바사삭.

요리사의 수고로움 만큼 요리는 맛있어지는 법이었다. 탱글탱글한 새우살을 어금니가 살짝 베어 물면 툭 하고 터지는 듯한 감각이 앞니를 타고 전해졌다.

바삭한 튀김옷이라는 껍질 안에 갇혀있는 풍성한 새우의 향기. 은은하게 새콤달콤한 양념 사이로 스며든 고소한 새우향을 확인한 순간 태감은 벼락처럼 자리에서 일어나 외쳤다.

“새우 기름! 벗겨낸 껍질로 새우 기름을 만들었구나!”

바삭하게 볶은 껍질을 압착해 새우의 풍미가 진하게 남아 있는 새우 기름을 만든 거야!

태감이 확인하듯 묻자 소년은 떨떠름하게 답했다.

“예? 아, 예. 그렇습니다.”

뭐 대수로운 일이냐는 듯한 소년의 대답에 태감은 시무룩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았다. 이해할 수 없다는 듯 태감을 흘겨보던 소년은 이내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리고, 저 내일 휴가 좀 쓰겠습니다.”

“휴가? 어디 갈 곳이라도 있느냐?”

“잠깐, 늙다리 친구 한 명 만나러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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