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관의 요리사 169화
태양이 오전의 끝자락에 살짝 걸치는 시간.
창틀에 내려앉은 하얀 눈을 보며 표자승은 조금 일찍 오전 업무를 마감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에게는 오늘 중요한 약속이 있었고, 눈이 내렸다면 거리가 질퍽거릴 테니 평소보다 조금 일찍 나가야만 제시간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표자승은 계속된 서류업무로 뻐근해진 허리를 두드리며 몸을 일으켰다.
의자가 드르륵 밀리는 소리에 직원들의 시선이 그에게로 쏠렸다. 의도치 않게 직원들을 주목시킨 표자승은 헛기침을 하며 엄숙한 표정으로 직원들에게 선언했다.
“다들 점심 먹으러 갑시다.”
상단주의 명령에 직원들은 신속한 동작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직장인의 가장 행복한 한때를 누리기 위해 삼삼오오 모여 나가는 직원들을 보며 표자승은 조용히 자신의 외투를 챙겨 들었다.
그의 예상대로 거리는 우울하게 질퍽거렸고 곳곳에 웅덩이가 생겨 통행을 방해하고 있었다.
도로가 제대로 관리되었다면 웅덩이는 생기지 않았을 것을, 내가 낸 세금은 도대체 어디에 쓰이고 있는가.
표자승은 관리들의 나태함에 한탄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자신이 낸 세금은 아깝다.
그렇게 많은 돈을 모았는데도. 표자승은 문득 자신이 벌어들이는 돈에 비해 소비를 덜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소 상단의 상단주였던 시절과 비교하면 수입은 어마어마하게 늘어났는데, 소비는 예전 그대로였다.
아니, 오히려 전보다 줄어든 것 같기도 하다.
‘돈은 많이 버는데, 쓰고 싶다는 생각이 안 들어.’
돈을 쓸 시간도 부족하고, 쓰고 싶다는 욕구도 부족했다. 요즘은 뭘 봐도 욕심이 들지 않았다.
뭘 가지고 싶다는 생각도, 누리고 싶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인생의 숙원이었던 것을 이루고 난 후부터.
“재미없는 인간이 되어버렸군.”
욕심이 없다니. 남자로선 끝장이야. 자조적으로 중얼거린 표자승은 문득 거리 한 귀퉁이에서 구걸하고 있는 거지에게 시선을 돌렸다.
차디찬 거리, 눈 녹은 물이 흐르는 거리에 거적때기도 없이 거지는 꿇어앉아 있었다.
앞에는 작은 그릇 하나를 두고. 한 푼 줍쇼, 도와주십쇼. 목청껏 구걸도 하지 않고.
동냥질을 하지 않으니 그의 그릇은 텅 비어 있었다. 저래서 밥은 먹겠나. 가만히 빈 그릇을 들여다보던 표자승은 그릇에 동전을 몇 푼 던져넣었다.
측은지심이 들어 한 행동은 아니었다. 그저 돈을 써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한 일이었다.
돈은 고여 있으면 안 된다. 혈관을 흐르는 피처럼 끝없이 돌아야만 한다.
상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격언을 다시 떠올리며 표자승은 발걸음을 재촉했다.
‘돈이 너무 고여 있어.’
표자승 개인의 돈뿐만이 아니었다. 상단의 돈 또한 고인 채 썩어가고 있었다.
기껏 잡은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기반을 다지기 위해 상단을 안정적으로만 운영해 온 결과였다. 마땅한 투자처도, 소비도 없이 상단의 돈은 창고에 묶여만 있었다.
건전한 상단이라고는 못하겠군.
자신의 상단에 혹독한 평가를 내리며 표자승은 거리를 둘러보았다.
눈이 그친 하늘은 우중충했고 물류가 멈춘 시장은 우울했다. 확실히, 겨울은 새로운 투자를 벌이기에 좋을 때는 아니다.
마치 변명하듯 자신을 설득하려 한 표자승은 이내 쓰디쓴 한숨을 내쉬었다.
때가 아니다.
그건 결국 변명에 불과했다. 때가 좋지 않은 것이 아니라, 마음이 동하지 않는 것이다.
잠시 고민하던 표자승은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완벽한 한마디를 떠올렸다.
나는 방황하고 있다.
멈춰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나아가고 있는 것도 아니다. 목적과 방향성을 잃은 채 그는 방황하고 있었다. 또는 배회하고 있다는 표현도 적절하리라.
