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관의 요리사 161화
서방에서 찾아온 푸른 눈의 외국인들이 경사를 떠나자 떠들썩했던 경사의 활기도 한풀 꺾인 듯했다. 오랜만에 찾아온 평온한 일상 속에서 소년은 조용히 자신의 본분에 충실했다.
태감의 아침상을 차려 올린 후, 조금 늦게 소년과 아이들의 아침 식사가 시작되었다. 그날의 아침은 쇄양육을 먹고 남은 양고기를 듬뿍 넣은 양고기 죽이었다.
양고기를 듬뿍 넣고 묽게 쑨 죽은 삼삼하게 소금으로만 간을 하고 다진 파와 생강을 조금 올린다.
마지막에 먹기 전에 참기름을 살짝 둘러 고소한 향을 내준다. 완성된 죽을 그릇에 담은 소년은 파와 생강이 죽의 열기에 살짝 숨이 죽을 때쯤 참기름병을 열었다.
“참기름은 너무 많이 두르면 죽의 풍미가 죽으니 살짝만 넣으면 된단다.”
한 방울. 두 방울. 세 방울. 새하얀 죽 표면에 노란 기름이 떨어질 때마다 고소한 참깨 향기가 확 피어올랐다.
마지막으로 간장을 조금 뿌려 간을 맞춘 소년은 나른한 하품과 함께 수저를 떴다.
뜨끈한 죽은 쌀이 푹 퍼져 뭉근하고 부드러웠다. 연한 소금 간은 양고기의 구수한 풍미를 섬세하게 드러냈다.
아삭아삭 씹히는 파와 생강의 알싸한 향기. 자극적이지 않은 순한 맛은 자극에 지쳐 둔감해져 있던 미뢰를 일깨우는 듯했다.
평소엔 알아차리지 못하고 넘어갔던 음식 본연의 맛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잊고 살았던 쌀의 달콤함. 야들야들하게 씹히는 고기의 고소함. 짠맛에 가려져 있었던 간장의 복잡한 감칠맛. 정성껏 볶아 짜낸 참깨의 향기.
그리고 너무 뜨겁지도, 미지근하지도 않게 혀를 감싸는 그 온기. 지나침도 모자람도 없는 푸근한 죽은 아직 깨어나지 않은 위장을 달래주는 완벽한 아침 식사였다.
“부드럽고 소화가 잘되지만 고기가 듬뿍 들어가서 은근히 든든하지.”
“죽에 고추기름을 넣으면 어울릴까요?”
“아침에는 좀 매울 것 같은데. 그래도 한번 넣어보렴.”
사람 입맛은 다 제각각이니까. 소년의 말에 장소는 거침없이 죽 위에 고추기름을 들이부었다.
새하얀 죽이 기름진 붉은빛으로 물들고 그릇과 숟가락에 번지르르한 기름기가 돌자 장소는 신중하게 죽을 떠 입으로 가져갔다.
“맛있어요!”
“하긴, 고추기름이 들어간 건 어지간하면 맛없긴 힘들지.”
자신의 죽에도 고추기름을 두어 방울 친 소년은 예상 그대로의 매콤한 맛에 고개를 끄덕였다. 딱 젊은 애들이 좋아할 만한 맛이었다. 나쁘진 않지만, 노인네 입에는 역시 그냥 먹는 게 더 좋았다. 후루룩 죽을 마시던 소년은 옆에서 우물쭈물하던 이삼을 보고는 다정하게 물었다.
“삼이는 뭐 먹고 싶은 거 있니?”
“그게요. 여기에 착채(榨菜)를 무쳐서 올려 먹으면 어울릴 것 같아서…….”
쑥스러운 듯 배시시 웃는 이삼을 보며 소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한국에서 흔히 자차이라고 부르는 착채는 중국에서 죽의 고명으로 즐겨 사용되는 재료였다.
죽이 삼삼하니 여기에 짭짤하고 매콤한 착채를 올리면 분명 어울리리라.
소년은 이삼이 기특하다는 듯 머리를 마구 쓰다듬었다.
“아이고 기특하다, 우리 삼이. 미각이 아주 예리해. 재능이 있다니까.”
“헤헤, 정말요?”
이삼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옆에서 장소가 서운하다는 듯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그 모습이 꼭 풀죽은 고양이처럼 처량해 보여 소년은 장소도 불러다 머리를 마구 헝클어트려 주었다.
“물론 우리 장소도 재능이 있지. 하지만 넌 너무 매운 것만 편애하잖니. 조금 더 정진하도록.”
“히잉. 알겠습니다.”
