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관의 요리사 171화
소년은 한숨을 토해냈다. 마치 폐부 밑바닥에서 끌어올린 듯한 더운 숨결에는 추억이란 이름으로 미화할 수 없는 과거에 대한 회한이 섬세하게 얽혀 있었다. 표자승은 가만히 소년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이제 고작 열 살이나 넘었을까 싶은, 솜털이 보송보송한 그가 후궁에서 겪어온 삶을. 어쩔 수 없이 삼켜야 했던 피눈물과 뜬눈으로 지새워야 했던 수많은 밤 이야기를 들었고, 비틀리고 굳은살 박이며 투박해진 그의 손에 얽힌 고단한 이야기를 느꼈다.
소년은 온몸으로 그를 말리고 있었다. 그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스며든 염려와 걱정, 그의 얼굴을 얼룩지게 만드는 쓰디쓴 슬픔, 그리고 희미하게 묻어나는 죄책감을 표자승은 보았다.
“오지 마라. 표자승. 여긴 네가 올 곳이 못 된다.”
“스승님.”
“나라를 위해서라고 생각하지 마라. 넌 이미 이 나라, 이 황실을 위해서 충분히 많은 일을 해줬다. 넘치도록 희생했어.”
네가 기꺼이 낸 그 많은 지원금, 황제 폐하와 태감님을 위한 지출을 생각해 봐라. 우린 필요한 것이 있을 때마다, 널 참 많이도 부려먹었지. 그리고 너를 장기 말 삼아 정적을 고꾸라뜨리기까지 했다. 넌 사대 상단의 일원이었던 금화 상단에 도전까지 했어.
그것이 너를 위한 일이었다고 정당화하지 않으마. 그건 우리가 널 이용한 일이었다. 넌 이미 충분히 많은 것을 해줬어.
소년은 숨을 헐떡였지만, 말을 멈추지는 않았다. 흉금 가장 안쪽에 응어리져 있는 것까지 모조리 꺼내겠다는 듯이. 그에게 복심을 숨기지 않겠다는 듯이. 소년은 말을 이었다.
“명예에 이끌리지 마라. 표자승. 넌 이미 충분한 명예를 손에 쥐었다. 이 경사에서 너를 모르는 이가 누가 있느냐? 넌 경사에서 가장 큰 다관의 주인이고, 사대 상단의 일원인 표가 상단의 상단주이다. 경사에서 가장 영향력 있고 존경받는 상인이야. 이 이상 너를 치장할 필요는 없다.”
“스승님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지요.”
“내 공을 생각하지 마라. 결국, 나의 도움은 말 몇 마디에 불과했어. 누가 그것들을 이루었지? 누가 좌절을 딛고 일어나, 숙원을 달성했지? 금화 상단의 정복자가 누구냔 말이냐. 바로 너다. 표자승. 네가 이룬 일이다. 넌 이미 충분히 자랑스러운 남자다.”
그만하면 되었어. 황제를 위해 일한다는 허울뿐인 명예에 눈을 돌리지 마라. 그 보잘것없는 명예로 네가 쌓아 올린 것들을 덧칠하지 마. 이미 넌 찬란하고, 훌륭하다.
소년은 숨을 고르기 위해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의 가슴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던 표자승은 시선을 위로 올렸다.
숨을 몰아쉬고 있는 소년의 얼굴을. 어린 스승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거무스름한 그림자가 드리운 눈가 아래로 생기를 잃은 매부리코. 얄팍한 입술은 메말라 갈라져 있었다.
피로에 찌들어 있는 소년은 이미 조숙이라는 단어로는 부족한 노쇠함이 있었다.
표자승은 들어 올리려던 손을 내렸다. 열리려던 입을 닫고, 소년의 말을 기다렸다. 잠깐의 시간이 흐른 후, 소년은 다시 입술을 비틀어 열었다. 말을 꺼내기 망설여진다는 듯, 한참 동안 입술을 달싹거리던 소년은 결국 마지막까지 미뤄왔던 자신의 본심을 이야기했다.
“네가 안 왔으면 좋겠다. 표자승.”
큰일을 한다는 건, 황제 폐하를 위해, 나라를 위해 일한다는 건. 너를 잡아먹는다. 웃음을 빼앗아가. 대의란 것은 그런 것이다. 그 대의를 이루기 위해 개개인의 희생을 요구하지.
