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관의 요리사-164화 (164/314)

환관의 요리사 164화

소년이 말없이 잔에 술을 따랐다. 둥근 보름달이 잔 안에 차오르고, 소년은 잔을 기울였다. 달이 흘러넘쳤다.

더운 숨을 토해내며 소년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뱃속을 달구는 열기가 위로 솟구쳐 올라 뇌를 끓이는 듯했다.

문득, 소년은 태감에게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은 것이 아득한 과거의 일인 것처럼 느껴졌다.

뜨겁게 달아오른 두개골 속에서 짓무른 뇌를 헤집어가며 소년은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려 했다.

술과 달빛이 추상적으로 일그러트린 기억 속에서 소년은 그날 느꼈던 감정의 일부분을 찾아냈다. 그 감정은 틀림없이 자신의 것이었으나 소년은 그것이 낯설게 느껴졌다.

그때 당시의 자신을 객관적으로 돌아보며 소년은 그 이유를 찾아냈다.

자신은 너무 무뎌져 버렸다. 긴장감. 악의. 사람을 죽이고, 끌어내리고, 망가뜨리는 일들.

정치판이라는 곳에 자신은 너무 익숙해져 버렸다. 그렇기에 무뎌지기 전의 자신이 느꼈던 충동과 감정을, 닳아빠진 지금의 자신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아니, 무뎌진 게 아니라. 그때의 내가 너무 예민했던 건가.’

점점 뚜렷하게 떠오르는 당시의 기억을 검토하며 소년은 자신의 판단을 수정했다.

그때 당시의 자신은 지나칠 만큼 예민하고 겁에 질려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아니, 겁에 질렸다기보다는 자포자기 상태였다는 것에 가까울 것이다.

평생 쌓아 올린 모든 것을 잃고, 십여 년간 비참한 노예 생활을 하며 찌그러진 심장에 정치판이라는 자극은 지나칠 만큼 강렬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긴장감 속에서 피딱지를 떼어낸 상처처럼 예민해진 그에겐 마음을 매어둘 곳이 필요했다.

의지할 사람. 살아갈 이유가 되어줄 사람. 언제 사그라질지 모르는 자신의 목숨을, 가치 있는 희생이었다 포장해 줄 사람. 자신을 기억해 줄 사람.

“태감님.”

그래서 그에게 털어놓았다. 오직 그에게만, 자신의 진짜 이름과 과거를 말해주었다.

그가 자신에게 특별한 사람이 되도록. 그에게 자신의 마음을 묶어놓을 수 있도록. 자신이 이 머나먼 타향에서 홀로 스러지지 않도록. 그가 자신을 기억할 수 있도록.

그에게 목숨을 걸었고, 자신의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하지만 자신에게 그가 특별해지길 원했지, 그에게 자신이 특별해지길 원한 것은 아니었다.

버려야 할 때 버릴 수 있는, 필요에 의해 죽으라 명령할 수 있는. 그런 부하의 위치로 남고 싶었건만.

‘어느새 나도, 당신에게 특별해져 버렸군.’

한숨을 내쉬며 소년은 태감의 잔과 자신의 잔에 술을 따랐다. 두 개의 달을 내려다보며 소년은 웃음을 흘렸다.

“처음에는 그저 비즈니스적인 관계로 끝날 줄 알았습니다.”

“비즈니스?”

“사업적인 관계. 그저 필요와 목적에 의해 만나는. 그런 관계 말입니다.”

그렇게 만나서, 그렇게 일하고. 그렇게 떠나가게 될 줄 알았는데. 소년이 술잔을 들어 올리자 태감은 피식 웃으며 챙그랑 소리가 나도록 건배했다.

“어느새 이렇게 되었구나. 참, 밥이란 게 뭔지.”

“중요하다면 참 중요한 것이고, 사소하다 하면 사소한 것이지요.”

“그래. 그렇구나. 나도 설마 요리사에게 이렇게 정을 주게 될 줄은 몰랐다.”

“저도 고용주에게 이렇게 충성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전 원래 돈과 이득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이었는데 말입니다.”

지금 저희 관계를 뭐라고 하면 좋을까요. 소년의 물음에 태감은 턱을 괴고는 생각에 잠겼다.

공적으로는 상사와 부하. 주인과 요리사. 정치적 동반자. 사적으로는. 일단 친구. 그리고.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구나. 고용주와 고용인 관계라고 하기에는 너무 친근하고.”

