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관의 요리사 167화
젖은 까마귀의 날개와도 같은 검보랏빛. 이제는 그의 상징이 된 오철 칼이 움직인다.
칼을 쥔 소년의 팔은 마치 그의 인사와는 별개의 존재인 것처럼 보였다. 마치 독자적인 의사를 가진 생물인 것처럼. 칼과 칼을 쥔 손은 부드럽고 우아한 움직임으로 약동하고 있었다.
그의 칼 아래에서 두부는 점차 곱고 가는 실이 되었다. 선녀의 날개옷처럼 가늘고 섬세한 실이 말간 닭 육수에 녹아든다.
국자가 부드럽게 육수를 휘젓자 하얀 두부 실이 와류 속에서 춤을 췄다. 하나의 요리사 완성되자 소년은 물 흐르듯이 다음 요리를 준비했다.
뼈째로 튀긴 거위는 토막을 쳐 진한 간장 양념에 조리고, 돼지갈비는 달게 조린 다음 찹쌀을 묻혀 쪄낸다.
살이 통통하게 오른 겨울 소라는 꽃잎처럼 얇게 썰어 풋고추와 함께 볶아내고 큰 쏘가리는 생강 간장을 뿌려 쪄낸 다음 뜨거운 상추씨 기름을 끼얹는다.
어느새 주방 안은 자극적이고 감미로운 향기로 가득 차 있었다.
마지막으로 신선한 민물새우와 최고급 용정차를 함께 볶아내 담백하고 향긋한 맛이 일품인 용정하인(龍井蝦仁)이 완성되자 소년은 보란 듯이 입꼬리를 올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변변치 않은 솜씨였습니다.”
어떠십니까. 제 솜씨가. 이죽거리는 듯한 소년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던 안양비는 결심한 듯 굳은 표정으로 입술을 열었다.
“우선은, 나의 교만함에 대하여 사과하고 싶네.”
“예?”
그녀를 탄복시켰으리라 자부하던 소년은 그녀의 갑작스러운 사과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당황하여 얼어붙은 소년을 보며 안양비는 기어이 고개를 숙였다.
“나는 자네의 솜씨를 깔보고, 시험해 보고자 했네. 아직 어린 자네가 과연 얼마나 잘하는지 두고 보겠다는, 오만한 생각을 품었지. ”
그대의 나이가 어리다고 얕잡아 본 나의 우둔함을 용서하시게.
안양비의 사과를 들으며 소년은 얼떨떨한 눈으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도대체 그게 사과할 만한 사유가 되기는 하는 걸까? 혼란스러워하던 소년은 이내 그것이 그녀가 인재를 대우하는 방식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상대를 자신이 부리는 아랫사람이 아닌 동등한 존재로서 대우하는 것. 그렇기에 자신의 잘못을 사과하는데 주저함이 없는 것이다.
멍하니 그녀의 말을 입안에서 굴려보던 소년은 아직 그녀가 고개를 들지 않음을 깨닫고는 황급히 그녀의 사과를 받아들였다.
고개를 든 안양비는 그제야 소년의 솜씨에 대한 그녀의 감상을 이야기했다.
“칼과 불을 다루는 데 군더더기가 없이 자연스러웠네. 요리에 문외한인 내가 보아도 참으로 훌륭하더군.”
“후한 평가에 감사드립니다.”
그럼 이제 상을 차릴까요? 소년은 민망하다는 듯 볼을 긁적이며 괜히 헛기침하는 척을 했다.
그 순박한 반응에 안양비는 슬쩍 입꼬리를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남은 이야기는 식후에 하도록 하지.”
잠시 후 그들은 북림궁의 식당에서 다시 마주 보게 되었다. 의자에 앉은 안양비가 준엄하게 식사를 시작할 것을 선언하자 소년은 조심스럽게 은 집게와 칼을 들고 오리를 해체하기 시작했다.
오리의 가슴 부분에 칼집을 넣어 껍질을 도려내는 것을 보며 안양비는 입맛을 다셨다.
“역시, 오리구이의 가장 큰 좋은 점은 식탁에 앉아 요리가 완성되는 것을 볼 수 있다는 점이지.”
“같은 요리라도 요리사의 손길이 닿는 게 눈에 보이면 더 맛있게 느껴지지요.”
안양비에게 맞장구치며 소년은 가장 맛있는 부분인 가슴 부위의 껍질을 손질했다.
