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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관의 요리사-178화 (178/314)

환관의 요리사 178화

다정한 연등의 불빛 아래로 그림자가 춤을 춘다. 정숙하게 흐르는 후궁의 밤하늘 아래에 소란스러운 활기가 번진다.

시녀들의 목소리.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타들어 가는 모닥불.

근심도, 걱정도, 불화도 없는 축제의 한 귀퉁이에서 소년은 웃고 떠들며 즐기고 있는 이들을 바라보았다.

그곳엔 어깨를 내리누르는 책임과 의무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난화비와 부여비, 홍엽비. 존귀한 황후 후보자라는 그늘을 걷어낸 그녀들은 여염집 처녀와 다를 바 없었다. 짓궂은 농담을 나누고, 호들갑을 떨고, 웃는다. 평범하게 웃는다.

그녀들의 때 묻지 않은 웃음은 소년에게 만일이라는 무의미한 가정을 떠올리게 했다.

만일 이곳이 후궁이 아니었다면. 만일 그녀들이 후궁의 비가 아니었더라면.

만일. 만약에. 어쩌면. 혹시.

길게 늘어지는 상념 속에서 발랄한 여인의 목소리가 그를 불렀다. 소년은 고개를 들었다.

“오상호 님!”

“허허, 골라오셨습니까?”

소년은 난화비가 내민 바구니를 받아들었다. 신선한 오징어에 가리비, 굴. 새우와 백합 조개가 가득 담겨 있었다.

소년은 잠시 얼굴을 매만졌다. 분명 우울한 표정을 짓고 있을 얼굴에 억지로 미소를 담고, 소년은 쾌활한 목소리를 꾸며냈다.

“물이 아주 좋군요.”

비들의 기대감이 담긴 시선을 한몸에 받으며 소년은 재빠르게 조리에 들어갔다.

가리비나 굴은 가볍게 손질한 다음 석쇠 위로 올라갔고 오징어와 새우는 볶음으로. 백합은 그대로 맑은 탕으로. 소년의 주위에는 금세 짭조름한 바다 향기가 퍼지기 시작했다.

“향기 좋다…….”

몽롱한 눈으로 요리를 지켜보던 홍엽비가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 무의식적인 한마디에 난화비와 부여비는 적극적으로 동조했다.

마치 오늘이 아니면 기회가 없다는 듯이 그녀들은 온갖 주제를 찾아내어 대화를 이어나갔다.

주제는 뭐든지 좋았다. 음식에 대한 기대감, 열정적으로 참여해준 시녀들에 대한 감사. 화려하게 타오르는 불꽃과 몽환적인 연등에 대한 찬사.

심지어 형식적이다 못해 무미건조하기까지 한 날씨 이야기까지도 오늘만큼은 유쾌한 농담으로 변모했다.

즐거운 담소가 무르익어 가는 동안 가리비 역시 석쇠 위에서 노릇하게 익어갔다. 입이 쩍 벌어진 가리비는 탐스럽고 탱글탱글했다.

껍데기 아래쪽에 고인 즙이 끓어오르는 것을 보며 소년은 버터 한 숟갈을 듬뿍 떠 관자 위에 올렸다. 버터가 녹아내린다.

유지방의 달콤한 향기가 짭조름한 바다 내음에 섞여든다. 위장에 직접적으로 호소하는 폭력적인 향기에 비들의 시선이 소년에게로 모인다.

가리비의 즙과 버터가 숯불의 열기에 졸아든다.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소리. 쉼 없이 조잘거리던 비들의 입에 초조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버터가 뭉근하게 녹아내리고, 가리비가 충분히 익은 것을 확인한 소년은 마지막으로 간장을 두 방울 떨어뜨렸다.

한 방울, 두 방울. 관자 위로 간장 방울이 떨어진다. 흘러내린 간장 방울이 끓어오르는 버터와 가리비 즙에 섞인다.

간장이 타들어 가는 향기. 그 반칙 적인 향기. 그 아찔한 향기에 난화비는 자신의 이성이 마비되는 것을 느꼈다.

난화비의 시선이 옆으로 향했다. 빤히 가리비를 들여다보던 부여비, 홍엽비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녀들의 시선 속에서 폭력적인 결의가 맺어졌다. 세 비의 협공을 당할 위기 속에서 소년은 느긋하게 요리를 마무리했다.

마치 그녀들을 놀리는 듯한 느긋함에 난화비는 격렬한 충동을 느꼈다.