“그저 친구라고 하기에는 관계가 무겁지요.”

소년과 태감은 말없이 잔을 기울였다. 말라붙은 혀뿌리를 적시며 부드럽게 풀어준 태감은 조용히 이야기를 꺼냈다.

“사실은 조금 더 일찍 말해주고 싶었다.”

나에게 모든 것을 보여준 너에게, 비밀을 숨기고 싶지 않았다. 그건 너를 믿지 못한다는 뜻이었으니까. 조금 더 일찍 말해주지 못해 미안하다.

이번엔 태감이 벌주를 마실 차례였다. 그의 잔에 넘치도록 술을 따라준 소년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뭘 그런 걸 가지고. 신경 안 씁니다.”

그리고 사실, 대충은 짐작하고 있고요. 이미 알고 있다는 듯, 소년이 음흉하게 웃자 태감 또한 따라 웃었다.

“그래. 이미 알고 있었겠지. 나 역시 그것을 각오하고 너에게 본모습을 보여준 거니까. 위정은 반대했지만 말이다.”

“저라도 반대했을 겁니다.”

사례 태감께서 사실은 숨겨진 황족이었다니. 만약 밝혀진다면 단순한 뒷소문으로는 끝나지 않을 이야기지요. 소년의 말에 태감은 쓴웃음을 지으며 동의했다.

그것은 그에게도 큰 모험이었다. 만약 소년이 혀를 잘못 놀렸다면 도저히 수습할 수 없는 결과가 나왔으리라.

하지만 그의 기대대로 소년은 침묵을 지켜주었다. 그렇게 신뢰를 쌓고, 수많은 일을 겪으며 마침내 이 자리까지 오게 되었다. 그와의 추억을 떠올린 태감은 목이 메인다는 듯 헛기침을 했다.

“그래. 네 예상대로, 나는 금룡 진가의 핏줄을 이은 황족이다. 그리고 황족으로서의 본명은.”

오운. 진오운이라고 한다.

태감의 말에 소년은 껄끄럽다는 듯이 투덜대었다.

“하필 제 이름으로 본인의 이름을 주시다니. 악취미이십니다.”

“내 나름의 신뢰의 표시였다. 마음에 안 드느냐?”

“태감님과 이름을 공유한다니, 솔직히 좀 껄끄럽군요.”

농담을 내뱉은 이후 소년은 입술을 굳게 닫았다. 이제 자신이 할 이야기는 전부 끝났다는 듯이. 재촉하지 않는 청자의 태도에 감사를 느끼며 태감은 입술을 열었다.

“궁금하겠지. 존귀한 핏줄을 타고난 황족이, 어째서 비천한 환관의 신분을 쓰고 있는지. 어째서 황제 폐하의 그늘에서 더러운 일을 도맡아 하는지.”

그 해묵은 내력을 이야기하기 전 태감은 잠시 침묵했다.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꺼내야 할지. 무엇을 먼저 이야기해야 할지.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달의 위치를 확인한 태감은 그들에게 허락된 밤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그는 두서없이 말을 꺼냈다.

“오래전. 끝없이 길어지는 가뭄에 논밭이 마르고 강줄기마저 끊어졌을 때가 있었다. 가뭄 속에서 백성들이 말라 죽어가자 진가의 시조이신 용린왕께서는 하늘에 제를 올렸고, 금룡께서 이에 화답하시어 자신의 여의주를 쪼개 그 조각을 땅에 내려보내셨지.”

하지만 용의 힘이 서린 여의주는 비록 조각일지라도 사람이 다룰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용의 피를 가장 진하게 타고나신 용린왕께서도 여의주를 다루실 수는 없었지. 이에 금룡께서는 진가의 피와 자신의 정기를 섞어 여의주를 담을 그릇을 만드셨다.

“그래. 여의주를 담고 그 힘을 사용할 수 있도록, 사람이자 동시에 용인 존재를 만드신 거지.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용린왕께서 큰 대접에 자신의 피를 가득 채우시자 그곳에 용의 정기가 스며들어 사람의 형태로 빚어졌다 하더구나.”

그때부터 금룡 진가의 핏줄에는 대대로 여의주를 품은 아이가 태어났다. 그리고 그 후로 나라에는 가뭄이 없어졌고, 용의 가호 아래에 번창한 끝에 제국이 되었다.

