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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관의 요리사-170화 (170/314)

환관의 요리사 170화

소년이 궁으로 복귀한 것은 늦은 오후였다. 아슬아슬하게 저녁상을 준비할 수 있을 시간.

인사도 없이 거추장스러운 외투를 벗어 던지고 주방으로 달려가는 소년의 뒤로 태감이 따라붙었다.

“이야기는 잘 끝냈느냐?”

“예, 잘 풀렸습니다. 기운이 없어 보여서 걱정했는데, 막상 돈 이야기를 하니까 사람이 달라지더군요.”

그 녀석은 천상 상인인 모양입니다. 소년은 낄낄거리며 저녁상에 오를 닭의 깃털을 뽑았다.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소년의 등을 보며 태감은 물었다.

“그에게 무엇을 팔라고 하였느냐?.”

“궁금하십니까?”

“그래. 궁금하구나. 알려다오.”

닭의 배 쪽으로 칼을 밀어 넣던 소년은 뒤를 돌아보며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세상에서 가장 비싸게 팔 수 있는 것을 팔라 했습니다.”

“가장 비싸게 팔 수 있는 것이라. 그것이 무엇이냐.”

“무엇이겠습니까. 허영심이죠.”

세상에 그보다 비싼 것이 또 뭐가 있겠습니까. 소년의 말에 태감은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소년의 말은 위정자로서 공감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 역시 때때로 상대의 허영심과 교만함을 이용한 계략을 짜곤 했으니까. 그것이 얼마나 매력적인 상품인지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잠시 인간의 본성에 대하여 고민하는 시간을 가진 태감은 또다시 질문했다.

“그렇다면, 어떤 방식으로 허영심을 팔 생각이냐?”

“허영심이란 것이 뭐겠습니까. 남에게 과시하고 싶은 마음, 자신의 우월함을 뽐내고 싶은 욕망 아니겠습니까. 그것을 만족시키는 법이야 뻔하지요.”

남보다 특별하게 대접해주면 되는 일이지요. 소년은 입꼬리를 기묘하게 일그러뜨렸다. 그것은 황금만능주의에 찌들어버린 망자의 얼굴이었다. 마른침을 삼키는 태감을 보며 소년은 그의 계획을 말해주었다.

“다관 막심에 회원제를 도입할 생각입니다.”

“회원제라?”

“예. 매년 회비를 내고, 그 대신 특별대접을 받을 수 있도록 해주는 거죠. 한마디로 말한다면 돈 낸 만큼 대접해 주겠단 소립니다.”

계절마다 출시하는 과자를 우선 적으로 회원들에게 공개한다든가, 한정판 다기를 제공한다든가. 다관 막심이 제공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마음껏 누릴 수 있게 해주는 겁니다.

소년의 설명에 태감은 의문을 제기했다.

“네 제안이 그리 만족스럽게 느껴지지는 않는구나. 과연 그 정도 특권을 누리기 위해 값비싼 회비를 내려 할까?”

“낼 겁니다. 애초에 낼 수밖에 없는 분들을 고객으로 선정하고 시작한 계획이니까요.”

태감님이야 합리적인 분이니 매력을 못 느끼시겠지요. 하지만 모든 사람이 태감님처럼 합리적이진 않습니다. 소년은 확신이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생각해 보십시오. 돈은 많고 시간도 넘쳐 흐르는 유생 나리들께서, 과연 남에게 자신의 부를 과시할 기회를 놓치실까요?”

“그래. 분명 사겠지. 남들이 누릴 수 없는 것을 누리고, 가지고. 과시하는 것. 그야말로 최고의 허영이로구나. 참으로 무서운 상술이야.”

태감은 질렸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과연, 도대체 그는 어디서 이런 흉악한 상술을 배워온 걸까? 그가 살던 세계는 이런 상술이 당연하게 여겨질 만큼 배금주의에 찌들어있는 걸까? 태감의 의문을 눈치챈 소년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이 정도는 상술이라고 할 수도 없지요. 그나마 제가 무식한 놈이라 여기서 멈춘 거지, 이쪽 분야 전문가가 왔으면 어리숙한 유생 나리들은 눈 뜨고 코가 베였을 겁니다.”

여긴 법이 좀 느슨하지 않습니까?