“난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다.”
결국, 그것이 소년의 본심이었다.
마지막까지 망설였던 그 말을 꺼내놓은 소년은 허탈하다는 듯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목을 뒤로 꺾어 천장을 올려다보던 소년은 웅얼거리듯 말했다.
“이런 것에 눈 돌리지 말고, 행복하게 살아. 넌 이미 행복할 수 있는 모든 조건을 갖추었다. 좋은 술도 마시고, 노래를 부르고, 마음껏 인생을 즐길 수 있어. 자유롭게.”
결혼해라. 표자승.
소년의 말은 고리타분하기까지 했다. 지금껏 수도 없이 들어온 조언에 표자승은 헛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소년은 진지했다.
“마음을 안주할 장소를 만들어라. 좋은 여자를 만나. 수더분하고, 너와 마음이 잘 맞는 사람을 찾아. 함께 있으면 마음이 편하고, 네가 사랑해준 만큼 널 사랑해 줄 사람. 그런 사람은 반드시 있다. 네가 아직 찾지 못했을 뿐이야. 그런 사람을 만나서, 가정을 이뤄.”
그게 네 마음을 붙들어 줄 거다.
그 말을 끝으로 소년은 침묵했다. 이제는 그의 대답만이 남았다는 듯이. 조용히 그를 기다리는 소년에게, 표자승은 질문을 던졌다. 결코, 소년이 원하던 답은 아니었다.
“스승님께선, 어떠십니까.”
“말하지 않았느냐? 네가 오지 않기를 바란다고. 굳이 정치판에 발 들이밀지 말고 행복하게 살라고.”
“그게 아니라, 제가 들어간다면, 스승님께 도움이 되겠냐는 말이었습니다.”
표자승의 말에 소년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야차 같은 표정으로 달려든 소년은 표자승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소년은 마치 상처 입은 짐승처럼 으르렁거리며 그에게 경고했다.
“나에게 은혜를 갚겠다. 그따위 말을 지껄일 거라면 관둬라. 표자승.”
“스승님.”
물론, 제가 스승님께 큰 도움이 되지 않으리란 건 잘 알고 있습니다. 표자승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무릎을 꿇었다.
“그것을 떠올려야 함을 알면서도, 저의 편의와 안정을 위해 스승님의 문제를 무시해 온 저의 사려 깊지 못함을 용서해 주십시오.”
“무슨 문제 말이냐.”
“스승님께서 어리다는 사실 말입니다.”
표자승은 고개를 들 수 없다는 듯, 깊게 고개를 숙였다. 소년은 깔끔하게 기름을 발라 넘긴 그의 머리를 보며 당혹스러움을 느꼈다. 어째서 그 말을 지금 꺼낸 걸까?
“그동안 스승님께 참 많이도 의지해 왔지요. 사업에 대한 것도, 인생에 대한 고민도. 이 불민한 제자는 모두 스승님께 떠맡겼지요. 스승님께선 늘 조건 없이 저의 고민을 받아주셨습니다.”
“네가 날 스승이라고 불렀으니까. 나 역시 제자에게 스승 된 도리를 다했을 뿐이다.”
“예, 스승님께선 단 한 번도 그 도리를 저버리지 않으셨지요. 그리고 전, 그런 스승님께 너무 많은 어리광을 부렸습니다.”
스승님께선 제가 이룬 것이 온전히 저의 공이라 하셨지요. 그렇지 않습니다. 만약 그렇게 여긴다면 저야말로 후안무치한 놈이겠지요.
이 어리석은 놈이 경사 제일의 다관의 점주가 될 수 있도록 지혜를 알려주신 분이 누구십니까. 사대 상단을 고꾸라뜨리고, 그 자리를 차지할 수 있도록 도와주신 분은요.
표자승은 고개를 들어 그의 어린 스승을 올려다보았다.
책무에 짓눌려 있는, 그림자가 드리운 소년의 얼굴을.
“스승님께서 저를 다시 꿈꾸게 해주셨습니다. 좌절하고 쓰러진 이 표자승이라는 놈을 다시 일으켜 세우고, 다시 살게 해주셨지요. 스승님께선 제게 모든 것을 다 해주셨는데도.”
