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관의 요리사 166화
별빛이 흘러내리던 밤이 저물고 난폭한 서광이 강제로 어두운 장막을 들추는 시간. 연좌궁의 주방 한쪽에선 소년이 칼을 갈고 있었다.
소년의 움직일 때마다 칼날에선 가슴을 에는 듯 섬뜩한 소리가 울렸다. 칼날이 운다.
칼날의 울림에 귀를 기울이며 소년은 눈을 감았다. 칼날의 떨림이 손끝을 파고든다. 그 희미한 진동은 소년의 심장과 같은 울림으로 맥동하고 있었다. 칼이 맥동한다. 칼이 노래한다.
하지만 그 노래는 영원히 이어지지 않았다. 날카롭게 벼려졌다면 손을 멈춰야 한다.
연마를 멈춘 소년은 칼을 들어 불빛에 날을 비춰보았다. 잘 갈린 칼날은 우아한 검보라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준비는 끝났느냐?”
어딘가 지쳐 있는 듯한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소년은 한 박자 늦게 고개를 들어 뒤를 돌아보았다. 그의 예상대로, 그를 부른 것은 태감이었다. 마치 날밤을 꼬빡 새고 온 것 같은 초췌한 몰골을 한 그를 보며 소년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피곤해 보이십니다.”
“오랜만에 실컷 잔소리를 듣고 왔다.”
“고생하셨습니다.”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 휘청거리며 자리에 앉은 태감은 노곤한 숨을 내쉬었다. 소년은 그의 입에 주목했다. 소년의 시선을 눈치챈 태감은 힘겹게 입꼬리를 올렸다.
“걱정되느냐?”
“뭐, 비밀을 지키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하나뿐이니 말입니다.”
목 쪽에서 손을 까딱거리는 소년을 보며 태감은 웃음을 터뜨렸다.
“의외구나. 늘 네 목을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고 다니길래, 목숨에 미련이 없는 줄 알았다.”
“써야 할 때 쓰면 아까울 일 없지요.”
정말 필요할 때 말입니다. 자신의 목덜미를 쓰다듬는 소년을 보며 태감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신뢰의 증표로 비밀을 알려주었는데, 그 신뢰 때문에 죽게 된다면 얼마나 황당하겠느냐?”
“황당한 게 아니라 억울한 거겠지요.”
전 이왕 죽을 거면 좀 멋지게 죽고 싶습니다.
소년의 말에 태감은 빈정거리며 물었다.
“세상에 멋진 죽음이 어디 있겠느냐?”
“예를 든다면. 동료들을 대피시킨 상태로 혼자서 적진에 남아 시간을 끈다든가. 그런 죽음 말입니다.”
“비장하긴 하다만…….”
너무 비현실적이지 않으냐. 우스갯소리를 하며 시간을 보내던 태감은 어느덧 소년이 출발할 때가 가까워졌음을 깨달았다.
이제 북림궁으로 가야 할 시간이었다. 무거운 짐을 진 그의 어깨를 굽어보며 태감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안양비의 식탁엔 어떤 요리를 올릴 생각이냐.”
“그거 물어보실 줄 알았습니다.”
“정적의 식탁을 차려준다니. 상상만 해도 배알이 꼴리는구나.”
“거 참, 사례 태감씩이나 되시는 분이. 말 좀 곱게 씁시다.”
태감의 말투에 핀잔을 준 소년은 주방 한쪽에 걸어둔 오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오리는 뜨거운 물을 끼얹어 껍질을 수축시킨 다음 꿀을 발라 건조 시킨 것이었다.
“보시는 것처럼, 오리구이(烤鴨)를 할 생각입니다만.”
“오리구이라. 오리구이를 올린단 말이지.”
“태감님 것도 준비해 두었습니다.”
다녀와서 해드리지요. 소년은 갈고리에 꿰어 걸어둔 오리를 내려 기름종이로 포장했다.
오리에 먼지가 앉지 않도록 꼼꼼히 포장한 다음 끈으로 단단히 묶고 나서야 소년은 안심이 된다는 듯 옷을 갈아입으러 갔다.