‘멈춰 서면 따라잡히고, 따라잡히면 사냥당한다.”
소년에게 충고를 들은 이후 그는 끝없이 달려왔다. 사냥감이 되지 않기 위해서. 무너지지 않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달리고, 노력하고, 이끌어오면서.
그는 자신의 열정과 의욕을 지나온 길 어딘가에 두고 온 것 같다고 생각했다. 어느 순간 표자승은 한없이 무기력해진 자신을 발견했다.
마치 탈진해 버린 것처럼. 한때는 불꽃처럼 타올랐던 의욕과 열정을 모조리 소진한 것처럼.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도, 움직일 생각도 들지 않았다.
‘너무 열심히 했나.’
착잡한 표정으로 걷던 그를 누군가가 불러세웠다. 어린아이치고는 낮고도 무거운 목소리. 그가 기다리던 사람의 목소리에 표자승은 반색하며 고개를 들었다.
“스승님!”
“밖에선 크게 부르지 마. 임마.”
남루한 옷차림에 굽은 등. 추레한 몰골의 소년을 발견한 표자승은 가슴속 스며들었던 근심과 막연한 불안감이 해소되는 것을 느꼈다.
막연한 기대감으로 얼룩진 표자승의 얼굴을 소년은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고민이 있는 얼굴인데.”
“어떻게 아셨습니까?”
“얼굴이 우거지상이니까.”
그렇게 표가 날 정도였나? 표자승은 자신의 얼굴을 쓸어 만졌다. 소년은 작게 하품을 한번 하고는 표자승에게 손짓했다.
“우선 밥이나 먹자. 고민 상담이야 밥 먹고 해도 늦지 않지.”
“식당으로 모실까요?”
“요리사 놔두고 뭐하러 밥을 사 먹냐.”
그러고 보니, 아직 너한테는 밥을 해준 적이 없었지? 소년의 말에 표자승은 섭섭하다는 듯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제국 제일의 요리사를 스승님으로 두었는데도 아직 밥 한 끼를 얻어먹지 못했다니. 이렇게 서글플 수가.”
“그러니까 이번 기회에 실컷 먹어라. 실컷.”
“저 많이 먹습니다.”
소년은 코웃음 치며 시장으로 향했다. 그 왜소한 등을 바라보던 표자승은 소년의 모습이 멀어지자 서둘러 그에게 따라붙었다.
짓밟혀 더러워진 눈을 밟으며 둘은 시장에 나온 식재료들을 둘러보았다.
“썩 괜찮은 게 없네.”
“그래도 이 죽순은 무척 싱싱하고 좋군요.”
얼어붙고, 색이 변하고, 시들시들한 식재료들 사이에서 소년은 두툼한 두부 한모와 싱싱한 겨울 죽순, 소금에 절인 돼지고기 한 근.
붕어 몇 마리를 구매했다.
붕어는 얼어붙은 저수지를 깨고 방금 잡아 온 것이라 싱싱하고 비늘에 윤기가 돌았다.
“그래도 이것만으로는 좀 섭섭한데.”
꿩이나 오리, 하다못해 닭이라도 한 마리 있으면 좋겠는데. 탐탁지 않은 눈으로 시장을 둘러보던 소년이 갑작스럽게 탄성을 질렀다.
놀라움과 기쁨으로 가득 찬 목소리에 표자승이 고개를 돌리자 소년은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그의 허리를 툭 쳤다.
“이거 상당한 대물이 있는데.”
좋은 강장제가 될 것 같지 않나? 이렇게 축 늘어질 때는 특히 이런 걸 먹어줘야지. 소년의 말에 표자승은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훌륭한 악어는 오랜만에 보는군요. 특히, 겨울엔 보기 어려운 놈인데.”
“악어고기 먹나?”
“없어서 못 먹지요.”
그들이 발견한 대물은 다름 아닌 독이 바짝 오른 악어였다. 추위에 둔화되어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지만, 틀림없이 살아 있는 놈이었다.
녹색과 금색이 섞인 눈동자가 깜빡거리는 것을 본 소년은 두말할 것 없이 주머니를 열었다.
“아니, 이걸 도대체 어떻게 공수해 왔습니까?”
