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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관의 요리사-168화 (168/314)

환관의 요리사 168화

“사실은 아직 질문하고 싶은 것이 많지만.”

이 이상 질문하는 것은 자네를 기만하는 일이겠지.

그녀의 말에 소년은 마치 소금에 절인 배추 잎사귀 같은 몰골로 의자 위에 늘어졌다.

족히 십 년은 늙어버린 듯한 소년의 표정에 안양비는 웃음을 터뜨렸다.

“잠시 쉬는 게 좋겠군. 차라도 마시면서 말이야.”

얼굴을 벌겋게 물들이고 눈두덩이에 손을 얹고 있던 소년은 안양비의 말에 고개를 들었다.

가혹하게 혹사당하며 달아오른 뇌가 뿜어낸 열기는 안구에까지 스며들어 있었다. 잠깐 사이에 뜨끈뜨끈해진 손바닥을 서늘한 탁자에 올려놓으며 소년은 고개를 저었다.

“쉬는 것은 이야기가 끝난 후에 해도 늦지 않을 것 같습니다.”

“원한다면 손님 방을 내줄 수도 있네만.”

“전 베개가 바뀌면 잠을 못 자는 체질이라.”

남은 이야기는 내일 이어 해도 좋다는 안양비의 제안을 에둘러 거절하며 소년은 자세를 다잡았다. 오기와 집념이 느껴지는 소년의 표정에 안양비는 그 이상 휴식을 권하지 않기로 했다.

“그렇다면 짧게 이야기하도록 하지. 서로를 위해서.”

“그래 주신다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소년이 짙은 피로감을 호소하자 안양비는 알았다며 그의 찻잔에 차를 따라주었다. 넘실거리는 찻물이 찻잔을 가득 채우는 것을 보며 소년은 긴 이야기가 될 것을 직감했다. 최소한, 이 차를 다 마시기 전까지는 끝나지 않으리라.

소년의 얼굴에 각오가 서리자 안양비의 입술이 가는 호선을 그렸다.

“자네의 피로함을 고려하여 우선은 결론부터 말하겠네. 자네의 추측 대로일세. 내가 소문을 거두지 않은 이유는 새로운 권력자의 탄생을 경계하는 기득권자들의 눈을 가리기 위함일세.”

황후 자리는 비와는 달라. 정계에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자리지. 그리고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뜻은, 그만큼 다른 이의 영향력에 휘둘릴 수도 있다는 뜻이네. 그러니 준비할 시간이 필요했지.

“휘둘리지 않도록, 뿌리를 내릴 시간 말입니까.”

그렇다면 뿌리를 내리신 다음에는, 무엇을 하실 겁니까. 그것이 소년이 가장 묻고 싶었던 말이었다.

그녀는 어째서 황후 자리에 오르려 하는가. 길고도 길었던 내전이 끝나고 간신히 평화가 찾아온 이 제국에서, 그녀는 어떤 일을 하려 하는가. 안양비라는 여인은 어떤 꿈을 꾸고 있는가.

소년의 의문을 눈치챈 안양비는 곧 대답하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찻물로 목을 축였다. 나른하게 느껴질 만큼의 시간이 흐른 후, 그녀는 입을 열었다.

“저번에 내가 했던 제안, 기억하나?”

“역사서에 이름을 새겨주겠다 하셨지요.”

소년은 그녀의 제안을 떠올리며 동시에 그녀의 제안이 퍽 매력적이었단 사실 또한 기억해냈다. 그리고 자신이 그렇게 생각했단 사실을 들키지 않기 위해 무표정을 유지하는 데 주의를 할애해야 했다.

표정근을 움직이는 데 공을 들인 덕분에 소년은 매우 엄숙한 표정을 지을 수 있었다.

“그래. 나의 꿈 또한 같네. 이 나라의 역사서에 나의 이름 석 자를 남기는 것. 그것이 나의 꿈이고, 목표라네.”

하지만 단순히, 황후로서 기록되고 싶은 것은 아니야. 그 기록은 너무나도 무미건조하지. 나라는 사람의 흔적을 메마른 먹물 자국 몇 방울로 만들어 버려. 난 그것을 원치 않았네.

“나는 조금 더 강렬하고, 의미 있는 기록을 원했네. 단순히 책에 기록된 정보가 아닌, 역사가들의 입에서 살아 숨 쉬는 기록이 되기를 원했어.”