소년의 악랄하기 그지없는 예시를 들은 태감은 현기증을 느꼈다.

“그쪽에는 사기라는 단어가 없느냐?”

“속은 놈이 병신이라는 말은 있지요.”

“끔찍한 동네군.”

태감이 혀를 내두르며 감탄하는 동안 소년은 내장을 빼낸 닭에 간장을 골고루 발라준 다음 뱃속에 파와 생강을 채워 넣었다.

그다음 닭의 모가지를 갈고리에 꿰어 기름 솥 위에 건 소년은 국자로 끓는 기름을 떠 닭 위로 끼얹었다.

닭 껍질이 기름에 오그라드는 소리와 함께 향긋한 기름 냄새가 진동했다.

요리에 집중하기 위해 입을 다문 소년에게 태감은 그가 숨기고 있는 비밀을 털어놓을 것을 재촉했다.

“아직 말하지 않은 것이 하나 남아 있지 않으냐.”

“없습니다.”

“있을 텐데.”

태감의 시선은 집요했다. 이미 네가 숨기는 것이 무엇인지를 다 안다는 듯, 지금이라도 실토하면 용서하겠다는 듯한 무언의 압박에 소년은 결국 한숨을 내쉬며 서늘한 곳에 놓아둔 짐을 가리켰다.

“거 참, 밥 먹기 전에 군것질하면 안 되는데. 맛만 보십쇼. 맛만.”

“알았다. 알았어. 내가 어린아이도 아니고, 그 정도도 못 지킬까 봐 그러느냐?”

소년은 입을 닫았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전력으로 참은 것이리라. 소년의 배려심에 만족하며 태감은 낡은 보따리 속에서 엄중하게 봉해진 금속 통을 꺼내 들었다.

금속 통은 안에 얼음이라도 채워 넣은 것처럼 손끝이 시릴 만큼 차가웠다.

“이것이 다관 막심의 겨울 한정 과자인가.”

“숟가락 식탁에 있습니다.”

얼른 숟가락을 가져와 손에 쥔 태감은 뚜껑을 열고 그 내용물을 확인했다.

거무튀튀한 통 안쪽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새하얀 순백의 설원이었다. 얼굴로 훅 치고 올라오는 저릿한 냉기에 태감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다관 막심의 겨울 한정 과자. 바닐라 아이스크림입니다.”

“허어, 얼음과자로 듣기는 했지만, 참으로 차갑구나. 보아하니 과즙을 이용한 건 아닌 것 같고, 우유를 얼린 건가?”

숟가락을 입으로 가져간 순간 태감은 뒷골을 찌르는 듯한 충격을 맛보았다.

혀 위로 미끄러지는 차가운 감촉, 혀의 온기에 그것이 녹아내려 스며드는 순간 그의 입안엔 천국이 찾아왔다.

유지방이 풍부하게 함유된 우유의 고소한 풍미. 과하지 않게, 아주 살짝 존재감을 과시하는 단맛. 그리고 그 향기. 코끝에 달라붙을 것처럼 진한, 들이마시는 숨과 함께 폐부를 가득 채우는 그 달콤한 향기. 그 향기는 사람을 취하게 했다.

마치 새하얀 꽃을 한 움큼 입에 배어들고 숨을 들이마시는 듯한 농후한 꽃향기, 원색적일 만큼 강렬한 그 향기의 출처를 찾기 위해 기억을 더듬어 올라가던 태감은 이윽고 탄성을 내질렀다.

“바닐라! 이 매혹적인 그윽함이 어딘가 익숙하게 느껴져 의아하게 생각했다만, 역시 바닐라였구나!”

“예. 최근에 표가 상단이 찬드라 왕국과 교역로를 넓히면서, 안정적인 수입이 가능해 졌지요.”

맛보셨으면 이제 그만 드십쇼. 저녁 준비됐습니다. 다 튀겨진 닭을 접시에 올린 소년이 아이스크림 통을 회수하기 위해 손을 뻗자 태감은 마치 소중한 인형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어린아이처럼 통을 품에 안았다.

“태감님?”

“한 숟갈만 더 먹고 주마.”

“식후에 드셔도 되지 않습니까.”

“그러면 녹을 것 아니냐.”

녹으면 또 만들어 드리면 될 것 아닙니까.