저는 스승님께서 품으신 짐에 대해서 무관심했습니다.
표자승은 손을 들어 소년의 손을 쥐었다. 관절이 굵어지고 비틀려 있었지만, 틀림없이 세월에 찌든 노동자의 손이었지만. 소년의 손은 참 작았다. 표자승은 그 손을 내려다보았다.
“이토록 작고, 이토록 어리신 것을 알면서도. 당신의 짐을 알면서도 모른 척해온 제자를 용서해 주십시오. 스승님.”
제가 조금이나마, 당신의 짐을 나눠서 질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그 결연한 고백 앞에서 소년은 궁색한 변명거리는 찾는 사람처럼 식은땀을 흘렸다. 표자승의 결의에 답해주고 싶어 하는 본능과 그를 말려야 한다는 이성의 대립 사이에서 소년은 자신도 모르게 그의 숨겨왔던 비밀을 토로했다.
“내가 어려 보인다고 한 말, 진심이냐?”
“예? 예, 스승님.”
“한 번도 의심해 본 적은 없고?”
이해할 수 없는 질문에 표자승은 의도가 궁금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소년의 눈동자 속에선 잠시 한심하다는 듯한 기색이 흘렀다.
이걸 순진하다고 해야 할까. 멍청하다고 해야 할까. 소년은 고민했지만, 그 결과를 입에 담지는 않았다.
“이상하지도 않았냐? 니 아들뻘인 놈이 너한테 반말이나 찍찍하면서 애늙은이 흉내 내는 게?”
“스승님이시니 그럴 수도 있겠다고…….”
“지금까지 나를 뭐라고 생각해 온 거냐?”
그야 뭐, 하늘이 내신 신인이시구나.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면목 없다는 듯이 머리를 긁적이는 표자승을 보며 소년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 낄낄거리는 실소는 점차 찢어질 듯 날카로운 파안대소(破顔大笑)로 변했다.
바닥을 구르며 한참을 웃던 소년은 허파에 공기가 부족하다는 듯 꺽꺽대며 일어났다. 눈초리에 매달린 눈물을 훔치며, 소년은 입꼬리를 올렸다.
“자리에 앉아봐.”
“예?”
“편한 자세로 앉아보라고.”
우리 이야기 좀 해야겠다. 그렇지?
* * *
소년은 또다시 새벽 별이 뜨는 시간이 되어서야 연좌궁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제는 익숙해진 새벽하늘을 올려다보며 소년은 한숨을 내쉬었다. 자야 할 때 잠을 못 자니 키가 안 크지.
피로가 내려앉은 관절은 마치 기름칠하지 않은 경첩처럼 삐거덕거렸다.
찢어질 듯이 당겨오는 날갯죽지를 조심스럽게 풀어주며 소년은 연좌궁 집무실의 문을 열었다. 그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는 것을 안다는 듯이. 소년의 행동은 거침이 없었다.
그의 예상대로, 집무실에는 태감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작은 촛불 하나로 방을 밝힌 채. 차가운 새벽 공기에 움츠러든 촛불은 일렁이며 태감의 그림자를 음산하게 흔들리게 했다.
잘 만들어진 인형처럼 무릎에 손을 모은 채 앉아 있는 태감의 모습은 소름 끼칠 만큼 불길하게 느껴졌다.
“안 주무십니까?”
무뚝뚝한 목소리가 방 안을 울리자 태감은 그제야 소년이 왔다는 것을 알아차렸는지 느릿한 동작으로 고개를 들었다.
텅 빈 눈동자에 또렷한 초점이 잡히자 태감은 비로소 사람 다운 생기가 느껴졌다.
“자야지. 네 보고를 듣고.”
어찌 되었느냐?
흐릿한 미소를 짓는 태감을 올려다보며 소년은 씹어 뱉듯이 대답했다.
“하겠다는군요.”
멍청한 새끼. 모자란 새끼. 그렇게 하지 말라고 했는데.
소년은 혀끝에서 맴도는 말을 목구멍 안쪽으로 삼켰다. 하지만 소년의 표정은 누가 봐도 그의 울화가 느껴질 만큼 구겨져 있었다.
“탐탁지 않은 것 같구나.”
“그럼 마음에 들겠습니까.”