목에서부터 다리까지. 삼각형 모양으로 껍질을 떠낸 소년은 섬세하게 껍질 아래쪽의 지방을 긁어냈다.
지방은 껍질의 바삭한 식감을 방해할 뿐만 아니라 과도한 기름기로 혀를 피로하게 하므로 깨끗하게 제거해야 했다.
충분히 지방을 긁어낸 껍질은 뒤로 촛불을 비춰보아 슬쩍 비칠 정도가 되어야 합격점이었다.
앞뒤로 돌려보며 꼼꼼하게 확인한 소년은 자신 있게 안양비의 접시에 껍질을 올렸다.
“가장 맛있는 부위입니다.”
“가장 맛있는 부위를 가장 맛있게 먹으려면 어떻게 먹는 게 좋겠는가?”
오리구이를 먹는 방법은 보통 두 가지가 있다. 밀전병에 싸서 파채와 함께 먹거나, 아니면 해선장을 살짝 찍어 그대로 먹거나 하지만 소년은 요리에 직접 찍어 먹는 양념으로는 조금 생소하게 느껴지는 ‘설탕’을 권했다.
하얀 설탕을 자신 있게 권하는 소년을 보며 안양비는 미심쩍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요리에 설탕이라. 특이한 조합이군. 소금도 아니고, 설탕에 찍어 먹는단 말이지.”
“예, 요즘 대갓집 규수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방법입니다.”
“나도 대갓집 규수 출신이지만 처음 들어보는군.”
유쾌한 농담이었다며 웃음을 터뜨리려 한 소년은 그녀의 진지한 표정을 보고는 혀를 깨물 기세로 입을 닫았다.
목구멍 끝까지 치밀어오른 웃음을 억지로 삼키며 소년은 안간힘을 다해 고개를 끄덕였다.
“하하, 그러셨지요. 예. 그렇고 말고요.”
“왠지 못 믿겠다는 얼굴인데.”
의심스럽다는 듯 소년의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보던 안양비는 이내 시선을 아래로 향했다.
그런 사소한 추궁은 식사가 끝난 다음에 해도 늦지 않으리라. 젓가락으로 껍질을 집어 든 안양비는 고민 끝에 설탕에 껍질 끄트머리를 찍었다.
껍질에 설탕. 과연 어울릴까? 안양비는 용기를 내어 껍질을 입으로 가져갔다. 아삭 소리를 내며 바스러지는 껍질에선 고소한 기름이 배어 나왔고 그 기름에 녹아든 설탕은 황홀한 이슬이 되어 혀 위를 미끄러졌다.
안양비가 입을 연 것은 소년이 이미 다섯 번째 껍질을 접시에 올린 후였다. 지금껏 알지 못했던 미지의 맛으로 혀를 흠뻑 적신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느끼하면서도 달아. 하지만 그것이 불쾌하게 느껴지지는 않는군. 오히려 설탕의 강렬한 단맛이 오리의 느끼함을 잡아줘 산뜻하게 느껴지기까지 해. 한마디로…….”
규중처녀들이 좋아할 만한 맛이군. 마치 편협하게 굴었던 과거의 자신에 대한 반성의 의미라는 양 안양비는 두 번째 껍질 역시 설탕에 찍었다.
“오리구이 외에도, 새끼돼지 구이에 찍어 드셔도 훌륭합니다.”
“그래? 나중에 꼭 시도해 봐야겠군.”
안양비는 설탕과 껍질의 조합이 썩 마음에 든 듯했지만 세 번째 껍질까지 설탕에 찍지는 않았다.
얌전히 밀전병을 앞접시에 올린 그녀는 껍질과 해선장, 그리고 파채를 넣어 전병을 말았다. 도톰하게 말린 전병을 입에 넣은 그녀는 달콤 짭짭한 장과 알싸한 파채 사이에서 조화롭게 어우러지는 껍질의 고소함에 안도감을 느꼈다.
“역시, 익숙하고 안정적인 맛이야.”
결국, 입맛은 보수적일 수밖에 없었다. 조금 전까지 설탕과 껍질의 조합이 신선하다며 환호한 주제에, 지금은 전병을 싸는 데 여념이 없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며 안양비는 쓴웃음을 지었다.
하여간, 혀라는 놈은 늘 간사하다니까.
* * *
“정말로 만족스러운 식사였네. 오상호.”