이렇게 말하고 보니, 나의 꿈은 자네가 원하는 것과 일치하는 부분이 있군. 그녀의 말에 소년은 안양비에게 고백했던 자신의 소망과 그녀의 소망을 비교해 보았다.

의미 있는 죽음.

그리고 의미 있는 기록.

두 말은 비슷해 보이지만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다.

안양비의 소망이 자기완성의 욕구에 기인하는 것이라면, 소년의 소망은 삶에 지친 피로감에 의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사는 데 지쳐 죽을 자리는 찾는 노인에게 그녀는 너무나 눈부시게 보였다. 소년은 부끄러움을 느꼈다.

동시에 소년은 그녀의 순결한 야망에 두려움을 느꼈다. 그 원대한 야망은 사람을 사르는 불꽃과도 같았다.

분명 그녀에게 매료된다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야망을 태우기 위한 장작이 되고 마리라. 장 태감의 자글자글한 주름을 떠올리며 소년은 쓴웃음을 지었다.

“대단한 야망이시군요.”

“평생을 투자할 만한 야망이지.”

그 순간 안양비가 지어 보인 미소는 태양처럼 강렬하고 아름다웠다. 그 미소는 그를 한없이 작아지게 만들었다. 소년은 화제를 돌리기 위해 무의미한 헛소리를 내뱉었다.

“글쎄요, 솔직히, 안양비 님께선 당장 칼 한 자루 들고 출가하셔도 역사에 이름을 남기실 것 같습니다만.”

“물론 내가 무인의 꿈을 꾸었다면 제법 이름을 날렸겠지. 자랑은 아니네만, 아직 칼로는 져본 적이 없다네.”

그러실 것 같았습니다. 안양비가 주먹을 쥐어 보이자 소년은 마치 바위를 깎아 만든 것 같은 주먹의 흉험함에 한기를 느끼며 옷깃을 여몄다.

“하지만 무인의 칼은 개인의 역사는 바꿀 수 있을지언정, 나라의 역사는 바꿀 수 없지.”

“안양비 님.”

“오상호. 그대는 이 나라의, 용황국의 고질적인 문제점을 아는가?”

그녀의 질문에 소년은 난감함을 느꼈다. 나라의 앞날에 관하여 이야기하기에 그는 식견도, 애국심도 부족한 인간이었다. 전자는 그렇다 치더라도, 후자를 함양하는 데는 애정과 관심이 필요했다.

그리고 소년은 도저히 자신이 나고 자란 이 나라에 애정을 가질 수 없었다.

“으음, 자네는 아직 나이가 어리니, 잘 모를 수도 있지.”

멍하니 풀어진 소년의 동공을 들여다보며 안양비는 소년이 볼 수 없는 각도로 고개를 돌려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녀는 남을 이해시키기 위해 시간을 투자하는 걸 아까워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용황국의 문제를 알려면, 우선 건국의 역사를 알아야 하지. 자네는 혹시 제국의 건국 역사를 알고 있나?”

안양비가 묻자 소년은 흐릿한 기억 속에서 태감과 나누었던 기억을 떠올릴 수 있었다.

“시조이신 용린왕께서 여러 혈족을 복속시켜 기틀을 잡으셨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래, 그렇지. 대륙이 전란으로 혼란스러웠던 시대, 용린왕께선 오십구의 혈족을 제국의 신하로 받아들이셨네.”

하지만 제국에 흡수되었다 한들, 그들이 일군 부와 권세가 무너진 것은 아니었네.

소년은 비로소 그녀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이해했다. 물이 고이면 썩어들어가듯이, 사람이 고이면 부정과 부패가 싹트는 법이다. 그리고, 긴 시간 퇴적된 부패의 결과를 소년은 알고 있었다.

“내전은 필연적이었지. 그것은 망조가 든 제국이 되살아나기 위한 자정작용이었어.”

“많은 피와 눈물이 흘렀지요.”

“그래. 혹독한 시술이었지. 고름을 짜내고 썩은 환부를 도려내는 일은. 하지만 그를 통해 제국은 간신히 숨을 연명할 수 있었지.”

소년은 고개를 들어 안양비를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목소리에서 위협적인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사상에 매몰된 이의 광기가 깃들어 있었다. 소년은 그녀의 입을 멈추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선황 폐하께선 내전을 끝내셨지. 쉰아홉이었던 혈족은 스물하나로 수가 줄어들었고, 제국은 간신히 평화를 되찾았다.”