“자, 드셔보시지요.”

난화비는 거의 뺏어들 듯이 가리비를 받아들었다. 껍데기 안쪽에서 뽀얀 색으로 빛나는 탐스러운 가리비 관자는 참을 수 없을 만큼 유혹적이었다.

최상품의 상아가 이런 빛깔일까. 감상은 거기까지였다.

그녀들의 입은 그 순간 표현의 의무를 포기했다.

결대로 찢어지는 섬세한 질감. 버터에 튀겨지듯 익으며 바삭해진 겉면을 조심스럽게 씹으면 살며시 무너져 내린다.

버터가 그을리며 가리비 살에 입힌 고소한 향기는 어딘가 견과류를 닮아 있었다.

순한 바다의 짠맛이 살짝 느껴지고 나면, 혀 위로는 달콤하고 진한 가리비 즙이 스며든다. 어쩜 이렇게 달콤할까.

“정말로, 살살 녹네요.”

“혹자는 가리비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조개라 말하는데, 그 이유를 알 것 같아요.”

“달큰하고 바다 향기 물씬 풍기는 즙에 녹아든 버터의 풍미. 거기에 간장의 향이 입혀지니…….”

보드라운 관자를 먹은 난화비는 껍데기를 들어 아래에 고인 황홀한 즙을 마셨다.

후궁의 예법에 어긋나는 모습이었지만 누구도 그 점을 지적하지 않았다. 가리비 즙과 버터, 간장이 졸아든 즙은 어지러울 만큼 농후했다.

희열에 물든 난화비의 표정에 부여비와 홍엽비 또한 껍질을 기울였다.

“가리비도 좋지만, 굴은 어떠신지요.”

소년은 나른한 목소리로 다음 요리를 권했다.

껍질이 쩍 벌어진 굴은 통통하고 촉촉했으며 유백색을 띠고 있었다. 강렬한 향기를 뿜어내며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굴 즙 위로 소년이 레몬즙을 뿌렸다.

산뜻한 산미가 더해진 굴을 접시에 올린 소년은 고민하듯 고개를 기울였다.

“버터를 올려도 맛있겠지만, 가리비에도 이미 버터를 올렸으니. 역시 이대로 먹는 게 좋으려나. 흐음, 그래도 버터의 감칠맛을 포기하는 것도 아쉽고.”

어찌 하는 게 좋을까.

난처한 상황에 빠진 것처럼 곤란한 표정으로 시간을 끄는 소년을 보며 난화비는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그러쥐었다. 소년은 재빨리 굴을 반으로 나눠 절반을 그대로, 나머지에는 버터를 올렸다.

“하하, 이렇게 반씩 나누면 되는 일인데, 멍청한 고민을 하고 있었군요!”

“오호호, 오상호 님도 참, 짓궂으시다니까.”

“어서 드셔보시지요! 다음 요리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굴은 가리비보다 즙이 많았고 더 짭조름했다. 비단결처럼 보드라운 촉감, 씹으면 말캉하고 달착지근하며 가리비보다 진하고 야성적인 바다 향기가 흘러넘친다.

“버터를 올린 굴은 파를 조금 곁들여도 별미지요.”

아삭아삭한 파의 식감과 아릿한 향이 비린내를 감춰주고 맛을 풍성하게 해준답니다.

소년의 설명에 비들은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버터와 파를 올린 굴구이. 그다음에 기다리는 것은 오동통한 새우와 오징어 볶음이었다.

탱글탱글한 새우와 쫄깃쫄깃한 오징어. 섬세한 풍미가 가려지지 않도록 양념을 최소화한 신선한 볶음요리를 먹고, 마지막으로 맑은 대합탕으로 입안을 정리하고 나면.

“배가…… 고프네요?”

“분명 실컷 먹은 것 같았는데.”

“이상하다, 평소 같았으면 배가 불렀을 것 같은데.”

그녀들의 위장은 이제 막 시작이라는 듯 거세게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다. 위장에서 울리는 격렬한 소리가 화음을 이루자 그 부끄러운 합주에 비들은 볼을 붉히며 폭소를 터뜨렸다.

“해물로 입맛을 돋우셨다면, 이제 본격적으로 야시장을 즐길 시간이지요.”

야시장의 명물 하면 뭐니 뭐니 해도, 마라향과(麻辣香锅) 아니겠습니까?