소년의 독기 어린 대답에도 태감은 희끄무레한 웃음을 지은 채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래, 고생 많았다. 밤이 늦었으니 이만 쉬거라.”
부드러운 말로 포장된 축객령이었다. 휴식을 권하는 태감을 보며 소년은 치밀어 오르는 욕지기를 간신이 참는다는 듯이, 이를 악물며 물었다.
“이걸로 제 일은 끝입니까?”
“그래, 끝이다.”
“그 녀석은 앞으로 어떻게 되는 겁니까?”
“정식으로 황제 폐하의 사람이 되었으니. 그에 상응하는 보답을 해둬야지. 그리고, 목줄도.”
소년은 더 이상 참지 못했다. 끓어 오르는 격노를 행동으로 옮기려던 소년은 차마 주먹을 휘두르지는 못하고 거세게 노호했다.
“도대체 이유가 뭡니까!”
“그를 포섭하는 이유 말이냐?”
“그게 변명인 건 알고 있습니다! 빌어먹을, 그렇게까지 해서 그 녀석을 감시하려는 이유가 뭡니까!”
그를 믿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태감은 처음으로 소리 내어 웃었다. 소년의 무지함을 조롱하는 비웃음이었고, 동시에 자조적인 웃음이기도 했다. 소년이 자신의 분노를 실행에 옮기기 전, 태감은 그에게 답을 알려주었다.
“믿기 위해서 그러는 거다. 그를 신뢰하기 위해서.”
소년은 침묵으로 그에게 답을 요구했다. 핏발선 눈으로 기다리는 그에게 태감은 달갑지 않은 이유를 들려주었다.
“말 그대로의 의미다. 표자승. 그 친구를 신뢰하기 위해서야. 내가, 그리고 황제 폐하께서.”
구두 맺어진 약속으로 안심하기에, 그는 너무 큰 인물이 되어버렸으니까.
태감은 마치 변명하듯 이야기했다. 자신의 실수를 이야기하듯이. 단조로운 태감의 어조는 소년에게서 분노할 기력을 빼앗았다.
“그는 경사에 막대한 영향력을 가진 인물이다. 문인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다관 막심의 점주이고, 존경받은 대상인이지. 정계와 재계. 양쪽으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이란 말이다.”
그의 성공 신화를 생각해 봐라. 그에 얽힌 내막을 모르는 이들에게 그의 이야기는 얼마나 화려하고, 대단하게 보이겠느냐? 그는 이미 수많은 이들의 우상이다. 실패를 딛고 일어선 승리자이고, 폭압을 휘두르던 금화 상단이라는 악을 물리친 영웅이지. 황제 폐하께서 그를 고려하여야 할 만큼. 표자승은 중요한 인물이 되었다.
“지금까지는 좋은 관계를 유지해 왔지. 그는 너를 스승으로 모시고 있고. 그가 우리를 위해 봉사한 만큼 우리 역시 합당한 대가를 내어주었다. 하지만, 그를 언제까지 믿을 수 있겠느냐?”
그를 계속 믿고 싶다면. 그와 계속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다면. 신뢰의 증표가 필요하지. 안심할 수 있는 증표가.
말끝을 끌며 고민하던 태감은 소년의 죄책감을 덜어줄 말 한마디를 끝에 덧붙였다.
“그것은 너의 책임이 아니다. 너는 그저 호의였을 뿐이지. 그를 이용하겠다 결정한 것도, 그에게 칼을 쥐여준 것도. 그를 믿지 못해 목줄을 채우려는 것도. 모두 나의 책임이다.”
소년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한참 후, 잠겨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다면, 앞으로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두 번째 질문이었다. 가만히 소년의 눈을 들여다본 태감은 그의 눈에서 분노의 기색이 사라졌음을 확인하고는 거짓 없이 대답했다.
“변하는 것은 없다. 너는 여전히 그의 스승이고, 그는 여전히 너의 제자야.”
그가 변심하지 않는 한, 그 관계는 변하지 않을 거다.
태감은 책상 서랍을 열어 자그마한 옥패를 꺼냈다. 그 어떠한 무늬도 새겨져 있지 않은 옥패는 붉은 수실이 달려 있었다.
“날이 밝으면 그에게 전해주거라. 그것이 증표라는 말도.”
소년은 한숨을 내쉬며 패를 받아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