하지만 우리에겐 아직 숙제가 남아있지. 선황 폐하께서 끝내지 못하신 숙제가.

소년은 안양비가 말하는 숙제가 무엇을 뜻하는지를 직감했다. 그 차갑고 잔혹한 청사진을 이해한 소년은 아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은 한기를 느끼며 떨리는 손을 등 뒤로 숨겼다.

가늘게 떨리는 그의 손끝을 보며 안양비는 마지막 쐐기를 박아넣었다.

“분명 최선은 아닐 것이며, 차선책조차 되지 못하겠지. 하지만 난 나의 생각이 차악책은 되리라 믿네.”

이것으로 나의 이야기는 끝이네. 상호. 부드러운 시선으로 창백하게 질린 소년을 관찰하던 안양비는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어느새 떠오른 초승달은 푸르스름한 빛으로 창틀을 밝히고 있었다.

“밤이 늦었군. 이만 돌아가 보게.”

소년은 고개를 끄덕이지 못했다.

* * *

산란하는 달빛은 현실을 환상적으로 일그러뜨려 놓았다. 그림자가 흘러내리며 남긴 흔적에 드리워진 달빛은 빛과 어둠의 절묘한 대비를 연출했고 그 속에서 소년은 어지럼증을 느꼈다. 소년은 문득 토기가 치밀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원한다면 담벼락, 기둥, 큼직한 두꺼비 조각상에도. 어느 곳에나 자신의 흔적을 남겨줄 수 있었지만, 소년은 점잖은 문화시민으로서 자신의 충동을 억눌렀다.

그 대신 소년은 털썩 주저앉아 담벼락 귀퉁이에 등을 기대었다. 차가운 돌의 냉기가 척추를 파고들었다.

“여기서 자면 입 돌아간다.”

조용히 눈을 감은 채 묵상하고 있었던 소년은 불쾌할 만큼 아름다운 미성에 눈을 떴다.

가면을 쓴 괴한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소년은 달밤에 가면을 쓰고 돌아다니는 미친놈이 자신의 직장 상사라는 점에 깊은 유감을 느꼈다.

“안 잡니다.”

“그럼 야밤에 담벼락에 기대서 뭘 하고 있느냐?. 일 끝났으면 퍼뜩 들어오질 않고.”

“달이 좋지 않습니까.”

그럴듯한 변명이었다. 만약 소년이 술에 취해 있었다면 더욱 그럴듯했으리라. 헛웃음을 터뜨린 태감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소년의 옆에 주저앉았다.

“그래. 달이 참 밝구나.”

달을 올려다보며 태감은 갑갑하다는 듯 가면을 벗었다. 달빛 아래에 드러난 하얀 이마는 살짝 땀에 젖어 있었다.

“괜찮습니까? 벗어도.”

“뭐 어떠냐. 보는 사람도 없는데.”

가면을 벗은 태감은 차가운 공기가 기분 좋다는 듯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의 호흡이 엉키지 않도록 소년은 그가 숨을 내쉴 때 질문을 꺼냈다.

“태감님도 알고 계셨습니까?”

“그래.”

안양비의 계획. 조금 더 자극적인 이름을 붙인다면 혈족멸족계획이라 불러도 되겠지.

즉석에서 명명한 태감은 소년의 동의를 구하듯 그를 보았다.

“직관적이어서 좋군요.”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구나. 아무튼, 혈족멸족계획에 대한 거라면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만약 그에 대해 모르고 있었다면, 내가 황후로 추대한 건 난화비가 아닌 안양비였을 거다. 태감의 설명을 들으며 소년은 잠시 안양비가 아군인 미래를 그려보았다.

안양비의 추진력과 담대함에 태감의 권력과 재력이 더해진 미래를. 그 완벽한 미래에 과연 자신이 활약할 구석이 남아있을까. 소년은 웃음을 터뜨렸다.

“만약 안양비 님이 아군이셨다면, 저 같은 건 활약할 기회도 없었겠지요.”

그럼 태감님의 요리사 노릇이라 하면서 조용히 살았으려나요. 소년의 희망적인 상상에 태감은 찬물을 끼얹었다.

“오히려 활동하는 무대를 옮겨 더 크게 활약했을 수도 있지. 후궁의 비가 아닌 정·재계의 인사들을 상대로 말이다.”

안 그래도 너를 빌려달라는 요청이 얼마나 많이 오는지 아느냐?