장소와 이삼의 머리를 공평하게 쓰다듬어준 소년은 죽 그릇을 내려놓고 주방 한구석으로 향했다.
서늘하고 볕이 들지 않는 구석에는 장과 장아찌가 가득 참긴 항아리들이 수도 없이 늘어서 있었다.
고추와 무, 생강 들을 소금물에 절여 발효시킨 사천식 포채(泡菜)나 직접 담근 두반장, 소금에 절인 돼지고기 등이 담긴 항아리 사이에서 소년은 착채 한 덩어리를 꺼냈다.
물기를 쪽 뺀 착체는 굵게 다진 다음 고춧가루와 다진 마늘 등으로 매콤하게 무쳐낸다.
즉석에서 무쳐낸 착채를 한 숟갈 죽에 올리자 흰 죽이 불그스름하게 물들며 매콤한 향기가 올라왔다.
“흐음, 향기 좋고.”
그럼 맛도 한번 볼까. 착채를 준비하는 동안 딱 좋게 식은 죽을 입에 넣은 소년은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살짝 밍밍한 죽에 짭조름한 착채를 더하자 맛이 확 살았다. 짭짤하고 매콤한 맛에 아작아작 씹히는 식감. 그리고 갓과 식물 특유의 톡 쏘는 향기까지.
착채는 담백하고 무난하던 죽의 맛에 새로운 활기가 되어주었다. 게 눈 감추듯이 한 공기를 비운 소년은 앉은 자세 그대로 팔을 뻗어 철과에 걸쳐져 있는 국자를 쥐었다.
“죽 한 그릇 더 먹을 사람?”
“저요!”
“저도 먹을래요!”
“나도 한 그릇.”
통통 튀는 듯한 아이들의 목소리 속에 섞인 옥구슬 구르는 듯한 청아한 목소리에 소년은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소년이 뒤를 돌아보자 굶주린 듯 배를 움켜쥔 태감이 퀭한 눈을 하고 서 있었다.
“일에 집중했더니 허기가 지더구나. 한 그릇 다오.”
“태감님, 아침 식사하신 지 삼십 분 지났습니다.”
“그래, 난 무려 삼십 분이나 굶주렸다. 더 굶었다간 아사할지도 몰라.”
주인은 굶어 죽도록 내버려 두고, 자기들만 배를 채우다니. 이 매정한 놈. 태감의 뻔뻔한 반응에 소년은 헛웃음을 터뜨리며 찬장에서 큰 대접을 내렸다. 고기 건더기가 가득 들어간 죽을 대접 가득 담아주고 나서야 태감은 볼을 발갛게 상기시켜 웃었다.
“역시 아침은 따뜻한 죽이 최고지.”
“삼십 분 전에 드신 아침도 죽이었습니다만?”
“그건 새우와 생선 살 경단이 들어간 죽이었지. 맛은 있었다만, 금세 배가 꺼져.”
역시 아침은 ‘고기’가 들어간 죽이 최고지. 든든하고. 넉살 좋게 웃으며 반박한 태감은 참기름을 조금 친 죽에 무친 착채를 듬뿍 넣고 간장과 후추를 뿌렸다.
“고기가 들어간 죽에는 후추를 듬뿍 쳐야 제맛이지.”
음, 역시. 이 맛이지. 후루룩 죽을 마시는 태감을 보며 소년은 말없이 아궁이에 불을 다시 지폈다.
분명 저 한 그릇으로는 배가 안 찰 테니, 넉넉하게 한 솥 정도는 더 끓여둘 생각이었다.
죽을 배부르게 먹고 노곤한 얼굴로 아궁이 불을 쬐는 태감에게 소년은 뜨거운 차가 든 찻잔을 내밀었다. 찻잔에 담긴 것은 찻잎을 우려낸 녹차가 아닌 뜨거운 물에 꿀을 탄 꿀차였다.
“호오, 꿀차라. 오랜만에 마셔보는구나.”
“후식 겸해서 내드린 겁니다.”
그건 그렇고, 무슨 볼일로 주방까지 오셨습니까?
소년의 딱딱한 질문에 태감은 시선을 피했다.
“마치 내가 일이 없으면 찾아오지도 않은 냉혈한인 것처럼 말하는구나. 그저 오랜만에 이야기나 좀 나눌 겸 해서…….”
“피차 한가한 사람 아니니, 수다를 떨 거면 용건이 끝난 다음에 합시다.”
시큰둥한 소년의 반응에 태감은 상처받은 척 고개를 떨구었다. 보기만 해도 애간장이 끓어오를 만큼 서글픈 모습이었지만 소년은 콧방귀를 뀔 뿐이었다.