잠시 후, 솜이 잔뜩 들어간 환관복을 차려입고 온 소년은 오리를 신줏단지처럼 챙겨 안으며 태감에게 인사했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뒤돌아선 소년의 왜소한 뒷모습을 보며 태감은 그가 꼭 먼 길을 떠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는 늘 그랬다. 그의 뒷모습을 볼 때마다 태감은 늘 가슴 답답한 불안감과 염려를 느꼈다. 초조함을 느낀 태감은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인사로 소년을 배웅했다.
“몸조심하거라.”
“참나, 누가 보면 어디 먼 길 가는 줄 알겠습니다. 북림궁이 멀면 얼마나 멀다고.”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마지막으로 태감을 한번 돌아본 소년은 힘껏 주방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아직 첫눈은 내리지 않았지만, 날씨는 완전히 겨울 날씨였다. 입술 사이로 하얀 김이 흘러나오는 것을 보며 소년은 옷깃을 여몄다.
‘솜옷을 껴입어도 이렇게 추운데, 전에는 어떻게 그 누더기 한 장을 걸치고 살았나 몰라.’
그에게 겨울은 늘 고통스러운 계절이었다. 난로에 불을 땔 장작이 없어 거적을 두른 채 웅크리고 지내야 했던 십 년의 세월. 그 악몽과 같았던 시간은 쉽사리 지워지지 않는 흉터가 되어 그의 가슴 깊숙한 곳에 응어리져 있었다.
손끝이 얼어 터져 피가 스며 나온 적도 있었다. 발이 동상에 걸려 발톱이 빠진 적도 있었다.
기침하다 목이 갈라져 피를 쏟았던 적도 있었다. 그 추웠던 밤은. 그 고통스러웠던 밤은 참으로 길고도 길었다.
가득 쌓인 눈은 소리를 잡아먹는다. 기침 소리마저 눈에 스며들어 고요했던 밤. 그 누구도 찾아오지 않는 후궁의 구석에서 언 손을 끌어안고 자야 했던 날들을 떠올리며 소년은 걸음을 멈추었다.
문득 떠올린 겨울의 기억은 소년의 발걸음을 잡은 채 그를 얼어붙게 했다. 소년은 다시 한번 숨을 내쉬었다. 하얀 숨이 뿜어져 나왔다.
“거기서 뭘 하고 있는가?”
“장 태감님.”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소년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길 한가운데에 멈춰서 있는 그를 별스럽다는 듯이 보고 있는 장 태감이 있었다.
장 태감을 보며 소년은 입안에서 혀를 움직였다. 혀는 얼어 붙어있지 않았다. 제대로 움직였다.
“잠시 하늘을 좀 보고 있었습니다.”
“그래. 겨울이라 그런지 하늘이 참 맑군.”
산책 중이셨습니까? 소년의 질문에 장 태감은 고개를 저었다.
“자네가 안 오길래 마중 나가는 중이었네.”
“장 태감님께서 마중을 나와주시다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허허, 사람 참.”
날이 참 추워졌군. 곧 눈이 오겠어. 겨울이 의례적으로 하게 되는 이야기를 나누며 둘은 북림궁을 향해 걸었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고, 시릴 만큼 푸르르렀다. 겨울 하늘을 올려다보던 장 태감은 갑작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자네는 겨울을 좋아하나?”
그 질문에 소년은 한동안 대답하지 못했다. 별 영양가 없는, 대화를 이어나가기 위한 질문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소년은 입을 열지 못했다. 잠시 후, 소년은 꾸며낸 듯한 가식적인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장 태감님은 어떠십니까?”
“예끼. 질문에 질문으로 답하다니. 고약한 친구로군.”
끌끌거리며 생각에 잠겨있던 장 태감은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다는 듯 몸을 움츠리며 답했다.
“나는 끔찍하게 싫어하네. 겨울에 대한 기억은 늘 힘들고 배고픈 것밖에 없거든.”
전에 말했다시피, 내가 태어난 곳은 정말 춥고 배고픈 동네였어. 하루를 먹으면 하루를 굶어야 하는 곳이었지. 옛 기억을 떠올린 듯 장 태감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두꺼운 솜옷으로도 가슴을 찌르는 시린 기억은 막을 수 없었다.
“그래. 참 모질게도 추웠지. 흑룡강성에 비하면 경사는 따뜻한 곳이야.”
추억이라고 미화할 수 없는 기억을 회상하며 장 태감은 기묘한 표정을 지었다. 결코, 웃음이라고는 부를 수 없는 표정이었다. 그리고 소년 또한 그와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저도 겨울이 싫습니다.”