“용림원 학사 금진사 나으리가 연회를 벌이신다고 특별 주문하셨는데, 오늘 갑자기 주문을 취소하셨지 뭐요. 그래서 하는 수없이 장터에 팔러 나왔지. 운남에서 이놈을 살려서 데려오느라 한 고생을 생각하면…… 어휴.”
장사꾼의 안타까운 사연에 소년은 웃돈을 쥐여주고 악어를 샀다. 자루에 들어가기 전까지 악어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표자승이 자루를 둘러매자 그제야 한번 버둥거렸을 뿐. 어깨를 묵직하게 누르는 무게감을 느끼며 표자승은 세월의 사토 속에 잊어버렸던 기억의 한 조각을 끄집어냈다.
“운남 쪽으로 거래처를 틀 때 참 다양한 음식을 대접받았지요. 뱀이며 개구리며 악어에 거북이에.”
“물지네나 매미는 대접받은 적 없고?”
“수두룩하지요. 귀한 음식이라는데 안 먹을 수도 없고.”
낄낄거리며 추억으로 미화된 기억을 떠올리던 표자승은 볼에 내려앉은 차가움에 고개를 들었다. 하늘에선 다시 눈이 내리고 있었다.
* * *
표가 상단 내부에 마련된 탕비실. 식탁으로 쓰이는 탁자 위에선 악어 해체작업이 한창이었다.
검녹색 빛이 흐르는 두꺼운 가죽을 벗겨내면 그 속에선 연한 분홍빛 살점이 드러난다.
목에서 가슴 쪽으로 이어지는 살은 질기지만 씹을수록 감칠맛이 진하고 등과 배 쪽 살은 부드럽고 연하며 꼬리 쪽 살은 탄력 있는 식감이 일품이다.
현대의 정육사들은 악어를 요리할 때 주로 자전거용 공기주입기를 이용하곤 한다.
딱딱한 악어가죽에 주입기를 찔러넣고, 풍선처럼 공기를 불어 넣어 살과 가죽을 분리한 다음 가죽을 벗겨내는 것이다.
하지만 소년은 오직 칼 한 자루만으로 품위 있게 악어를 해체했다.
말끔하게 가죽을 벗긴 다음 뼈에서 발라낸 살점은 전분 가루가 입혀져 기름 솥으로 들어갔다. 바삭바삭하게 튀겨진 살점은 청고추와 함께 간장 양념으로 빠르게 볶아낸다.
매콤한 향기를 두른 바삭한 악어 볶음이 상에 오르자 표자승은 감격스럽다는 표정으로 젓가락을 들었다.
“스승님! 잘 먹겠습니다!”
열정적인 감사 인사와 함께 표자승은 악어를 물어뜯었다. 닭고기와 흡사하지만 조금 더 견고하고 조밀한 식감, 살짝 흰살생선을 연상시키는 풍미와 담백한 육즙.
나태한 기름기라곤 조금도 느껴지지 않은 포식자의 고기는 실로 야성적인 풍미가 느껴졌다.
“악어고기는 잘못 조리하면 살짝 비릿할 수가 있는데, 이 요리에선 그 특유의 비린내가 조금도 느껴지지 않고 담백하군요. 거기에 마늘과 고추가 듬뿍 들어간 간장 양념이 알싸하면서도 진한 맛으로 자칫 밋밋할 수 있는 악어고기의 맛을 보완해 줘 질리지 않는 요리로 만들어주는군요.”
혀끝으로 맛의 비밀을 파헤치며 표자승은 점점 더 악어고기의 깊은 풍미에 빠져들었다.
잘 단련된 근육질의 고기가 위장을 채울수록 전신에 활력이 샘솟는 듯했다.
마치 악어의 기운이 혈관을 타고 흐르는 것처럼. 뜨거운 피가 혈관을 타고 흐르자 온몸에 진액이 샘솟는 듯했다.
“알겠으니까 벗지는 마라.”
“죄송합니다. 갑자기 더워서 그만…….”
소년이 떨떠름한 목소리로 말하자 표자승은 헛기침을 하며 자신도 모르게 풀어헤친 옷깃을 여몄다.
가슴 털이 풍성하게 우거진 가슴팍에서 시선을 돌린 소년은 잠시 주방 한편의 물동이로 가 눈을 씻었다.
마치 각막을 뜯어내겠다는 듯한 기세로 눈을 씻는 소년을 보며 표자승은 조용히 밥을 입에 밀어 넣었다.