“확실히 사람은 적응의 동물인가 봅니다.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네.”
“훗, 내 미모를 이렇게까지 버텨낸 남자는 네가 처음이구나.”
헛기침하며 허리를 쭉 편 태감은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후궁의 상호 오운. 어명을 받아라.”
“예? 이번엔 또 뭔 일이랍니까?”
“그래도 어명인데, 무릎은 꿇어야지.”
소년이 쑤신다는 듯 무릎을 툭툭 치자 태감은 별수 없이 황제의 명령을 말했다.
“서방의 사절단을 훌륭히 대접한 공로를 인정하는바, 후궁의 상호. 문화보존문예 기술인 오운에게 금룡비고에 출입할 것을 허(許)한다.”
“또?”
소년의 표정이 와락 일그러지는 것을 보며 태감 역시 한숨을 쉬었다. 황제의 대리인인 태감 또한 소년을 안내하기 위해 비고에 가야 했기 때문이다.
또 그 한도 끝도 없이 이어지는 계단을 걸어 내려갈 것을 생각하면 벌써부터 삭신이 쑤시는 듯했다.
“그 양반은 줄 거면 좀 그럴듯한 걸 줄 것이지. 참나. 차라리 주지 말던가. 가는 길 고생인 걸 뻔히 알면서.”
“커흠, 그래도 황제 폐하신데…….”
말은 소년을 말리는 듯했지만, 태감의 표정 또한 좋지 않았다. 한참 동안 품위 있는 단어로 황제를 씹은 둘은 서로를 마주 보며 피로에 찌든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엔 또 뭘 가져온다. 혹시 거기 튼튼한 철과 같은 건 없습니까? 국자나.”
“한번 뒤져보거라. 원체 역사가 긴 비고이니 잘 뒤져보면 있을 수도 있겠지.”
태감은 품에서 두툼한 책을 한 권 꺼내 소년에게 건네었다. 세월의 먼지가 쌓인 낡은 책을 받아든 소년은 그 재질이 일반적인 종이가 아님을 알아차렸다.
그것은 송아지의 가죽으로 만드는 독피지(犢皮紙)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금룡 비고의 중요한 보물들을 기록해둔 서책이다. 한번 읽어보고 마음에 드는 게 있으면 골라보거라.”
태감의 말에 책을 들춰본 소년은 케케묵은 먼지 냄새에 기침하며 책장을 덮었다.
“좀…… 있다가 보겠습니다.”
먼지를 털어내든가 해야지. 어휴.
* * *
반룡궁의 내원. 담장 아래쪽으로 마련된 비밀스러운 통로에 들어서자 태감은 쓰고 있던 가면을 벗어던졌다.
황제의 권세를 대신한다는 신성한 용권차면(龍權借面)을 바닥에 내던진 태감은 목덜미로 흘러내린 땀을 닦으며 가면의 통기성에 대해 불평했다.
“이것 좀 봐라. 안감이 비단이야. 이런 걸 쓰고 있는데 숨이 안 막힐 리가 있겠느냐?”
태감이 불평하는 동안 소년은 말없이 아득하게 이어지는 통로를 바라보았다. 나무뿌리가 얽혀 만들어진 계단. 파르스름한 나뭇잎과 가지로 이루어진 벽. 은은한 빛을 내며 통로를 밝히는 은빛의 꽃.
다시 찾은 환상적인 정경에 소년은 짧은 소감을 내뱉었다.
“X발 거, 더럽게 기네.”
둘은 황제를 씹으며 천천히 계단을 내려갔다. 예로부터 상관의 뒷담화는 직장인들의 친목 도모에 필수적인 사교활동 아니었던가.
이런저런 욕과 험담을 나누며 한참을 내려간 끝에 소년은 폭포가 흘러내리는 지하 호수에 도착할 수 있었다.
별의 융단을 깔아놓은 것처럼 빛나는 꽃들과 시원한 폭포 소리. 두 번째 감동은 첫 번째만큼 극적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좁고 어두운 통로를 걸어 내려온 고생에 대한 보답으로는 충분했다.
밀려오는 호수의 물결을 굽어보며 소년은 천천히 주저앉았다.
“좀 쉬었다 갑시다.”
“그래. 그러자꾸나. 오늘은 시간도 넉넉하게 받아 왔으니.”
태감의 말에 소년은 고개를 돌렸다. 여기 시간제한도 있었습니까? 소년의 질문에 태감은 어이없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럼 황실의 비고에 그렇게 한도 끝도 없이 머무를 수 있을 줄 알았느냐?”