“자네도 그런가?”
“예, 저도 겨울에 고생을 많이 했거든요.”
보시는 것처럼, 그리 유복하게 자라질 못해서. 소년의 말에 장 태감은 시선을 돌려 소년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고급스러운 환관 예복을 차려입었는데도 겉으로 깡마른 것이 드러날 만큼 소년은 볼품이 없었다.
“그래. 그래 보이는군. 자네도 참 힘들었겠어.”
“전 혼자여서 그런지 유독 겨울이 무섭더군요.”
“난 그나마 형제가 많아 괜찮았지. 같은 이불을 덮고 끌어안으면 그럭저럭 따뜻하거든.”
그러고 보니 말이야.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말문을 연 장 태감은 빙긋 웃으며 물었다.
“사례 태감께서는, 겨울을 좋아하시나?”
그 말에 소년은 고개를 돌려 장 태감을 바라보았다. 마치 아무런 의도도 없다는 듯이, 단순한 호기심이라는 듯이 질문하는 그를 보며 소년은 과장된 동작으로 어깨를 으쓱거렸다.
“잘은 모르겠습니다만, 추운 걸 싫어하시는 것 같기는 하더군요.”
“허어, 그런가. 하긴, 추운 걸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 어서 날이 풀려야 할 텐데.”
본격적인 정쟁(政爭)은 봄부터인가. 장 태감은 그 말을 입에 담지 않았으나 소년은 그의 의도를 알 것 같다고 생각했다. 만약 장 태감이 자신의 말을 진정으로 믿은 거라면.
이건 큰 기회가 아닐까. 소년은 순간 숨을 멈추었다. 태감이 본격적으로 나서기로 한 것은 겨울 중순. 만약 장 태감님이 시기를 오판하고 경계를 느슨히 한다면. 생각을 이어가던 소년은 이내 고개를 저으며 자신의 판단을 부정했다.
‘무식한 놈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몇십 년을 묵은 정치가를 상대로.’
장 태감님이 이렇게 허술하실 리가 없지. 만약 허술한 모습을 보여준다면, 그것은 틀림없이 상대를 속이기 위함일 것이다.
소년이 모호한 웃음을 지어 보이자 장 태감은 긍정하는 것처럼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자네는 재미있는 친구야. 눈치도 빠르고.”
녹록지가 않구먼. 진심으로 유쾌하다는 듯이 손뼉을 친 장 태감은 팔을 활짝 펴고 소년에게 인사했다. 소년은 어느새 그들이 북림궁 내부에 들어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서 오게나. 날이 추우니, 우선 차 한잔하겠나?”
장 태감의 제안을 소년은 부드러운 어조로 사양했다.
“그러고 싶지만, 우선은 안양비 님께 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 * *
“어서 오게. 상호. 오느라 고생 많았네.”
“후궁의 상호 오운이 문후드립니다. 안양비 님.”
정중하게 인사를 올리며 소년은 지금 그들이 선 장소가 서로 안부를 묻기에는 썩 적절하지 않은 곳이라고 생각했다.
손님을 맞이하는 장소는 대게 응접실이 되어야 하지 않는가. 장작이 한가득 쌓여 있고 시퍼런 칼이 줄줄이 걸린 주방은 인사와 담소를 나누기에 적절한 장소는 아니었다.
이것은 무슨 의도일까? 물청소가 쉬운 장소이니 이 자리에서 베어 죽이겠다는 뜻?
소년이 말도 안 되는 망상을 늘어놓을 동안 안양비는 살가운 표정을 지으며 그에게 다가왔다.
“이렇게 와주어 고맙네. 제국 제일의 요리사가 저녁을 차려준다니, 상상만 해도 기대가 되는군.”
“이 미천한 자에게 기회를 주신 것에 감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자네의 말은 조금 밉살스럽군. 지나치게 공손해서 왠지 바보 취급당하는 기분이야.”
쩔쩔매는 소년을 보며 안양비는 꾸밈없는 소탈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이렇게 나와의 약속을 지켜 주였으니. 사소한 건 책잡지 않도록 하지.”
아니, 오히려 감사의 인사를 해야겠는걸.
안양비가 선뜻 고개를 숙이자 당황한 소년은 납작 엎드리려 했다. 하지만 안양비는 그런 소년의 행동을 제지하며 담백한 감사를 전했다.