태감의 말에 소년은 솔깃하다는 듯 귀를 기울였다.

“제 몸값이 어느 정도나 됩니까?”

“왜, 궁금하냐?”

“소싯적에 비하면 얼마나 되나 궁금해서 그럽니다.”

저도 왕년에는 잘나갔지요. 건당 천, 이천짜리는 액수가 작다고 받지도 않았던 사람입니다.

소년이 거들먹거리자 태감은 코웃음을 치며 그의 귀에 그가 제시받았던 조건을 속삭였다.

“저녁 식사 부탁은 가장 큰 액수가 대충 그 정도고, 연회는 대충…….”

도저히 한 끼 식사의 대가라고는 믿을 수 없는 액수에 소년은 육두문자를 내뱉었다.

“와, 이 미친 부자 새끼들, 돈이 썩어 넘치나.”

한참을 투덜대던 소년의 입에선 쓰디쓴 한숨이 새어 나왔다. 착잡한 표정으로 하늘을 올려다보던 소년은 안양비의 계획에 대한 황제의 의견 또한 들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황제 폐하께선 어떻게 생각하고 계십니까.”

“그분 또한 기득권층으로 굳어진 혈족세력의 위험성에 대해선 강경한 태도를 견지하고 계시다. 다만.”

“안양비 님보다는 조금 더 온건한 방향으로 처리하길 원하시는군요.”

“내전의 상처가 아직 아물지도 않았는데, 벌써 새로운 피를 흘릴 수는 없지 않으냐.”

흘린 피가 너무 많았고, 쌓인 시체가 너무 많았다. 아직 백성들의 가슴팍에는 아물지 않은 상처가 그대로 남아있으니 폐하께서도 조심스러우실 수밖에.

그에 비해 안양비는 설령 희생을 치러서라도 기회가 왔을 때 뿌리 뽑아야 한다는 의견이니.

“두 분이 합의점을 찾기는 요원해 보이는군요.”

“합의점을 찾을 수 있다면 진작에 찾았겠지. 그래도 살을 맞대는 부부 사이인데.”

혀를 차며 일어선 태감은 소년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을 잡고 일어선 소년은 냉기가 스며들어 뻣뻣해진 허리와 주무르며 몸을 뒤로 젖혔다.

“생각해 보니 굳이 제가 고민할 문제는 아니었군요. 휴, 아랫사람이라 다행이다.”

“파격 승진해볼 생각 있느냐?? 그럴듯한 직함 몇 개 달아주는 거야 일도 아니지.”

“책임은 안 지고 권리만 빼먹을 수 있으면 생각해 보지요.”

“그런 자리가 있으면 내가 먼저 가서 앉고 싶구나.”

이 바닥 공무원은 철밥통이 아닌가 보군. 하긴, 여긴 물리적으로 모가지가 날아가는 곳이었지.

안쓰럽다는 듯 태감을 보던 소년은 그 또한 낙하산이라는 사실을 떠올리고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고 보니 이 양반, 황제 폐하 동생이라 그 연줄로 태감 자리 앉은 거였지?

“역시 혈연 지연 학연, 그중 제일은 혈연이지.”

“뭐라고?”

“아무 말 안 했습니다.”

입을 쩍 벌리며 하품을 한 태감은 슬슬 궁으로 돌아가야겠다며 앞장섰다. 소년은 절뚝거리며 뒤를 따랐다.

“그러고 보니, 내일은 특별한 일정이 없었지? 뭐 계획 있느냐?”

태감의 말에 소년은 당장 해야 할 일이 무엇이 있는지를 검토했다. 태감 밥이야 늘 하던 거고, 난화비 님을 뵙는 것은 조금 더 나중에 해도 늦지 않으니. 지금 가장 급한 것은.

“다관 막심의 겨울 특선 과자를 개발하는 것 정도군요.”

아직 얼음이 얼지 않아 시도를 못 하고 있습니다만, 완성되면 보여드리지요. 소년의 말에 태감은 의문을 느꼈다.

“얼음이 얼어야만 만들 수 있는 과자라니, 그것참 흥미롭구나. 설마 조각낸 얼음에 과즙이나 꿀을 뿌려 만드는 얼음과자는 아니겠지.”

“글쎄요. 드셔보시면 알겠지요.”

단순한 얼음과자일까요. 아니면.

소년은 일부러 말끝을 길게 끌며 태감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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