한참을 옥신각신한 그들의 다툼은 결국, 태감의 승리로 끝났다. 그래도 차마 주인이었기에, 도저히 주먹을 쓸 수 없었던 소년은 한숨을 내쉬며 손을 내저었다.

알아서 드쇼. 당뇨병이 걸리든 말든.

툴툴거리는 소년을 보며 승리의 단맛을 즐기던 태감은 이내 아이스크림 통을 식탁에 내려놓고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정말 맛있구나. 이렇게 맛이 있으니, 네 계획은 분명 성공하겠지.”

“성공해야지요. 그래야 그 녀석도 좋고, 우리도 좋지 않습니까.”

“그렇지. 표자승. 그 친구는 우리의 중요한 자금줄이니. 성공해야지.”

말끝을 흐리며 시간을 끌던 태감은 이내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소년에게 물었다.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다.”

그 말은 소년에게 친구가 아닌 부하의 관계를 요구하고 있었다. 그와 함께 웃고 떠들던 친구로서의 질문이 아닌 황제의 심복. 사례 태감 양단으로서의 질문. 그에 소년은 그의 요리사 김승조가 아닌 후궁의 상호 오운으로서 대답해야 했다.

“말씀하십시오.”

“표자승이라는 자는 신뢰할 수 있는 자인가.”

“신뢰할 수 있는 친구입니다. 이미 여러 번 결과로 보여주지 않았습니까.”

“네 비밀을 알려줄 수 있을 정도로?”

소년은 입을 다물었다. 그것은 단 한 번도 고려해 본 적 없는 문제였다. 비밀을 알려준다? 표자승에게? 소년은 수염이 덥수룩하게 난 산적 같은 얼굴을 떠올렸다.

그를 향해 늘 호의와 존경이 담긴 시선을 보내온 그의 눈을. 단 한 번도 그의 신뢰를 의심해본 적은 없었다.

그가 자신을 스승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자신 역시 그를 진정으로 제자라 생각했으니까. 소년은 입술을 깨물었다.

“예, 그를 믿습니다.”

“네가 그토록 신뢰한다니. 나 또한 그를 믿어보고 싶구나.”

소년은 눈을 부릅떴다. 그 말이 단순히 표자승을 신뢰한다는 뜻에서 내뱉어진 말이 아님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황제의 심복. 후궁 제일의 권력자인 그의 신뢰는 무거운 것이었다. 소년은 태감이 하고자 하는 말을 깨달았다.

“황제 폐하께서 그 친구를 원한단 말씀이십니까?”

“신뢰할 수 있는 인재는 귀한 법이지. 특히, 황제 폐하께는 더더욱.”

그에게 전해다오. 폐하의 사람이 될 의향이 있느냐고. 태감의 명령에 소년은 이를 악물고 고개를 숙였다.

“말은 한번 꺼내 보겠습니다만, 기대는 하지 마십시오.”

내키지 않는다는 듯한 소년의 의사 표현에 태감은 빙그레 웃었다.

* * *

이튿날. 다관 막심을 찾은 소년은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표자승 앞에서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장사준비로 바쁜 모양이구나.”

“예, 지금 한창 단골손님분들의 명부를 만드는 중이었습니다. 스승님.”

물론, 스승님께는 언제든지 시간을 내어드려야지요.

양 옆구리에 낀 두루마리를 책상 밑으로 쑤셔 넣으며 표자승은 호들갑스럽게 소년을 맞이했다.

먹으로 얼룩진 손으로 손수 차를 준비하는 그를 보며 소년은 조용히 그에게 말했다.

“바쁜 것 같은데, 조금 나중에 오마.”

“아닙니다. 스승님. 오히려 제가 찾아뵙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우선 스승님께서 말씀해주신 대로 시안은 작성해 봤는데, 아직 어색한 부분이 많습니다.

표자승이 수줍게 검토를 부탁해 오자 소년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서류 뭉치를 받아들었다. 한치의 여백도 용서할 수 없다는 듯이, 가장 가는 세필로 빼곡하게 작성된 문장은 착시현상을 일으킬 정도였다.

오랜만에 노안이 찾아온 기분을 느끼며 서류와 악전고투를 벌인 소년은 서류의 마지막 장을 넘긴 순간 헛웃음을 터뜨렸다.