“고맙네. 약속을 지켜줘서. 나의 말을 믿어줘서.”
그 진솔한 한마디는 백 마디의 미사여구보다도 더 가슴에 진한 파문을 일으켰다.
꾸밈없는 안양비의 태도에 소년 또한 억지로 짓고 있던 가식적인 미소를 지운 채 담담히 그녀의 감사를 받았다. 고개를 든 안양비는 정돈된 주방의 풍경을 둘러보며 물었다.
“자네가 요리하는 모습을 구경하고 싶어 일부러 주방에서 만나자 했네만. 혹시 거북한가?”
물론 거북하다면 자리를 비켜주겠네. 그를 염려하는 척하는 안양비의 질문에 소년은 사납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무더운 곳이라 구경하기 편치는 않으실 텐데요.”
“걱정하지 말게나. 더위와 추위에 영향을 받을 경지는 이미 옛적에 지났으니.”
아니, 뭔 무협지도 아니고. 괴이하다는 듯이 안양비를 보던 소년은 굳이 반문하지 않고 가져온 바구니를 열어 오리를 꺼냈다.
반질반질 윤기가 흐르는 오리를 본 안양비는 깊은 관심을 표했다.
“호오, 오리인가.”
“예, 오늘은 오리구이를 상에 올릴 생각입니다.”
“참 크고 좋은 오리군. 어디서 가져온 건가?”
“경사 인근의 청양호수에서 양식하는 오리입니다.”
여름에는 수초와 갑각류를 잡아먹으며 크고, 가을이 되면 곡식을 먹여 살찌운 오리는 다섯 근(3㎏)이 넘어야 출하한다.
오리 구이용 오리는 일반 집오리보다 지방이 두텁고 가슴살이 비대한 것이 특징이었다.
뜨거운 물을 끼얹고 꿀을 발라 말린 오리는 대추나무나 살구나무 같은 유실수를 장작으로 사용해 화덕에서 굽는다. 화덕의 문이 닫히는 것을 보며 안양비는 소년에게 질문했다.
“이걸로 끝인가?”
“예, 오리구이는 이걸로 끝입니다. 남은 것은 다 구워지기를 기다리는 일뿐이지요.”
“그래. 끝이란 말이지.”
조금 섭섭하다는 듯 말끝을 흐리는 안양비를 보며 소년은 칼을 뽑아 들고 도마 앞으로 향했다.
“물론, 본격적인 요리는 이제 시작이지요.”
“기대해도 되겠는가?”
“변변치 않은 솜씨입니다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주방을 돌아보며 자신의 솜씨를 뽐낼만한 재료를 찾던 소년은 주방 한쪽에서 연두부가 담긴 그릇을 가져왔다.
하얀 두부 한모를 도마에 올리는 소년을 보며 안양비는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이 두부로는 어떤 요리를 만들 생각인가?”
“문사두부(文思豆腐)를 만들 생각입니다.”
“내 견문이 짧아 그런 요리는 들어본 적이 없군. 괜찮다면 그게 어떤 요리인지 좀 알려주겠는가?”
안양비의 부탁에 소년은 머릿속으로 이야기를 짧게 간추린 후 입술을 열었다.
“오래전 양주 지방에 문사라는 스님이 살았는데, 그 스님은 매일 마음의 수양을 위해 두부를 채 썰어 국을 끓였다 하는군요.”
“허어, 연두부를 말인가?”
“예, 부드러운 연두부를 으깨지지 않게 채 치려면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하니, 그 과정을 통해 마음을 비우려 했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아무튼, 두부를 채 썰어 끓인 국은 부드러우면서도 담백한 맛이 실로 일품인지라 금세 양주 지방의 명물이 되었다 합니다.”
거기에 양주 지방의 요리사들은 닭 육수와 닭고기, 죽순, 화퇴를 더해 현재의 문사두부를 만들었다 하는군요.
의미심장한 웃음으로 말을 마치는 소년을 보며 안양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마디로, 칼솜씨를 보여주기 좋은 요리다 이거군.”
“마음에 안 드십니까?”
“그럴 리가. 바로 이걸 기다리고 있었네.”
식방각주를 꺾었다는 자네의 요리 솜씨를, 직접 한번 보고 싶었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