소년이 알싸한 마라 양념이 담긴 단지의 뚜껑을 열어 보이자 홍엽비가 반색을 했다. 당장에라도 군침을 흘릴 것 같은 표정의 홍엽비를 본 난화비는 흥미롭다는 듯 물었다.

“마라향과에는 어떤 재료가 어울릴까요?”

“뭐든 좋지요. 해산물, 고기, 채소. 뭘 넣어도 훌륭하지요.”

하지만 해산물은 방금 드셨으니, 이번엔 고기 위주로 짜보시는 게 좋겠지요. 날이 추우니 몸을 따뜻하게 하는 양고기를 위주로 하고, 쫄깃한 식감을 좋아하신다면 내장류를 더하시는 것도 좋습니다.

채소로는 버섯에 죽순, 목이버섯, 건두부를 넣으면 식감이 좋아지지요. 당면을 넣으면 매운 양념을 흠뻑 빨아들여 또 일품입니다.

연근을 넣으면 아삭아삭한 식감이 좋고, 또 배추를 넣으면 단맛이 살지요. 시원한 맛을 원하시면 콩나물이나 숙주를 넣으시고.

“또 감자를 넣으면 파근파근하니 좋지요. 양념이 텁텁해진다고 싫어하는 사람도 많지만, 매운 양념이 촉촉하게 밴 감자는…… 크!”

흥분한 비들이 식재료를 고르러 떠나자 소년은 건성으로 배웅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뻐근한 어깻죽지를 돌려준 후, 소년은 고개를 뒤로 돌렸다.

“이제 나오십쇼.”

“알고 있었느냐?”

“그게 숨은 거였습니까? 인기척이 대놓고 나던데?”

소년이 핀잔을 던지자 처마 밑 그늘에서 태감이 걸어 나왔다. 가면을 쓰긴 했지만, 그의 민망함은 감출 수 없었다. 머뭇거리며 주저하는 태감을 보며 소년은 피로에 찌든 숨을 내쉬었다.

“정 숨고 싶으시면 여장이라고 하고 오시든가, 왜 숨어서 궁상입니까?”

감쪽같았을 텐데. 소년이 농을 던지자 태감은 코웃음을 쳤다.

“나의 미모에 비 분들이 상처받으시면 어쩌려고?”

“쯧, 그것도 그렇군요.”

반박을 고려해 본 소년은 태감을 올려다보며 혀를 찼다. 가면으로 절반을 가렸는데도 태감의 빛나는 아름다움은 숨길 수가 없었다.

은은한 달빛 아래에서 찬란히 빛나는 태감의 우아함에 소년은 괜스레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근데 그 잘난 면상으로 왜 여기서 지지리 궁상이세요. 예?”

“그게, 왠지 저기 끼기는 좀 그래서…….”

“염병하겠네. 진짜.”

움츠러든 태감을 보며 소년은 인상을 와락 찌푸렸다. 평소에는 입에 칼을 물고 정치판을 주름잡던 양반이, 뭔 안 어울리게 수줍음은. 턱밑까지 차오른 짜증을 눌러 담으며 소년은 다가오는 난화비를 향해 눈짓을 보냈다.

소년과 눈이 마주친 순간 난화비는 그 뜻을 이해하고는 살가운 목소리로 태감에게 다가왔다.

“어머, 사례 태감 아니세요?”

“안녕하십니까. 난화비 님.”

“덕분에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감사드려요.”

“커흠, 아닙니다.”

잠깐 점검하러 오셨나 봐요?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난화비는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잠깐 시간을 내달라 부탁했다.

“혹시 괜찮으시다면, 태감께서도 함께 식사하지 않으시겠어요?”

“그래도 괜찮으시다면,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못 이기는 척 대바구니를 받아든 태감이 노점 쪽으로 향하자 소년은 난화비에게 감사를 표했다.

“감사합니다.”

“후훗, 별말씀을요. 대신, 맛있게 부탁드려요.”

난화비가 골라온 재료를 확인한 소년은 탄성을 질렀다.

“호오, 아주 맛있는 것들만 골라오셨군요.”

얇게 썬 차돌박이에 우삼겹, 숙주와 배추에 느타리버섯과 메추리 알. 그리고 당면 한 움큼과 떡. 탄수화물 가득한 난화비의 바구니에 소년은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

“탁월한 안목이십니다.”

“너무 욕심껏 골랐나 봐요.”

“허허, 이런 곳에선 조금 욕심을 부려도 좋지요.”