식사를 마친 안양비는 응접실로 자리를 옮겨 소년과 마주 앉았다. 손을 뻗으면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그의 노고에 대한 보답이라며 안양비는 직접 소년의 잔에 차를 따라주었다. 은은한 옥빛의 찻물이 잔에 담기자 향긋한 차 향기가 물씬 피어올랐다.
소년은 잔을 기울여 입안에 찻물을 머금었다. 혀가 부드럽게 움직이도록, 충분히 수분을 보충한 그는 찻잔을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에 내려놓았다.
대화할 준비가 되었다는 신호였다. 하지만 소년은 먼저 입을 열지는 않았다.
대화를 청해온 주제에 상대에게 먼저 말문을 열어달라 요청하는 소년의 태도를 짓궂다고 생각하며 안양비는 입을 열었다.
“그대가 나의 청을 받아들인 이유를 아네.”
내가 그대를 시험해 보았듯, 그대 역시 나를 시험하기 위함이었겠지. 나라는 사람을 알아보고, 가늠해보기 위해서. 아닌가? 소년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그런 그를 가만히 들여다보던 안양비는 침묵으로 일관하는 그에게 다시 한번 질문했다.
“그대가 보기에, 나는 어떤 사람 같은가?”
“그에 대해 대답하기 전, 한 가지 여쭙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나의 말에 답하는 데 필요한 질문인가?”
그렇다면 물어보게. 소년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지금부터 할 말에는 용기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숨을 들이쉬고 내쉬며 호흡을 고른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가 여쭙고 싶은 것은, 후궁에 퍼진 안양비 님에 대한 소문에 관한 것입니다.”
탐욕스럽고 표독하며, 황후 자리에 오른다면 외척 세력에 힘을 실어줘 나라를 어지럽힐 여자. 그것이 안양비에 대한 세간의 평이었다.
듣기 좋은 소리는 아니었음에도 안양비는 계속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지. 왜, 소문과는 너무 달라 괴리감이 드는가?”
“예, 제가 본 안양비 님은 그런 사사로운 것에 집착하여 대의를 그르치는 소인배는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기에 더욱더 의심되더군요.”
안양비 님. 혹시 그 소문은, 안양비 님께서 퍼뜨리신 것 아닙니까?
마치 확신한다는 듯한 소년의 태도에 안양비는 그것이 진심인지를 확인하듯 되물었다.
“그렇게 생각한 이유는?”
“첫 번째는 말씀드린 대로, 소문과는 다른 안양비 님의 모습 때문에. 두 번째는.”
황후가 되는데 악영향밖에 없을 소문에 대응하지 않고 그대로 내버려 두셨다는 것. 제 근거는 이 두 가지뿐입니다.
말을 멈춘 소년은 목이 탄다는 듯 찻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그의 목울대가 움직이는 것을 보며 안양비는 오른손을 움직여 턱을 괴었다.
“나쁘지는 않은 추측이지만, 근거가 조금 부족하군. 혹시 설명을 보충할 수 있겠나?”
“그럼 조금 부족하긴 하지만, 한가지 정도 더 말해보지요.”
제가 소문에 관해서 이야기할 때, 만약 근거 없는 소문이라면 헛소리라며 묵살하는 것이 보통의 반응일 겁니다. 하지만 안양비 님께선 오히려 흥미롭다는 듯이 귀담아들으시더군요. 그 모습은 마치 자신이 뿌린 씨앗이 잘 퍼졌는지를 확인하는 것 같았다……고 느꼈습니다.
“그건 어디까지나 자네의 감이 아닌가. 상대를 설득해야 할 때 추상적인 감에 호소하는 것은 감점 요인일세. 조금 더 구체적이고 명확한 근거는 없나?”
“죄송합니다.”
아쉽다는 듯 한숨을 내쉰 안양비는 소년의 근거를 하나하나 꼽으며 최종적인 채점을 해주었다.
“그럴듯한 근거는 두 번째뿐이군. 첫 번째와 세 번째는 어디까지나 그럴 것 같다는 감에 의존한 것이니, 아쉽군. 답은 맞혔는데 계산식이 틀렸으니.”
전부 맞혔다면 상을 줬을 텐데.
안양비 다시 도전해 볼 생각이 없냐고 묻자 소년은 답을 맞힌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답했다.
“애석하군.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일단 답을 맞혔으니 대답해 줄 수밖에.”
자네의 추측이 맞네. 그 소문은 내가 일부러 퍼트린 것이야.
소년의 눈을 들여다보던 안양비는 심술궂은 미소를 지었다.