자랑스러운 건국의 역사를 이야기하는 태감의 얼굴에 떠오른 것은 희미한 절망감. 그리고 분노였다.

“사람이며 동시에 용인 존재. 여의주의 그릇으로 태어난 아이들은 황실의 엄중한 보호를 받았다. 혹시나 훗날 화근이 될까 기록으로도 남기지 않고, 가계도에조차 이름을 올리지 못하고. 후궁의 깊숙한 심처에 유폐된 채 평생을 살아야 했지.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운명이었다. 만약 세상이 여의주의 존재를 알아차린다면, 그 어떤 희생을 치러서라도 빼앗고 싶어 할 테니.”

제국의 멸망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그것은 어쩔 수 없는 희생이었다. 어쩔 수 없는 희생이라고 포장된 감금이었고, 구속이었지. 저항할 수도, 저항해서도 안 되는 구속.

“그리고 이번 대에 태어난 그릇이 바로 나였다.”

담담히 이야기하던 태감은 갑작스럽게 자신의 옷깃을 푸르기 시작했다.

당황한 소년이 멈칫 뒤로 물러서려 하자 태감은 코웃음 치며 핀잔을 던졌다.

“뭘 그리 놀라느냐?. 여인네 속살 보는 것도 아닌데.”

“아니니까 더 놀랍지요. 태감님도 웬 남자가 갑자기 자기 앞에서 옷을 벗는다고 생각해 보십쇼. 얼마나 당황스러운가.”

“하여간, 한마디를 져주질 않는다니까.”

장난스러운 말다툼을 이어가던 태감은 상의를 왈칵 내렸다.

그의 백자 같은 빗장뼈 아래로 새하얀 가슴팍이 드러났다. 그 아래로 시선을 옮기던 소년은 그의 몸에서 보통 사람과는 확연히 다른 특징적인 것을 찾아낼 수 있었다.

살과 뼈로 이루어진 생명체에게는 있을 수 없는 것.

그의 가슴 아래. 심장이 위치할 장소에는 새파란 유리조각과도 같은 것이 박혀 있었다. 그것은 억지로 살을 째고 봉합하는 우악스러운 시술을 통해 박아넣은 것이 아니었다.

마치 처음부터 가지고 태어난 것처럼. 마치 신체의 일부인 양 자연스럽게 박혀 있었다.

그것을 멍하니 바라보는 소년을 보며 태감은 짓궂은 목소리로 물었다.

“만져보고 싶으냐.”

그럼 만져 보거라.

태감은 떨리는 소년의 손목을 잡고 그를 잡아끌었다. 고된 노동으로 마디가 굵어지고 뒤틀린 그의 손가락을 파편에 가져다 대며, 태감은 조용히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이것이 금룡 진가에 대대로 내려온 용의 보물. 여의주니라.”

여의주에 손끝이 닿는 순간 소년은 손끝을 파고드는 듯한 저릿함을 느꼈다. 마치 전류가 혈관을 파고드는 듯한 섬찟한 느낌에 화들짝 놀란 소년은 당황스러움을 숨기기 위해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여의주라기에 얼마나 대단한가 했는데, 만져보니 별것도 없군요.”

“하여간, 불경한 녀석. 제국의 수호신이 실존한다는 증거를 눈앞에서 보고, 만져보기까지 했는데. 놀랍지도 않으냐?”

“죽어서 다른 세상에 환생도 해봤는데 그 정도로 놀라겠습니까?”

무뚝뚝하게 대꾸한 소년은 이내 깊은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그 목소리는 탁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것으로 비를 내리는 겁니까.”

“그래. 황실의 권위를 지켜주는 신물이며, 제국의 목숨줄이기도 하지. 나의 굴레이기도 하고.”

처음에는 발버둥 쳤지만 결국은 체념하게 되더구나. 고작 나 하나의 힘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었으니까. 이 나라가, 만백성의 목숨이 나의 신변에 달려 있으니. 이해할 수밖에 없었지. 어쩔 수 없는 희생이라고 자신을 위로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시대가 변하더구나.”

어느새 기운 달을 올려다보며 술잔을 만지작거리던 태감은 단숨에 술을 들이켰다.

마치 술기운을 빌리지 않으면 말할 수 없다는 듯이. 연거푸 석 잔의 술을 마신 후에야 태감은 입을 열었다.