“그럼 시간 내에 못 돌아오면 어떻게 됩니까?”
“노공께서 침입자가 누군지를 보러 오시지. 그리고.”
태감은 꿀꺽하고 무언가를 넘기는 시늉을 했다. 오래전 마주쳤던 산과도 같았던 뱀을 떠올린 소년은 마른침을 삼켰다.
“그러고 보니 그 어르신은 뵌 지도 오래되었군. 슬슬 명절도 다가오는데 술이라도 한 병 들고 뵈러 가야겠어.”
“한 병으로 되겠습니까? 어르신 입을 생각하면 저 호수를 통째로 마셔도 부족하실 것 같은데.”
명절이라. 이제 곧 입동절이구나. 하품과도 같은 한숨을 내쉰 소년은 꽃밭에 드러누울지 말지를 고민하는 태감에게 물었다.
“이제 곧 입동절인데, 거나하게 한 상 차려 먹어야지요.”
“그래야지.”
밥 이야기가 나오자 태감의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어둠 속에서 스스로 빛을 내는 듯한 태감의 미소에 소년은 눈을 찌푸렸다.
“그래서 그런데, 입동절에 뭐 드시고 싶으신 음식 없으십니까?”
소년의 질문에 태감은 어렵다는 듯 신음성을 흘렸다. 먹고 싶은 음식이라. 세상이 이보다 더 어렵고도 감미로운 질문이 또 어디 있을까.
먹고 싶은 거야 한도 끝도 없지. 군침을 흘리며 손을 꼽아보는 태감을 보며 소년은 은밀한 제안을 건네었다.
“통구이는 어떠십니까.”
“통구이?”
“예. 양이나 돼지 한 마리를 통째로 굽는 겁니다.”
“그…… 그건…… 끝내주지.”
물론 돼지 통구이 하나로 끝낼 생각은 없습니다. 소년의 담대한 선언에 태감은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통구이 하나로도 이미 넘쳐 흐를 만큼 풍요로울 텐데, 거기서 요리를 더 차리겠다니.
“날이 추워지면 해산물이 맛있을 계절 아닙니까. 싱싱한 새우며 조개류, 소라. 게. 석반어 같은 큰 생선도 한 마리 쪄먹어야지요. 겨울철 보양에 좋은 오리도 푹 조리고. 위장의 원기를 회복시키는 데는 밤과 닭을 함께 찐 요리가 또 최고지요. 거위도 한 마리 굽고, 소고기는 또-”
“너무 잘 차리는 것 아니냐?”
“잘 먹어야지요.”
이제 곧 싸워야 하지 않습니까. 소년의 담담한 말에 태감은 고개를 끄덕였다. 입동절이 지나고, 안양비와의 불가침 협정이 끝나면 이제 남은 것은 추악한 정쟁(政爭)뿐이었다. 그것을 위해서 그토록 자금을 끌어모으지 않았던가.
“그래. 그렇지. 정치판 위를 구르려면, 잘 먹고 체력을 붙여 둬야지.”
이제 곧 새로운 비들이 후궁에 들어올 계절이구나. 태감의 말에 소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벌써 그럴 때군요. 일 년에 두 번이었지요?”
“그래, 네가 또 고생해야겠구나.”
“뭐, 늘 하던 일 아닙니까.”
난화비가 파벌을 확충하기 위해 다과회를 열면, 그 밑 준비를 해야 하는 것은 소년이었다.
이번에는 또 어떤 과자를 올린다? 고민하던 소년은 지난 다과회를 떠올리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엔 안양비께서 어떤 방법으로 견제를 해오실지 기대되는군요.”
“걱정할 필요 없다. 이번엔 이쪽에서 공세에 나설 거니까.”
태감님께서 말입니까? 소년의 말에 태감은 입꼬리를 올리며 자신만만한 태도로 말했다.
“그래. 그러기 위해서 자금을 모은 것 아니냐. 지금까지 당한 빚을 갚아줘야지.”
그보다, 슬슬 보물을 챙겨야겠구나. 시간을 오래 지체했으니. 태감의 말에 소년은 옷자락을 털고 일어섰다.
“생각해 둔 보물이 있느냐?”
“예, 미리 골라둔 게 있습니다.”
“호오, 어떤 보물이지?”
궁금하다는 듯 태감이 물어오자 소년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별건 아니고, 그냥 보험입니다. 보험.”
만약에, 정말 어쩔 수 없을 때를 대비한 보험. 뜻을 알 수 없는 말을 남긴 채 소년은 비고의 어둠 속을 향해 걸어 들어갔다.