한참 후, 벌게진 눈을 하고 돌아온 소년은 숨을 씩씩거리며 의자에 걸터앉았다.
표자승이 그의 눈치를 살피며 우물쭈물하는 동안 숨을 고른 소년은 갈라진 입술을 열었다. 어울리지도 않는 상담사 흉내를 낼 시간이었다.
“무기력하고 의욕이 없지? 사는 게 지루하고. 뭘 해도 재미가 없고.”
표자승이 화들짝 놀라자 소년은 쓴웃음을 지으며 그가 느끼는 증상들을 줄줄이 늘어놓았다.
소년의 말이 끝날 때쯤, 표자승의 얼굴에 떠오른 것은 의혹의 감정이었다.
“스승님, 혹시…….”
“신내림 같은 거 안 받았다.”
“그럼 어찌 그리 족집게십니까.”
족집게는 뭔 족집게야.
표자승의 너스레에 낄낄거리며 웃은 소년은 이내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지금 네가 느끼는 건 번아웃 증후군이라는 거다. 연소증후군, 탈진 증후군이라고도 하지.”
지나친 업무 과중으로 피로감이 누적되어, 극도의 무기력감과 피로감을 느끼게 되는 현상이지.
소년의 목소리는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어 오히려 더 불길했다.
마치 환자에게 충격을 주지 않도록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이는 의사처럼. 소년의 말투가 갑자기 상냥해지자 표자승은 가슴이 울렁거리는 듯한 불안감을 느꼈다.
“시…… 심각한 병인가요?”
“심각하다면 심각한 병이지. 육신의 병은 약으로 고칠 수 있으나, 마음의 병은 그 어떤 약으로도 고칠 수 없으니.”
한숨을 내쉰 소년은 자리에서 일어서 표자승에게 다가가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동안 수고했다는 듯이. 나긋한 소년의 손길을 느끼며 표자승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이 심병의 약은 오로지 휴식뿐이다. 일을 잠시 멈추고, 새로운 의욕이 샘솟을 때까지 푹 쉬어라. 그동안 넌 너무 많은 짐을 홀로 짊어지려 했으니, 이젠 그 짐을 나눠줄 때야.”
“하지만, 제가 없으면 부하 직원들은…….”
“네가 키워낸 부하들은 그 정도도 짊어지지 못할 만큼 나약한 놈들이냐?”
소년의 말에 표자승은 수긍했다는 듯 억지로 고개를 끄덕였다. 표자승에게 시선을 돌리며 소년은 흘리듯이 중얼거렸다.
네게 새로운 사업을 제안하러 왔는데, 이건 좀 미뤄야겠는걸.
작지만 또렷하게 울린 소년의 목소리에 표자승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응? 아, 아니다. 그냥 새로운 사업을 한 가지 구상해 봤는데, 이건 네 무기력증이 나으면 그때 하자꾸나.”
소년은 표자승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상냥한 목소리로 그를 말렸다.
마음이 탈진해 버린 그에게 새로운 일을 던져주는 것은 역효과가 될 뿐이니. 적어도 겨울 동안은 그를 푹 쉬게 해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소년의 착각일 뿐이었다. 소년의 입에서 나온 새로운 사업이라는 말에 표자승은 맹렬한 호기심을 표했다.
“그건 어떤 사업입니까?”
“표자승, 지금은 일을 멀리해야 할 때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다른 즐거운 일을 생각해야지.”
여행도 좋고, 아니면 이번 기회에 여자도 좀 만나보고.
소년의 간곡한 설득에도 표자승은 관심을 돌리지 않았다.
“스승님. 이야기만 들려주십시오. 만약 구미가 당기지 않으면 그때 결정해도 될 일 아니겠습니까.”
“안 듣는 게 좋을 거다.”
만약 들으면, 헤어나올 수 없을 테니까.
소년의 말은 꿀처럼 달콤하고 독처럼 치명적이었다. 그 강렬한 맹독은, 자신의 지치고 무기력해진 심장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강심제가 되리라. 표자승은 확신했다.
“스승님. 들려주십시오.”
“흐음…….”
한참을 고민하던 소년은 결국 내키지 않는다는 듯이 입술을 비집어 열었다.
“표자승. 세상에서 가장 값비싸게 팔 수 있는 게 뭐라고 생각하지?”
그것은 상인의 심장을 요동치게 하는 한마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