“선황 폐하께선 너무 일찍 황권을 양위하셨다. 지난 내전으로 얻으신 심병에 지치셨을 테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셨겠지. 하지만 황좌라는 자리에 앉기에 당시의 황제 폐하께선 너무 어리고, 미숙하셨다.”

흔들림 없이 단단해야 할 황권은 무너져 내렸고, 간신히 내전을 이겨낸 제국은 부패한 신하들에 의해 천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분께는 아군이 필요했어. 절대로 배신하지 않을, 핏줄로 얽혀있는 아군이.

“그래서 황제 폐하와 난 거래를 했지. 그분의 그림자가 되는 조건으로, 자유를 손에 넣었다.”

과거를 떠올리며 흐릿해진 태감의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소년은 그의 역사를 읽었다. 움직일 수도, 소리칠 수도 없는 온실 속에서 차갑고 냉혹한, 그리고 자유로운 세상 속으로 나온 그는 무엇을 느꼈을까. 폭력과 모략이 혼재해있는 세상의 민낯에 두려움을 느꼈을까. 아니면 동경하던 자유를 만끽하며 즐거워했을까.

그의 아픈 과거를 동정해야 할지, 아니면 역경을 이겨낸 그의 의지를 칭찬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고민하던 소년은 결국 고르고 고른 한마디를 간신히 입에 담았다.

“그래서, 만족하셨습니까?”

소년의 말에 태감은 고민할 필요도 없다는 듯이 대답했다.

“만족할 리가 있겠느냐? 아직 이루지 못한 것이 얼마나 많은데.”

아직 나라는 어지럽고, 자기 보신만을 위하는 부패한 탐관오리들이 도처에 널려있거늘, 어찌 만족할 수 있겠는가.

연설조로 말을 끝낸 태감은 멀뚱히 보는 소년의 시선에 볼을 붉히며 헛기침했다.

“아무튼, 이걸로 내 비밀은 끝이다. 혹시 더 궁금한 것 있느냐?”

“그럼 일단, 황제 폐하와의 관계는?”

“일단은 그분이 내 형님 되시지.”

황제와 태감의 외모를 비교해본 소년은 둘의 나이 차이가 제법 된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더 물을 것 없다는 듯이 시큰둥한 소년의 태도에 태감은 당혹스럽다는 듯 거듭 되물었다.

“정말로 더 궁금한 것 없느냐?”

“없습니다.”

“매정한 녀석 같으니.”

툴툴거리며 입술을 비죽 내민 태감을 보며 소년은 마치 가슴 깊이 감동한 척 가식적인 발랄함으로 열화와 같은 함성을 쏟아냈다.

그에 빈정 상한 태감은 고개를 팩 돌리며 자신의 감정이 상했음을 표현했다. 물론 소년은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결국, 먼저 지고 들어가는 것은 태감이었다. 자신의 패배를 노인 공경의 일환이라고 포장하며 애써 자신을 위로하는 태감을 보며 소년은 툭 던지듯이 물었다.

“이제 후련하시겠습니다. 비밀도 다 털어놓았고. 더는 거리낄 것도 없으니.”

이제 서로 숨기는 건 없는 겁니다?

소년의 말에 태감은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마치 아직 켕기는 것이 남았다는 듯이. 고민하며 망설이던 태감을 위해 소년은 과하지 않은 재촉으로 그의 말문을 터주었다.

“또 비밀이 남으셨습니까? 설마 사사로운 개인정보까지 전부 말해주시려는 건 아니죠?”

그런 개인정보까지는 말해주실 필요 없습니다. 궁금하지도 않고요.

소년의 말에도 태감은 속 시원히 털어놓질 못하고 한참을 끙끙거렸다. 태감이 결단을 내리는 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네가, 꼭 들어야만 하는 일이다. 들어야만 하는 일이지만.”

아직, 나도 확신할 수 없는 일이라, 함부로 말해줄 수가 없구나. 그것이 복이 될지, 화가 될지 모르니.

침울하게 고개를 떨구는 그를 보며 소년은 가슴 안쪽에서 뜨끔하게 번지는 통증을 느꼈다. 그 통증은 틀림없이 죄책감이었다.

그 역시, 아직 태감에게 고백하지 못한 비밀이 한 가지 남아 있으니까. 언젠가 그에게 알려줘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소년은 고집스럽게 입을 닫았다.

그의 미련한 행동이 더 큰 슬픔을 초래할 것을 알면서도, 소년은 끝까지 태감에게 그 비밀을 말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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