“그럼 이제 그 이유를 알아맞힐 시간이군.”
“안양비 님. 제가 무릎을 꿇으면 답을 알려주시겠습니까?”
“그러지 말고 한번 고민해보게. 어째서 일부러 좋지 않은 소문으로 위장을 했을까. 그러면서까지 위장해야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다른 비들의 견제를 받지 않기 위해서일까?”
자네의 생각을 듣고 싶군. 말을 마친 안양비는 그가 충분히 생각에 잠길 수 있도록 침묵했다.
생각을 강요하는 고요함 속에서 숙고하던 소년은 흘러내리는 땀을 참을 수 없다는 듯 이마에 손을 얹어 머리를 쓸어넘겼다.
머리칼은 축축하게 젖어있었고 목덜미에 착 달라붙어 소년을 짜증스럽게 했다.
쌀쌀한 겨울 날씨였음에도 불구하고 소년은 숨 막히는 더위를 느꼈다. 벌게진 소년의 얼굴을 보며 안양비는 일어서서 손수 창문을 열었다.
차갑고 신선한 공기가 방안으로 밀려 들어오자 소년은 태어나 처음으로 호흡하는 것처럼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신선한 공기는 그의 뇌리에도 신선한 발상을 가져다주었다. 그 새로운 발상을 검토해본 소년은 그것이 퍽 그럴듯하다고 생각했다.
최소한 답은 아닐지라도, 거의 근접하지는 않았을까.
긴 고뇌에 질려있었던 소년은 지체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우선, 지금부터 하는 말은 어디까지나 제 개인적인 의견임을 알아주십시오.”
“알겠네.”
그럴 필요가 없었음에도 소년은 그것이 사적인 의견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앞으로 해야 할 말의 무게를 알기에,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함이었다.
“소문을 퍼뜨리는 것은 훌륭한 위장수단이지요. 특히 자신의 세력이 미약하여 준비가 필요할 때, 남의 시선을 피해야 할 때 유용한 수단입니다. 하지만 이미 충분한 준비를 갖추셨는데도 소문을 거두지 않으신 이유는, 아직 그 소문이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기 때문이겠지요.”
혹은 자기 스스로에 대한 악의적 소문을 퍼뜨리는 것을 좋아하는 악취미를 의심할 수도 있겠지만, 일단 이 가정은 배제하고 이야기하겠습니다.
안양비는 희미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긍정의 의미가 아닌 계속 말하라는 재촉의 의미였다.
소년은 어쩐지 그녀가 자신을 비웃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안양비가 짓는 웃음은 무미건조한 것이었기에 소년은 그 속에서 어떠한 의미도 찾을 수 없었다.
소년은 자신이 꺼낸 말을 맺기 위해 혀를 움직였다.
“후궁은 그 특성상 수많은 세력의 눈과 귀가 모이는 장소지요. 후궁에서 퍼진 소문이 열흘 후면 온 경사에 퍼진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는 없을 겁니다. 그런 장소에 자신에 대한 악의적인 소문을 퍼뜨렸다면, 그것은 후궁에 심어진 눈과 귀를 통해 그들의 주인을 속이기 위함이겠지요.”
후궁의 바깥에서 후궁을 감시하는 자들. 정계의 권력자들 말입니다.
“권력자들을 속여야 하는 이유는 향후 황후 자리에 오르신 안양비 님께서 하실 일에 그들이 방해되기 때문이겠지요. 그렇기에 그들을 칠 독을 바른 단검을 준비하는 동안 시간을 벌기 위해서 소문을 퍼뜨렸다는 것이 저의 추측입니다.”
그 말을 끝으로 소년은 입을 다물었다. 잠시 후, 북림궁의 응접실에는 낮고 날카로운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것은 안양비가 소년에게 보내는 박수갈채였다.
“아주 인상적인 가설이었네. 혹시나 하여 묻겠네만, 사전에 장 태감에게 귀띔을 받았나?”
“아니요.”
“어디까지나 자네가 궁리하여 얻어낸 답이다?”
나쁘지 않군. 나쁘지 않아.
안양비는 만족스럽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입꼬리가 길게 찢어지는, 먹잇감을 보는 굶주린 맹수와 같은 미소였다.
“자네가 그 답을 유추해낸 이유는, 분명 자네가 나와 비슷한 종류의 인간이기 때문이겠지.”
오상호. 논리는 어설펐지만, 답은 백 점일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