“도대체 나보고 뭘 봐달라는 거냐? 이렇게 치밀하게 준비했으면서.”

“뭔가 첨삭할 만한 부분이 없을까요?”

“첨삭은 무슨, 이대로만 진행해라. 이대로만.”

이대로만 진행하면 더 바랄 게 없다. 소년의 장담에 표자승은 안심이 된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몸을 늘어뜨렸다.

밤을 지새우며 초고를 완성한 피로감이 그제야 몰려오는 듯했다. 나른한 숨을 내쉬며 기지개를 켠 표자승은 문득 생각났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어제까지만 해도 무기력감에 허덕이고 있었는데, 이젠 돈 앞에서 굶주린 들개처럼 침을 흘리는군요.”

“간사한 놈.”

“예. 간사한 놈입니다. 스승님. 자고 일어나면 기분이 휙휙 바뀌는 놈이지요. 이 제자 놈이 사람 구실을 할 수 있도록, 앞으로도 많은 지도편달 부탁드립니다.”

“제자 놈이 불민하니, 매를 아낄 수가 없구나.”

소년이 거만하게 고개를 까닥거리자 표자승은 간신배처럼 손을 비비며 그의 비위를 맞추었다.

그렇게 둘은 한참을 실없는 농담을 나누며 웃었다. 농담과 웃음으로 넘길 수 있는 시간이 끝났을 때. 남겨진 의무 앞에서 소년의 표정은 굳어졌다.

“이제 스승으로서의 용무는 이걸로 끝났다.”

“스승님?”

“지금부터 하는 말은, 후궁의 상호. 오운으로서 하는 말이다.”

얼어붙은 표자승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소년은 혀끝에서 맴돌고 있던 제안을 입에 담았다.

“표자승. 황제 폐하를 위해 일할 생각이 있나?”

예상치 못한 제안에 당황한 표자승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눈을 끔벅이는 그에게 소년은 황제의 전언을 들려주었다.

“물론, 충성에는 응당 그에 따른 보상이 있어야지. 네가 폐하께 충성을 다한다면, 폐하 또한 보답하실 거다.”

“스…… 스승님.”

“예를 들자면…… 그래. 금군에 납품되는 병장기. 생필품 같은 군납품의 납품권일 수도 있겠지.”

세금 감면은 물론 세무 조사의 간소화, 국경을 통과할 때 검문을 면제시켜줄 수도 있지. 상인으로선 나쁘지 않은 제안일 거다. 거기에.

“황제 폐하를 위해 일한다는 명예 또한 얻을 수 있지.”

“확실히, 천한 상인에게 과분할 만큼 후한 보상이로군요.”

하지만, 왜 하필 저입니까?

표자승의 질문에 소년은 와락 얼굴을 찌푸렸다. 뭐라고 대답해 줘야 할까. 내가 너를 믿었기 때문에? 나의 비밀을 알려줘도 좋을 만큼 너를 신뢰해서? 그 때문에 태감께서 너를 황제 폐하께 추천했다고 말할까? 소년은 가슴속에 고인 숨을 몰아쉬었다.

“내가 어찌 알겠느냐? 폐하께서 너를 지목하셨으니, 나는 따를 수밖에.”

“제가 곤란한 질문을 드렸군요. 죄송합니다.”

담담히 고개를 숙인 표자승은 소년이 한 제안을 곱씹어보며 장고에 잠겼다. 분명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뒤바꿀 제안이리라. 그것이 영광의 길로 향하는 기회가 될지, 나락으로 떨어지는 실수가 될지는 소년도 알지 못했다.

소년은 그저 그가 신중하게 선택하기만을 기도했다.

기나긴 숙고 끝에 표자승은 다시 입을 열었다.

“한 가지만 더 여쭙고 싶습니다. 스승님.”

스승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소년은 입을 다물었다. 그것은 후궁의 상호로서, 황제를 위해 일하는 사람으로서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었다. 입을 연다면 분명 본심이 튀어나오고 말 테니까.

하지만 그의 혀는 고집스럽게도 이성의 명령을 거부하고 자유분방하게 본심을 토로했다.

“난, 네가 거절했으면 좋겠다. 그래. 솔직하게 말하마. 네가 이 더러운 바닥에 발을 담그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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