채소가 조금 부족한 것 같기도 하지만…….

난화비를 슬쩍 올려다본 소년은 이내 불 위에 철과를 올리고 유채씨 기름을 둘렀다.

“오늘 하루 정도는 괜찮겠지. 하루 정도는.”

하루 정도는 신께서도 용서하시리라.

기름진 마라향과를 만들며 소년은 남몰래 기도를 올렸다.

* * *

즐거운 시간 후에는 반드시 고단한 뒷정리가 따른다. 이튿날. 시녀들에게 도움을 받아 서난궁의 내원을 깨끗하게 정리한 소년은 왼 다리를 질질 끌며 피로에 찌든 숨을 몰아쉬었다.

욱신거리는 팔다리에 스며든 세월의 서글픔이 그를 짓눌렀다.

그늘이 드리운 그의 옆얼굴을 보며 이삼이 말없이 그에게 팔짱을 껴왔다. 자신에게 기대라는 듯이. 따스한 온기가 전해져 오자 소년은 힘을 조금 풀고 이삼의 부축을 받았다.

“어젠 즐거웠니?”

“네! 재밌었어요!”

연회가 끝난 후에는 시녀들과 남은 재료들을 모아 뒤풀이를 벌였다. 춤추고 노래하고 먹고 마시는, 성대한 축제였다.

인원이 많았던 만큼 소년은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요리를 해야 했지만, 해맑은 이삼의 미소는 어제의 고단함에 대한 충분한 보상이 되어주었다.

“그래. 그럼 다음에 또 하자꾸나. 다음엔 더 크게.”

정식으로 허가를 받아서 예산을 할당받으면 일단 회장을 화려하게 꾸며야지, 노점도 좀 더 가짓수를 늘리고. 그 전에 우선은 돌아가서 느긋하게 한숨 자자꾸나.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고개를 들던 소년이 갑작스럽게 멈춰 섰다. 그리고 한발 늦게, 이삼 또한 발을 멈추었다.

북림궁으로 향하는 갈림길에서 장 태감이 걸어오고 있었다. 처음 보는 낯선 이와 함께. 소년은 그자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여우처럼 가는 눈에 턱선이 가늘어 유약해 보이는 사내였다. 입고 있는 옷의 재질이 좋은 것을 보면 직급이 높은 환관이고, 손이 희고 고운 것을 보면 좋은 집안 출신인 듯했다.

아마 집안이 몰락하며 살길을 찾기 위해 거세하고 후궁에 들어왔으리라.

‘귀걸이나 반지 같은 장신구는 하지 않았지만, 신발이나 혁대는 고급품이군. 실리적인 성격인가 본데.’

소년이 손짓하자 이삼은 폴짝 뛰어 담장을 넘어갔다. 이삼이 숨은 것을 확인한 소년은 표정을 매만지고는 장 태감이 다가올 때까지 기다렸다. 점점 다가올수록 크게 울리는 장 태감의 목소리에 소년은 숨을 삼켰다.

낮게 가라앉은 장 태감의 목소리에선 불쾌감과 분노가 느껴졌다. 늘 능구렁이 같았던 장 태감이 화를 숨기지 않는 모습에 소년은 묘한 안도감을 느꼈다.

바늘 하나 들어갈 틈 없을 것 같았던 그에게도 결국, 틈은 있었다. 그리고 그 틈이 무엇인지 확인할 수 있다면 앞으로 큰 도움이 되리라.

소년을 발견한 장 태감은 감탄스러운 표정 변화를 보여주었다. 언제 화를 냈었냐는 듯이 만면에 화색을 띤 장 태감은 반가운 손님을 맞이하듯이 정답게 인사했다.

“이거 오상호 아닌가!”

“오랜만에 뵙습니다.”

“허허, 요즘 얼굴 보기가 쉽지 않더군. 그래, 하는 일은 잘 되는가?”

소년은 대답 대신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수많은 의미가 함축되어있는 소년의 표정에 장 태감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거 다행이구먼. 소년의 눈을 찬찬히 들여다보던 장 태감은 문득 생각났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이것 참. 내 정신 좀 보게. 이거 인사가 길어져 이 친구 소개를 깜빡 잊고 있었군.”

장 태감이 손짓을 하자 환관이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소년을 가만히 위아래로 흩어보던 환관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내관감에서 일하고 있는 금조(錦鳥)라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오상호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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